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 네드베드

 

'''파벨 네드베드의 수상 이력 '''

'''Juventus Football Club S.p.A.'''
''' 이름 '''
'''파벨 네드베트[1]
Pavel Nedvěd'''
''' 출생 '''
1972년 8월 30일 (52세) /
체코슬로바키아 헤프(cheb)
''' 국적 '''
체코
''' 신체 '''
177cm 70kg
''' 주발 '''
양발
''' 직업 '''
축구선수 (좌-우 윙어[2],공격형 미드필더,중앙 미드필더 / 은퇴)
축구경영인
''' 등 번호 '''
유벤투스 FC - 11번
''' 소속 '''
''' 선수 '''
TJ 스칼나 (1977~1985 / 유스)
RH 헤프 (1985~1986 / 유스)
TJ 슈코다 플젠 (1986~1990 / 유스)
VTJ 타보르 (1990 / 유스)
두클라 프라하 (1990~1991 / 유스)
두클라 프라하 (1991~1992)
스파르타 프라하 (1992~1996)
'''SS 라치오 (1996~2001)'''
'''유벤투스 FC (2001~2009)'''
FK 스칼나 (2018)[3]
''' 경영 '''
유벤투스 FC 기술이사 (2012~2015)
유벤투스 FC 부회장 (2015~)
''' 국가대표 '''
91경기 18골 (체코 / 1994~2006)
1. 소개
2. 선수 경력
2.1. 클럽
2.2. 국가대표
3. 은퇴 후
4. 플레이 스타일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남자를 울리던 남자
7. 이야깃거리
9. 네드베드에 대한 말, 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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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image]

'''"피치에서는 기력이 다할 때까지 계속해서 달릴 것이다."'''

'''나는 하루에 12시간을 연습했고, 두 다리 중 어느 한 다리가 우월하지 않다고 느꼈을때 처음으로 희열을 느꼈다.'''

네드베드의 인터뷰 中[4]

체코의 前 축구선수이자, 현재는 유벤투스 FC 구단의 부회장. 애칭은 '''네디'''.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 데이비드 베컴과 함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중반을 대표하는 미드필더로 꼽혔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네드베드는 자국 리그의 두클라 프라하에 프로 데뷔하여 1년만에 체코 리그 명문인 스파르타 프라하로 이적, 서서히 네임밸류를 쌓아가며 체코 리그에서 우승 3회, 체코컵 우승 1회를 차지했고, UEFA 유로 1996에서의 임팩트 강한 플레이를 펼쳐, 각국의 명문 클럽들이 떠오르는 신성 네드베드에게 잇따른 러브콜을 날렸고, 구애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세리에 ASS 라치오가 그를 채가는 데 성공한다. 이를 계기로 네드베드는 이탈리아 리그에 정착하며 오랫동안 뛰게 된다. 네드베드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고, 이듬해 라치오는 1997-98 시즌 코파 이탈리아에서 AC 밀란을 격파하고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또한 UEFA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어쨌든 24년 만의 트로피를 들어올린 라치오는 기세를 몰아 더욱 몸집 불리기에 나섰고, 라치오 구단의 과감한 투자는 '''그 당시에는'''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네드베드는 1998-99 시즌에도 맹활약을 하는데 UEFA 컵 위너스컵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며 결승 진출을 이끌었고, 결승전에서 RCD 마요르카와 1:1 팽팽한 승부를 펼치고 있을 때 네드베드는 81분 결승골을 넣으며, 우승을 이끌었다.
1999-00 시즌에는 네드베드는 31경기에 출전해 9골을 넣었고, 유벤투스를 승점 1점 차로 따돌리고 스쿠데토를 차지했다.[5] 또한 인터 밀란과의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 네드베드는 선제골을 넣으며 합산 스코어 2:1로 승리, 더블을 달성한다.
하지만 라치오의 재정난으로 인해 라치오를 떠나는데, 2001-02 시즌을 앞두고 팀의 에이스였던 지네딘 지단이 팀을 떠나자 다급해진 유벤투스 FC는 그의 대체자로 네드베드를 SS 라치오에서 모셔오는 데 성공한다.[6][7]
그도 과연 사람인지라 팀을 옮긴 직후는 제법 부진한 모습을 보였었고, 그냥 우주괴수 그 자체였던 지단의 향수를 그리워한 사람들은 네드베드가 잠시 부진하자 신랄하게 까기에 이른다.[8] 그러나 잠시 숨고르기를 마친 후 곧이어 지단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자신만의 플레이를 보여주기 시작했고, 세리에 A 2연패에 공헌했고, 2002-03 시즌 때 유벤투스를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까지 이끌었다.
하지만 4강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멋진 중거리골을 넣었지만, 경고 누적으로 결승전에 출전하지 못했고, 유벤투스는 승부차기에서 AC 밀란에게 패했다. 네드베드는 이 맹활약으로 UEFA 클럽 올해의 미드필더 상과 2003년 발롱도르를 수상한다.[9]
그 후 칼치오폴리 사건으로 유벤투스가 우승 박탈 및 2부리그로 강등되자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파트리크 비에라 등을 위시한 대부분의 동료들이 팀을 떠날 때, 확고부동한 주전이었던 네드베드에게도 역시 수많은 빅 클럽들의 오퍼가 따랐다. 그 때, 이 사람은...

