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제너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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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축구계의 손꼽히는 명문 AC 밀란의 최전성기인 1988~96년까지의 시절을 일컫는다. 멤버를 보면 갈락티코스 레알 마드리드 CF나 드림팀 FC 바르셀로나와 비견되는 이름값과, 그에 걸맞는 성적을 보여주었다. 한 마디로 밀란의 최고 리즈 시절.
1980-90년대는 베를루스코니가 신흥 언론 재벌, 2000년대에는 정치 생명이 아직 살아있는지라 대규모 투자를 자주 감행하면서 지금의 맨시티, 바르셀로나[1] , 맨유, 첼시, 레알 마드리드를 능가하는 쇼미더머니를 보여주었다.
2007년 월드 사커에서 선정한 '''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 TOP 10에 클럽 팀으로는 유일하게 5위 안쪽에 선정[2] ''' 되었다. 그 위로는 펠레가 이끌던 1970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요한 크루이프가 이끌던 토탈 풋볼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1950년대를 풍미한 페렌츠 푸스카스가 이끌던 매직 마자르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이 있다.
이때 밀란의 맴버는 그야말로 호화 그 자체인데, 단순히 어느 시대에나 있을 당대 A급 선수들을 모아둔 클럽이 아니였다. 대표적으로 마르코 판바스턴은 아직까지도 역대 최고의 수준의 스트라이커[3] 로 꼽히고, 루드 굴리트는 육각형 만능 선수로 올타임 넘버원에 꼽힌다.[4] 프랑크 레이카르트의 경우 역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5] 로, 파올로 말디니는 역대 최고의 레프트백[6] 으로, 프랑코 바레시는 역대 최고 수준의 센터백[7] 으로, 아직까지도 각 포지션에서 최고로 꼽히는 선수들이 득실득실한 그야말로 완전체 팀이였던 것. 끝판왕으로 아리고 사키 감독은 역대 최고의 감독 중 한명으로 꼽힌다. 뒤를 이은 파비오 카펠로 감독은 부임 첫 해에 무패 우승 달성.
근 몇년 사이에는 최고의 임팩트를 보여주던 펩의 바르셀로나와 밀란 제너레이션이 종종 비교된다.[8] 펩 과르디올라 당시의 티키타카는 21세기 초 세계 축구의 정상에 있었고[9] , 아리고 사키의 압박 축구는 현대 축구의 뿌리라 평가받는지라 어느 팀이 강한지는 유명한 VS놀이의 떡밥 중 하나이다.
다만, 당시 AC 밀란에게는 바로 그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끌던 SSC 나폴리를 포함한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는데도 챔피언스 리그 2연패와 세리에A 리그 무패 우승을 이끌어냈다는 점, 펩의 바르셀로나가 지배한 라리가는 레알 마드리드 CF를 제외하고는 상대적 약체팀들로 구성됐다는 점은 두 팀을 비교시 밀란에게 유리하게 작용된다. 당시의 세리에 A는 지금의 EPL 이상의 경쟁구도였고, 챔스 2연패 당시 밀란은 우승만 못했을 뿐, 리그 3위, 준우승을 기록하며 좋은 성과를 내기도 하였고 그와중에 아예 무패 우승까지 달성해버렸다. 하지만 당시 펩의 바르셀로나 역시 챔스에서는 여러 강팀을 때려 부수며 빅 이어를 들었고, 두 팀이 활동하던 시기적 간격이 커서 순위를 매기는 건 큰 의미는 없다.
더군다나 자국 상위권 클럽들 조차 소위 7공주라 불리는 1990년대 말-2000년 초반 세리에 A보다 더욱 강력하여 유럽 대항전인 UEFA 챔피언스 리그, UEFA컵, UEFA 컵 위너스컵에서 온갖 강팀들을 박살내고 우승 트로피를 휩쓰는 최전성기여서 임팩트가 더욱 강력했다.[10] 특히 클럽 월드컵의 전신인 도요타 컵에서는 그야말로 깡패 모드로 군림하면서 일본 축구계에 큰 충격을 안겨줌과 동시에 이탈리아 리그를 열렬히 지지하는 결과로 발전하였다. 실제로 일본에선 몰락했지만 현재도 세리에 A, 나아가 밀란의 팬덤이 어마어마하다.
지아니 리베라 은퇴 이후 1979-80 시즌이 끝나고 구단주 펠리체 콜롬보의 라치오전 승부조작 일명 토토나로 승부조작 스캔들이 발각되어 라치오와 함께 동반으로 세리에 B로 강등된다. 물론 구단주 또한 축구계에서 영구 퇴출된 것은 덤. 1980-81시즌 세리에 B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1981-82시즌 세리에 A로 1년만에 복귀하지만 이번에는 '''실력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당시 주전이였던 선수들이 전부 떠나는 시기에 프랑코 바레시, 알베리고 에바니등은 묵묵히 팀을 지키면서 서포터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얻는다.
