헝거 게임 시리즈

 


1. 개요
2. 소설
3. 평가
3.1. 문제점
3.2. 배틀로얄과의 유사성 논란
5. 설정
6. 기타


1. 개요


미국의 소설가 수잔 콜린스가 집필한 영 어덜트 SF 디스토피아 배틀로얄 소설. 최슨 넷상에 유행하는 인방물의 시조격이라 볼수도 있다.
아래 문단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캐피톨과 반군 사이의 정치싸움을 다루는 소설로, 정치 싸움의 과정에서 양측 모두 미디어를 적극 이용함으로써 미디어로 통제되고 선동될 수 있는 미래사회에 대한 경고를 보내고자 작가가 시리즈를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작중 캐피톨과 반군은 마치 거울을 두고 마주보는 것처럼 비슷한 양상을 많이 보이곤 한다.)
'''막장 디스토피아 세계관 + 전국 방영되는 살인 서바이벌 쇼'''라는 스토리. 배경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디스토피아가 되어버린 북미 대륙.[1] 판엠이라는 국가가 세워지고 캐피톨을 중심으로 13개의 식민지 같은 구역을 건설하게 되었는데, 13구역 모두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모두 박살, 제13구역은 소멸당하며, 본보기 및 체제유지를 위해 각 구역에서 12-18세의 남녀 두 명씩을 뽑아 한 명만 남을 때까지 죽도록 싸우게 만드는 "헝거 게임"을 개최한다. 여기서 12구역에 사는 주인공 캣니스 에버딘은 74번째 헝거 게임에 동생을 대신해서 나가게 된다.
이 소설 때문에 한동안 영 어덜트에 디스토피아 소설 붐이 불었다.

2. 소설



2011년 4월 3권을 마지막으로 국내에 전부 정발됐다. 역자는 이원열. 역자가 초보라 그런지 번역투가 좀 심한 편이다.
  • 1부: 헝거 게임
  • 2부: 캣칭 파이어
  • 3부: 모킹제이[2]
  • 프리퀄: 우는 새와 뱀의 서사시(the Ballad of Songbirds and Snakes) - 젊은 시절의 코리올라누스 스노우가 주인공이다. 2020년 5월 19일 발매. 평가는 본편에 비해서 더 갈린다. 영화로도 나온다. 대한민국에는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로 번역되어 9월 8일 나왔다.

3. 평가


수도와 지방 간의 엄청난 격차와 착취, 주민의 이동 제한, 미디어의 강력한 통제 등이 나타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 디스토피아 소설. 북한[3] 등 독재국가에 대한 풍자라느니, 자국민에게는 나름대로 민주적인 체제를 갖춘 반면 다른 나라들과는 폭력을 휘두르는 천조국에 대한 은유[4]라느니 시청자 수 올리기에만 급급한 쇼 미디어에 대한 풍자라느니 하는 등 다양한 해석이 있다.
피튀기는 성장물에서 점점 액션물로 변하는 영화와는 다르게 캣니스 1인칭 시점의 묘사를 중점으로 흘러가는 심리-정치 스릴러물의 성격이 강하다. 소설을 먼저 읽은 사람들은 영화판에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평을 자주 내리는 것도 소설은 100% 캣니스 시점이라 읽는 사람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햇갈리기 때문.
소설의 진행이 캣니스 개인의 주관으로 서술+해설이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 어느정도 걸러 읽어야 한다. 감정이입은 하되 비판적으로 캣니스의 이성을 읽으려 하면 주인공 또한 100% 정상인은 아니고 상당히 자기편의적 관점으로 모든 상황을 인지함을 파악하고 읽으면 조금 더 세계관의 현실에 근접할 수 있다. 영화판의 많은 설정들도 주인공이 직접 목격하지 않은 장면들은 죄다 캣니스 본인의 추정 + 각본가의 상상으로 이루어 진거다. 물론 작가 본인이 준 캐넌으로 인정하긴 했지만.