'''나는 녹색 잔디만 있다면 세리에 A든 B든 상관없다. 이제부터 세리에 B는 나의 챔피언스리그가 될 것이다.'''
'''나는 유벤투스의 팬들이 준 사랑에 보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내겐 팀 내 최연장자로서 어린 선수들에게 경험을 전수해줄 의무가 있다.'''
'''유벤투스는 항상 최고의 자리에 있어야 하고, 그걸 돕는 것이 내가 할 일이며, 내가 유벤투스에 있어야 할 이유다.'''

라는 간지폭풍의 대사를 날려주며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잔루이지 부폰, 다비드 트레제게 등과 함께 유베에 잔류했다. 게다가 떠나려는 동료들을 설득까지 하는 모습까지 보이며[10] '''충성심의 화신''', '''멘탈甲'''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팀을 1시즌만에 다시 1부로 승격시킨 후에도 2시즌을 더 뛰고, 강등까지 당했던 팀을 다시금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시킨 뒤 선수인생에 마무리를 고했다.

2.2. 국가대표


네드베드는 UEFA 유로 1996에서 말 그대로 미친 듯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약팀이라고 평가받던 체코를 유로 결승전 무대까지 끌고 간 것. 독일과의 개막전에서 공격적인 부분의 결함을 드러냈지만, 수비적인 부분에서 맹활약했고, 이탈리아와의 2차전에서 선제골을 넣어 2:1 승리를 이끌었다.
네드베드는 경고누적으로 8강 포르투갈전에 결장했으나, 체코는 4강 진출에 성공했고, 4강전에서 네드베드는 승부차기 때 2번째 키커로 나와 성공시켰고, 결국 프랑스를 물리치고 결승 진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독일과의 결승전에서 올리버 비어호프에게 골든 골을 허용해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UEFA 유로 2004에서 네드베드는 골은 넣지 못했지만 밀란 바로시, 얀 콜러와 합을 맞추며 맹활약한다.
체코는 라트비아네덜란드를 힘겹게 잡아냈으며 독일과의 최종전에서는 네드베드를 비롯한 9명의 선수가 휴식을 취했음에도 2:1로 승리하며 8강 진출에 성공한다.
체코는 덴마크를 3:0으로 대파했지만, 4강전에서 그리스에게 연장 혈투 끝에 패한다.(전반전에 부상으로 네드베드가 교체된 이후 체코는 미드필더에서부터 힘을 잃어갔으며 결국 그리스의 한방으로 인해 패배한다. 네드베드가 계속 뛰었다면 어떤결과가 나왔을지 궁금해지는 부분이기도 한데 유로2004 당시 네드베드의 활약은 대단했다)
EURO 2004 이후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였으나 2006 FIFA 월드컵 독일 예선에서 네덜란드에 밀려 2위로 직행을 하지 못한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었고 그동안 네드베드가 없는 체코 대표팀은 이전만 못한 공격력으로 부진하자 매번 네드베드의 복귀를 당시 체코 축구협회 와 카렐 부뤼크너 감독 팬들까지 복귀를 원했지만 그떄마다 네드베드는 고사했지만 최종적으로 노르웨이 와의 플레이오프로 월드컵 진출 티켓이 걸려있자 조국을 위해 한시적으로 복귀를 선언했고 노르웨이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 과 2차전 모두 출장하면서 맹활약 끝에 노르웨이를 두번모두 1:0으로 제압하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슬로바키아와 분리후 처음 출전권을 획득하였고 네드베드의 공로가 굉장히 컸다. 네드베드는 플레이오프 후로 월드컵 진출권을 획득했으니 다시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지만 월드컵 티켓을 획득했기에 이제는 월드컵 출장까지 요구했고 네드베드 또한 월드컵 출전을 한적이 없기에 마침내 2006 독일 월드컵 출전을 선언하였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미국을 상대로 3:0 완승을 거두나 이후 가나, 이탈리아에게 모두 0:2로 패하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가나와의 2차전에서 동점골을 넣었으나 옵사이드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일부 축구팬들은 옵사이드가 아니라고 당시 반박 하기도 했었다. 이후 조별리그 마지막 3차전 이탈리아전에서 고군분투하며 몇차례 슛팅도 했지만 부폰의 선방에 막힌다.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 무대였고 이후 국가대표를 은퇴하게되는데 이후 체코대표팀은 하락세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2006 월드컵이 끝난 직후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3. 은퇴 후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 전향하지 않고 유베보드진으로 활동 중이다.[11]
그런데 2017년 9월 22일 그는 자국의 아마추어 팀 FK 스칼나와 현역 계약을 했다! 이 팀에는 자신의 아들이 현역으로 선수 생활을 하고있다.
하지만 네드베드는 유벤투스의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구단도 이 부분을 알고 출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계약 후 경기에서 뛴 적은 없다.

