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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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태종 이방원의 8남이자 서4남으로, 어머니 신빈 김씨에게는 장남이다. 친남매로는 누이 소숙옹주와 경신옹주, 남동생 익녕군이 있다.
2. 군호의 발음
태종 아들들의 군호는 전부 가운데에 ‘편안할 녕(寧)’ 자가 들어가있다. 그런데 혜령군의 군호는 ‘녕’이 아닌 ‘령’으로 읽는다. 물론 ‘寧’의 원래 발음이 ‘녕’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혜녕군’이 맞다. 하지만 예전부터 '寧'의 앞 글자가 받침이 없는 경우 활음조 현상으로 인해 '령'으로 읽고 썼기 때문에 이를 반영한 혜령군으로 부르는 게 적절하다. 자세한 것은 '寧' 항목 참조.
둘째 적형(嫡兄) 효령대군과 이복동생 희령군, 후령군의 군호 발음도 같은 경우이다.
3. 생애
1427년(세종 9년) 10월에 홍녕군(弘寧君)에 봉해졌으며#, 2년 후 군호가 혜령군(惠寧君)으로 바뀌었다.# 1438년(세종 20년)에는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베이징에 가 정통제의 칙서를 가지고 돌아오는 공을 세워 안장과 말을 하사받았다.#
4. 사망과 이후
1440년(세종 22년) 6월 7일에[1] 세상을 떠났다.# 향년 33세.[2] 묘는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에 있다.
5. 여담
- 1430년(세종 12년) 새해 첫날에 열린 조회에서, 혜령군과 온녕군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홀로 신의군의[3] 양관(梁冠)을 때렸다. 그러자 화가 난 신의군이 온녕군의 양관[4] 을 걷어차 버렸다.(...) 그런데 종부시[5] 에서는 도리어 신의군을 탄핵했다. 아무리 혜령군과 온녕군이 잘못했다해도 당조카가 어떻게 당숙의 관을 걷어찰 수 있냐는 것이었다. 결국 신의군은 한성 밖으로 쫓겨났고 그의 종과 관노비, 하인들은 몰수되었다.#
6. 가족과 후손
낙안군부인 무송 윤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큰딸은 원맹수와 혼인했고, 둘째딸은 안동김씨 복창군 김수녕, 셋째딸은 원보강과 혼인하였다.
유일한 아들인 예천군 이수(醴泉君 李洙)는 슬하에 3남을 두었고 이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오늘날의 전주 이씨 혜령군파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