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증권 여자농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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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존재했던 여자농구 실업팀. SK그룹 산하의 스포츠 팀이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팀이다. SKC 여자농구단으로 출발해 1995년 팀 운영권이 선경증권으로 넘어왔고 해체 직전인 1998년 1월 SK증권 농구단으로 이름을 바꾼 뒤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마스코트는 코끼리였다.[1]
1975년 당시 대한농구협회 회장이던 이병희의 권유를 당시 선경직물(現 SK네트웍스) 회장이던 최종현이 받아들여 만든 것이다. 선경의 창업지가 수원시인데 농구단 창단을 권유한 이병희는 수원을 지역구로 한 대한민국 국회의원이었다. 그리고 그냥 일개 국회의원이 아니라 집권당인 민주공화당 5선 국회의원을 지낸 거물급 인물이었다. 이병희의 권유는 말이 좋아 권유지, 사실상 권유 이상의 것이었다.[2][3]
여하튼 창단 후 총 10여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종별선수권이나 전국체육대회 우승으로 주가를 올렸지만, 1980년대 농구대잔치 등장 이후에는 아무래도 농구대잔치 우승이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면서 이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런데 1980년대에는 농구대잔치에서 별 재미를 못 봤다. 당시 농구대잔치를 주도하던 팀은 삼성생명이었고, 가끔 국민은행이 우승하던 정도. 그나마 당시 활약하던 선수는 부산 혜화여고 출신의 '득점 컴퓨터' 박진숙이었다.
1986년 선경스포츠단 산하로 편입된 후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칼을 빼들어서, 특급 유망주였던 유영주, 정선민, 김지윤을 스카우트하면서 주가를 올리기 시작했다.[4] 그 결과 총 세 차례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하면서 신흥 강호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특히 1997-1998 농구대잔치 결승은 여자 농구 역사에 손꼽히는 명승부였다.
'''그러나 그 명승부가 더 빛나게 하는 비극적인 일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우승 '''다음 날''' 팀이 해체된 것이다. 1997년 외환 위기 직후 경비 절감을 위해 전격적으로 팀이 해체되었는데[5] 당연히 모든 선수들과 여자농구 관계자들이 반발했다. 우승팀을 해체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고 SK그룹 자체가 딱히 경영난이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6] 다만 팀 전용 연습체육관도 마련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다지 투자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 조치는 SK그룹이 SK케미칼 배구단[7] 역시 해체한 것과 맞물리면서 엄청난 비난을 사게 되었다.[8]
특히 당시 출범 직전이던 한국여자프로농구가 이 해체 파동으로 인해 출범을 연기하게 되었다. 원래 3월에 첫 시즌을 시작하려고 했던 WKBL은 SK증권의 해체로 인해 가맹 팀 수가 단 세 팀(삼성생명, 현대산업개발, 신세계)로 줄게 되었다. 세 팀으로 리그를 꾸려갈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출범 자체가 뒤로 늦춰진 것이다. 그리고 SK증권의 해체는 은행 팀들의 WKBL 참가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으로 이어져 결국 서울은행 여자농구단의 해체로 이어졌다. 그나마 국민은행과 상업은행이 동참하기는 했지만 해체 선수 드래프트에서 신용보증기금의 지명을 받았던 정진경이 이에 불복하고 대만행을 택하자 신용보증기금은 팀을 해체해버렸고 최종적으로 5개 팀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유영주의 경우, 우승 당일 신나게 놀고 다음날 신문을 보고서야 팀이 해체된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 때 배신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고. 선수들은 해체 드래프트 대상이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유영주는 삼성생명으로, 정선민은 신세계로, 김지윤은 국민은행으로, 이종애는 상업은행으로 이적하게 된다.
1997년 외환 위기 직후, 최악의 국면을 맞이했던 여자 농구의 흑역사. 아니, 여자 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막장스러운 흑역사. 그래서 오랫동안 여자 스포츠를 아껴온 팬들은 SK그룹 하면 치를 떤다. 이후 스포츠에서 SK그룹은 여러가지 논란으로 어그로를 쌓아 오게 된다.