4. 플레이 스타일



어렸을 때부터 노력의 화신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컸으며, 원래 오른발잡이였으나 양발을 자유자재로 쓰기 위해 코치가 질릴 정도로 미친 듯이 노력했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동시에 부유하지 않았던 집안 사정으로 집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연습장을[12] '''뛰어서''' 다니다 보니 '''흠좀무한 체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도 유명한 백그라운드 스토리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유벤투스가 지네딘 지단을 보내고 그의 공백을 전혀 느끼지 못 하게 했던 최고의 선수.[13]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양발잡이라면 정말 성가시기 그지없는 타입인데, 그걸로 끝이 아니고 경기 다 끝나가는 시점 다들 혀 빼물고 늘어지려는 시간대에 이르러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경기장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네드베드를 상대하는 입장이 되어 보면 그야말로 환장할 지경이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네드베드는 박지성이 '''두 개의 심장'''이라 불리기 이전에 이미 '''두 개의 심장, 세 개의 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선수다.
분명 골키퍼 바로 앞까지 내려와서 윙어의 드리블 돌파를 차단하며 수비가담을 하고 있던 선수가 1분도 지나기 전에 크로스를 올리고 있거나 반대로 상대 진영 골 포스트 앞에서 헤딩 경합을 하고 있다, 공격 상황에서도 상대 수비진을 혼돈의 도가니로 밀어 넣는다. 오른쪽에서 오른발로 크로스 올리던 선수가 잠깐 카메라 돌아간 사이 왼쪽에서 나타나 크로스 올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미친 활동량을 자랑하는 선수가 '''테크닉까지 세계 정상급이었다.''' 그의 이런 미친 활동량에 수비들이 지쳐 나가떨어져 마크에 실패하면 곧바로 중앙으로 파고들어 특유의 정밀하면서도 대포알 같은 중거리슛을 때리던 선수다. 그는 당대 지단, 베르캄프와 함께 퍼스트 터치와 볼 트래핑에 있어 최정상급이었으며 네드베드의 크로스 역시 베컴 피구 긱스 등 당대 내로라하는 윙어들과 함께 최정상급이었고 델피에로와 함께 프리킥을 번갈아 찰 정도로 킥력 역시 세리에 A를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을 논했다. 이런 선수가 화려하진 않지만 실속있고 부드러운 드리블로 수비진을 해집는다.
네드베드의 주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이지만 유벤투스에서 윙어로 출전했을 때는 중앙 미드필더 시절만큼 아주 훌륭했던 것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훌륭했던 선수였고 윙어임에도 수비력까지 절륜했던 선수다. 지단과 함께 축구라는 종목에서 필요한 모든 스킬을 완성형으로 구사했던 선수. 이런 사기적인 능력으로 윙어들의 무덤이라는 세리에 A에서 '''측면의 지배자'''라고까지[14] 불리며 상대팀 사이드라인을 초토화시켰다.[15]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걸 정말 효율적으로, 그리고 온몸을 불살라 가며 사용할 줄 아는 남자였다. 30대 중반에 이르러서도, 은퇴하는 시즌에까지 그 플레이스타일은 변함이 없었으니 이건 뭐…네드베드는 36세의 나이로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12.66km를 뛰며 챔피언스 리그에서 활약한 모든 선수들 중 가장 많이 뛴 선수로 랭크되었다.[16]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2003
  • UEFA 올해의 미드필더: 2002-03
  • UEFA 올해의 팀: 2003, 2004, 2005
  • UEFA 올해의 궁극적인 팀: 2015[17]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2004
  •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2002-03
  • 세리에 A 올해의 외국인 선수: 2002-03
  • FIFA 100: 2004
  • 구에린도르: 2002-03
  • 체코 올해의 축구 선수: 1998, 2000, 2003, 2004
  • 체코 올해의 운동 선수: 2003
  • 즐라티 미치[18]: 1998, 2000, 2001, 2003, 2004, 2009
  • 유벤투스 역대 베스트 XI: 2017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2003
  • ESM 올해의 팀: 2000-01, 2002-03
  • 골든풋: 2004

