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1. 일반적인 의미
- 景氣: 경제적인 총체적 활동.
- 京畿: 수도권이나 수도 그 자체를 일컫는 옛말.[1] 원래 주나라 봉건제에서 경京은 천자가 머무르는 곳, 즉 수도를 의미하고 기畿는 경을 둘러싸고 있는 땅으로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직할지라는 의미이다.[2] 당나라는 이 개념을 행정에 그대로 적용해서 수도 인근에 경현과 기현을 두었는데 이것이 행정구역 경기의 유래이며, 이를 당나라 주변국들이 수용해 각국에서 현지화되었다. 즉 신라에서는 경주시 근처가 기(畿)였고,[3] 일본의 긴키(近畿) 지방의 유래도 마찬가지이다.[4]
- 競技: 운동에서 규칙을 통해 겨루는 일. 첫번째 의미와 엮어서 KCC창호에서 광고를 만들기도 했다.
- 驚氣: 어린아이가 경련을 일으키는 병의 총칭. 이 단어만 읽을 때 [경끼]로 읽는다.
2. 후한 말의 인물
경기(삼국지) 문서로.
3. 춘추시대 말의 인물
慶忌
생몰년도 미상
춘추시대 오왕 료의 아들.
용맹이 뛰어나 각국에서 그를 등용하려고 할 정도이며, 만인지적으로 짐승을 잡거나 손을 늘려 날아가는 새를 잡았다고 한다.
공자 광이 자객 전제(専諸)를 이용해 오왕 요를 죽이고 합려로 즉위하자 경기는 복수를 위해 위(衛)나라에서 군사를 준비했는데, 오자서는 경기를 제거하기 위해 요리(要離)라는 인물을 합려에게 추천한다. 이때 요리가 내놓은 계책은 극단적인 고육책으로, 합려는 요리를 역적으로 매도하며 오른팔을 자르고 요리의 처자식을 불에 태워 죽인다. 이렇게 경기에게 접근한 요리를 경기는 의심없이 맞았으며, 그의 말에 따라 오왕을 탈환할 준비를 한다.
행군 도중 장강을 건널 때 경기는 요리에게 찔렸으며, 찔리고도 그 용력으로 여러 번 요리의 머리를 쳐박았다. 이에 군사들도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하루에 두 명의 용사가 죽을 수 없다면서 요리를 오나라로 보내라 명하고 숨을 거두었다.[5]
훗날 조위의 조휴가 오나라 주방#s-2이 자기 머리카락까지 잘라가며 거짓 항복으로 속이자 가규가 이 고사를 언급했다. 그러나 조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결국 주방의 계략에 넘어가 대패하고 만다.
4. 고려시대의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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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근처의 지역. 한자는 京畿로 아래의 경기도와 같다. 이 쪽이 원조. 고려의 수도는 개성이었으므로 개성과 그 주변을 포함하는 행정구역이었으며, 다만 아래의 경기도가 조선 팔도 중 하나로 쳤던 것과 달리 고려의 경기는 5도 양계 중의 하나가 아닌 중앙정부 직할지로 간주되어 도(행정구역) 자가 붙지는 않았고(그래서 '경기도'가 아니라 '경기'다) 범위도 아래의 경기도보다 좁았다.
왜인지 고려시대 행정구역을 나타낸 지도에서는 십중팔구 색깔을 달리해서 다른 5도 양계들과 구분은 해놓는데, 경기라는 이름이 안 적혀있어서 이게 고려시대의 경기인지 뭔지 학생들은 잘 모른다.
고려시대에는 수도 개성 외에도 서경(西京, 평양), 동경(東京, 경주), 남경(南京, 양주,서울[6] )에도 각자 서경기, 남경기, 동경기가 있었다. 공민왕 대에는 경기가 경기우도와 경기좌도로 갈라졌다.
고려의 행정구역을 나타낸 지도에서는 잘 표현되지 않지만 고려 말에는 경기의 범위가 상당히 확장되어서 다른 도들과 비슷한 크기만큼 커졌다. 완전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지금의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개성을 중심으로 황해도 동쪽 절반과 경기도 북쪽 절반쯤을 합친 것이 고려 후기의 경기였다.
고려가 망한 뒤에는 경기의 경, 즉 수도가 개성에서 남쪽의 한양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한양을 중심으로 경기의 영역을 재편하고[7] 기존 경기의 중심이었던 개성도 한양의 주변지역으로서 경기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중앙정부 직할지가 아닌 다른 도들과 같은 광역 지방행정구역인 경기'도'로 바꾸었으며, 경기(도)에서 제외된 지역을 황해도와 강원도로 이관했다.
5. 조선시대, 대한민국의 지명
京畿道
조선시대의 수도 한양 주변을 아우르는 행정구역으로 잠시 23부제가 시행되었던 때를 제외하면 현대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를 포함한 경기 지역은 수도권(대한민국) 문서로.
현재 대한민국의 행정구역 경기도는 경기도 문서로.
[1] 경기고등학교나 경기대학교의 경기가 바로 이 뜻으로 쓰인 것이다.[2] 원래는 천자가 다스리는 나라가 방(邦)이고 제후들에게 나눠준 봉토가 국(國)이고, 제후가 다시 자신의 봉신들에게 분봉한 봉토가 경대부가 다스리는 가(家)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한고제 유방이 등장하면서 피휘가 이뤄져서 방은 사용되지 않고 국이 나라를 의미하게 되었고 경과 대부의 봉토였던 가는 가문이라는 의미로 변했다.[3] 서라벌 시가지를 중심으로 동기정(停), 서기정, 남기정, 북기정이 둘러싸는 형태의 행정구역이었다.[4] 현재 일본의 수도는 도쿄이지만 왜 오사카 근교의 간사이 지역에 이런 이름이 붙었냐면,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의 수도는 교토였던 전통이 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지금도 도쿄를 함부로 서울 경(京)자로 약칭하지 못하여 도메이 고속도로의 경우 교메이(京名)가 아닌 도메이(東名)로 명명하게 되었다.[5] 그러나 요리는 오나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왕을 위해 처자식을 죽였으니 어질지 못했고, 선왕의 아들을 죽였으니 의롭지 못했으며, 내 몸을 해쳤으니 지혜롭지 못했다" 라며 자결했다.[6] 고려시대때 남경은 지금의 서울이다. 그당시 서울지역이 양주에 속해있었다.[7] 기존 양광도의 서북부를 경기(도)에 편입하고, 양광도의 잔여지역을 충청도로 개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