실력으로 강등된 1982-83시즌을 세리에 B 우승으로 장식하고 다시 세리에 A로 복귀하지만 주축 선수들의 이탈 및 승부조작의 여파로 인한 재정난으로 죽을 쑤다 결국 팀이 파산위기에 몰렸고, 당시 신흥 언론재벌이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팀을 인수했다.
참고로 파팽은 챔스 때문에 밀란에 왔는데 이적한 년도에 전 소속팀이 우승해버린 기이한 경험을 했다.[14]
이들 외에도 필리포 갈리, 마우로 타소티, 로베르토 바지오, 조지 웨아 등 각 국가대표팀 및 클럽들의 슈퍼스타들까지 영입하지만 밀란의 성공은 슈퍼스타뿐만 아니라 이 당시 밀란의 황금유스가 그야말로 빵빵터져 주면서 파올로 말디니-프랑코 바레시-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로 이어지는 밀란출신 역대급 수비수들과 알베리고 에바니, 딥 라잉 미드필더의 시초인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17] 등이 기량을 만개하고 활약한다.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중반까지의 기간동안 리그 우승 5회[18] , 챔스 3회 등 축구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오렌지 삼총사의 퇴장 및 주역들의 노화로 1995-96시즌의 유로파 리그에서 실망스런 성적을 거두었지만 그들의 마지막 스쿠데토를 사수하여 유종의 미를 거둔 뒤 카펠로 감독의 레알 마드리드 행으로 인한 사임 그리고 그 다음시즌 15년간 주장직을 수행하며 밀란 역사상 가장 오랬동안 주장직을 역임한 프랑코 바레시 & 밀란의 위대한 철의 백포의 멤버이자 당시 오른쪽 풀백 자리를 담당했던 마우로 타소티 은퇴 및 고질적인 발목 부상으로 인해 2년간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선수 은퇴라는 결정을 하게된 마르코 판바스턴, 그리고 루드 굴리트의 첼시 이적, 로베르토 도나도니의 MLS 진출 등 주요 멤버들의 노쇠화로 인한 은퇴 및 이적으로 인해서 한시대의 최고 존엄 지위를 유지했던 축구 클럽의 역사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 당시 밀란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다른 클럽으로 떠난 유망주로는 파트리크 비에라,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옌스 레만, 에드가 다비즈 등이 있다.
즈보니미르 보반, 올리버 비어호프, 조지 웨아,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레오나르두 아라우주, 세르지뉴로 대표되는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암흑기는 선수들의 이름값과 실력에도 불구하고 확치고 올라온 리그 라이벌들과 위닝 멘탈리티의 부재등으로 1998-1999 시즌에 알베르토 자케로니가 일궈낸 깜짝 리그 우승을 포함해서 1999-2000 시즌 리그 3위를 기록해 챔피언스리그 대회 티켓을 거머쥐었으나 2000-2001시즌에는 리그 6위로 추락했고 그 다음 시즌인 2001-2002 시즌에 다시 반등에 성공 하여 리그 4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1999년에 안드리 셰브첸코와 젠나로 가투소 영입을 시작으로 개혁의 칼을 빼들면서 기존의 즈므니미르 보반, 데미트리오 알베르티니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또한 미국에서 돌아온 도나도니의 은퇴까지 더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세대교체를 하기 시작한다.
밀란 역사상 최악의 먹튀라 평가받는 이브라힘 바[19] , 호세 마리, 하비 모레노, 호케 주니오르[20] 가 이 시절 선수들이다.
일명 New generation. 1996년부터 시작된 팀의 암흑기를 벗어나 2002-2007 동안 유럽을 호령했던 시기로 당시 감독은 카를로 안첼로티이다. 당시 안첼로티는 초보 감독으로 유벤투스를 2년 연속 2위로 이끌지만 이름값과 유벤투스의 오직 우승이라는 기대에 부합하지 못했으며, 라이벌 팀의 레전드라는 이유[21] 로 서포터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밀란 감독 부임 후 2002-03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 코파 이탈리아 우승, 2003-04시즌 세리에 A 우승, 2006-07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견인하며 대표적인 젊은 감독으로 우뚝섰다.[22]
이 시대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선수들은 안드리 셰브첸코, 카카, 클라렌스 세도르프, 안드레아 피를로, 알레산드로 네스타, 필리포 인자기, 젠나로 가투소, 디다, 카푸, 세르지뉴 그리고 말년을 불태우던 말옹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001-02시즌 여름 이적시장이 개장하자마자 베를루스코니는 파산해버린 피오렌티나의 후이 코스타와 마르첼로 리피의 개혁의 일환으로 내쳐진 유벤투스의 필리포 인자기를 사재 7000만 유로[23] 를 풀면서 영입하였고[24] , 이후 인테르에서 영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던 안드레아 피를로와 안드리 셰브첸코와 함께 디나모발 돌풍을 이끌던 카카베르 칼라제 등을 영입하면서 2001-2002 시즌을 4위로 마치면서 지난 시즌만 못한 순위를 기록했지만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2002-03시즌에는 인테르에서 그저그런 활약으로 네라주리에서 쫏겨나다시피 했던 클라렌스 세도르프를 영입, 그 외에도 바르셀로나 에서 히바우두를, 페예노르트 에서 욘 달 토마손을, 라치오의 주장이자 유스 출신인 알레산드로 네스타를 영입하면서 1993-94 시즌 이후 8년만의 챔피언스 리그 6번째 우승 및 코파 이탈리아 통산 5회 우승을 견인하며 다음 시즌에 입게될 유니폼에 코카르다 크리콜로레 패치를 달게됐으나 리그에서는 맹주 유벤투스와 더비 라이벌 인테르에게 밀리며 3위를 기록한다.