6. 남자를 울리던 남자


[image]
이 사진 한 장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2002-03 챔피언스리그 4강전 vs 레알 마드리드. 지단 VS 네드베드로 엄청난 설레발을 모았던 이 맞대결에서 승리한 팀은 유벤투스였으나 네드베드는 기뻐할 수 없었다. 팀의 승리를 확정짓는 쐐기골까지 박아넣었음에도 한순간의 실수로 경고를 받아 경고누적으로 결승전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고, 그가 빠진 유벤투스는 결승전에서 AC 밀란에게 승부차기까지 간 접전 끝에 패배하고 만다. 선수 본인도, 팬들도 '''"그 때 네드베드만 있었다면…"''' 하며 몹시도 아쉬워했고, 위의 사진처럼 그라운드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던 네드베드의 모습을 본 팬들은…'''네드베드도 울고, 팬들도 울고, 하늘도 울고, 나도 울었다.'''[19]
이 일 후에도 비슷한 일이 또다시 일어났는데, UEFA 유로 2004에서 체코가 준결승[20]까지 전승으로 올라갔음에도 이번에는 준결승 도중 '''부상'''으로 교체아웃되었고[21] 그가 빠진 체코는 또다시 연장까지 갔다가 패배하고 만다.[22]
한편, 유로 2004 이후 체코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으나 2006 월드컵을 앞두고 체코가 지역예선에서 원체 죽을 쑤자 백의종군을 선언하며 복귀, 플레이오프 끝에 간신히 체코를 본선까지 이끌었으나 체코미국전에서 3:0으로 승리한 후 가나이탈리아전에서 2연패를 당해 16강 능선을 넘지 못하고 탈락하게 된다. 그러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필드를 종횡무진하던 네드베드의 모습은 수많은 축구팬들의 눈물을 뿌리게 만들었다. 오오 네디옹 오오...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이 됐다. 대회 이후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으며, UEFA 유로 2008이 다가오자 체코 국가대표팀 복귀를 요청받았지만 거절하였다.
네드베드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후덜덜할 정도의 멘탈인데, 위에 상술한 대로 칼치오폴리 사건이 터진 직후에도 팀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오히려 떠나가던 동료들을 붙잡으려까지 하며 팀을 지켰던 모습에 반해버린 축구팬들이 부지기수다. 경기가 끝나가던 말던 방금 시작한 것처럼 미친 듯 뛰어다니던 그의 플레이 스타일도 그런 멘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은퇴한 후에도 유벤투스에서 프런트로 일하고 있다. 2013년 인터뷰.

7.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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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인의 이름이 이바나(Ivana)인데, 아들딸의 이름도 자신들의 이름을 따서 파벨과 이바나이다(...). 이유는 자신들이 세상을 떠나도 파벨 & 이바나 네드베드가 이 세상에 남아있게 하고 싶어서라고. 한동안 네드베드의 딸 이바나라고 알려졌던 사진이다. 하지만 실제 네드베드의 딸 이바나는 눈썹이 안 보일 정도로 밝은 금발인데다가 외모도 어릴 때 부터 통통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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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네드베드의 딸 이바나와 아들 파벨의 모습이다.
2009년 네드베드의 은퇴식때 찍힌 그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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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많은 사람들에게 미스터리로 남아있다가 결국 2014년 유벤투스가 우승 세레머니를 할 때 찍힌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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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모습. 성인이 되며 그녀의 인스타그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 선수에서 은퇴한 지금은 유벤투스에서 기술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2년에 걸쳐 페라라에 이어 델 네리 감독이 유벤투스를 제대로 말아먹자 매우 분노한 인터뷰가 알려져 네드베드 본인이 감독으로 오는 것 아니냐 하는 설레발이 제기되었으나 정작 감독은 또다른 유벤투스의 레전드 선수인 안토니오 콘테로 결정. 다행히도 콘테는 유벤투스를 세리에 최강 팀으로 부활시키는데 성공하고 유벤투스를 떠났다.

