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자프로농구
[clearfix]
1. 개요
1997년 2월 24일에 창립해 1998년 7월 28일에 첫 리그를 연 한국의 여자 농구 프로 리그. 약칭은 리그 주최 기구인 한국여자농구연맹의 이름을 따서 WKBL.[2]
과거엔 금융기관들이 참여로 은산분리를 의식해 12명 이상의 선수로 구성된 국내 여자실업농구팀으로 규정했다. 이를 두고 실업리그 아니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지만 현재는 정관이 변경되어 WKBL에 참가하기 위해선 구단이 독립법인이어야 하며, 아닐 경우 총재가 그 조건을 충족할때까지 유예기간을 준다고 명시되어 있다.
제3장 회원
제15조 (회원의 자격)
WKBL회원의 자격은 다음과 같다.
'''1. 농구단 운영을 설립 목적으로 하는 독립법인 또는 지방자치단체. '''다만 회원이 독립법인이 아닌 경우 총재의 승인을 받아 일정기간 자격조건의 구비를 유보할수 있다.'''
'''한국여자농구연맹 규약'''
2. 역사
2.1. 출범 배경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하향세를 그리기 시작한 여자 농구를 재정비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규모에 비해 13개로 많았던 실업 팀의 구조조정부터 시작해 갈수록 입지가 줄어든 여자 농구의 입지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미프로 형태로 리그를 만들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딱히 인기가 없던 여자 농구에 굳이 돈을 쓸 필요는 없었고, 선수 입장에서도 굳이 안정적인 직장을 잃어가면서 프로 선수가 될 필요는 없었다. 남자 농구의 경우, 1990년대 농구대잔치의 엄청난 인기로 인해 기업도 돈이 된다고 뛰어들었고, 선수들도 실업 팀 급여보다 더 많은 돈을 원했던 상황이었지만, 여자의 경우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말은 나왔지만 계속 지지부진한 상황이 이어졌다.
하지만, 1997년 찾아온 외환위기는 여자 농구의 프로화를 촉진시켰다. 경제 위기로 인해 13개나 달하던 팀이 순식간에 5개로 줄어들면서 이제는 프로화를 통해 이슈를 부각시키지 않으면,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든 것이다. 그래서 지지부진하던 프로화 작업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2.2. 탄생
출범 당시에 엄청난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차피 13개 팀을 다 끌고 갈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선수층의 향상을 위해서도 몇 팀은 해체되는 것이 맞았는데, 문제는 그 속도가 너무 빨랐고, 해체되는 팀의 수가 너무 많았다는 점.
- 1997년 4월 3일: 한보그룹 부도 사태로 치명타를 입은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제일은행) 여자 농구단이 해체. 이때만 해도 어차피 프로화에 금융권 팀이 동참하기 어렵다는 것을 남자 농구를 통해 봤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 1997년 8월 11일: 태평양 여자 농구단이 신세계로 넘어갔다.[3] 이때까지는 괜찮았다.
- 1997년 11월 19일: 한국화장품 여자 농구단 해체. 실업 팀의 첫 해체였다.
- 1997년 12월 2일: 코오롱 여자 농구단이 27년 역사를 끝으로 해체되었다.
- 1997년 12월 12일: 외환은행 여자농구단이 해체되었다.