2003-04시즌 개막 전 AS 로마에서 맹활약하던 카푸를 영입하고,당시 브라질 축구의 10년 대계를 열어줄 대표적인 유망주였던 카카 등을 영입하면서 드디어 17번째 스쿠데토를 차지하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데포르티보에게 원정 4:1 참패를 당하면서 일찌감치 짐을 싼다.
2004-05시즌에는 야프 스탐, 에르난 크레스포를 영입하면서 말네스카라는 역대급 수비라인과 안드리 솁첸코, 에르난 크레스포라는 막강한 투톱과 그를 받쳐주는 카카, 클라렌스 세도르프, 젠나로 가투소, 안드레아 피를로라는 환상적인 미들진과 그를 받쳐주는 두터운 백업으로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리그에서는 파비오 카펠로가 부임하고 입맛에 맞게 뜯어고친 유벤투스에게[25] ,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이스탄불의 악몽으로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2005-06시즌에는 마르시오 아모로소, 요한 포겔, 크리스티안 비에리, 알베르토 질라르디노, 마렉 얀쿨로프스키, 젤리코 칼라치등을 영입하면서 다시금 기대를 높였으나 크레스포의 대체자로 데려온 비에리의 폭망 등으로 또다시 유벤투스에게 막혀 리그 준우승[26] ,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는 바르셀로나에게 1:0으로 패하고 탈락한다. [27]
이후 마지막을 불태우며 준비한 2006-07시즌은 시작부터가 암울했다. 칼치오폴리로 인한 승점 7점 감점 및, 3차예선부터 참가하게 된 챔피언스 리그 및 안드리 솁첸코의 이적과 대체자로 데려온 히카르두 올리베이라의 대폭망, 월드컵 우승으로 인한 주전 이탈리안들의 부상 및 후유증으로 리그에서는 챔피언스 리그 마지노선인 4위도 간당간당했으나 챔스에서는 카카의 원맨쇼로 16강에서 셀틱을 격파하고, 이후 인자기와 세도르프의 각성으로 [28] 전력상 열세가 점쳐지던 FC 바이에른 뮌헨을 8강에서 원정에서 2:0으로 꺾은 후 4강에서 만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다시 한 번 카카의 맹활약으로 5:3 격파하고 결승전에서 2년전 악몽을 안겨준 리버풀에게 2:1 승리로 설욕하며 다시한번 챔피언스 리그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 한편 리그에서는 겨울 이적시장 신입생 호나우두와 마시모 오또의 맹활약으로 4위를 수성하면서 2007-08 시즌 챔스 티켓을 손에 넣는다.
이 시기에도 항상 성공적인 영입만 있던게 아니라서 크리스티안 비에리, 히바우두, 파브리시오 콜로치니, 요앙 구르퀴프, 리카르도 올리베이라등의 실패작도 많았다.
그 후 밀란은 세대교체 실패와 지나친 주전 선수들의 노예화 및 노쇠화로 인해 2007-2008 시즌에 리그 5위를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3위권 안에는 용케 들었지만 눈이 썩는 예능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그래도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호비뉴, 안토니오 카사노, 이냐치오 아바테, 잔루카 잠브로타, 치아구 시우바 등이 활약한 2010-11시즌엔 리그 우승을 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그 당시에 지금 시점에서도 이해하기 힘든 베를르스코니의 행동이 컸다. 그리고 그 다음 시즌인 11-12 시즌에 끝난 뒤 2012년 여름 이적 시장에서 즐라탄과 치아구 시우바를 PSG에 팔아버린 것. 이후 밀란은 나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밀란의 유명한 경쟁팀인 유벤투스는 이 시즌에 유벤투스가 세리에의 역사적인 리그 무패 우승을 기록하고 3년뒤에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기록하고 그리고 또 다시 2년 뒤에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기록하는 등 좋은 성과를 내었고 이것을 밀란은 옆에서 구경하는 처지가 되었다.
