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무장척탄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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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부대사
3. 전후
4. 전쟁범죄
5. 여담


1. 개요


독일군 무장친위대에 속해 있던 외인부대 중 하나.

2. 부대사


이 부대는 초기에는 SS저격사단이라고 불리다가 루테니안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45년 3월에는 우크라이나 제1사단으로 개칭되었다. 구성 병력은 29/30/31SS 척탄병 연대, 정찰대대, 돌격포대대, 공병대대, 통신대대, SS경보병대대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고 주 전역은 동부전선이었다.
이 부대는 우크라이나인 중에서도 2차 대전 이전에는 폴란드 영토였던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갈리치아 출신자를 주 구성원으로 하여 1943년 4월부터 편성되었다. 그것은 이들이 아리안 인종에 더 가깝다는 이유였고, 슬라브계인 순수 우크라이나인은 받지 말라는 힘러의 지시가 있었다. 우크라이나인 부대가 편성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 독립의 전조라고 보고 이 부대의 편성을 반긴 지원자가 상당히 많았다고 하며,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모병한 지원자의 수가 무려 81,999명....
자원자 수를 늘이기 위해 신장 제한도 165cm에서 161cm로 완화했다고 하고, 최종적으로 입대한 자원자의 수는 13,000명 정도라고 한다[1]. 장교로는 독일인과 네덜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등이 있었으며 우크라이나인 장교 중에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소속과 폴란드군 예비역 장교 출신자가 섞여 있었다.
1944년 2월부터 작전에 들어간 갈리치엔 사단은 경험은 부족해도 장비는 좋은 편이었다고 하며, 발터 모델 원수 휘하에서 대빨치산 전투에 종사했으나 이해 여름의 바그라티온 공세를 맞아 박살이 났다. 철수에 성공한 생존자는 3천 명 가량으로, 이 부대를 재편성한 독일군은 이들을 1944년 9월에 발생한 슬로바키아 반독 봉기 진압에 투입했다. 그 뒤에는 1945년 2월부터 3월까지 슬로베니아-오스트리아 국경에서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을 소탕하고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가 4월에 대규모 병력 보충을 받아 오스트리아로 들어온 소련군과 격전을 벌여 큰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5월 10일에 영국군미군에게 항복하면서 이들의 전쟁은 끝을 맺는다.

3. 전후


이들에게 정말 다행이었던 것은 항복한 뒤 이탈리아로 이송된 갈리치엔 사단 병사들이 자유 폴란드군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을 전쟁 전 폴란드 국민으로 간주한[2] 자유 폴란드군 사령관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은 이들의 소련 송환을 막기 위해 나섰고, 이들이 소련으로 가면 겪게 될 뻔한 운명을 알고 있던 바티칸에서도 송환을 막으려고 나섰다. 사단 병력 중 176명은 아예 안데르스의 폴란드 2군단에 '''입대'''를 했고, 7,100명에 달하는 갈리치엔 사단의 투항병들은 1947년에 영국캐나다로 이주할 수 있었다. 이들의 명단은 영국 정부에 의해 봉인되었으며 각계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의 반공 분위기를 탄 덕이라고 봐야 할 듯. 물론 소련 당국에서는 이를 열심히 씹었다.

4. 전쟁범죄


일단 이 부대는 전쟁 중후반기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편성되었으며, 지원자들도 나치즘에 공감해서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독립이라는 대의 때문에 참가한 것이므로 이들에 대한 나치화 시도는 도리어 거부감을 사서 전력을 저하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부대에 대한 나치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도리어 우크라이나 종교계의 요구로 이들 부대에는 우크라이나인들을 위한 우크라이나 정교회 소속의 군종 사제까지 배치되었다. 또한 토텐코프 부대처럼 수용소 관리를 맡은 것도 아니므로 부대 차원에서 그런 류의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이 주로 종사한 임무가 후방의 빨치산 토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대민학살 등의 의혹은 받을 수밖에 없다. 위키피디아에도 세 건의 학살 사건이 올라와 있으며, 일부 부대는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 투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전투에서 과연 갈리치엔 사단이 전투원만 상대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사단의 기간이 된 일부 병력은 1943년 한참 이전부터 우크라이나 방위군 소속으로 독일군 편에 선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독일군이 조직한 이런 지역 치안유지 부대들은 독소전 초기 유대인 박해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독일군 부대가 유대인들을 체포해 집결시키면 이 치안부대 대원들이 사살하는 식으로 업무 분장을 이룰 정도였다.
'''총살 집행을 맡은 독일군 병사들의 정신이 PTSD로 맛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독일인들은 자신들 병사도 아낄 겸 하여 반유대주의적 성향이 강한 우크라이나인들을 앞세워 유대인들을 총살한 것. 후에 이들 우크라이나 대독협력자들은 서우크라이나 지방의 폴란드인들을 대량학살하는 데에도 동참하는데, 이 학살에 일부 갈리치엔 사단이 가담했다는 의혹(사실 의혹 정도가 아니라 거의 확실하지만)이 있다. 1943년 부터 시작된 이 대량학살로 인해 12만여 명에 이르는 폴란드인들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위의 안데르스 사령관은 고국의 동포들을 학살한 이들을 사단원으로 받아들인 셈이 된다.

5. 여담


2013년 6월 16일, 미국에서 갈리치엔 사단 복무 경력을 숨기고 살고 있던 마이클 카콕(94)이라는 자의 정체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나치 동조자이자 전쟁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은 이가 전후 60년이나 자유롭고 평화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에 여론은 들끓고 있으며, 폴란드 검찰과 독일 수사 당국이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나선 상태. 다만 근 70년이 지났기 때문에 증거를 찾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들통이 난 계기는 1995년에 본인이 우크라이나어로 출간한 회고록에서 "1943년에 sd와 함께 우크라이나 방위군을 창설하고 사령관으로 취임했다"고 쓴 내용이 연구자에게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65년 미국인으로 산 나치사령관 마이클 카콕, 과거 속이고 정착
그러나 이 자는 1943년에 입대한 것도 아니고 우크라이나 방위군 창설 멤버였을 정도의 적극적인 대독협력자였으므로 우크라이나 유대인 학살이나 빨치산 소탕 과정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또는 바르샤바 봉기에서의 폴란드 민간인 학살 등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무척 높다. 위 기사에서 폴란드 정부가 "카콕의 전쟁 범죄 기록을 제공하겠다"고 나선 것도 이 중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 참여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현재 나온 보도로는 카콕은 중대 지휘관으로 이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재판은 진행중인 듯하다.

[1] 일본어 위키피디아는 11,578명.[2] 2차대전 전의 폴란드는 현재의 폴란드와 달리 다민족 국가였다. 우크라이나 인들은 당시 폴란드 영토의 남동쪽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