- 1998년 1월 23일: 대웅제약 여자농구단이 농구대잔치 도중 해체를 통보했다. 그래도 이 시점에서는 13개 팀이 8개로 줄어든 상황이라 그래도 버틸 만했다. 애당초 프로화에 동참한 삼성생명, 현대산업개발, SK증권, 신세계, 신용보증기금 정도에 한두 팀, 이를 테면 국민은행 정도를 끌어들이면 해볼 만하다고 본 것. 그래서 1998년 2월에 첫 리그를 출범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 1998년 2월 10일: 1997-98 농구대잔치 우승팀 SK증권 여자농구단이 우승 다음 날 해체를 통보했다. 이 결정이 치명타였다. 프로에 동참하기로 약속한 SK증권이 돌연 해체를 선언해 버린 것. 이 결정은 여자 농구의 쇠락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였는데, 왜냐하면 바로 직전에 SK그룹이 남자농구의 진로 맥카스를 무려 250억에 인수해서 SK 나이츠를 창단했기 때문이다. 남자농구는 신생팀[4] 도 250억에 팔리는데, 여자농구는 우승팀도 버려지는 상황... 미약하게나마 돌아가던 프로화 움직임은 여기서 올스톱이 되었고, 팀이 무더기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 1998년 2월 18일: 금융권 구조조정 상황에서 서울은행 여자농구단이 해체되었다. 그래도 서울은행의 해체 선에서 간신히 수습하고, 해체 선수 드래프트를 했는데, 1순위인 정진경이 신용보증기금행에 대해 불복하고[5] 대만으로 떠나면서 열받은 신용보증기금이 7월 30일에 팀을 해체시켰다. 이로서 5개로 팀은 축소. 그나마 사정이 나은 금융 회사였던 국민은행은 팀을 존속시켰고, 공적 자금이 들어간 상업은행은 가장 오래된 여자 농구 팀이라는 그 타이틀 때문인지 차마 팀을 없애지 않고, 결국 프로화에 동참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1998년 7월 28일에 리그가 처음 시작되었다. 하지만, 한 번에 8개 팀이 해체되면서 나온 선수들은 다 흡수할 수 없었고, 이는 그 무렵에 졸업한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7명의 고교 졸업생들은 대만으로 귀화해서 농구를 이어가는 참담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2.3. 성장
대한민국농구협회와 갈등도 빚었지만, 어차피 무더기 팀 해체과정에서 무력했던 농구협회를 생까고, 농구인들에게 존경받던 이성구 선생[6] 을 회장으로 추대해 일단 출범은 했고, 그 뒤로 성장을 위해 당시 집권당 새천년민주당의 중진의원이던 김원길 씨를 총재로 영입했다.
김원길 총재는 다른 협회의 수장들에 비하면 능력이 있는 편이었다. 김원길 개인의 정치적 행보와는 달리 여자농구 팬들에게는 좋은 평을 받았다. 고인이 된 이성구 선생의 잔여임기 3년은 물론 세차례 더 연임하면서 1999년부터 2012년 4월까지 재직한 김원길 총재 아래서 여자 농구는 최소한의 생존 가능성을 살리는데 성공했다.[7]
발전기금을 모으고, 스폰서나 경품 협찬을 땡겨오고, 리그 운영의 원칙을 세웠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대회 타이틀 스폰서를 가맹 팀들이 돌아가면서 맡는 원칙이 세워졌고, 선수들의 연봉과 FA가 틀이 잡혔으며, 여자 농구 유망주 육성을 위해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WKBL 회관을 만들었고, 자체 방송국인 WKBL TV도 만들었다. 참고로 김원길 총재는 시즌 때 말 그대로 매일 농구경기 관람할 정도로 열정적인 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원길 총재 체제의 가장 큰 업적은 구리 KDB생명 위너스 농구팀을 만들어 팀을 여섯 개로 늘리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로서 멸망 직전까지 갔던 여자 농구는 극적으로 회생하는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김원길 총재는 정계에서 물러난 이후 구단에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고, 7구단 창단이 유력했던 교보생명 창단에 실패했다. 게다가 장기집권으로 인한 피로도가 누적되며 슬슬 교체여론이 힘을 받고 있었다. 결국 신세계 해체라는 최악의 상황과 이를 전혀 수습하지 못하고 우왕좌왕대는 모습을 끝으로 쓸쓸하게 퇴장하고 만다.
외국인 선수 제도는 초창기에 중국 선수를 영입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 뒤 KBL 처럼 드래프트와 자유 계약 선발제를 반복하면서 외국인 선수들을 영입했다. 그런데 점차 너무 수준높은 외국인 선수[8] 가 오면서 국내 선수의 기량 발전이 정체된다는 지적이 있자, 2007-08 시즌[9] 부터 외국인 선수 제도를 아예 폐지했다. 그래서 한국의 여타 프로 스포츠 중에서 외국인 선수가 뛸 수 없는 유일한 리그'''였'''다.[10]
어쨌든 한국의 여타 여자 스포츠 중에서는 그나마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축에 속한다. 다만 2000년대 후반부터 신한은행의 독주 체제가 형성되면서 결과가 뻔하다는 고민은 계속 남고 있다. 시청률 자체는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결과가 뻔하면서 모기업들의 관심도가 현저히 낮아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한 것. 심지어 단골 우승팀인 신한은행도 우승을 당연히하면서 투자에 소홀하다는 비판도 나오는 실정이다. 이런 우려는 금융권 위주의 리그 운영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던 신세계의 해체 선언으로 현실화되는 모양새다. 만일 신세계가 해체되고, 인수팀이 없어진다면 여자 농구는 IMF 이후, 다시금 위기에 빠져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결국 후임자를 찾을때까지만 재임하겠다던 김원길 총재가 계획보다 조금 일찍 사퇴했다.