밀란 제너레이션 시절 압권인 기록은 최후의 챔스 2연패도 있으며(2015-17 레알마드리드가 경신) 또한 세계 축구사에서 여덟번째로 긴 58경기 무패 행진 및 1991-92 시즌을 무패우승으로 마무리를 한 대 기록과 더불어 동시기의 또다른 강팀 요한 크루이프 감독이 이끌던 원조 드림팀을 1993-94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4:0으로 개박살낸 것이다. 시즌 전 이미 레이카르트가 이적하여 오렌지 삼총사는 붕괴되었고, 주전들의 줄부상과 경고누적 컨디션 난조 등으로 세간의 예상은 바르셀로나의 완승을 점쳤다. 심지어 요한 크루이프는 경기전 인터뷰에서 "밀란은 공을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드사이같이 형편없는 놈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는 끔찍하게 멍청한 팀이다. 내일은 우리들이 축구 레슨을 시켜주겠다"라는 자신감을 내보였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밀란이 평소 전술[29] 과 달리 맞불작전을 놓는 바람에 준비한 전술이 모두 물거품이 된데다 팀 내부의 균열과 더불어 밀란의 미친듯한 경기력으로 초장부터 밀리기 시작해 전반전에만 마싸로에게 2골을 얻어맞아 패색이 짙어지고, 후반전 사비체비치 1골에다 크루이프 자신이 조롱한 축구 못하는 드사이에게 까지 골을 헌납하면서 4:0 떡실신을 당해 드림팀 해체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만다. 이후 크루이프는 이탈리아 축구계와 수비에 중심을 둔 소위 안티 풋볼[30] 에 커다란 반감을 가지게 된다.
1. 개요
유럽 축구계의 손꼽히는 명문 AC 밀란의 최전성기인 1988~96년까지의 시절을 일컫는다. 멤버를 보면 갈락티코스 레알 마드리드 CF나 드림팀 FC 바르셀로나와 비견되는 이름값과, 그에 걸맞는 성적을 보여주었다. 한 마디로 밀란의 최고 리즈 시절.
1980-90년대는 베를루스코니가 신흥 언론 재벌, 2000년대에는 정치 생명이 아직 살아있는지라 대규모 투자를 자주 감행하면서 지금의 맨시티, 바르셀로나[1] , 맨유, 첼시, 레알 마드리드를 능가하는 쇼미더머니를 보여주었다.
2007년 월드 사커에서 선정한 '''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 TOP 10에 클럽 팀으로는 유일하게 5위 안쪽에 선정[2] ''' 되었다. 그 위로는 펠레가 이끌던 1970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요한 크루이프가 이끌던 토탈 풋볼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1950년대를 풍미한 페렌츠 푸스카스가 이끌던 매직 마자르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이 있다.
이때 밀란의 맴버는 그야말로 호화 그 자체인데, 단순히 어느 시대에나 있을 당대 A급 선수들을 모아둔 클럽이 아니였다. 대표적으로 마르코 판바스턴은 아직까지도 역대 최고의 수준의 스트라이커[3] 로 꼽히고, 루드 굴리트는 육각형 만능 선수로 올타임 넘버원에 꼽힌다.[4] 프랑크 레이카르트의 경우 역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5] 로, 파올로 말디니는 역대 최고의 레프트백[6] 으로, 프랑코 바레시는 역대 최고 수준의 센터백[7] 으로, 아직까지도 각 포지션에서 최고로 꼽히는 선수들이 득실득실한 그야말로 완전체 팀이였던 것. 끝판왕으로 아리고 사키 감독은 역대 최고의 감독 중 한명으로 꼽힌다. 뒤를 이은 파비오 카펠로 감독은 부임 첫 해에 무패 우승 달성.
근 몇년 사이에는 최고의 임팩트를 보여주던 펩의 바르셀로나와 밀란 제너레이션이 종종 비교된다.[8] 펩 과르디올라 당시의 티키타카는 21세기 초 세계 축구의 정상에 있었고[9] , 아리고 사키의 압박 축구는 현대 축구의 뿌리라 평가받는지라 어느 팀이 강한지는 유명한 VS놀이의 떡밥 중 하나이다.
다만, 당시 AC 밀란에게는 바로 그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끌던 SSC 나폴리를 포함한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는데도 챔피언스 리그 2연패와 세리에A 리그 무패 우승을 이끌어냈다는 점, 펩의 바르셀로나가 지배한 라리가는 레알 마드리드 CF를 제외하고는 상대적 약체팀들로 구성됐다는 점은 두 팀을 비교시 밀란에게 유리하게 작용된다. 당시의 세리에 A는 지금의 EPL 이상의 경쟁구도였고, 챔스 2연패 당시 밀란은 우승만 못했을 뿐, 리그 3위, 준우승을 기록하며 좋은 성과를 내기도 하였고 그와중에 아예 무패 우승까지 달성해버렸다. 하지만 당시 펩의 바르셀로나 역시 챔스에서는 여러 강팀을 때려 부수며 빅 이어를 들었고, 두 팀이 활동하던 시기적 간격이 커서 순위를 매기는 건 큰 의미는 없다.
더군다나 자국 상위권 클럽들 조차 소위 7공주라 불리는 1990년대 말-2000년 초반 세리에 A보다 더욱 강력하여 유럽 대항전인 UEFA 챔피언스 리그, UEFA컵, UEFA 컵 위너스컵에서 온갖 강팀들을 박살내고 우승 트로피를 휩쓰는 최전성기여서 임팩트가 더욱 강력했다.[10] 특히 클럽 월드컵의 전신인 도요타 컵에서는 그야말로 깡패 모드로 군림하면서 일본 축구계에 큰 충격을 안겨줌과 동시에 이탈리아 리그를 열렬히 지지하는 결과로 발전하였다. 실제로 일본에선 몰락했지만 현재도 세리에 A, 나아가 밀란의 팬덤이 어마어마하다.