SKC 시절 유니폼인데, 깊은 V넥 타입의 긴팔 유니폼이었다. 단순하고 펑퍼짐해보이지만 이 유니폼이 은근히 남성 팬들에게 인기를 끈 적도 있었다.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여자농구 실업팀. SK그룹 산하의 스포츠 팀이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팀이다. SKC 여자농구단으로 출발해 1995년 팀 운영권이 선경증권으로 넘어왔고 해체 직전인 1998년 1월 SK증권 농구단으로 이름을 바꾼 뒤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마스코트는 코끼리였다.[1]
1975년 당시 대한농구협회 회장이던 이병희의 권유를 당시 선경직물(現 SK네트웍스) 회장이던 최종현이 받아들여 만든 것이다. 선경의 창업지가 수원시인데 농구단 창단을 권유한 이병희는 수원을 지역구로 한 대한민국 국회의원이었다. 그리고 그냥 일개 국회의원이 아니라 집권당인 민주공화당 5선 국회의원을 지낸 거물급 인물이었다. 이병희의 권유는 말이 좋아 권유지, 사실상 권유 이상의 것이었다.[2][3]
여하튼 창단 후 총 10여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종별선수권이나 전국체육대회 우승으로 주가를 올렸지만, 1980년대 농구대잔치 등장 이후에는 아무래도 농구대잔치 우승이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면서 이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런데 1980년대에는 농구대잔치에서 별 재미를 못 봤다. 당시 농구대잔치를 주도하던 팀은 삼성생명이었고, 가끔 국민은행이 우승하던 정도. 그나마 당시 활약하던 선수는 부산 혜화여고 출신의 '득점 컴퓨터' 박진숙이었다.
1986년 선경스포츠단 산하로 편입된 후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칼을 빼들어서, 특급 유망주였던 유영주, 정선민, 김지윤을 스카우트하면서 주가를 올리기 시작했다.[4] 그 결과 총 세 차례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하면서 신흥 강호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특히 1997-1998 농구대잔치 결승은 여자 농구 역사에 손꼽히는 명승부였다.
'''그러나 그 명승부가 더 빛나게 하는 비극적인 일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우승 '''다음 날''' 팀이 해체된 것이다. 1997년 외환 위기 직후 경비 절감을 위해 전격적으로 팀이 해체되었는데[5] 당연히 모든 선수들과 여자농구 관계자들이 반발했다. 우승팀을 해체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고 SK그룹 자체가 딱히 경영난이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6] 다만 팀 전용 연습체육관도 마련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다지 투자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 조치는 SK그룹이 SK케미칼 배구단[7] 역시 해체한 것과 맞물리면서 엄청난 비난을 사게 되었다.[8]
특히 당시 출범 직전이던 한국여자프로농구가 이 해체 파동으로 인해 출범을 연기하게 되었다. 원래 3월에 첫 시즌을 시작하려고 했던 WKBL은 SK증권의 해체로 인해 가맹 팀 수가 단 세 팀(삼성생명, 현대산업개발, 신세계)로 줄게 되었다. 세 팀으로 리그를 꾸려갈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출범 자체가 뒤로 늦춰진 것이다. 그리고 SK증권의 해체는 은행 팀들의 WKBL 참가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으로 이어져 결국 서울은행 여자농구단의 해체로 이어졌다. 그나마 국민은행과 상업은행이 동참하기는 했지만 해체 선수 드래프트에서 신용보증기금의 지명을 받았던 정진경이 이에 불복하고 대만행을 택하자 신용보증기금은 팀을 해체해버렸고 최종적으로 5개 팀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유영주의 경우, 우승 당일 신나게 놀고 다음날 신문을 보고서야 팀이 해체된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 때 배신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고. 선수들은 해체 드래프트 대상이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유영주는 삼성생명으로, 정선민은 신세계로, 김지윤은 국민은행으로, 이종애는 상업은행으로 이적하게 된다.