  • 네드베드 은퇴, 카모라네시 방출 후 유벤투스의 윙어진은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이다. 10-11시즌 공수해 온 밀로스 크라시치가 포지션은 오른쪽 윙으로 다르지만 그 공백을 훌륭하게 메워주는 듯 했다. 유럽시장에서 꽤나 주목받았고 찰랑이는 금발머리에서부터 얼굴 생긴 것까지 은근히 네드베드를 닮았기에 팬들이 크게 기대하였다. 하지만 윙어의 무덤이라는 이명이 보여주는 세리에 A의 두터운 수비 및 경기내내 다채로운 수비전술에 돌파 및 드리블 패턴이 너무 단조로운 크라시치의 개인능력은 초반 몇경기 반짝후 대처법을 발견한 감독 및 수비수들에게 읽혀서 결국 부상 크리가 뜬 후 주전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났고, 11-12 시즌 복귀 후에도 몇 경기 못 뛰고 다음 시즌 페네르바흐체 SK로 이적했다. 그렇기에 전반기뿐이었지만 그래도 10-11시즌 막장테크의 유벤투스를 먹여살린 몇 안 되는 청년가장 중 한 명이었음에도 페짜델의 77시절을 근성으로 버틴 유베팬들이 지에구를 그리워하면 그리워했지 크라시치는 딱히 그리워하지 않는다.
  • 그 후 11-12 무패우승 시즌에 오른쪽 윙어로 시모네 페페가 각성하며 '페날두'란 별명을 얻고 좋은 활약을 보여줬지만...12년 8월 왼쪽 허벅지에 부상이 생기더니 수술을 계속 했음에도 부상이 1년 반이 넘도록 재발하며 제대로 복귀하지 못 하고 있으며 은퇴설까지 돌고 있다. 끝내 쓸만한 윙 자원이 없어지자 콘테는 11-12시즌 후반기부터 쓰던 3-5-2를 주 전술로 정착시켰고 계속 사용하고 있으며 제 2전술로 쓰려는 4-3-3은 뭔가 아쉽다.
  • 유벤투스의 핵심 중 핵심인 사람이라 인테르에 매우 적대적이다. 하비에르 사네티를 제외하고는 인테르의 모든 것이 싫다고 할 정도. 혐오 대상에서도 빠지는 사네티의 위엄을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인테르의 트레블 직전 시즌, 유벤투스는 한창 암흑기를 걷던 와중 무리뉴 감독이 UCL에서 우승시켜준다며 네드베드에게 직접 인테르로 오라고 권유했으나 단칼에 거절하며 "무리뉴를 따라 세계 어느 클럽으로 갈 수 있지만, 인테르는 아니다" 라는 근본넘치는 말을 남겼다.
  • 네드베드가 무려 23세 연하의 연인과 불륜관계로 이혼을 준비 중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그러나 출처가 찌라시가 많기로 유명한 스페인의 아스인데다가, 딸 이바나와 아들 파벨 주니어의 인스타그램에는[23] 변함없이 다정다감한 부부관계를 자랑하는 사진이 올라오고 있다. 아무래도 호날두 노쇼 사건 직후 감정이 많이 안좋은 상태이다 보니 이런 흔한 찌라시까지 언론에서 보도한 것으로 보인다.