그러나 다행히 새로운 총재로 최경환 전 지식경제부 장관을 추대하고, 하나은행을 끌어들이면서 신세계 인수에 성공, 일단 급한 불을 끄는데 성공했다. 대신 리그의 특성은 이제 완전히 금융권 팀들의 대리전으로 변했다. 1997-1998년 프로출범준비기간동안 프로화를 하지않고 해체한팀들이 거의 금융팀들이었다는걸 생각한다면 역사의 아이러니.
2015-16시즌 들어 리그 전체의 경기력 침체가 눈에 띄고 있다. 득점이 50점이 넘지 못하는 경기들도 간간히 등장하고 있고, 각 팀에서 에이스라고 불리는 선수들이 한 경기 2점, 4점을 기록하는 등 극도의 부진에 빠져 있는 상황. 원인으로는 국가대표 차출과 공격 14초 룰 적용 등이 언급되고 있다.
2015-16시즌에 앞서 한화그룹에서 여자농구팀을 창단할 수도 있다는 소식이 있었다. 여자농구팀이 하나 더 는다는 소식에 환영하는 팬들도 있지만, 인재풀이 얕은 여자농구계에서 한 팀을 더 창단한다는 건 무리가 아니냐며 부정적으로 보는 팬들도 있다. 결국 백지화되었다. 기사 흥행이나 홍보면에서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
15-16시즌엔 1위 우리은행과 6위 KDB생명을 제외한 2, 3, 4, 5위팀이 5할밑에서 순위를 다투는 드문 상황이 벌어졌다. 2위와의 격차가 이미 9게임정도 벌어진지라 우리은행은 정규리그 우승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이런 난전 속에서 신한은행이 구단 창단 이래 최초의 5연패, 6연패를 당하면서 5위로 미끄러졌다.
이후 국회 윤리위의 겸직금지 권고에 따라서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총재직에서 사임하고서 사무총장을 밑던 신선우 前 LG 감독이 신임 총재로 왔으나, 무능한 행정력으로 논란을 빚었고, 결국 본인이 2018년 3월에, 연임을 하지 않겠다는 인사를 밝혔고, 모든 구딘의 만장일치 추대로 이병완 前 대통령비서실장이 신임 총재로 선임되었다.
주관 중계방송사는 2013년부터 꾸준히 KBS N이 맡고 있다. 2019-20 시즌을 앞두고 다시 3년 계약을 맺었다. 현재 KBS N SPORTS와 더불어 재판매 형식으로 중계권을 얻은 MBC SPORTS+와 IB SPORTS도 2019-2020시즌부터 WKBL 중계를 시작했다. 그 채널들에서 다른 종목중계로 편성되었을 때는 골프 코리아 채널에서 중계한다. 한편 부산 BNK 썸의 홈 경기는 부산MBC에서도 볼 수 있는데 평일 경기는 다음날 오후 1시 50분에 [11] KBS N SPORTS중계 버전 그대로 녹화방송되며 주말경기는 자체 중계로 생중계된다. [12] 2019-20시즌은 변연하 해설이, 2020-21시즌은 정선민 해설이 맡고 있으며 자체 중계 시에도 경기 중 화면은 KBS N SPORTS 중계 화면을 사용한다. 정규방송 관계로 경기가 끝까지 방송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2.3.1. 관련 문서
3. 가맹 팀
4. 역대 챔피언 결정전
4.1. 챔피언 결정전 전적
굵은 글씨는 통합 우승.
5. 우승 횟수
- 팀간 대결은 다음과 같다.
