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원
1. 개요
북한의 통화. ISO 4217 코드는 KPW이며, 기호는 ₩이나 실생활에선 한글로 "원"이라고 쓴다. 일단 북한 정부가 발표하는 공식 환율은 108원/USD이지만, 실제로 시장에서 유통되는 환율은 끝도 없이 치솟고 있어 아예 미국달러나 유로화, 위안화로 전향한 인민들이 많다. 정확하게는 교통비나 쌀값같은 기초 생활비는 북한돈을 쓰기는 하지만 재산축적용으로 쓰기엔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해서 외화로 저축하고 있는 것. 중국 자본이 많이 진출해있는 라선특별시는 장마당(=재래시장)에서도 중국 위안화가 일상적으로 쓰인다고 한다. 두부 한 모에 1위안 이런 식으로... 2013년 이미 장마당의 반 이상이 위안화로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북한 주민 99.9%가 미국 달러를 쓰고 있다.#
2009년의 화폐개혁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지독해져 지금은 사실상 휴지조각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환전이 불가능하고 인근 나라인 일본이나 대만, 심지어 중국에서조차 환전이 불가능하다. 이유는 다른게 아니라 취급이 까다로워 꺼리기 때문. 왜냐하면 가치변동이 너무 심각하다. 예를 들면 오늘 대한민국 원화 만원으로 북한 원 십만원을 교환할 수 있었으나 다음날 백만원까지 폭락하는 등. 언제 무슨 연유로 단 하루만에 보유한 금융자산이 1/10로 떨어지는 사태가 북한에선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다.
일단 2016년 3월 기준으로 국정 환율은 1달러당 900원이지만, 시장 환율은 1달러당 8150원(북한 7원=남한 1원)을 가리키고 있다. 유엔제재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가 없다. 이 화폐는 전세계에서 짐바브웨 달러처럼 위조비용이 위조로 얻는 돈보다 비싸서 위조지폐조차 만들지 않는 화폐로 악명이 높다. 2016년, 위조지폐 150kg이 발견되었다. 태국에서도 위조지폐가 발견되었는데, 경제개방 기대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 시장 환율은 $1(미국)=₩1000(남한)=₩10000(북한)이 될 수도 있겠다.
예전엔 북한을 방문한 외국인을 위한 화폐로 태환권이 있었지만, 지금은 폐지하고 미국 달러와 유로화를 공식적인 외국인용 화폐로 지정한 상태다. 남한 사람들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구경할 일이 없으나 북한 상인과 일반 인민들에 의해 중국의 중개상에게 넘겨져 점차 유출되는 방식으로 퍼져 이 루트를 타면 손 쉽게 구할 수 있다. 북-중 국경 근처(단둥시, 도문시)의 가게에서도 볼 수 있고 파주, 고성(강원도) 소재 통일전망대에서도 팔고 있으나 화폐 가치에 비해 굉장히 비싸므로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가장 저렴한 곳은 다름아닌 이베이. 국내 화폐상에서도 약간 가격이 있긴 하다만 나름 간단히 구할 수 있다. 참고로 중국 등 제3국을 통해 북한 화폐를 들여오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고 한다.해당 판결 기사
다만 2013년 이후로 물가가 안정세로 접어들면서 북한 내에서 북한 원의 신용도가 어느정도 회복되었다고 한다. 화폐개혁 실패의 여파로 수년간 북한 원은 길거리 음식이나 생필품을 사는데 정도에나 쓰였고, 가전 제품같은 고가의 물건이나 외제품의 경우에는 달러나 위안을 쓰는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그간 대북제재에도 물가가 비교적 안정된데다가 2018년 중순에 들어서는 비공식적 달러 환율(암환율)이 1달러에 8000원선에서 안정되어가면서 굳이 귀찮게 환전을 해야 될 필요가 적어졌다는 듯하다. 물론 달러가 안정화되었다고 해도 공식환율과 비공식 환율간의 차이는 여전하기 때문에 재조정하는 작업은 필수적이기는 하다.
