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 배구단 선수 체벌 사건

 

1. 개요
2. 배경
3. 경과
4. 사건 직후
5. 결과
6. 이후


1. 개요


1992년 제9회 대통령배 전국남녀배구대회 도중 효성 여자배구단 선수단 숙소 내에서 벌어진 집단 체벌 사건이다.

2. 배경


효성 배구단은[1] 제3회 대통령배 대회에서 1차경기 3위를 한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성적을 보이지 못하였다. 잘해야 2차 리그까지 가서 탈락하는 것이 매년 되풀이되던 팀이었다. 그만큼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고, 당시 미도파현대와의 라이벌전에 시선이 집중되는 바람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 효성의 성적은 후지필름이나 도로공사, 한국담배인삼공사보다는 나은 수준이었지만 한일합섬이나 선경인더스트리(현 SK케미칼), 호남정유, 흥국생명에 비하면 조금은 부족한 수준이었다.
이 당시의 효성 배구단의 주요 선수로는 황경자, 양순이, 양점덕, 김경희,[2] 김성순, 손명숙 등이었고, 훗날 한국배구연맹의 심판이 되는 강주희가 1989년에 이 팀에 입단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강주희는 키가 186cm로, 당시 여자배구선수로서는 매우 컸고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주였다.[3][4] 지금이야 이 분이 한국배구연맹 심판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그저 그런 배구인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경북여상을 졸업하고 억대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 선수였다. 그 외에도 김정애, 주순란 등 나름대로 괜찮은 선수들이 들어왔다. 이런 가운데 효성은 나름 유망주들을 보강하면서 제9회 대통령배 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3. 경과


그러던 중 수원 순회경기 중에 건수가 잡히게 된다.[5][6] 효성 선수단은 1992년 1월 18일 수원 순회경기에서 다른 팀도 아니고 '''최하위팀인 후지필름에게 1-3으로 지고 만다.''' 당시 배구는 서브 득권제 방식[7]이라 과정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8] 이 당시의 경기 결과는 1세트 13-15, 2세트 11-15, 3세트 15-6, 4세트 13-15였다. 그렇게 효성이 후지필름에게 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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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인 1월 20일에 현대-효성 경기가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는데, 이 때 효성 선수들은 위 사진처럼 평범하게 경기 직전에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혐오주의[[https://photo.hankooki.com/newsphoto/v001/2021/02/16/jay1220210216042942_P_02_C_1.jpg|혐오주의]]
경기 시작 직전 선수들이 '''하나같이 엉덩이 아래와 허벅지 뒤쪽에 피멍이 든 것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만다.''' 이에 장충체육관을 찾은 관중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효성 선수단에 하나같이 야유를 보냈다. 당연히 선수들의 부모들도 이를 보게 되는데, 이를 본 선수들의 부모는 오열을 하며 난리가 나고 만다.
그리고 사건의 전말은 얼마 못 가서 알려지게 되는데, 앞서 열렸던 후지필름과의 경기를 진 것에 임태호 감독이 화가 많이 났고, 코칭스텝으로 하여금 기합을 주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선수들의 엉덩이를 피멍이 들도록 몽둥이로 때렸던 것이다.'''
당시 효성 배구단 임태호 감독은 “'''선수들의 정신이 많이 해이해진 것 같아 정신무장을 시키기 위해서였다'''”며 폭행 이유를 해명했는데, 사실 이 때 폭행한 사람은 당시 코치였던 신일균이다. 당시 김경희는 주장인 것도 있지만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대통령배 대회를 끝으로 은퇴하기 때문에 체벌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4. 사건 직후


이렇게 선수들을 집단으로 몽둥이로 구타하고도 효성 선수단은 '''함구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선수들이 이를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안 맞았다고 발뺌하는가 하면 한 선수는 부모에게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누가 봐도 맞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관중들은 현대-효성 경기 내내 선수들이 왜 저렇게 되었는지 진상을 규명하라며 난리를 쳤다.
물론 선수들이 누가 봐도 약체를 상대로 졌기에 그에 따르는 책임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지도자가 선수를 상대로 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에는 아직 '''군사정권 시절이었고,''' 때마침 성폭력인신매매 문제가 대두되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커졌다.[9]

5. 결과


이 사건 이후 대한민국배구협회는 효성 배구단 임태호 감독에게 체벌 사건에 대한 경위서를 제출하게 하였다. 또한 효성은 이후 벌어진 도로공사의 경기를 다시 한 번 0-3으로 졌고, 결국 대회가 끝난 뒤 임태호 감독과 신일균 코치가 경질되었고 김동한 감독과 이정철 코치[10]가 새로 부임했다.