- 7회: 신한은행-삼성생명 (5:2)
- 6회: 우리은행-삼성생명 (5:1)
- 3회: 우리은행-신한은행 (2:1)
- 2회: 하나원큐-신한은행, 우리은행-KB (모두 앞 팀이 2회 승리 2:0), 삼성생명-KB (1:1)
- 1회: 삼성생명-하나원큐, 하나원큐-우리은행, 하나원큐-KB, BNK-삼성생명, 신한은행-BNK, 신한은행-KB (모두 앞 팀이 1회 승리 1:0)
여담으로, 배구 리그인 V-리그 여자부에서 17-18시즌 김천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가 우승하면서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리그들 중 리그 참여팀 모두가 우승 기록이 있는 최초의 리그가 됐는데, 18-19시즌 청주 KB 스타즈가 챔피언결정전을 우승하면서 WKBL이 두 번째가 되었다.
6. MVP
6.1. 역대 정규리그 MVP
6.2. 역대 챔피언 결정전 MVP
7. 역대 타이틀 스폰서
8. 문제점
8.1. 낮은 경기 수준
현재 WKBL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선수들의 수준이 지속적으로 저하되고 있다. 이런 부분은 공격 부분에서 더욱 두드러져, 한 경기에 60점은 커녕 50점도 간당간당히 나오는 경우도 많이 생겼다. 양 팀이 60점 아래에서 접전을 펼치면 보는 입장에선 답답해서 결국 발길을 끊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이러한 저득점 경기의 결과는 '누가 슛을 잘 넣나' 보다는 '누가 실수를 더 하나' 로 판가름나게 된다. 하루에 에어볼이 10개, 턴오버가 15개는 기본으로 나오니 볼 장은 다 봤다.
결국 2021년 2월 21일 경기에서 일이 터졌다. 우리은행 55득점: BNK '''29'''득점으로 WKBL 한 팀 최저득점 신기록은 물론, 지난 2018년 12월 27일 KB와 신한은행이 기록했던 양 팀 합계 최저득점 타이기록('''84점''')까지 달성했다. 수준 저하와 저득점 문제는 단기적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서 더욱 심각하다. 득점이 많이 나오도록 룰을 바꾸기도 어렵기 때문. 거기에 KDB생명의 작전타임에서 보이는 프로의식이 결여된 모습 등등 많은 여자프로농구 선수들의 선수자질이 의심되는 행동을 보여준 것 역시 반성해야할 부분이다.
2020-21시즌은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 인해 외국인 선수 없이 국내선수로만 시즌을 진행하고 있다.
8.2. 연고지 문제
현재 WKBL 팀들이 위치한 연고지는 아래와 같다.
- 부천 하나원큐: 부천시, 인구 83만명.
- 부산 BNK 썸: 부산광역시, 인구 340만명.
- 아산 우리은행 위비: 아산시, 인구 31만명.
- 용인 삼성생명 블루밍스: 용인시, 인구 100만명.
-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 인천광역시, 인구 290만명.
- 청주 KB 스타즈: 청주시, 인구 83만명.
다만, 연고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18-19시즌 올스타전을 장충체육관에서 개최한 것이 그 예시. 장충에서의 올스타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연고지의 인구가 어느 정도 받쳐준다면 WKBL도 충분히 흥행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2019년, 부산 BNK 썸이 창단하면서 지방에 있는 광역시 팀이 하나 더 늘게 되었다. 연고지 문제는 점점 해결되는 중이다.
8.3. 부실한 여고 농구
여고 농구는 WKBL 출범 때부터 이미 기반이 약화된 상태다. 운영 중인 팀들 중 로스터 12명을 온전히 채운 팀이 거의 없을 정도이며,[27]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렇게 유소년 시스템이 붕괴가 되다보니 여자농구 구단들은 몇 안되는 선수들을 순위를 위해 쟁취해야 되는 판국이라 매우 높은 평균 연봉을 주고서라도 데리고 와야 하는 실정이다. 우스갯소리로 레이업만 할 줄 알아도 연봉 1억을 받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준에 비해 높은 연봉을 받고 있는게 현재 여자프로농구이다. 일례로 미국여자프로농구 평균 연봉이 8000만원인데 비해 16-17시즌 평균득점 8.06 4.1 리바운드 3.8 어시스트라는 평범한 기록을 보이는 임현아가 2억 5000만원에 3년 계약을 맺는 등 6개 구단이 한줌의 선수풀에서 과열된 경쟁을 보이고 있다.