2020년 코로나 19로 인해 북한원의 가치가 오히려 올랐는데 이게 북한 입장에서 마냥 좋은 일이 아니라서[1] 평양의 한 환전상을 처형했다는 얘기가 나왔던바 있고, 북한 당국이 북한내 외국인들에게 미국 달러화 대신 북한 원화만을 사용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1.1. 평양 시내의 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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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참고용 사진. 2012년 경 북한 최초의 대형마트인 광복지구상업중심이 개장했을 당시 리포터가 식용유, 샴푸와 기타 화장품, 2~3kg 정도의 모듬빵, 음료수 2병, 술 1병을 구입했을 때 상품가격이다. 그런데… 최고액권을 대체 몇장 줘야할 지 모를 숫자가 인상적이다.[2] 이정도면 북한 노동자의 월급과 맞먹는다. 달러로 환산해도 1달러/8150원 기준으로 44달러나 한다.
유튜브에서 평양에 여행 갔다온 외국인들이 찍어서 올린 동영상들을 살펴보면 대략적으로나마 가장 나은 형태로[3] 추정할 수 있다. 2014년 평양 기준으로 호떡이나 밀전병 같은 간단한 간식이 3,500원, 간단한 소형 전자기기들도 50만원 ~ 2백만원에 필적하고 있다고 한다.
알아두어야 할 것은 평양 물가가 북한 전체의 물가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평양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4] 지방과의 물가는 괴리될 대로 괴리되어 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평양은 상위 5% 정도만 모아 둔 동네다. 쉽게 말해 금수저들만 사는 동네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도 평양의 1인당 GDP는 달랑 2700달러.[5]
2. 시리즈
북한 원은 5회의 화폐개혁을 거쳤기 때문에 모두 더해 5개의 시리즈가 존재한다. 하지만 개혁을 했어도 ISO 4217 코드는 바뀌지 않았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화폐개혁을 하거나 디자인을 바꾸면 짧아도 2~3년 정도는 교환을 위해 유예기간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해 북한의 화폐정리사업은 딱 1주의 여유만 있었다.
심지어 이 1주 후에는 돈으로써 인정해주지 않았기에 무조건 바꿔야 하지만 이게 북한당국은 인민들이 몰래 모은 돈을 자신들이 꿀꺽하기위해 시행하는 것이다보니, 평생 모은 돈 10억이 곧바로 1억이 되어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모든 자산가들은 위안화나 달러로 보관하게 되었다.
2.1. 소련군사령부 군표
1945년 여름에 소비에트 연방 국가은행/재무인민위원회/국방인민위원회가 금엔으로 표시한 군표의 발행을 제안했으니,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위원회의가 소련군에 대하여 금융지원을 결정하면서 소련군이 점령한 곳에서 소비에트 연방 국가은행의 금루블로 거래하는 행위를 엄금했다. 1945년 가을에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위원회의가 군표의 발행을 지시한 덕택에 북한 땅을 다스리는 소련군사령부는 조선 엔과 등가로 교환이 가능한 군표(1엔/5엔/10엔/100엔)를 발행했다.
2.2. 1기 (1차 시리즈)
- (전화는 왼쪽에서 오른쪽, 원화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다.)
- 전화 (15전, 20전, 50전) / 원화 (1원, 5원, 10원, 100원) = 7종 [6]
(가) 1세대 단위로 세대주는 500원, 만 18세 이상의 동거가족 1명에 대해서는 200원으로 계산된 금액까지 교환할 수가 있었고, 육해공군/공안당국/민정관청/국유기업/사회단체에서 근무하는 사람들과 국가로부터 생활보조를 받는 사람들은 1947년 11월 봉급과 동액까지 교환할 수가 있었지만, 그들의 가족에 대하여 교환하지 않았다.
(나) 10명 이상의 노동자와 사무원을 고용하는 민간기업소 및 민간단체에 대해서는 교환액이 1947년 11월 지불임금의 50%를 넘지 못했고, 10명 이하의 노동자와 사무원을 고용하는 민간기업가, 수공업자, 소상인 및 자유직업자들은 1947년 11월 납세한 액수에 대하여 시도 인민위원회 재정과장의 증명서를 제출하여 사업소득세 또는 자유소득세의 과세표준액 1개월분의 반액까지 교환할 수가 있었다.
(다) 농민들은 현물세를 납부한 농가에 한하여 1호당 700원까지 교환할 수가 있었고, 기숙사에 있는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은 교장증명서를 제출하여 500원씩 교환할 수가 있었고, 전문학교학생 및 대학생들은 1명당 1개월분의 국가장학금 지급액에 준해서 교환할 수가 있었다.