1997년 외환 위기 직후, 최악의 국면을 맞이했던 여자 농구의 흑역사. 아니, 여자 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막장스러운 흑역사. 그래서 오랫동안 여자 스포츠를 아껴온 팬들은 SK그룹 하면 치를 떤다. 이후 스포츠에서 SK그룹은 여러가지 논란으로 어그로를 쌓아 오게 된다.
SKC 시절 유니폼인데, 깊은 V넥 타입의 긴팔 유니폼이었다. 단순하고 펑퍼짐해보이지만 이 유니폼이 은근히 남성 팬들에게 인기를 끈 적도 있었다.
[1] 유공 코끼리 축구단 마스코트로 쓰였던 그 코끼리 맞다. 이 시절에는 같은 그룹 내 스포츠팀끼리는 같은 동물을 돌려쓰는 일이 다반사였다. 삼성그룹 계열 스포츠팀들은 사자를 마스코트로 주로 썼고 럭키금성 계열 스포츠팀들은 황소를 마스코트로 돌려썼다.[2] 선경이 농구단을 창단하던 시절은 박정희의 폭압정치가 극에 달했던 유신정권 시절이었다. 대통령이나 정부, 여당 고위층의 말은 곧 법이나 다름없었고 이를 멋대로 거역했다가는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서 진한 설렁탕 국물을 콧구멍으로 맛보던 그런 시대였다.[3] 훗날 SK그룹이 창단하게 되는 야구단도 정부 차원의 권유가 먼저였다. 다만 이 때는 프로야구단 창단을 권유한 사람이 당시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였다. 농구단 창단 때처럼 야구단 창단도 강권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나선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4] 셋 다 농구대잔치 신인왕 출신이다.(유영주 1990-91 시즌, 정선민 1993-94 시즌, 김지윤 1994-95 시즌) 특히 저돌적인 파워 포워드로 유명했던 유영주는 당시 엄청난 거금이었던 2억원에 스카우트했다고 한다. 이 당시 유영주와 인성여고 동기였던 정은순은 동방생명 농구단으로부터 1억원의 스카우트 머니를 받았다.[5] 우승 다음 날 팀 해체 사실을 발표한 것은 팀 성적과 무관하게 이미 그룹 차원에서 농구단 해체 작업을 비밀리에 단행했고 시즌이 모두 끝난 시점에서 외부에 공개했다고 볼 수 있다. 선수나 코치진이 팀 해체 소문을 알았다면 크게 동요한 나머지 챔피언결정전에서 패퇴했을 것이다. 결국 선수와 코치진, 농구단 프런트 누구에게도 이를 알리지 않고 그룹 고위층만이 농구단 해체 작업에 나섰다고 볼 수 있는데 이와 비슷한 상황이 23년 뒤 같은 그룹 야구단에서 발생하게 된다. 물론 이쪽은 해체가 아니라 매각이라는 차이가 있지만...[6] 이 당시도 SK그룹의 주된 이익 창출원은 석유화학사업과 통신사업이었다. 두 사업 모두 업계에서 월등한 시장 점유율을 나타냈기에 경제 위기 상황에서도 안정적인 이익을 낼 수 있었다.[7] SK케미칼 여자배구단의 주축 선수는 강혜미와 장소연이었다. 이 둘은 후에 현대건설 여자배구단으로 이적하게 된다.[8] 그래 놓고 외환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싶었던 2000년에 돈이 훨씬 더 많이 드는 '''야구단을 창단했다'''. 창단 과정에서 외압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하필 그 이전에 정리해 버린 팀은 모두 다 남자 종목에 비해 인기가 뒤처지는 여자 스포츠팀이었고 그들의 운영비보다 몇 배는 더 드는 종목의 남자 스포츠팀을 만든 것 자체가 성차별로 비칠 소지는 다분했다. 희한한 것은 그 야구단을 포기하면서 언급했던 말이 가관이다. SK그룹은 "프로 스포츠보다 비인기 아마추어 스포츠에 더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과거 SK그룹은 프로도 아니었고 인기 종목도 아니었던 여자농구단을 석연찮은 이유로 해체한 전과가 있다. 상식의 선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언급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