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클루브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
'''Club Estudiantes de La Plata'''
''' 이름 '''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Juan Sebastián Verón'''
''' 출생 '''
1975년 3월 9일 (49세) /
아르헨티나 라플라타
''' 국적 '''
아르헨티나
''' 신체 '''
184cm
''' 직업 '''
축구선수(미드필더 / 은퇴)
축구경영인
''' 소속 '''
''' 선수 '''
'''에스투디안테스(1994~1996)'''
CA 보카 주니어스(1996)
UC 삼프도리아(1996~1998)
파르마 칼초 1913(1998~1999)
'''SS 라치오(1999~200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2001~2003)
첼시 FC(2003~2007)
인테르나치오날레(2004~2006/임대)
'''에스투디안테스(2006~2007/임대)'''
'''에스투디안테스(2007~2012)'''
브란드센(2012)
'''에스투디안테스(2013~2014)
에스투디안테스(2017)'''
''' 경영 '''
에스투디안테스 회장(2014~ )
''' 국가대표 '''
73경기 9골(아르헨티나 / 1996-2010)
1. 소개
2. 클럽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기타


1. 소개


아르헨티나 국적의 축구선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세계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2. 클럽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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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초창기


1993년 아르헨티나 에스투디안테스 유스팀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하였다. 1995년 에스투디안테스 성인팀으로 계약한 베론은 당시 2부에 있던 팀을 1부리그로 승격시키는데 기여하고 1996년 아르헨티나 명문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하여 디에고 마라도나와 함께 뛰면서 17경기동안 3골을 넣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해 세리에 A 스카우터들의 눈에 들어 삼프도리아와 계약을 하여 유럽무대를 밟게 되었다.

2.2. 세리에 A


UC 삼프도리아에서 2시즌동안 61경기를 뛰고 1998년 1,500만 파운드에 AC 파르마로 이적하였다. 당시 파르마는 전시즌 준우승팀으로 파비오 칸나바로, 릴리앙 튀랑, 에르난 크레스포, 지안루이지 부폰, 엔리코 키에사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베론은 파르마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과 UEFA 컵 우승에 기여하였지만 팀의 시즌성적은 6위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듬해 2,600만 파운드를 받고 '''SS 라치오'''로 이적하였다. 그시절 라치오는 베론을 비롯하여 파벨 네드베드, 디에고 시메오네, 알레산드로 네스타, 에르난 크레스포, 데얀 스탄코비치, 로베르토 만치니 등을 보유했던 원조 부자구단. 라치오는 2000시즌 스쿠데토를 차지하고 코파 이탈리아와 슈퍼컵까지 우승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하였고 팀의 에이스였던 베론은 21개의 도움을 기록하며 시즌 도움왕에 등극하였다.[1] 그의 축구인생에 가장 화려한 전성기였다.
하지만 그의 선수인생에 위기가 찾아왔다. non-EU quota(비유럽권 선수제한)을 피하기 위해 위조여권을 사용했다는 혐의를 받은것. 알바로 레코바, 디다 등이 자격정지 등의 징계를 먹은 것과 달리 베론은 이탈리아 여권 위조 수사에서 무혐의로 드러났으나 이후 여권을 만들기 위한 서류가 가짜였다는 루머가 또다시 떠돌아 이탈리아 국뽕 언론들의 먹잇감으로 물어뜯기며 세리에 A에서의 생활에 회의감을 느꼈고 재정난에 시달리던 라치오의 사정과 맞물려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의 이적을 감행한다. 이적료는 2800만 파운드로 당시 '''프리미어리그 사상 최고의 이적료'''였다.