(라) 여행하고 있는 사람은 여행증명서를 제출하여 500원까지 교환할 수가 있었고, 세대주가 감옥에서 복역하는 경우에는 동장증명서를 제출하여 500원을 가족이 교환할 수가 있었고, 소련군에 속한 사람과 인민군에 속한 사람에 대해서는 일반교환소에서 취급하지 않았다.
(마) 소련군은 병영에서 소련군사령부의 군표를 조선중앙은행권에 무제한으로 등가교환해 소련군의 주둔비를 북한인들에게 전가했다.
이렇게 해서 동결한 예금 가운데 단체예금은 1947년 12월 5일을 기준으로 하여 육해공군/공안당국/민정관청/국유기업/사회단체의 예금은 전액 지불하고 그 뒤에 입금된 금액은 동결했다. 협동조합과 백화점의 예금은 화폐개혁 직후에 물가가 절반으로 내려갔다는 기준을 적용하여 교환기간까지의 예금총계의 50%를 지불하였다. 민간예금은 1948년 2월 25일에 지불했는데, 1명의 예금자에 대하여 1개의 계좌로 통합하면서 특정한 계산법에 따라 지불액을 산출하고 잔액은 무이자예금으로 동결했다. 민간예금을 새돈으로 지불하는 계산법을 보아라.
(가) 2,000원 이하는 전액지불하고, 2,000원 초과-5,000원 이하는 옛돈 5,000원=>새돈 2,000원+(3,000원X50%)
(나) 5,000원 초과-10,000원 이하는 옛돈 10,000원=>새돈 2,000원+(3,000원X50%)+(5,000원X30%)
(다) 10,000원 초과-50,000원 이하는 옛돈 50,000원=>새돈 2,000원+(3,000원X50%)+(5,000원X30%)+(40,000원X20%)
(라) 50,000원 초과는 옛돈 10,0000원=>새돈 2,000원+(3,000원X50%)+(5,000원X30%)+(40,000원X20%)+(50,000원X10%)
6.25 전쟁 중 국군이 평양을 잠시 수복했을 때, 북한 원을 법화로 인정한다고 시당국이 밝히면서 남한 화폐의 유입으로 급속히 치솟던 인플레가 진정되기도 했다.#
70년대 말 북한정부에서 위 지폐들을 기념품 형식으로 재발행해 지금도 이베이나 화폐상을 돌아보면 10~15달러 정도면 입수 가능하다.
진품은 색깔이 좀 노랗고, 빛에 비춰보면 다이아몬드 모양의 체크무늬가 보인다. (이를 투문(透紋)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원 지폐에도 그 지폐에 나오는 인물이 투문으로 따로 새겨져 있다.)
1차 지폐로 투문이 있는 세트는 200만원 정도 하며, 최고액권인 100원권 미사용은 간간히 보여 5~6만원 정도에 입수 가능하나, 저액권일수록 미사용권 입수 난이도가 급상승하는 특징이 있다.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발행한 재발행본은 특정한 숫자패턴이 있으며, 백원권은 70, 10원권 80, 5원권 90, 1원권 50으로 시작한다. 그 외에 번호로 시작하는 투문없는 지폐들은 모두 가짜 복사본 지폐들이다.
2.3. 2기 (2차 시리즈)
1959년 2월 13일부터 1959년 2월 17일까지 [ 100:1 ]로 무제한으로 교환했는데, 북한판 경제 개발운동인 천리마 운동의 일부로서 투자재원을 수집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이 화폐가 공식적으로 쓰여졌을때가 북한경제의 전성기이기도 했다.[7] 탈북자 노인의 증언을 들어보면, 이 시절에는 배급제도 원활하게 작동했고 생활수준도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좋았던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대약진운동이 터지는 바람에 옆 동네의 조선족들이 국경을 넘어서 먹을것을 달라고 하던 시절이었다! 통계를 봐도 두자릿수 경제성장을 매년(1950년대 후반~1960년대 중반) 기록했을 정도다. 남북한의 경제력이 뒤집히는 시기는 1975~1977년 이다.
실제로 이 시리즈는 북한 원화 중에서는 꽤 구하기 어려우며, 가격이 상당히 비싼 축에 속한다. 지폐 6종류와 동전 3종류(10전, 5전, 1전)가 발행되었다. 그리고, 이 시리즈부터 화폐에 한자가 사라진 것도 특징이다.