8.4. 열악한 인프라
당장 KB의 청주실내체육관과 신한은행의 인천도원체육관은 70년대에 개장했다. 그나마 다른 체육관들은 2000년 이후에 개장했다지만...
경기장 시설도 시설이지만, 더욱 문제인 것은 경기장의 교통 편의이다. 지방에 있는 경기장들은 그렇다 쳐도, 수도권 경기장들 중 역세권에 있는 경기장은 도원역이 근처에 있는 인천도원체육관과 운동장·송담대역이 근처에 있는 용인실내체육관 정도 뿐이다. 수도권 교통에서 도시철도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이건 큰 문제.
또한 외지팬들의 접근성 또한 불편하다. 시외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이 근처에 있는 경기장이 전무하기 때문. 그나마 부산에 있는 부산금정체육관이 시외버스터미널 근처에 있다지만, 남자 농구팀 부산 kt 소닉붐이 이 경기장을 버리고 사직실내체육관으로 이전해야 할 정도로 외곽지역에 있다. 다행히 여기는 노포역 역세권이지만 걸어서 20분이상 걸려 가깝지 않다.
8.5. 극단적인 팀간 수준 차이
출범 초기엔 삼성생명이, 2000년대 후반에는 신한은행이, 최근에는 우리은행이 우승컵을 휩쓸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흥행의 주요 요소인 순위 싸움의 재미를 반감시킨다는 것이다. 결국 '''이기는 팀만 이기는''' 경기가 지속되며 대중들의 흥미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이는 V-리그의 남자부에서도 프로 출범 내내 삼성화재, 현대캐피탈, 대한항공 세 팀이서 챔피언을 나눠먹는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28]
8.6. 판정 문제
KBL이 쓸데없이 파울을 너무 많이 분다면 WKBL은 파울 상황에서 너무 파울을 안 불고 반대로 파울이 아닌 상황에서 쓸데없이 파울을 불어서 문제다. 괜히 여자농구가 '''격투기 농구'''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닌데, '''골밑에서 공격자에게 수비자가 팔을 치는 게 명백하게 중계화면에 보이는데도''' 정말 안 분다. 다행이 2020 박신자컵 이후 더 엄격해졌다.
2020시즌 외국인 선수가 없이 시즌을 진행해야 하는 사태에 이제는 파울콜이 전과 다르게 너무 엄격해졌다.
8.7. 보수성 및 지나친 폐쇄주의
각 구단들이 지나칠 정도로 보수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FA시장에서 자팀 선수가 나왔을 때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 선수가 그 팀에서 필요한 존재이자 에이스일 경우 어떻게든 잡고 싶은 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WKBL은 정도가 지나친 수준일 정도로 언플성 기사를 쏟아내면서 심리적으로 그 선수한테 압박을 가해 결국 재계약을 하게 만드는 수법을 여러 구단들이 사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팬들은 FA시장이 재미가 없다면서 악평을 쏟아내고 있는 지경.
외국인선수 제도 역시 수없이 변화해 나가면서 국내 센터들을 의도적으로 밀어주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000년대 중후반 외국인선수 없이 리그를 치르면서 하은주를 앞세운 신한은행 천하가 지속되면서 리그적인 재미가 사라져 팬심이 떠났던 걸 잊었는지 2020-21 시즌부터 또다시 외국인선수 제도를 폐지하면서 국내선수들끼리만 경기를 치룬다고 선포했다. 이는 경기 질적 저하가 매우 심해질 것이 뻔한 상황이다.
9. 팬덤
특정 팀이 아닌 WKBL 전체의 팬들이 모이는 곳은 크게 Inside WKBL과 WKBL JJANG, 그리고 디씨의 여자농구 갤러리가 있다. 앞의 두 곳은 다음 카페.