2.3. 프리미어리그


베론의 흑역사이자 EPL의 손꼽히는 고액 이적생 잔혹사의 사례로 꼽힌다.
많은 기대를 받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입단한 베론은 시즌 초반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2001년 9월 프리미어 리그 이 달의 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나 조금씩 팀에서 겉돌기 시작한다. 베론이 가장 자신있는 포지션인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는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폴 스콜스가 선점하고 있었고 베론은 그 뒤에서 수비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이러한 팀 전술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잔부상으로 컨디션마저 떨어지고 팀원들과의 불화설에 시달리게 된다. 03/04 시즌 프리 시즌에서 맹활약을 하며 알렉스 퍼거슨으로부터 "베론을 중심으로 팀을 개편하겠다"라는 말도 나왔지만 로만 인수 이후 한참 선수 수집을 열을 올리던 첼시 FC로 옮겨가게 된다.[2]
첼시 FC에서도 부상에 시달리며 제대로 뛰지도 못했다. 세계 최고 리그이던 세리에A를 4~5년간 호령하던 베론은 잉글랜드에서 먹튀로 전락하였고 베론의 실패는 프리미어리그가 거액의 투자자들을 영입하며 공격적인 마케팅에 열을 올리던 시기와 맞물려 국내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프리미어리그>>세리에A 라는 우스갯소리마저 생겨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만, 애초에 베론이 수비형 미드필더가 아닌데 수비형 미드필더에 가까운 중앙 미드필더로 포진시킨게 패착이었다. 더군다나, 폴 스콜스도 악명높은 태클에서 알 수 있듯이 수비테크닉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선수였으니.. 참고로, 이 시즌 아스날 FC가 무패우승을 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라이벌인 맨유가 리빌딩 과정에서 삐걱거리고 있어서 아스날의 큰 대항마가 되지 못한 것도 크다.[3] 실례로, 맨유가 0203 시즌 이후에 다시 리그 트로피를 가져온 시점이 06/07시즌인 것만을 봐도 알 수 있다.

2.4. 그 이후


2004년 첼시를 떠난 베론은 인테르에 임대되어 세리에A로 복귀하였다. 예전만큼 엄청난 활약은 보이지 못하였지만 잉글랜드에서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하였고, 천부적 재능과 풍부한 경험을 살려 데얀 스탄코비치, 에스테반 캄비아소와 중원을 형성하며 인테르의 스쿠데토와 코파이탈리아, 슈퍼컵 우승 등 7년이 넘은 무관 탈출에 기여하였다. 2006년 임대계약이 만료된 뒤에는 고향팀인 에스투디안테스로 돌아가 아르헨티나 리그우승을 이끌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에서도 우승하여 클럽월드컵에 출전, 결승까지 올라가 후배 리오넬 메시가 이끄는 FC 바르셀로나와의 결승전에서 석패하였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2008, 2009 남미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그간의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하고 2012년 선수생활 은퇴를 선언하였으나[4] 에스투디안테스 구단의 간곡한 설득으로 은퇴를 번복하고 2013년 한시즌을 더 뛰고 은퇴하였다.
그런데 팀이 2017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출전권을 확보한 뒤, 팬들에게 ‘시즌 티켓 65% 이상 구매시 현역으로 복귀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고, 목표를 달성하자 2년 만에 현역 복귀하여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 본인이 회장으로 활동하던 팀인 에스투디안테스에서 1년 6개월동안 무급으로 뛸 예정이다.

3. 국가대표 경력


1998 프랑스 월드컵에 출장하여 3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부상으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였고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엔트리에서 제외[5], 2010 남아공 월드컵 엔트리에는 포함은 되었으나 팀은 리오넬 메시와 같은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돌아갔기에 이래저래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는 선수였다. 사실 2010년 월드컵 엔트리에 들어간 것도 후안 베론과 베론의 아버지조차 무리수라고 생각했으나 디에고 마라도나의 독단으로 기용되었다. 그리고 베론은 마라도나가 구상한 기이한 포메이션의 허리를 담당하는 위치였다는게 문제였다. 게다가 그 병맛같은 포메이션 위치상 허리와 동시에 수비때 우측 측면을 맡아야 하는 위치였다.[6] 아무리 베론이 우수한 선수여도 이미 만 35세, 선수로서 은퇴를 앞뒀는데 가장 왕성한 활동력이 필요한 자리에 넣어뒀으니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가진 전력대비 엄청난 삽질을 했고, 베론은 월드컵 조별 리그 1차전에서 부상당해서 크게 빛을 보지도 못했다.