3.1. 문제점


1편 이후 전개성과 재미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다. 머테이션의 등장 반복이나 작중 인물의 서술어 반복이 계속되는 패턴을 1편 이후로 보이기 때문인듯. 거기에 1편의 신선함과 긴박감을 갑자기 정치 액션물로 변모한 2편부터 말아먹어서 분위기가 확 바뀐다.
절정과 결말에서의 서술도 상당히 간략하고 허무하기에 까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는 소설 고증을 철저히 한 헝거 게임: 더 파이널에서도 나타난 문제점과 귀결되기도 한다.
소설은 철저한 주인공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고, 묘사도 캣니스의 관점으로만 이루어진다. 심정묘사가 자세하고 독백도 많아 몰입감/주인공 대입은 분명히 있지만 그만큼 사건적인 묘사 또한 이를 반영하기 위해 액션이 빨리 일어날수록 대충대충 넘어간다. 1인칭 시점을 확실히 잘 잡은 것일수도 있지만 독자 입장에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이 안되기 때문에 (캣니스 입장에서 상황파악이 안되면 독자도 마찬가지) 심히 답답한 것 또한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즐기려면 캣니스라는 캐릭터와 독자가 어느정도 통해야 하는데, 이 부분을 공략하기 위해 캣니스 내면 묘사 공략에 너무 치중하느라 상황 묘사가 허술해져 평가가 떨어진 것.
SF와 밀러터리 쪽으로는 고증이 약간 부족한 면이 있다.
헝거 게임 자체의 현실성도 그렇다. 상당히 비효율적이고 비인도적인 체제유지 방식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국가 단위의 희망고문이다.[5] 또한 각 구역과 구역민들의 지역갈등과 계급다툼을 발생시켜 뭉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의 불화를 조장함과 동시에 추첨을 통한 생필품 제공을 하고, 우승자에게는 베푸는 척 하면서 캐피톨에 대한 불만을 희석시킴으로써, 그렇게 "너희들 중 선택된 이들이 아무라 날고 뛰어봐야 우리 손바닥에서 못 벗어나니 얌전히 굴어라"는 의식을 암연하게 심어놓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너무 작위적인 설정으로 보인다는 것.[6][7]
구역들은 격리되어 있는데, 아무리 철저한 독재라고 해도 각 지역 사이에 최소한의 커넥션[8]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완전히 단절이다.
스노우는 정적을 독살시켜 저 자리에 올랐다는데, 그게 들키지 않았단다(...). 더군나나 상술한 헝거 게임의 취지와 연결하면, 저 양반의 정치 방식은 그냥 힘으로 찍어누르는 스타일이고 민심은 캐피톨에만 한정되어 있다.[9] 즉, 작중 나오는 정책부터가 심하게 현실성이 떨어진다.[10]
게다가 주인공 버프가 좀 심하다.

