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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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태종 이방원의 11남이자 서7남으로, 어머니 숙의 이씨에게는 장남이자 유일한 아들이며 태종이 상왕이 된 후 낳은 첫 아들이다. 전주이씨 후령군파의 파시조이다.
2. 군호의 발음
태종 아들들의 군호는 전부 가운데에 ‘편안할 녕(寧)’ 자가 들어가있다. 그런데 후령군의 군호는 ‘녕’이 아닌 ‘령’으로 읽는다. 물론 ‘寧’의 원래 발음이 ‘녕’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후녕군’이 맞다. 하지만 예전부터 '寧'의 앞 글자가 받침이 없는 경우 활음조 현상으로 인해 '령'으로 읽고 썼기 때문에 이를 반영한 후령군으로 부르는 게 적절하다. 자세한 것은 '寧' 항목 참조.
둘째 적형(嫡兄) 효령대군과 이복형 혜령군, 희령군의 군호 발음도 같은 경우이다.
3. 생애
1429년(세종 9년) 10월 27일에[1] 후령군(厚寧君)에 봉해졌다.#
천성이 조신하고 사람들에게 인망을 많이 쌓았으며 어려서부터 의리를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4. 사망과 이후
적형 세종이 승하한 지 8달 뒤인 1450년(문종 즉위년) 11월 9일에[2] 세상을 떠났다.# 향년 31세.[3] 묘는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에 있다. 원래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에 있었는데 일제가 그곳에 군용지를 만들자 1941년 2월에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다.
사당 숭도사(崇悼祠)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명덕리에 있다.#
5. 여담
- 1433년(세종 15년) 9월 19일에[4] 후령군의 생모 숙의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숙의 이씨가 태종에게 쫓겨났던 듯 하다. 당시 쫓겨난 사람을 위해 대군들이 상복을 입을지 말지를 두고 조정에서 논의했다. 이 때 지신사 안숭선이 “정실 어머니라도 나갔으면 상복을 입지 않는데 하물며 서모이겠습니까.”라고 하여 상복을 입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다만, 세종은 부의로 쌀과 콩을 합쳐 20섬, 종이 80권, 정포 20필, 석회 40섬과 널 등을 후령군에게 보내주었다.#
6. 가족과 후손
무안군부인 평산 신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딸 한 명을 두었다. 이 딸은 신숙주의 아들인 신정과 혼인하였다.
둘째부인 동양군부인 한양 조씨 사이에서는 2남 1녀를 두었다. 딸은 배맹종과 혼인하였다.
장남 정해도정 이집(貞海都正 李緝)은 슬하에 5남을, 차남 암성수 이윤(巖城守 李綸)은 2남 1녀를 두었고, 이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오늘날의 전주 이씨 후령군파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