9.1. Inside WKBL
링크
WKBL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거의 다 모인 곳. 카페 운영진은 대개 90년대 혹은 2000년대 초반부터 여농을 봐온 사람들이다. 70년대 여농(실업 시절)을 본 사람도 존재한다. 크보 팬들이 몰린 곳에 비하면 평화로운 곳이라 할 수 있으나, 이곳 역시 사람 사는 세상... 시즌 중 심심치 않게 키배가 벌어지며 신고 게시판에는 신고자와 신고당한 자 간에 키배가 또 벌어진다. 심한 경우 서로 간에 전번 까고 통화하여 마무리 짓는 일도 발생... [29]
이곳에 모인 팀별 팬들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신한은행 팬들: 2000년대 초반 현대 하이페리온 시절부터 응원하던 사람들과 전주원, 최윤아, 김단비 선수의 팬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충성도도 높으며 응집력 또한 뛰어나다. 신한의 리즈시절에는 카페 내에서 신한까와 엄청난 키배를 벌였다. 그 때문인지 키배력으로는 카페 최강!
- 삼성생명 팬들: 90년대부터 박정은, 이미선 선수를 응원해온 팬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농팬계에 오랫동안 발을 담궜던 이들이 많아 오래 전 일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키배력과 응집력은 신한 다음이며[30] 구단에 대한 충성도는 신한보다 더 하다. 더불어 지나친 충성도와 애착을 엉뚱한 방향으로 분출한 이들도 많다. 13년 6월 기준으로 현재까지 카페에서 강퇴 내지 경고를 받은 이들이 대개 신한 또는 삼성팬들... 참고로 삼성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박정은 코치의 남편인 배우 한상진씨도 이 카페 회원이다.
- KB 팬들: 과거에는 어떠했는지 모르나, 현재는 변연하 선수를 따라 삼성에서 넘어온 팬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팀에 대한 애착이나 충성도는 삼성을 능가한다.[31] KB까가 별로 없어서인지 키배력은 삼성보다 떨어지고 KDB 팬들과 비슷하다. 다만 삼성에서 넘어온, 충성심 높은 팬들이 많기에 제대로 열받으면 삼성을 능가할 수도 있다.
- BNK 팬들: 예전 금호생명 시절 응원하던 사람들은 많이 사라지고 새로이 유입된 팬들이 대다수. 하지만 케디비 팬게시판 주요 인물들은 오랜 금호 팬들. 팀에 대한 애착과 충성심은 아무래도 신한과 삼성에 비하면 밀린다. 주로 한채진, 신정자 선수를 주로 응원하는 팬들이 많기에 키배가 벌어져도 응집력이 위 3부류에 비하면 현저히 밀린다. 키배에 있어 신한과 삼성이 방어 및 반격이라면 케디비 팬들은 주로 방어로 끝낸다.
- 하나원큐 팬들: 과거 신세계 리즈시절(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팬들과 소수의 새로 유입된 팬들로 구성. 신입 팬들과 기존 팬들이 같이 여론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2000년대 초중반 전성기 시절 이문규 감독 체제 이후 신세계의 성적이 바닥을 치자 팬들도 빠져나가고 남아 있는 팬들의 희망고문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대개 온순한 성향이라 키배는 잘 안 벌어지고 벌어지더라도 강하게 스파크가 일어나지 않는다. 위의 BNK보다도 더 작은 규모로 벌어지고 끝난다. 다만, 팬들의 구단에 대한 애착과 충성심은 거의 KB 팬들 버금가는 수준.
- 우리은행 팬들: 2000년대 중반 잘나갔을 때만 해도 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사고 친 뒤 팀이 수렁에 빠졌고, 이 꿈도 희망도 없는 기간동안 기존 팬들이 썰물빠지듯 빠져나갔다. 지금은 리즈시절 팬들, 찍던 시절 들어온 극소수와 대다수의 신입들로 이루어져 있다. 내성적이고 점잖은 분위기라 그런지 키배에 거의 맞딱뜨리지 않고 좋게좋게 끝내는 편.[34] 신입 팬들은 거의 다른 팀을 좋아하다가 12-13 시즌부터 갈아탄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대다수는 구단에 대한 애착이나 팬들끼리 응집력은 거의 최하이다. 카페내 팬 게시판 활동이 가장 뜸하다. 심지어 12-13 시즌 통합 우승 당시에도 팬 게시판 반응은 별로였다. 차라리 11-12 시즌 희망고문 시기에 팬 게시판 활동이 그나마 왕성했다. 정리하자면, 13년 현재 WKBL 6개 구단 팬들 중 온라인 활동은 가장 뜸하고 선수 개개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오프라인 상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9.2. WKBL JJANG
링크
이 곳은 Inside WKBL과 달리 카페 분위기가 삼성생명 쪽에 편향되어 있다. 사실 이 카페 구성원들은 원래 Inside WKBL 소속으로 09년, 신한팬들과 키배를 거하게 벌인 뒤 Inside를 나와서 만든 곳이다. 삼성 편향과 친목질이 어느 정도 진행된 카페로 신입 회원들이 낄 자리가 별로 없다. 홍보람 선수 팬들이 많으며 구단 관계자가 있는지 특정 회원들의 선정보가 며칠 뒤 점프볼에 실리기도 한다.