3.2. 배틀로얄과의 유사성 논란


첫 번째 책의 경우 전체주의 국가가 배경이라는 점, 반란에 대한 불신과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청소년들을 강제로 뽑아 한명만 살아남을때까지 죽도록 싸우게 하는 게임을 시킨다는 점, 주인공 남녀가 살아남는다는 점 등 배틀로얄과 비슷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표절 논란이 생기기도 했다. 지금도 해외 인터넷에서 헝거 게임 vs 배틀 로얄 떡밥을 던지면 순식간에 키배 난장판이 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다만 배틀로얄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사항은 '''클리셰표절로 받아들이기에 일어나는 문제이다.'''
작가 수잔 콜린스는 "이전까지 그런 소설이나 작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으며, 출판사에 넘기고 나서야 (작품의 유사성에 대한) 얘기를 듣고 편집자에게 문의했다"라고 해명했고[11], 책의 아이디어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한 채널에서는 아프가니스탄 파병 뉴스가 나오고 있었고, 다른 채널에서는 리얼리티 서바이벌 쇼가 나오고 있었는데 이 둘과 로마 검투사들의 배틀로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미노타우로스에게 남녀 7명씩을 바치던것을 합쳐서 헝거게임의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고 말했다. 사실 배틀로얄 자체도 여기저기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 배틀로얄 작가인 타카미 코슌 역시 큰 반발없이 그럴수도 있다고 반응을 보였다. 평론가들은 대체로 '''비슷하긴 하지만 이미 이러한 소재가 한둘인 것은 아니며 같은 소재를 다른 양상으로 발전시켰으니 표절이라고는 볼 수 없음'''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배틀로얄과 헝거게임은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히 다르다. 세세하게 보면 둘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청소년들이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여야 하는 배틀로얄식 살인 게임이 주제지만, 차이점이라면 배틀로얄은 게임 자체와 한때 같은 반 친구들이었던 서로를 죽여야 하는 게임에 강제로 참여하게 된 각각의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진 데에 비해, 헝거 게임 시리즈는 살인 게임 그 자체보다는 살인 게임을 생중계함으로써 체제를 유지하는 사회와 그곳에서 서술자 주인공 캣니스가 반란의 도화점이 되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 배틀로얄의 사회비판요소가 불신, 폐쇄주의, 우경화, 입시위주교육, 세대갈등이라면, 헝거 게임의 사회비판요소는 미디어를 이용한 선동의 영향과 그에 휘둘리는 무지한 대중, 물질만능주의,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공리주의에 더 가깝다[12].
사회에 대한 언급보단 게임 내부에만 촛점을 맞춘 배틀로얄보다 사회에 대한 묘사를 꾸준히 하는 헝거 게임 쪽이 오히려 사회비판이 훨씬 떨어진다는 게 특이하다.
사실 굳이 두 작품 사이의 차이를 찾아보자면 이 외에도 제법 많은데... 예를 들어 둘 다 독재국가에 의해 벌어지는 살인게임을 주제로 삼고 있긴 한데, 그 독재국가와 살인게임의 성격 자체도 상당히 다르다. 배틀로얄의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압도적인 국가의 권력 앞에서 각 개인이 평등하게 보잘것없음을 보여주는 장치에 가깝다. 실제로 작중에서 프로그램에 끌려간 3학년 B반의 인원중에는 의지할 데 없는 고아문제가정 출신의 불량청소년, 반정부 운동가의 가까운 친척도 있지만 독재체제의 중요한 기반인 군인의 딸이나 간부급 관료의 아들, 읍의회 의원의 딸 처럼 체제에 순응적인 중간층 집안의 자식도 있고 심지어 대동아공화국 최대의 재벌집안의 후계자도 있지만 일단 게임 내에서는 '이들 모두 평등한 입장인 것. 이에 비해 헝거 게임의 '헝거 게임'은 참가 인원 자체가 '자의로 참여를 선택한 인원' 이든 '가난할수록 불리한 추첨 규정에 의해 선택된 인원'이든 전혀 평등하지 않다.(물론 헝거 게임 역시 특권층 출신 역시 권력기구 그 자체의 위력 앞에서는 저항의 여지조차 없이 끔찍하게 숙청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는 한데, 이건 어쨌건 '헝거 게임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요약하자면 헝거 게임의 '헝거 게임'은 그 자체로써 불공정하고 억압적인 판엠의 사회상을 축소해 보여주는 일종의 극중극인데 비해 배틀로얄의 '프로그램'은 각자 능력, 배경, 처지가 전혀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라 해도 그러한 각 개인의 차이는 국가의 압도적인 권력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을 정도로 보잘것없음을 상기시키는 일종의 희생양 역할을 하는 것. 헝거 게임이 TV를 통해 생중계될 정도로 온 사회의 강렬한 주목을 받는데 비해 배틀로얄은 단지 '시작했다'는 뉴스와 '우승자가 나왔다'는 뉴스 정도로 짧게 다뤄지고, 아무도 프로그램에 출전한 청소년들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는 것 역시 이런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둘 다 피지배층의 저항 의욕을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된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그 방법은 정 반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른 것. 캐피톨이 사용하는 수단은 판엠 사회의 축소판인 헝거 게임을 통해 '너희들 중 선택된 이들이 아무라 날고 뛰어봐야 우리 손바닥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따라서 헝거 게임의 실체에 대해 속속들이 공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반면 대동아공화국은 '너희들 중 누구도 이렇게 소리없이 끌려가 숙청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따라서 프로그램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공개되는 것보다는 그것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아무도 제대로는 알지 못하는 미지의 공포로 남아있는 쪽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보면 배틀로얄의 대동아공화국은 기본적으로 20세기 독재국가들의 오마주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현재까지 등장한 독재 체제 중에서 가장 '정치공학적으로 정교한' 체제를 구축했던 20세기 전체주의 독재국가들이 그 국민을 억압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 바로 배틀로얄의 '프로그램'과 같은 은밀한 숙청에 대한 공포였던 것. 이에 비해 헝거 게임 시리즈가 보여주는 독재국가상은 현실적이고 기술적인 고증이나 핍진성 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이 미치는 한 가장 끔찍하고 악의적, 차별적인 독재체제를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즉, '현실적인' 독재상을 비추어주고 비판하는 부분에서는 배틀로얄이 훨씬 뛰어나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물론 그렇다고 헝거 게임의 작품성을 낮게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 헝거 게임의 경우 현실성을 포기한 대신 '독재 권력과 그에 저항하는 영웅적 인물상'이라는 서사적 구조의 드라마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흔히 '헝거게임 그거 뒷부분 가면 완전 연애물. ㅋㅋㅋ' 라고 하지만, 그 연애조차도 영웅적 인물상의 영웅적 저항이라는 드라마의 일부인 셈이다. 또 여기서 더 나아가서 배틀로얄에서 등장하는 정부 관계자가 '정부의 입' 격인 사카모치 킨바츠를 제외하면 철저히 익명화된 얼굴없는 권력인데 비해 헝거 게임 시리즈에서는 코리올라누스 스노우알마 코인 같은 인간화된 권력자의 행보가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시나에피 트링켓, 플루타르크 헤븐스비 같은 입체적인 체제 내 저항자들 역시 다양하게 등장하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인 셈. 말하자면, 배틀로얄의 서사구조는 현실을 모사하여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데 비해 헝거 게임의 서사구조는 작가에 의해 이상화된 악에 맞서는 이상화된 영웅상을 묘사하는 데 중심을 두고 있고, 때문에 인물상의 측면에서는 단순화-우화화된 배틀로얄에 비해 헝거 게임에서는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인물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의 작중 행보 역시 헝거 게임의 캣니스는 '압제에 맞서는 혁명의 기폭제' 라는 영웅적인 활약상을 보여주는 데 비해 배틀로얄의 나나하라 슈야&나카가와 노리코가 할 수 있는 일은 강력한 체제 앞에서 무력한 개인, 또는 소수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자기 손으로 친구를 죽이지 않는 것' 이나 많은 친구들의 헌신적인 도움을 끌어모아 겨우 '한명만이 살아남아 체제의 선전거리가 되어야 한다'는 규칙에서 벗어나 '두명이 살아남아 외국으로 탈출한다'는 소박한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다.
말하자면 두 작품은 비슷한 소재와 비슷한 주제를 사용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서사구조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다고 할만큼 차이가 크다. 표절 의혹이 작가 수잔 콜린스의 부인과 타카미 쿄슌의 납득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해결된 것 역시 상당부분 이 서사구조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한다. 원래 작품의 표절 판정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나 설정의 유사성' 같은 부분보다는 '표현의 유사성' 인데, 서사구조에서 차이가 크다 보니 표현의 유사성이 성립하기가 좀 심하게 어려웠던 것.