2. 밀란 제너레이션 이전 상황
지아니 리베라 은퇴 이후 1979-80 시즌이 끝나고 구단주 펠리체 콜롬보의 라치오전 승부조작 일명 토토나로 승부조작 스캔들이 발각되어 라치오와 함께 동반으로 세리에 B로 강등된다. 물론 구단주 또한 축구계에서 영구 퇴출된 것은 덤. 1980-81시즌 세리에 B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1981-82시즌 세리에 A로 1년만에 복귀하지만 이번에는 '''실력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당시 주전이였던 선수들이 전부 떠나는 시기에 프랑코 바레시, 알베리고 에바니등은 묵묵히 팀을 지키면서 서포터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얻는다.
실력으로 강등된 1982-83시즌을 세리에 B 우승으로 장식하고 다시 세리에 A로 복귀하지만 주축 선수들의 이탈 및 승부조작의 여파로 인한 재정난으로 죽을 쑤다 결국 팀이 파산위기에 몰렸고, 당시 신흥 언론재벌이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팀을 인수했다.
3. 베를루스코니의 구단주 부임 이후
- 1986-87시즌
- 1987-88시즌
- 1988-89시즌
- 1989-90시즌
- 1990-91시즌
- 1991-92시즌
- 1992-93시즌
참고로 파팽은 챔스 때문에 밀란에 왔는데 이적한 년도에 전 소속팀이 우승해버린 기이한 경험을 했다.[14]
- 1993-94시즌
- 1994-95시즌
이들 외에도 필리포 갈리, 마우로 타소티, 로베르토 바지오, 조지 웨아 등 각 국가대표팀 및 클럽들의 슈퍼스타들까지 영입하지만 밀란의 성공은 슈퍼스타뿐만 아니라 이 당시 밀란의 황금유스가 그야말로 빵빵터져 주면서 파올로 말디니-프랑코 바레시-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로 이어지는 밀란출신 역대급 수비수들과 알베리고 에바니, 딥 라잉 미드필더의 시초인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17] 등이 기량을 만개하고 활약한다.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중반까지의 기간동안 리그 우승 5회[18] , 챔스 3회 등 축구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오렌지 삼총사의 퇴장 및 주역들의 노화로 1995-96시즌의 유로파 리그에서 실망스런 성적을 거두었지만 그들의 마지막 스쿠데토를 사수하여 유종의 미를 거둔 뒤 카펠로 감독의 레알 마드리드 행으로 인한 사임 그리고 그 다음시즌 15년간 주장직을 수행하며 밀란 역사상 가장 오랬동안 주장직을 역임한 프랑코 바레시 & 밀란의 위대한 철의 백포의 멤버이자 당시 오른쪽 풀백 자리를 담당했던 마우로 타소티 은퇴 및 고질적인 발목 부상으로 인해 2년간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선수 은퇴라는 결정을 하게된 마르코 판바스턴, 그리고 루드 굴리트의 첼시 이적, 로베르토 도나도니의 MLS 진출 등 주요 멤버들의 노쇠화로 인한 은퇴 및 이적으로 인해서 한시대의 최고 존엄 지위를 유지했던 축구 클럽의 역사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 당시 밀란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다른 클럽으로 떠난 유망주로는 파트리크 비에라,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옌스 레만, 에드가 다비즈 등이 있다.
4. 암흑기
즈보니미르 보반, 올리버 비어호프, 조지 웨아,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레오나르두 아라우주, 세르지뉴로 대표되는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암흑기는 선수들의 이름값과 실력에도 불구하고 확치고 올라온 리그 라이벌들과 위닝 멘탈리티의 부재등으로 1998-1999 시즌에 알베르토 자케로니가 일궈낸 깜짝 리그 우승을 포함해서 1999-2000 시즌 리그 3위를 기록해 챔피언스리그 대회 티켓을 거머쥐었으나 2000-2001시즌에는 리그 6위로 추락했고 그 다음 시즌인 2001-2002 시즌에 다시 반등에 성공 하여 리그 4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1999년에 안드리 셰브첸코와 젠나로 가투소 영입을 시작으로 개혁의 칼을 빼들면서 기존의 즈므니미르 보반, 데미트리오 알베르티니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또한 미국에서 돌아온 도나도니의 은퇴까지 더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세대교체를 하기 시작한다.
밀란 역사상 최악의 먹튀라 평가받는 이브라힘 바[19] , 호세 마리, 하비 모레노, 호케 주니오르[20] 가 이 시절 선수들이다.