6. 이후


이 체벌 사건은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이야기라 그렇게 심하게 공론화되지 않았지만 훗날 배구계 학교폭력 폭로 사건이 터지면서 재조명된다. 왜냐 하면 학교폭력 가해자인 이재영, 이다영의 어머니가 위에 언급된 대로 김경희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모자라 과거 이재영이 2017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대놓고 '''엄마가 깡패였대요.'''라고 말한 사실이 재조명되면서 김경희 또한 당시 체벌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되기에 이른다.
게다가 이 체벌 사건이 터진 후 2002년에는 KBO 리그 KIA 타이거즈김성한 감독이 훈련중 자리를 잡지 못한다는 이유로 김지영#s-1.8의 머리를 배트로 구타하였고, 2005년에는 신영철 당시 LG화재 감독이 하현용, 곽동혁을 폭행하였고, 2009년에는 이상열 당시 국가대표팀 코치가 박철우를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11] 급기야는 2020년 최숙현 선수 투신 자살 사건까지 터지면서 체육계 전반적으로 지도자의 선수 폭행 문제는 정점을 제대로 찍고 만다.[12]

[1] 1998년 IMF 사태로 인해 해체되었다.[2] 훗날 이재영, 이다영의 엄마가 되는 그 사람 맞다.[3] 참고로 그 당시 여자 최장신 배구 선수는 호남정유의 이시은(188cm)이었는데, 코트보다는 웜업존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 다음이 호남정유의 홍지연(187cm).[4] 이뿐만 아니라 강주희는 비디오 시스템 게임 파워 스파이크에서 한국 선수 6명 중 한 명으로도 나왔다. 나머지 5명은 임혜숙, 김미숙, 지경희, 김경희, 남순옥이다.[5] 당시 대통령배 배구대회는 서울에서 시작하여, 부산, 대구, 광주, 대전을 필수로 하여 수원, 마산, 전주를 돌았고, 심지어는 목포, 제주, 원주, 포항에서도 개최되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마무리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농구대잔치도 마찬가지였다.[6] 프로리그 출범 전에는 천안, 인천, 구미, 의정부, 안산은 아예 들어가지도 않았다.[7] 서브 득권제 방식은 서브권을 가진 팀이 공격을 성공하거나, 서브 에이스, 상대 범실 등으로 랠리가 종료되면 다시 서브권을 가지면서 1점을 득점하는 방식이다. 만일 반대의 상황이 되면 상대에게 서브권이 넘어간다. 그리고 서브 권한을 가진 상태에서 공격에 성공해야 1점을 얻기 때문에 계속 양쪽으로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면 점수 변동 없이 무한한 경기를 하게 된다.[8] 더구나 두 팀이 하위권을 전전하던 팀이었으니 지상파 방송도 안 나갔고, 기자들로부터 인지도가 없어서 구체적 상황을 알 수 없다.[9] 노태우 정부 시절이다. 그 때는 그 유명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대적으로 범죄자들을 소탕하고 있었다.[10] 훗날 IBK기업은행 감독으로 부임하는 그 분 맞다. 이정철 코치는 1994년 효성 배구단이 미도파 배구단을 흡수 통합할 때 팀을 떠나 호남정유 코치로 자리를 옮겼고 이 때 효성 소속 세터 김귀현을 같이 데리고 갔다.[11] 특히 이상열 감독은 배구계 학교폭력 폭로 사건이 터진 후 2021년 2월 17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무슨 일이든 인과응보가 있다”며 폭력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했는데, 당연히 박철우는 자신의 SNS에 '''정말 피꺼솟이네...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느낌이 이런 것인가'''라고 글을 남기면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이게 끝이 아니라 박철우는 이후 OK금융그룹과의 경기를 마치고 기자 회견을 열더니 '''이상열 감독은 고등학교 지도자 시절부터 폭행을 했으며 그 중에는 기절을 하거나 고막이 나간 선수도 있었다'''고 폭로한다. 결국 이상열 감독은 스스로 잔여 경기에 출장을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시즌을 내려 놓았다.[12] 최숙현의 소속팀 선수들은 물론이고 코칭 스텝까지 집단으로 선수를 구타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