흥미로운 점은 배틀로얄 역시 스티븐 킹의 소설 롱워크에 등장하는 죽음의 게임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으나, 스티븐 킹은 오히려 "끔찍하게 재미있는 소설"이라며 배틀로얄을 극찬했다. 배틀로얄과 롱워크는 유사점은 어디까지나 '연상되는 부분이 있는 정도'로 실제로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 어렵기는 하다.
배틀로얄(소설) 항목에도 서술된 것처럼 헝거 게임과 배틀로얄 사이에 유사한 부분이나 서로 연상되는 부분이 상당하기는 하나 표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표절 의혹을 제기하는 독자들은 작품의 이야기 구조나 설정등을 근거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실질적으로 작품의 표절이 인정되는 경우는 대부분 문장이나 영상 연출, 장면 묘사처럼 세부적이고 기술적인 영역에서 유사성이 발견되는 경우이지, 이야기의 구조나 설정이 유사하다는 것은 표절로 보기 힘들다는 관점이 많다. 위에서 표절의 근거로 제시된 것들을 보더라도 '외딴 곳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서로를 죽이게 하는 것', '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살아남은 최후의 승리자는 부와 영광을 누린다는 룰', '강력한 권력에게 강요받은 규칙에 저항하여 반기를 드는 주인공' 으로 분할해서 생각해 보자... 각각의 요소와 같은 요소를 중요하게 다루는 작품이 생각 이상으로 엄청나게 많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야기 구조나 작품 설정같은 부분의 유사성은 작품간의 표절을 따지는 기준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장르를 가르는 구별 기준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하며, 이 영역에서 표절을 이야기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 그런데 헝거게임이 배틀로얄의 표절 의혹을 받는 이유는 아마 소재의 참신함 때문일 것이다. 한 곳에 몰아놓고 한 명만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게하는 소재로 만든 책이나 영화가 흔치 않은지라... 좀 더 쉬운 예로, 음악에 비유해서 설명해 보자. 만약 한 음악이 다른 음악의 소절을 그대로 따 와서 사용한다면 그건 당연히 표절이다. 하지만, '애절한 분위기로', '실연을 노래하는', '발라드' 두 곡이 있다면 이 중 한 곡이 다른 한곡을 표절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만약 이걸 표절이라고 한다면 이 두 곡 모두 '애절한 분위기로' 짝사랑을 노래하는 가곡의 일부분을 표절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배틀로얄의 작가인 타카미 코슌이 수잔 콜린스의 해명을 받아들인 상황에서 이런 차원의 표절을 주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4. 등장인물


헝거 게임 시리즈/등장인물 문서 참고.