5. 밀란 제너레이션 2기
일명 New generation. 1996년부터 시작된 팀의 암흑기를 벗어나 2002-2007 동안 유럽을 호령했던 시기로 당시 감독은 카를로 안첼로티이다. 당시 안첼로티는 초보 감독으로 유벤투스를 2년 연속 2위로 이끌지만 이름값과 유벤투스의 오직 우승이라는 기대에 부합하지 못했으며, 라이벌 팀의 레전드라는 이유[21] 로 서포터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밀란 감독 부임 후 2002-03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 코파 이탈리아 우승, 2003-04시즌 세리에 A 우승, 2006-07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견인하며 대표적인 젊은 감독으로 우뚝섰다.[22]
이 시대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선수들은 안드리 셰브첸코, 카카, 클라렌스 세도르프, 안드레아 피를로, 알레산드로 네스타, 필리포 인자기, 젠나로 가투소, 디다, 카푸, 세르지뉴 그리고 말년을 불태우던 말옹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001-02시즌 여름 이적시장이 개장하자마자 베를루스코니는 파산해버린 피오렌티나의 후이 코스타와 마르첼로 리피의 개혁의 일환으로 내쳐진 유벤투스의 필리포 인자기를 사재 7000만 유로[23] 를 풀면서 영입하였고[24] , 이후 인테르에서 영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던 안드레아 피를로와 안드리 셰브첸코와 함께 디나모발 돌풍을 이끌던 카카베르 칼라제 등을 영입하면서 2001-2002 시즌을 4위로 마치면서 지난 시즌만 못한 순위를 기록했지만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2002-03시즌에는 인테르에서 그저그런 활약으로 네라주리에서 쫏겨나다시피 했던 클라렌스 세도르프를 영입, 그 외에도 바르셀로나 에서 히바우두를, 페예노르트 에서 욘 달 토마손을, 라치오의 주장이자 유스 출신인 알레산드로 네스타를 영입하면서 1993-94 시즌 이후 8년만의 챔피언스 리그 6번째 우승 및 코파 이탈리아 통산 5회 우승을 견인하며 다음 시즌에 입게될 유니폼에 코카르다 크리콜로레 패치를 달게됐으나 리그에서는 맹주 유벤투스와 더비 라이벌 인테르에게 밀리며 3위를 기록한다.
2003-04시즌 개막 전 AS 로마에서 맹활약하던 카푸를 영입하고,당시 브라질 축구의 10년 대계를 열어줄 대표적인 유망주였던 카카 등을 영입하면서 드디어 17번째 스쿠데토를 차지하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데포르티보에게 원정 4:1 참패를 당하면서 일찌감치 짐을 싼다.
2004-05시즌에는 야프 스탐, 에르난 크레스포를 영입하면서 말네스카라는 역대급 수비라인과 안드리 솁첸코, 에르난 크레스포라는 막강한 투톱과 그를 받쳐주는 카카, 클라렌스 세도르프, 젠나로 가투소, 안드레아 피를로라는 환상적인 미들진과 그를 받쳐주는 두터운 백업으로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리그에서는 파비오 카펠로가 부임하고 입맛에 맞게 뜯어고친 유벤투스에게[25] ,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이스탄불의 악몽으로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2005-06시즌에는 마르시오 아모로소, 요한 포겔, 크리스티안 비에리, 알베르토 질라르디노, 마렉 얀쿨로프스키, 젤리코 칼라치등을 영입하면서 다시금 기대를 높였으나 크레스포의 대체자로 데려온 비에리의 폭망 등으로 또다시 유벤투스에게 막혀 리그 준우승[26] ,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는 바르셀로나에게 1:0으로 패하고 탈락한다. [27]
이후 마지막을 불태우며 준비한 2006-07시즌은 시작부터가 암울했다. 칼치오폴리로 인한 승점 7점 감점 및, 3차예선부터 참가하게 된 챔피언스 리그 및 안드리 솁첸코의 이적과 대체자로 데려온 히카르두 올리베이라의 대폭망, 월드컵 우승으로 인한 주전 이탈리안들의 부상 및 후유증으로 리그에서는 챔피언스 리그 마지노선인 4위도 간당간당했으나 챔스에서는 카카의 원맨쇼로 16강에서 셀틱을 격파하고, 이후 인자기와 세도르프의 각성으로 [28] 전력상 열세가 점쳐지던 FC 바이에른 뮌헨을 8강에서 원정에서 2:0으로 꺾은 후 4강에서 만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다시 한 번 카카의 맹활약으로 5:3 격파하고 결승전에서 2년전 악몽을 안겨준 리버풀에게 2:1 승리로 설욕하며 다시한번 챔피언스 리그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 한편 리그에서는 겨울 이적시장 신입생 호나우두와 마시모 오또의 맹활약으로 4위를 수성하면서 2007-08 시즌 챔스 티켓을 손에 넣는다.
이 시기에도 항상 성공적인 영입만 있던게 아니라서 크리스티안 비에리, 히바우두, 파브리시오 콜로치니, 요앙 구르퀴프, 리카르도 올리베이라등의 실패작도 많았다.