4.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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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론패스-베컴슛의 합작품
후이 코스타, 지네딘 지단, 프란체스코 토티와 대등할만한 엄청난 '''시야'''를 지녔다. 거기다 주무기인 '''킬패스'''는 팀 동료도 예측 못한 타이밍에 역회전을 걸어 보내버리는 엄청난 능력을 지녔으며 '''초장거리 킬패스'''만으론 당대 어떠한 미드필더도 범접할 수 없는 테크닉을 지니고 있었다.[7] 때문에 CA 보카 주니어스 시절에 마라도나로부터 능력에 대해 칭찬을 받은 적도 있으며, 중거리슛, 볼컨트롤과 개인기 또한 명실상부 월드클래스였다. 직접 박스쪽으로 공격에 가담하는 능력도 일품이었으며, 후방에서 조율하며 플레이메이커까지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삼프도리아~라치오 시절 전성기때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많이 출전하였으나, 인테르 시절부터 에스투디안테스에서 은퇴하기 전까진 중앙미드필더로 많이 출전하였다. 애초에 공격형 미드필더임에도 불구하고 186cm의 키와 균형잡힌 바디밸런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 미드필더롤도 잘 소화해내었다. 아예 선수생활 중후반부터는 사실상 전문 중앙미드필더였고 투볼란테 전술이긴 해도 수비형미드필더로도 많이 뛰었다. 즉 맨유시절에 중앙 미드필더로 실패한건 단지 PL과의 궁합이 안맞았던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특히 빠른 공격가담의 침투를 귀찮아(...)하는 듯한 본인의 스타일처럼 굉장히 빠른 역습상황에서는 자기진영에서 상대진영 박스쪽까지 드리블 하지 않고 대놓고 '''장거리 킬패스'''를 정확히 발사해버리는 대범함을 자주 보여주기도 했다.
베론에 대해 얘기한다면 빼놓을 수 없는 '''프리미어리그에서의 부진'''에 대해선 많은 전문가와 팬들이 이구동성으로 그의 플레이스타일과 연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가 세리에로 진출하여 잠재력을 발산하고 전성기를 구가할때의 스타일은 전형적인 8번 스타일의 미드필더이자 '''빠른 템포의 축구를 특이할 정도로 싫어하는 스타일'''이었는데 반해, 당시 '''프리미어리그는 굉장히 빠른 킥&러쉬 롱볼축구를 선호'''했고 역습시에는 지체하지 않고 굉장히 빠른 공격전개를 강요하였기 때문에 베론의 스타일과는 완전히 상극일 수 밖에 없었다. 일각에서는 알렉스 퍼거슨의 베론을 기용하는 방법이 잘못됐다는 의견도 많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다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당시 EPL에서의 베론의 부진 이후로 남미선수들은 프리미어리그의 빠른 축구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선입견이 많이 심어지기도 했다. 물론 지금이야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8]
베론이 자기 마음대로 플레이하는 성향이 강한 것도 맨유에서 실패한 원인이기도 하다. 누군가 알렉스 퍼거슨에게 포백 앞 홀딩 미드필더로 써 보는 것이 어떠냐 라고 묻자 어떤 위치에 두어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놈이라 똑같을 거라며 한마리의 자유로운 새라고 표현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기타