9.3. I Love WKBL
링크
Inside WKBL의 전신. 08년까지 국내 유일 여농 카페였다. 현재 Inside와 WKBL JJANG 운영진들도 원래 이 카페 소속. 이 카페 이전에 '''팬진'''이라는 사이트도 있었다고 한다. 분위기 좋게 이어져오던 카페가 08년, 당시 운영자가 사고를 터트리면서 카페 회원들이 이 카페를 떠났고 지금은 유령 카페.[36] 허나 예전 팬들이 제작한 자료들이 조금은 남아 있기에 혹시 WKBL 팬들의 고대 자료에 관심 있는 팬들은 한 번 방문해 보길(물론 가입과 등업 신청은 필수다).
9.4. 디씨인사이드 한상진 갤러리
여자농구 갤러리가 생기기 전, 여자농구 팬들의 핫 플레이스. 탤런트 한상진이 삼성생명 박정은 코치의 남편이라는 이유로 여자농구 팬들이 이곳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정식 갤러리 신설도 계획하는 듯.[37][38] 이연화 선수를 갤주로 삼고 있으며 전체적인 분위기는 디시답지 않게 식물식물한 편이다.[39] 물론 어딜가나 어그로는 있기 마련. 경기 있는 날은 돈 날린 토쟁이들의 선수 까는 글이 꽤 많다. inside wkbl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 어그로꾼이 오면 '너 인싸충이지?'하는 댓글이 꼭 달린다. 소소한 갤러들의 활동으로 시간이 늦어지면 거의 정전갤이 된다. 새벽이 되면 가끔 출몰하는 점프볼 손대범 기자 덕분에 갤이 흥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14년 4월 현재 갤 구성원은 KB팬들이나 신한팬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삼성팬들도 한 두명 정도 있다.
9.5. 디씨인사이드 여자농구 갤러리
링크
2014년 10월 말경에 드디어 여자농구 갤러리가 생겼다.
10. 공인구
스타에서 제작한 공을 사용한다. KBL은 2015-2016부터 몰텐으로 바뀌었지만 여기는 여전히 스타의 것을 사용한다.
[1] 코로나-19 영향으로 인한 리그 조기종료로 인해 정규시즌 우승[2] Women's Korea Basketball League.[3] 그러나 태평양의 주축 선수였던 김영옥은 새로운 운영 주체인 신세계에서 안고 가려고 하지 않았고 그는 우여곡절 끝에 현대산업개발로 이적하게 된다.[4] 진로 맥카스는 선수 지명만 해놓은 채 모기업이 부도가 나면서 창단식도 못한 상태였다.[5] 신세계로부터 거액의 제안을 받고 입단 직전까지 갔는데, 드래프트에 포함되면서 일이 꼬였다고 한다.[6] 농구원로로 행정가이자 외교관으로 농구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인물이다. 지금도 남자농구 모범선수상은 이성구기념상으로 이름붙여 기리고 있을 정도. 이 당시 이성구 선생의 나이는 87세였다. 2002년 타계.[7] 그와 더불어 김원길 개인의 삶에도 보탬이 되었다. 김원길은 2002년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선거 경선 당시 민주당을 탈당해 후단협을 만들어 정몽준 후보를 지지하다가 노무현 후보로 단일화되자 한나라당에 입당,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때 한나라 후보로 출마했다가 탈당 행적 때문에 총선시민연대의 낙선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하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 역풍 속에서 낙선했다. 총선직후 장관 시절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정치생명이 끝장나면서 다른 사회활동은 포기하고 여자농구에만 올인한 것이다. [8] 타미카 캐칭과 같이 미국 현역 국가대표가 왔다. ㄷㄷㄷ 잘 이해가 안 된다면, KBL에 케빈 가넷, 케빈 듀란트, 르브론 제임스가 외국인 선수로 뛴다고 생각하면 된다. 역시 세계구급으로 유명한 호주의 로렌 잭슨이 온적도 있다. 