그 후 밀란은 세대교체 실패와 지나친 주전 선수들의 노예화 및 노쇠화로 인해 2007-2008 시즌에 리그 5위를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3위권 안에는 용케 들었지만 눈이 썩는 예능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그래도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호비뉴, 안토니오 카사노, 이냐치오 아바테, 잔루카 잠브로타, 치아구 시우바 등이 활약한 2010-11시즌엔 리그 우승을 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그 당시에 지금 시점에서도 이해하기 힘든 베를르스코니의 행동이 컸다. 그리고 그 다음 시즌인 11-12 시즌에 끝난 뒤 2012년 여름 이적 시장에서 즐라탄과 치아구 시우바를 PSG에 팔아버린 것. 이후 밀란은 나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밀란의 유명한 경쟁팀인 유벤투스는 이 시즌에 유벤투스가 세리에의 역사적인 리그 무패 우승을 기록하고 3년뒤에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기록하고 그리고 또 다시 2년 뒤에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기록하는 등 좋은 성과를 내었고 이것을 밀란은 옆에서 구경하는 처지가 되었다.
6. 기타
밀란 제너레이션 시절 압권인 기록은 최후의 챔스 2연패도 있으며(2015-17 레알마드리드가 경신) 또한 세계 축구사에서 여덟번째로 긴 58경기 무패 행진 및 1991-92 시즌을 무패우승으로 마무리를 한 대 기록과 더불어 동시기의 또다른 강팀 요한 크루이프 감독이 이끌던 원조 드림팀을 1993-94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4:0으로 개박살낸 것이다. 시즌 전 이미 레이카르트가 이적하여 오렌지 삼총사는 붕괴되었고, 주전들의 줄부상과 경고누적 컨디션 난조 등으로 세간의 예상은 바르셀로나의 완승을 점쳤다. 심지어 요한 크루이프는 경기전 인터뷰에서 "밀란은 공을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드사이같이 형편없는 놈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는 끔찍하게 멍청한 팀이다. 내일은 우리들이 축구 레슨을 시켜주겠다"라는 자신감을 내보였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밀란이 평소 전술[29] 과 달리 맞불작전을 놓는 바람에 준비한 전술이 모두 물거품이 된데다 팀 내부의 균열과 더불어 밀란의 미친듯한 경기력으로 초장부터 밀리기 시작해 전반전에만 마싸로에게 2골을 얻어맞아 패색이 짙어지고, 후반전 사비체비치 1골에다 크루이프 자신이 조롱한 축구 못하는 드사이에게 까지 골을 헌납하면서 4:0 떡실신을 당해 드림팀 해체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만다. 이후 크루이프는 이탈리아 축구계와 수비에 중심을 둔 소위 안티 풋볼[30] 에 커다란 반감을 가지게 된다.
[1] 2000년대 유스가 빵빵 터져 이미지가 희석된 감이 없잖아 있는데 원래 바르셀로나는 이적시장에서 이적자금을 효율적으로 못 쓰는걸로 유명했다.[2] 정확히는 4위.[3] 그의 위상은 호나우두, 게르트 뮐러와 동급이다.[4] 골키퍼를 제외한 전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던 선수 중에서는 이견의 여지 없이 세계 최고. 보통 그 다음으로 필립 코쿠, 케빈 그로스크로이츠, 야야 투레 정도를 드는데, 굴리트와는 클래스 차이가 많이 난다.[5] 로타어 마테우스를 중앙 미드필더로 본다면 이견이 없는 세계 최고, 수비형 미드필더로 보더라도 마테우스 바로 밑이다.[6] 레프트백으로는 이견이 없는 역대 최고이고, 수비수 포지션을 통틀어도 언터쳐블인 프란츠 베켄바워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최고 반열에 있다.[7] 프란츠 베켄바워, 바비 무어와 함께 역대 최고로 평가된다.[8] 바르셀로나에 대해 당시 밀란의 에이스 마르코 판바스턴은 바르셀로나가 더 강력하다고 했지만 립 서비스인지 진심인지는 불명. 사실 이러한 레전드들의 감탄사를 객관적인 순위매김으로 보기는 어렵고, 파고들면 모순이 한도 끝도 없다.[9]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펩이 떠나고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 CF가 지네딘 지단 감독 하에 챔스 3연패라는 업적을 달성해서 21세기 초의 세계 최고의 클럽은 역사의 평가에 맡기게 되었다.[10] 이때 기록은 세리에 클럽이 결승에 진출하지 못한 년도가 더 적을 정도(...). 특히 UEFA컵은 1999년까지 딱 한번을 제외하곤 전부 결승에 진출했다. 2000년대 중반의 EPL 클럽들의 유럽 돌풍은 챔스 트로피 갯수도 갯수지만 UEFA컵에선 독일과 스페인의 강세인지라 초라한 감이 없잖아 있다.[11] 어차피 밀리던 상황이었다.