2.4. 3기 (3차 시리즈)
1979년 4월 7일부터 1979년 4월 12일까지 [ 1:1 ]로 교환했는데, 다른 의도는 전혀 없고 디자인만 바뀐 흔한 개혁조치 수준. 50전 지폐가 없어진 대신에 천리마 동상이 그려진 동전이 생겼다. 본격적으로 북한 경제를 지탱하던 천리마 운동의 퇴색 탓으로 추정. 그런데 옛돈을 새돈으로 교환하는 절차는 1명당 1회만 할 수가 있었고, 옛돈을 새돈으로 교환하면서 가능하면 전액을 저금해서 필요한 만큼의 돈을 가끔 인출할 것을 장려했다. 그러니까 무현금유통을 뒷받침하는 은행저축사업을 홍보한 것이다. 말이 은행 저축이지 아래 4차 시리즈에도 나오지만 '''김일성의 인민 돈 강탈'''이 맞는 표현이다. 그나마 3차 시리즈는 인출을 제한했다가 얼마 안 가 풀어주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이때부터 외화와의 태환권(일명 '돈표')이 발행되어 환율을 도입했는데, 공식 고정환율로 미국 1달러는 북한 2.18원이었다. 따로 태환권이라는 종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폐 뒷면에 도장을 찍어서 구분했었다. 사회주의국가 출신 외국인에겐 붉은 도장이 찍힌 것을, 자본주의국가 출신 외국인에겐 푸른 도장이 찍힌 것을 주었다. '''한글로.'''
[image] [image]
이후 1988년에 조선무역은행에서 위와 같이 내국인용과 완전히 다른 모습의 '''외화와 바꾼 돈표'''라는 이름의 태환권을 발행했는데, 매우 조악한 질을 자랑했었다. 분홍색 국제우의전람관[8] 이 그려진 것이 사회주의국가용, 청록색 천리마상이 그려진 것이 자본주의국가용이다. 3차는 "외화와 바꾼 돈표" 도장이 안 찍힌 것이 더 귀한 대접을 받으며, 100원권은 찍지 않았다.
그리고 지폐에 김일성이 그려진 첫 시리즈이기도 하다. 50전은 동전으로 바꾸면서 삭제.
2.5. 4기 (4차 시리즈)
대부분 "북한돈" 하면 떠올리는 시리즈로, 1992년 7월 15일부터 1992년 7월 20일까지 [ 1:1 ]로 교환했다. (그리고 3년뒤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겪게된다.) 자연인 1명당 400원을 초과한 옛돈을 새돈으로 교환을 거부하면서 400원을 초과한 액수의 옛돈을 조선중앙은행으로 입금했으며, 자연인 1명당 30000원 이상의 옛돈을 저금할 수가 없게 했으니, 처음으로 재정회수를 위해 계획적으로 자행한 화폐개혁이다. 하지만 교체 당시만 해도 김일성이 버젓이 살아있었고, 그 위대하신 수령님이 원하신다는데 선량한 인민들이 무엇을 의심할까, 그냥 당의 선전만 믿고 입금했다 큰 낭패를 보고 말았다.
북한의 국민경제가 점차 나빠지게 될 때에 발행한 것인데, 그냥 보면 매우 복잡한 구성으로 보이겠지만, 처음 도입했을 무렵에는 3차 시리즈를 계승하여 100원, 50원, 10원, 5원, 1원 5종류를 그대로 이어서 발행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으로 인한 물가폭등을 이기지 못하고[10] 결국, 1998년에 500원권을 추가 하였다. 이것이 1959년 이후로 등장한 첫 고액권이었다. 그 후 2002년 7월 1일의 조치에 따라 1000원권과 5000원권을 발행하면서 2005년에는 200원권을 발행했다. 동전도 마찬가지로 1987년에 1원짜리가 등장한 이후로 계속 변화가 없다가, 2005년에 5원, 10원, 50원, '''100원'''짜리를 급조했다.[11] 이는 2009년에 모두 폐기되어버렸다. 지폐그림 출처.
한국의 쇼핑몰이나 이베이에서 수집용으로 판매하는 북한지폐는 십중팔구 4기 지폐이다.
5원권과 10원권은 1992년판과 1998년판이 있으며 1992년판의 가격이 훨씬 비싸다. 인쇄판식도 다르며, 1992년판은 요판, 1998년판은 평판이다. 4차권은 여러가지 지폐의 베리에이션이 존재하는 판으로 수집하기 매우 까다로운 권종이다.