8. 팀 K리그 VS 유벤투스 FC 관련 논란


2019년 7월 26일 팀 K리그 VS 유벤투스 FC 친선경기가 열러 선수단에 따라 방한했다. 하지만 사실상 친선경기의 주인공이었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1초도 출전하지 않으면서 유벤투스가 계약을 위반한 셈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관중석에 있던 네드베드는 대행사의 대표 로빈 장이 항의하자 "코치도 선수도 그 계약을 알지만 선수가 그냥 뛰기 싫단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라고 했다는 게 알려져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네드베드는 호날두가 사인회도 멋대로 불참했을 때 부폰 등 일부 선수와 함께 내려와 본인이 대신 사인을 해줬고, 항의했을 당시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는 등 할 수 있는건 정말 다 했다. 서호정 기자 역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서 네드베드가 호텔에서부터 엉망진창이 된 상황을 풀기 위해 유일하게 동분서주하며 열심히 뛰어줬는데 역부족이었다고 안타까워했다. 한편 만약 주최 측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유벤투스의 레전드, 그것도 델피에로 수준으로 언터쳐블인 올타임 레전드이자 한 클럽의 부회장이 이적한지 고작 2년된 선수 한명의 변심도 컨트롤 못하고 휘둘릴 정도로 구단의 기강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이 되므로 국내 유벤투스 팬덤 역시 애초에 이 모든 사단을 만들어서 클럽을 욕먹인 호날두에게 다시 한번 크게 분노하고 있다. 더페스타 측의 언급에 따르면 뒤늦게 연락을 받은 유벤투스 관계자는 이 일에 대해 구단의 수치라며 사과하고 29일에 긴급 회의를 소집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다만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아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경기 시간을 단축하자는 무례한 주장을 한 사람이 바로 본인'''인 게 밝혀져 다시금 논란에 불을 지폈다. 앞서 유벤투스는 지각에도 모자라 경기시간과 하프타임 시간을 단축시키자는 제안을 했고,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현장에서 경기를 취소할수도 있다고 사실상의 협박을 했다는 것이 드러나 갑질 논란이 일어났었는데 그 제안을 한 당사자가 바로 네드베드라는 것이다. 연맹은 이에 공식항의하는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선수 하나가 물을 흐렸다고만 생각했던 국내 팬덤은 이젠 레전드까지 말썽이냐며 한탄하는 중이며 국내 유벤투스 팬사이트인 유베당사에서도 엄청나게 까이고 있다. 이에 실망한 팬들이 네드베드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여줬다고 증언한 서호정 기자를 비난하는 해프닝도 있었다.[24]
그러나 이 사실은 시간이 지나며 로빈장의 당시 발언 등을 토대로 발췌된 기사로 다소 악의적인 날조가 아니냐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로빈장은 사건 당시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잘못을 상황을 외면하고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여왔기에 이번에도 그저 네드베드에 대한 책임전가성 발언이 아니었냐는 것이다. 실제로 네드베드 협박설은 근거도 부족하고 서호정 기자가 언급했듯이 사건 당시 네드베드가 팬들을 응대하는 자세나 사태 해결을 위해 보여준 태도와도 상당히 달랐기에 호날두와 달리 사건 초기 만큼의 비난은 받지 않고있다. 아직까지 호날두를 싫어하는 분위기가 매우 짙은 유벤투스 팬들 사이에서도 네드베드는 까이지 않고 있고 네드베드로 인해 탈덕을 선언한 사람도 매우 적다. 유벤투스 팬들 외의 다른 축구팬들도 호날두 노쇼 사태는 로빈장의 뻥카로 흘러가는 분위기 속에서 네드베드의 협박설도 뻥카로 여기고 있다.

9. 네드베드에 대한 말, 말, 말


[image]

'''나는 매일 지옥과 같은 트레이닝을 요구했다. 베론을 비롯한 모든 선수들이 파리처럼 쓰러져나갈 때, 오직 그만이 운동장에 서 있었다.'''

스벤예란 에릭손

'''현대 축구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선수는 다름아닌 네드베드이다. 그와 같은 선수는 없다. 그는 절대 멈추는 법이 없다.'''

마르첼로 리피

'''그는 내가 만나본 선수 중에 가장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네드베드는 팀 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한 시간 동안 혼자서 사이클을 탔고, 훈련이 끝나면 다시 한 시간 동안 혼자서 조깅을 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의 소유자로 여간해서는 중간에 나오는 경우가 없었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자서전 '''나는 즐라탄이다''' 中

('이제 최고의 미드필더다.'라고 말하는 기자들에게)

'''네드베드가 은퇴했던가요?'''