이는 미국 WNBA가 그리 많은 연봉을 주지 않기 때문에 유명 선수라도 생계를 위해 알바를 뛰어야 하는 여자 농구의 상황 때문이다.[9] 이 때부터 겨울리그, 여름리그로 나눠 치르던 것을 단일 시즌으로 바꿨다.[10] 2012 - 2013시즌부터 외국인 선수 제도가 부활했고 각 구단은 1명씩 선수를 영입했다. 해당 선수들은 3라운드부터 출전했다. 2013 - 2014시즌부터는 2인 보유, 1인 출전으로 바뀌었다.[11] 19-20시즌에는 다음날 오후 1시 30분에 방송[12] 이 때문에 주말 부산 경기는 오후 2시에 시작한다.[13] 정식 프로 리그 출범을 하기 전 세미프로 리그 형식으로 개최하였다.[14] 공식적인 프로리그로는 첫 시즌이었다.[15] 전임 감독 가 선수 폭행으로 제명된 후 감독은 공석[16] 광주 연고로는 마지막이자 2020년 현재까지도 팀의 마지막 우승. 이후 우승은 커녕 챔피언 결정전도 진출을 못했다. 팀은 2006년 연고를 경기도 부천시로 옮기고 2012년에는 하나외환은행에 매각 후 2016년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으나 그마저도 무효가 되버렸다.[17] 정규리그, PO 포함 25연승으로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18] 첼시 리 사건으로 기록 취소. 준우승은 청주 KB 스타즈.[19] 13년만에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이 없는 챔피언결정전[20]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영향으로 인한 시즌 조기 종료로 인해 미개최 되었으나, 공식적으로 우승이 인정되었으므로 기술함[21]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영향으로 인한 시즌 조기 종료로 미개최[22] 챔피언결정전 우승은 아니지만 시즌 우승으로 취급받는다.[23]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가 2011년까지 연고지로 삼았다.[24] 부천 하나원큐가 2006년까지 연고지로 삼았다.[25] 다만 이곳은 충무체육관을 배구팀들이 쓰고 있어서 당장 이주할 실내체육관이 없긴 하다.[26] 체육관은 타 종목과 공유하면 된다. 미국도 체육관 하나에 하키, 농구팀들이 공유하는 게 일반적이다. 문제는 천안 같이 공유 거부를 안 한다는 보장도 없다.[27] 등록 선수 수는 2020년 현재 19팀 146명으로 팀당 평균 8명에 미치지 못한다. 이런데도 팀이 6개나 있으니...[28] OK금융그룹이 챔피언을 두번 하였고 우리카드도 코로나19로 인해 정규리그가 조기에 종료됐지만 1위를 하였다.[29] 하지만 12-13 시즌 60-70대 분들 중 일부가 경기 중 나눠주는 음료수, 상품 등을 갈취했다는 목격담이 Inside WKBL 카페에 올라왔다.[30] 위에 기술한 신한 리즈시절, 신한까들의 선봉을 맡았다.[31] 대표적인 예로 11-12, 12-13 시즌 올스타 팬투표율을 보면 국민은행 선수들은 기본 1만 표를 넘는다.[32] 13년 FA 당시 하나외환으로 이전하면서 과거가 되었다.[33] 2017년 우리은행으로 이적하면서 과거가 되었다.[34] 사실, 이 카페가 생기고 나서 우리은행에 시비건 글이 거의 없었다.[35] 13년 5월 은퇴하면서 과거가 되었다. 사실상 우리은행에서 가장 인기 높았던 선수이다.[36] 13년 초 어떤 사람이 새로이 운영자를 맡으면서 다시 시작해보려 하는것 같지만 아직은... 카페 대문만 봐도 07-08 시즌 때 그대로이다.[37] 2014년 3월부터 갤신갤에 많은 글을 올리고 있다. 일베로 간 글도 꽤 있다.[38] 허나 이선태 갤러리를 원하는 중고딩 여학생들에게 많이 밀린다;;[39] 하지만 원래가 인사이드 다음 카페에서 선수, 감독 비난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이 오는 곳이기에 앞으로는 장담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