- 백원(적색), 천원(녹색), 오천원(보라색)은 티끌 하나 다르지 않고 색깔만 다른 바리에이션이다.
2.6. 5기 (5차 시리즈, 현행권)
2009년 11월 30일에 도입, 동년 12월 6일까지만 교체가 진행된(단,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시리즈. 계획경제의 강화와 팽창된 통화를 회수하기 위해 발행하였으며, 북한 사상 처음으로 실패를 인정한 통화개혁이기도 하다.
구권과 신권을 은행에서 교환하는 비율은 [ 100:1 ]인데 누구나 은행에 입금하면 '''10배 부풀려서''' 넣어준다는 선전까지 했을 정도로 그 의도가 확실했다. 하지만 이미 4차 개혁때의 속임수를 모르는 인민이 없었으니 어떻게든 안 넣으려 애쓰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의 상황은 북한의 화폐개혁항목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으니, 이쪽을 참고하도록 하자.
- 동전은 5종류(일원(김일성화), 오십전(김정일화), 십전(진달래), 오전(목란꽃), 일전(철죽꽃)가 있다.
- 신권 오천원권이 등장함으로서 김일성 도안이 짤렸다.
- 이전 시리즈와는 달리 권종별 지폐 크기가 모두 동일하다.
3. 기념권 (기념 문구 가쇄권)
1998년부터 특정한 날을 맞이하여 기존 지폐에 기념 문구를 가쇄하여 발행하고 있으나, 이 분야의 본좌인 태국 바트에는 명함도 못 내밀고, 심지어는 중국 위안의 기념 지폐에 밀리는 처지. 중국과 태국을 본 받아서, 쓰잘데 없이 가쇄만 하지 말고 도안과 디자인을 새로 만들어 발행하는 편이 나을 듯... 1998년, 2012년, 2013년, 2017년, 2018년, 2019년에 기념 문구를 가쇄하여 발행하였다.
4. 이야기거리
- 국내 모 새터민 토크쇼에서 썰을 풀길, 이집트에서 이 북한 원화를 대한민국 원화로 혼동하여 잘못 환전 해 주는 바람에 큰 손실을 입었다는 이야기를 언급 했었다.
- 로동신문과 함께 담뱃잎이나 각성제(빙두)를 말아서 피우기 정말 좋다고 한다. 특히 마약 피우는 데 유용하다. 김일성 도안이 있었을 당시에는 정치범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어서 조심했었지만 신 권 오천 원 권의 등장으로 김일성 도안이 퇴출되어 현재는 그리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5. 만약에 남북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일단 흡수 통일을 달성한 독일의 경험을 살펴보자.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의 환율에 대하여 동독의 법정 환율(서독에서 동독으로 여행할 때에 쓰이는 환율)과 서독의 시장 환율(동독에서 서독으로 여행할 때에 쓰이는 환율)이 있었다. 동독의 독일국가은행에 따르면 1989년 10월까지 동독의 특수은행에서 합법적으로 거래하는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의 법정 환율을 [ 1:1 ]로 유지했지만, 서독의 독일연방은행에 따르면 1989년 10월부터 서독의 외환시장에서 합법적으로 거래하는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의 시장 환율이 [ 10:1 ]에 이르렀다.
그런데 동독이 서독에 통합한 1990년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결단을 내려 [ 1:1 ]로 교환하는 바람에 가치가 매우 낮은 동독 마르크의 가치가 갑자기 몇배 이상 폭등했고 동독 마르크를 [ 1:1 ]로 서독 마르크와 교환한 동독 주민들은 처음에는 행복했으나 동독계 기업의 부실화와 동독계 일자리의 감소에 행복하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서독산 소비재의 대량 공급과 독일연방은행의 고금리 정책에 힘입어 옛 동독 지역의 물가는 가까스로 안정을 유지했다.
다만, 북한 원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현실적으로는 북한 화폐를 아예 없애버리고 대한민국에서 쓰는 화폐로 일원화하여 사용할 확률이 높긴 하다.