카카

[1] /ˈpavɛl ˈnɛdvjɛt/, 실제 발음은 '네드비에트'에 가깝다.[2] 유벤투스에서 주로 4-4-2 포메이션에서 왼쪽 윙어로 뛰면서 매우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선수로, 엄청난 활동량과 뛰어난 킥력, 패스, 크로스 등 킥이 매우 뛰어난 선수였다.[3] 자신의 유소년 시절을 보냈던 스칼나의 창단 1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아들 파벨 주니어(Pavel Jr.)와 함께 1경기 한정 계약했다.[4] 완벽한 양발잡이다. 주발은 오른발.[5] 당시 네드베드와 함께 뛰었던 라치오 스쿼드가 상당히 짱짱하다. 에르난 크레스포, 크리스티안 비에리, 알레산드로 네스타,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데얀 스탄코비치 등등. 이 때의 세리에 우승을 가볍게 볼 수 없는 게, 당시 세리에는 흔히들 말하는 '''7공주'''시대였고, 지금의 뭔가 나사 하나 빠진듯한 세리에와는 격이 다른, '''챔스 우승보다 세리에 우승이 더 어렵다'''는 말까지 나오던 시기였다. [6] 유벤투스는 이때 지단을 판매한 돈으로 라치오에서 네드베드를 사오고 파르마에서 잔루이지 부폰릴리앙 튀랑을 사왔다.[7] 그리고 네드베드를 이적시킨 라치오는 발렌시아에서 가이즈카 멘디에타를 영입했지만...[8] "네드베드가 지단보다 나은 건 머리숱 뿐이다"라는 개드립까지 나왔으니...[9] 다만 해당 발롱도르는 말디니와 앙리가 더 적합하다는 의견이 많을 정도로 논란이 있었다.[10] 즐라탄의 자서전을 보면 새로 부임한 디디에 데샹 감독이 그를 설득하려 면담했을때 그에게 압박을 주려는 목적이었는지 이미 잔류를 선언한 네드베드도 같이 왔었다고 한다. 비록 즐라탄이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은 상태라 별 효과는 없었지만.[11] 비슷한 케이스로는 에드빈 판데르사르가 있다.[12] 연습도 항상 연습장의 불이 꺼질 때까지 했다고 한다.[13] 그렇지만 두 선수의 스타일은 확연히 다르다. 지단이 그야말로 아트사커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우아한 축구를 보여줬다면 네드베드는 숫사자 그 자체로 온 경기장을 뛰어다니며 휘젓고 다니던 스타일.[14] 세리에의 팀들은 전형적인 형태의 윙어를 선호하지 않는다. 측면은 풀백이나 윙백들에게 전임시키는 경향이 강한 편. 이탈리아 선수들중 기라성 같은 풀백들이 넘쳐나는것도 다 이러한 사실 덕분.[15] 사실 전통적인 윙어라고 하기보단 하프윙이나 왼쪽 측면에 배치된 프리롤 플레이 메이커에 가까웠다. 라치오 시절엔 대부분 중앙에 배치되었으나 유벤투스 이적 이후엔 대부분 4-4-2의 왼쪽에 배치되었다.[16] 미친 듯한 활동량을 기반으로 경기장을 갈아엎는다는 점에서 박지성과 플레이스타일이 비슷하다는 말이 있으며, 혹자는 박지성의 궁극적인 진화형이 네드베드라는 평을 내린다. 그래서 한때 디씨등지에서 (반은 비아냥으로) 박지성을 박드베드라 불렀고 심지어 네드베드에 박지성을 합성한 박드베드(...) 짤방도 돌아다녔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 결과적으로 박지성은 부상 이후 PSV시절 보여줬던 공격력 포텐셜이 감소한 대신 네드베드 같은 팀의 에이스를 지원하고 시너지를 끌어올리는데 특화된 수비형 윙어로 정착했다.[17] 2군[18] Zlatý míč(황금공)[19] ...라고 쓰여있어서 네드베드가 굉장히 억울하게 경고를 받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명백히 경고당할만한 백태클이였다. 네드베드 본인이 카드관리를 못한 것일뿐. 사진만 봐도 어필할 시도도 안하는걸 보면...[20] 상대는 유로 2004에서 우승한 그리스.[21] 교체 후 벤치에서 낙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22] 골든 골 제도를 폐기하는 과도기적 조치였던 실버골 제도의 피해자가 되고말았다. 연장전반 종료 10초 전 골을 내주며 그대로 경기가 끝났다.[23] 네드베드 본인은 SNS를 하지 않는다.[24] 다만 서호정 기자가 이후 해명문을 올려 설명하길, 자신이 호텔에서 목격했던 팬들을 응대하는 네드베드의 모습만큼은 진심이 느껴졌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