아버지 후안 라몬 베론 역시 축구선수 였으며 에스투디안테스와 그리스 파나티나이코스 등지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선수시절 별명은 '마녀'. 그래서 베론의 별명은 '작은마녀'가 되었다고.
삼촌도 축구선수 출신인데 잉글랜드 셰필드유나이티드에서 뛰었었다. 어린시절 베론은 삼촌을 따라 셰필드에서 뛰기를 희망했었는데 맨유에 입단한 후 한 말이 '나는 셰필드에서 뛰고싶었는데 맨체스터로 왔네요(...)'
2000년대 초반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 데이비드 베컴과 더불어 4대 미드필더로 불렸다 베론은 전성기가 지난 30대 중반 2010 남아공 월드컵에도 출전하였다. 물론 1차전인 나이지리아 전에서 부상으로 인해 팀의 탈락에 크게 일조해버렸지만.[9] 본래 인테르 시절 준수한 활약으로 완전 이적이 기정 확실시 되었지만 역사상 최고의 멘탈쓰레기인 아드리아누와의 불화[10]로 인해 사실상 이적은 무산되고 아르헨티나로 돌아가게 된다. EPL에서의 실패와 인테르에서의 첫 시즌 후 아르헨티나 리턴, 2006 독일 월드컵 국대 미발탁 등으로 브라운관에서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또한 노안으로 인해 2000년 전후 전성기를 맞이할 당시 나이가 20대 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나이가 많은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던 것 또한 하나의 원인이다.[11]
한창 그가 맨유에서 부진할 때, 언론에서 그를 마구 물어뜯자 퍼거슨 감독은 인터뷰에서 그를 변호하며 기자들에게 '''“이 멍청한 XX들아! 베론은 위대한 선수야!”'''라는 희대의 명언을 날렸다.
한준희의 말로는 세비야의 스티븐 은존지가 베론과 플레이 스타일이 유사하다고 한다.
[1] 당시 세리에A의 도움 기준은 오직 원터치 골만이 기록되었다. 그의 엄청난 기회 창출 능력을 알 수 있는 대목[2] 사실 초창기까지 베론의 크로스나 패스 능력 자체는 여전히 뛰어났고 활약상도 그리 심하게 나쁘진 않았다. 다만 자기 자신에게 맞지 않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니 많은 팬들이 기대하던 것처럼 제 폼이 안 나올 수 밖에...[3] 그러나 맨유는 시즌 중 아스날과의 대결에서 1번도 패하지 않았다.[4] 정확히는 프로생활 은퇴. 2012년 아마추어 구단인 브란드센에서 한시즌을 뛴 전력이 있다.[5] 2002 월드컵 이후 사이가 나빠진 후안 소린이 자신과 베론 둘중 한명만 택하라고 경고하여 당시 호세 페케르만 감독은 결국 소린을 선택한다.[6] 마라도나의 포메이션을 보면 우측 허리가 아예 없는 기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수비때 우측 공격수만 따돌리면 우측 수비수까지 직선으로 길이 열리는 구조였다. 따라서 중간 미드필더인 베론과 수비형 미드필더인 마스체라노는 자신의 위치를 사수함과 동시에 필요할때 전력으로 우측을 커버해야 하는 막중하다못해 과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7] 당시 세리에는 공격형 미드필더들의 르네상스였으며 지단의 조율과 토티의 힐패스, 후이 코스타의 스루패스등 개성적이고 천재적인 재능의 집합소였다.[8] 물론 이들 외에도 EPL에서 활약하는 남미 국적 선수들은 많았다. 베론과 비슷한 시기의 지우베르투 시우바는 아예 아스날 FC의 주전으로서 2003-04 시즌 무패우승의 숨은 주역으로 평가받으면서 주전 멤버로 활약하였고, 그 외에도 윌리안, 하미레스, 다비드 루이스 등의 선수들이 첼시 FC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9] 이건 마라도나의 삽질. 34살의 노장을 가장 중요한 허리에 배치한 것도 모잘라 공격전개까지 맡겨놨는데 부상으로 인해 공백이 생기자 그것을 메꿔줄 선수가 전무했다. 후안 로만 리켈메라도 있었다면 사정이 나았겠지만 이미 마라도나와의 트러블로 국대에서 은퇴한 상황이였다.[10] 05-06 시즌까지 아드리아누는 명실상부한 인테르의 에이스로 수많은 활약을 선보였다. 또한 구단주였던 마시모 모라티가 열렬한 아드리아누 빠돌이로 멘탈이 터졌을때도 계속 그를 옹호했으며 심지어 프로의식 없는 선수 싫어하기로 정평난 주제 무리뉴까지 모라티의 간곡한 부탁으로 갱생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베론 역시 아드리아누와의 불화로 인해 아르헨티나로 쫒겨나듯 복귀했다.[11] 이 때 당시 비교된 미드필더들의 나이를 보면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후이 코스타,파벨 네드베드가 1972년생으로 베론보다 3살 많지만. 사진으로만 보면 '''베론이 제일 노장같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