'북한 화폐 정리 사업'은 대략 6가지의 시나리오가 있다. 가장 먼저 구글 도서의 원문 검색과 외국어판 위키피디아를 활용하면서 데일리엔케이 웹사이트와 한국은행 경제통계 웹사이트를 꼼꼼하게 살피고, 그 다음에 일반인들이 국회도서관이나 RISS에서 공짜로 다운로드가 가능한 논문들( 북한의 화폐개혁에 관한 연구 ; 이진욱 / 화폐통합이론과 남북한에의 적용 ; 서양원 / 남북한 통화 및 임금통합에 관한 연구 ; 강석준 / 통일독일의 경제통합 정책과 남북한 경제통합 ; 조윤수 )을 꼼꼼하게 살펴야 추측이 가능하다.
5.1. 북한의 화폐를 남한의 화폐로 바꾸기
- [ 1:1 ] 교환: 북한 원(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은행권)을 남한 원(한국은행권) 으로 자연인 1명당 1억 원까지 [ 1:1 ]로 교환하면서 1억 원을 초과한 금액은 모두 0으로 처분한다.[14]
- [ 10:1 ] 교환: 남북한의 달러-원 환율(1 미국 달러 = 1천 남한 원 = 1만 북한 원)의 차이[15] 및 남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 3만 미국 달러 vs 3천 미국 달러 )의 차이를 반영한, 남한 원(한국은행권)과 북한 원(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은행권)의 무제한 교환 비율.
- [ 100:1 ] 교환: 남북한의 국내 총생산(1조 미국 달러 vs 100억 미국 달러)의 차이 및 남북한의 가장 비싼 월급의 차이(1억 남한 원 vs 1백만 북한 원)를 반영한, 남한 원(한국은행권)과 북한 원(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은행권)의 무제한 교환 비율.
5.2. 남북한의 화폐를 모두 갈아치우기
- [ 10,000:1 ] 교환: 가장 먼저 남한에서 화폐개혁(OLD ₩10000=NEW ₩1)을 실행하여 남한 원(한국은행권)을 배포하면, 그 다음에 북한에서 화폐개혁(OLD ₩10000=NEW ₩1)을 실행하여 북한 원(조선은행권)을 배포한다. 남북한의 전역에서 달러-원 환율을 개정(미국 1달러=남한 1원=북한 1원)하면, 부당이득을 청산하면서 수출입을 뒷받침할 수가 있다.
- [ 1,000,000:1 ] 교환: 남북한의 전역에서 120년 동안의 도매 물가를 하루아침에 삭감하면서[16] 일본 제국의 일본은행권 금엔(UK£1=USA$10=금화 1냥=지폐 1円=100錢=1000厘=10000文)처럼 교환(순금 1그램=USA$100=₩1000000=1환→순은 1그램=USA$1=₩10000=1전→순동 1그램=USA$0.01=₩100=1문)하는 비율.[17]
6. 구하는 법
당연하지만 국내의 통상 은행에서의 환전은 불가능하다. 국내에서 구할 경우, 우선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 기념품점과 출입신고소, 판문점에서 구권(4기)을 판매하고 있으며,[19] 옥션이나 중고나라 같은 곳에서도 구권(3~4기)을 기념 지폐 개념으로 판매하기도 한다. 다만 5기 현행권은 워낙 희귀한지 국내 사이트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황학동 도깨비 시장내의 가게 중 국내외 기념화폐나 수집용 화폐세트를 파는 가게를 뒤져다 봐도 현행권은 찾을 수 없다. 간혹 해외의 ebay나 alibaba에서도 5기 현행권을 팔고 있으나 신권이 아닌 사용한 흔적이 많은 너덜너덜한 지폐가 온다. 그리고 alibaba의 경우도 마찬가지나 사기 위험성이 크다.
중국에서 직접 구할 경우 현행권인 5기권을 나름 쉽게 구할 수 있다. 예를들어 중국과 북한의 접경 지역인 단둥, 연길 등의 은행에서 중국 위안 → 북한 원으로 환전을 할 수 있다,[20] 이렇게 할 경우 사용한 적이 없는 깨끗한 신권을 받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나 2020년 5월 기준으로 중국 북한 접경지역의 은행들에선 '''북한에 갈 목적이 없으면(보딩패스, 비자 확인 등) 환전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외에 북한 접경지역의 관광지 길거리나 기념품 가게에서 기념품으로 '조선 돈 묶음'이라고 하여 판매하는 것을 구매할 수도 있다. 한국인이 많이 방문하고, 북한과도 가까운 편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기념품으로 판매하는것을 찾아볼 수 있다. 단, 이러한 길거리에서 기념품으로 파는것들도 십중팔구 구권이니 현행권을 구하고 싶으면 낚이지 말고 은행으로 가자.