5. 설정



6. 기타


  • 2017년 7월에 예브게니 피야트코프스키라는 사람에 의해 헝거 게임과 비슷한 서바이벌 리얼리티 프로그램 게임2: 겨울(Гаме2Винтер)이 기획되기도 했다.

[1] 사실 그렇게 중요한 부분도 아니다. 어떻게 망했는지, 망한지 얼만큼 오래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그냥 지명만 몇 번 언급될 뿐. 다만 적어도 수백년은 됐을 거라고 유추할 수 있다. 더 따지자면 포스트-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이다. 기후변화로 지구가 한번 아작나고, 또다시 내전으로 판엠이 거의 파멸직전까지 갔기 때문. 또한 판엠은 미국이 흑화하여 북한마냥 완벽한 정보통제가 이루어지는 독재국가이고, 나머지 세계는 멀쩡하다는 음모론도 있긴 하다.[2] '흉내어치'라는 뜻[3] 특히 평양과 캐피톨이 상당 부분 싱크로된다.[4] 실제로 작중 악역인 스노우 대통령도 캣니스와 피타를 무턱대고 죽여 국민들의 반감을 사는 것보다는 나름대로 계략을 짜서 함정에 빠뜨리려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5] 1편 영화에서도 코리올라누스 스노우 대통령이 하는 말에 의하면, 캐피톨이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한 목적이라면 그냥 24명을 1년에 한번 공개처형해버릴 수도 있지만, 우승자가 있는 일종의 게임을 함으로써 너무 많지도 않은 적정량의 희망을 주는 것을 통해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6] 일단 뭐가 말이 안되냐 하면, 타 구역에선 '''시장의 자제도 선별에 포함된다.''' 그러니까 나라가 임명한 관리도 재수없으면 자식이 저 게임에 들어간단 소리.[7] 계급다툼이니 뭐니 해도, 일단 '''통제가 안되면 끝이다'''. 영화에선 11구역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것까지 나왔다. 우승자에게 베푸니 뭐니 해도, 2편에서 우승자들을 데리고 성매매(...)를 할 수 있게 해놨다는게 밝혀져서 말이 되냐고 까이고, 헝거게임 우승자들을 모아놓고 게임을 한다는 발상이 본래 취지에 완벽하게 반대인지라...[8] 단순히 물자 이동도 있지만, 그것 말고 사람들 간의 교류가 필요하다.[9] 즉, 스노우의 정책은 캐피톨의, 캐피톨에 의한, 캐피톨을 위함(...)이다. 물론 현실의 독재 국가들에서 부유층들의 지역에 부가 집중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각 구역의 인구 수가 비슷하다 치면 12 구역에서 4구역 까지만 쳐도 대략 국민의 62%의 민심이 날라간 셈인데다, 다른 구역이라고 그리 만족하진 않을 것 같다.[10] 물론 정말로 제딴에는 저게 좋은 방법이라 여겨서 강행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인간이 항상 합리적인 선택만 하는 것은 아니니(...). 그런데 그렇다기엔 헝거 게임만 해도 너무 길게 이어져 내려온 전통(?) 이다.[11] 이에 대해 소설 집필 당시 15년 이상 경력의 TV 각본가이자 소설가였고 집필을 위해 많은 자료 수집을 했을 터인 수잔 콜린스가 배틀로얄 정도의 유명한 작품을 알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논자도 있다. 이런 식의 진실게임에선 자주 볼 수 있는 대답이긴 하다.[12] 배틀로얄은 '네 친구를 죽여야 네가 살아남는다=네 친구를 밟고 올라가야 네가 살아남는다'는 것을 핵심적인 갈등요소로 하여 '프로그램' 자체가 사회를 은유하기에 그 프로그램을 보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헝거 게임은 일종의 검투 경기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진짜 갈등은 헝거 게임 내부보다는 헝거 게임(및 그 참가자)와 그를 둘러싼 사회 사이에서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