[12] 아이러니 하게도 훗날 20년 뒤에 최초의 이탈리아 리그 무패 우승팀 이던 밀란을 제치고 유벤투스가 리그 무패 우승 기록한다.[13] 다만 마르세유가 시즌중에 리그에서 승부조작을 했다는것이 발견되어 UEFA 슈퍼컵 및 인터컨티넨탈컵 출전권이 박탈되어 밀란으로 넘어갔다.[14] 이후엔 마이클 오언 또한 같은 상황을 맞이한다. 파팽의 경우는 결승전에서 전 소속팀을 만나 교체 출장, 패배한 케이스인데 오웬보다 파팽과 더 비슷한 예로는 09-10 시즌 빅 이어우승을 위해 인터 밀란에서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였지만 준결승에서 전 소속팀을 만나 1, 2차전 통틀어 큰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팀과 함께 탈락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있다. 이 때 바르샤가 즐라탄을 영입하기 위한 조건으로 3500만 파운드와 함께 트레이드 된 사무엘 에투는 인터 밀란으로 둥지를 틀었고 08-09 시즌 바르샤에서의 트레블 이어 09-10 시즌에도 트레블을 달성하며 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2시즌 연속 트레블을 경험한 유일한 선수로 남아있다. 그것도 다른 리그, 다른 팀에서.[15] 1929-30 시즌에 세리에 A를 본격적으로 출범하면서 풀리그 제도를 도입한 이래 최소 득점 우승이다. 최소 실점 우승팀은 69-70 시즌에 30경기 11실점을 한 칼리아리 칼초. 세리에 A가 16팀 체제를 유지하는 동안에 우승한 다른 모든 팀들도 93-94 시즌의 밀란보다는 득점을 많이 했다.[16] 그리고 그 당시 챔피언스리그 본선 티켓 규칙에 의하여 그 다음 즌 챔스 본선 진출 티켓을 얻는데 실패한다.[17] 밀란 유스이나 파도바에서 기량을 만개하고 돌아온다.[18] 당시 리그 우승 경쟁상대가 디에고 마라도나의 나폴리, 위르겐 클린스만ᆞ로타어 마테우스 · 안드레아스 브레메의 게르만 삼총사를 앞세운 인테르, 전통의 강호 유벤투스, 잔루카 비알리와 로베르토 만치니를 앞세운 삼프도리아 등 일명 7공주 시절보다 더한 경쟁상대들이 넘쳐나던 시절이였다.[19] 청대나 보르도 시절엔 지단 이상의 기대를 받던 선수였으나 현재의 발로텔리 이상의 또라이 기질을 보여주었다. 매 경기 머리색을 바꾸면서 축구계의 데니스 로드먼으로 불렸을 정도. 결국 임대를 전전하다 방출당하고, 이후 방출을 밥먹듯이 당하다 보다 못한 밀란이 밀란에서 은퇴시켜줬다.[20] 일명 3R. 호케는 월드컵 때 브라질을 우승으로 견인한 동일인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돌고래짓을 해댔고, 나머지 스페니쉬들은 라리가와 청대에서의 기량은 전부 스페인에 두고왔는지 쓰레기 돋는 플레이를 보이면서 세대 교체의 선두주자에서 먹튀로 전락하며 일명 스페니쉬 징크스와 이탈리아 클럽들이 스페인 선수들을 꺼리는 결과로 나타났다.[21] 안첼로티는 로마와 밀란의 레전드이다. 인테르, 토리노에 비하면 라이벌 의식이 적은 편.[22] 노안이라서 덕장 및 노장 이미지가 심어져서 그렇지 안첼로티는 무리뉴와 꼴랑 4살 차이다(...).[23] 후이 코스타는 4132만 유로, 인자기는 3615만 유로에 영입[24] 이는 베를루스코니가 이 두선수의 열혈 팬인 이유가 가장 컸다. 더불어 보반 대체자와 안드리 셰브첸코의 파트너를 영입하는 계획도 있었고.[25] 덧붙이자면 이 당시 유벤투스 또한 무시무시한 스쿼드를 자랑했다.[26] 후에 칼치오폴리로 인해 4위로 조정.[27] 2차전 캄프 누 원정에서 푸욜 장풍 사건이 터져 솁첸코의 골이 취소되었고, 결국 바르셀로나가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올라가게 되었다. 바르셀로나는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만난 아스날을 상대로 2:1 역전승을 거두어 구단 역사상 두 번째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하게 된다.[28] 바이에른은 밀란과의 유럽대항전 전적이 1승 2무 6패로 극열세이다. 인자기가 그 당시 뮌헨 킬러였으며, 2경기 합산 스코어 6-1 중에서 3골을 넣었다...[29] 당시 감독은 파비오 카펠로 당시엔 초짜 감독에 불과했다. 게다가 밀란의 1993-94 시즌의 주요전술은 1골 넣으면 걸어잠그기라는 무진장 재미없는 경기력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토탈 풋볼의 원조라는 자부심을 가진 크루이프가 자신의 축구와 상반되는 경기를 하는 밀란과 카펠로를 곱게 보지않은것은 당연했다. 2009-10 시즌에도 마찬가지라 펩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는 자신의 축구철학에 반하지 않아 지지하는 한편 카펠로의 전술과 비슷한 주제 무리뉴의 인테르는 '''안티 풋볼'''이라며 산란하게 깟다. 결과는 보다시피 인테르의 총합스코어 3:1 승리.[30] 수비전술도 하나의 전략인데 자신의 철학에 반한다고 안티 풋볼이라 하는 것에서 크루이프의 독선적이고 고집적인 성격이 잘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