중고나라에서 파는 조선돈, 북한지폐전집들은 모두 가치가 적은 구권임에도 불구하고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하고있다. 구권이라도 이렇게 구입하고 싶다면 무턱대고 구입하지 말고 조금만 찾아보면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으니 전문 수집가들에게 물어보자.
[1] 이유인 즉슨 수출에 악영향을 주는데다가 수입물가가 싸진것도 아니기 때문이다.[2] 짤방 속 가격은 360780.00원(소수점을 잘 보도록 하자.)이다. 최고액권 '''72장'''을 내고 780원을 더 내야 한다.[3] 남한에서도 세계각국의 물가를 이야기할 때 수도(首都)의 물가를 기준으로 삼는다. 다만 북한의 경우는 지방물가와 수도물가가 심각하게 차이가 난다는게 문제.[4] 여행증 항목 참고. 단순 경유만으로도 허가 없이 들어가면 처벌을 받는다![5] 그나마 평양이라 2700달러로 찍히는 것이지, 잘 알려져 있듯 다른 동네들은 말 그대로 총체적으로 답이 없는 수준. UN에 따르면 평양 포함 북한 전역의 GDP가 640달러 정도 된다고 한다. 이 정도 돈이면 한국에서는 막노동 5일이면 버는 돈이다.[6] 5전, 10전, 25전만 만들 수 없고, 다른 것 (예: 1원 25전)은 조합을 통해 만들 수 있다.[7] 남한은 이 시절만 해도 빈곤으로 고심하고 있던 세계적인 후진국 중 하나였다. 반대로 북한은 소련, 중국, 그리고 동독 등 동유럽권이 자본, 물자, 기술을 지원하여 6.25의 폐허를 완전히 복구하고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상황이었다.[8] "국제친선전람관"이라고도 한다.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에 위치한 박물관 비슷한 곳으로 세계 각국에서 김일성에게 보낸 선물들을 보관해 선전에 자주 쓰는 편이다. 예를 들면 '''"전세계가 김일성 주석을 위대하게 여겨 이런 공물을 바쳤다"'''라는 식.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것은 물론, '''신발 신고 들어가도 안 된다!'''[9] 손발이 오그라들겠지만, 정말로 이렇게 썼다. 현재까지의 화폐 중에서, 이 지폐만 직접 긴 선전글구를 넣었다.[10] 1970년대에서부터 1990년대 초반에는 100원 1장이 번듯한 직장인 한달치 월급이지만 1990년대 말에는 100원 1장가지고는 쌀 1~2kg밖에 살수없게 되었다.[11] 실물을 보면 알겠지만, 디자인도 그렇고 동전 질도 그렇고 심각하게 조악하다.[12] 3차에 달려있던 긴 수식어는 빠졌다.[13] 북한에서 김정일의 출생지라 주장하는 장소이다.[14] 2010년대에 남한 국내의 사업소에서 받을 수가 있는 가장 비싼 월급이 1억 원이다. [15] 북한 국내의 암시장 환율 기준이다. 북한 정부에서 가끔 발표하는 국정 환율은 1996년부터 북한의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16] 자포니카 쌀 1kg당 쌀값으로 계산하면 1890년대(上級米:¥0.1/中級米:¥0.01/下級米:¥0.001)부터 2010년대(上級米:₩100000/中級米:₩10000/下級米:₩1000)까지 1953년의 화폐개혁(100:1)과 1962년의 화폐개혁(10:1)을 반영하여 10억 배만큼 올랐다.[17] 2010년대에 북한 국내의 사업소에서 받을 수가 있는 가장 비싼 월급이 100만 원이다.[18] 물론 북한이 남한 주도로 통일될 경우(반대 상황은 끔찍하니 생각하지 말자) 북한 지역에 통용될 화폐에서는 기존의 북한 체제를 선전하는 도안을 폐기하고 새로운 도안을 채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화폐를 따로 발행한다 하여 반드시 남북이 별도의 감독·발행 기관을 둘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한국은행과 한국조폐공사에서 남북의 화폐를 모두 관리하는 방식을 채택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19] 과거엔 5기 현행권도 팔았으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우려로 판매 중단 조치되었다.[20] 중국의 모든 은행이 북한 원을 보유하고 있는게 아닌지라 대부분 북 접경지역이랑 대도시의 중앙은행급의 큰 은행에만 보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