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식 교육
1. 개요
스파르타의 교육 제도를 뜻한다. '아고게 (Άγωγή, agoge)'라고 부른다.
'''진짜 스파르타식 교육'''은 당대[1] 에나 현대에나 '''스파르타를 말아먹은 최악의 실수'''로 인정받는다. 현대보다 지식의 폭이 좁아 상대적으로 비과학적이었던 고대에도 문제점을 지적받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훈련 과정은 똥군기의 극치였고, 아이들의 생명이나 정신건강 따위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가혹한 훈련 때문에 죽거나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일부는 살아남았지만, 그렇게 훈련을 못 견디는 아이들을 버려가면서 평생 싸우는 것만 배운 소수의 엘리트 전사들로는 도시국가 주변을 정복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리스 전체의 패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스파르타 군대가 강력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같은 학자들은 무자비한 가혹행위를 통해 양성된 전사 한명 한명의 전투력과 근성이 그야말로 일당백이었다고 '''착각했지만,''' 정작 스파르타 군대는 그렇게 압도적으로 잘 싸웠던 군대가 아니었다. 분명 수십 년 동안 훈련받고 중무장을 갖췄으니 헤일로타이 저항세력이나 중소 폴리스의 군대보다는 당연히 잘 싸웠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보면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서로 여러 번 승패를 주고받았으며, 이후로도 다른 폴리스의 군대보다 압도적으로 잘 싸웠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결정적으로 레욱트라 전투에서는 6000명의 테베 동맹군에게 2배가 넘는 군대로 맞섰음에도 전멸하여 30년의 짧은 전성기의 종지부를 찍는다. 결국 훨씬 짧은 훈련과 인간적인 생활로도 스파르타와 맞먹는 군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고, 스파르타의 비인간적인 훈련이 얼마나 심각한 낭비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때문에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파르타를 엄청나게 비판한다.
현대에 와서도 훈련이 잘 된 군대의 가치는 매우 높지만, 이는 스파르타가 추구했던 것처럼 병사 하나하나의 스펙을 올리는 방향이 아니다. 물론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도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전술 훈련을 통해 실전에서 어떻게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하는지 아는 것이 그보다 몇 배는 더 중요하다. 뛰어난 참모장과 더불어 병사들 간의 호흡이 잘 맞아 떨어져서 여러 번의 어려운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게다가 스파르타의 훈련이 일대일 전투에서 유의미한 스펙 상승을 불러왔냐면 그것도 '''아니다.''' 오랬동안 고문에 가까운 가혹행위를 참아왔으니 고통을 더 잘 참을 수는 있었지만, 스파르타 군인들은 사실상 인격이 말살된 인형에 가까웠다.
스파르타의 시민들 가운데에서 아고게를 면제받을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이들은 바로 왕의 아들들뿐이었다. 스파르타 왕의 아들, 특히 후계자가 될 남자아이들이 행여라도 아고게의 혹독함을 견뎌내지 못하게 될 때에 닥쳐올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위를 계승할 확률이 높은 왕의 아들들은 아고게를 거치지 않고 따로 군사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다만 왕위 계승 순위가 떨어지는 왕자들은 아고게를 수행했다. 테르모필레 전투의 활약으로 유명한 레오니다스 1세가 대표적이다.[2] 그리고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스파르타인 본인들도 아고게가 '''보통 사람들이 평범하게 소화할 수 없는 미친 짓'''이라는 것을 시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소리다.
2. 현대의 쓰임
현대에는 스파르타식 교육이라고 하면 비유적인 의미로 강압적이고 행동의 자유를 제약하는 빡센 공부법을 의미한다. 기숙형 재수학원 같은 곳들이 대표적. 물론 과거 스파르타에서 했던 것 정도는 아니다. 원초적인 의미에서의 스파르타 교육은 앞서 언급되었듯이 당대에도 비판받았고, 현대에 이런 교육 방식을 시행하는 곳이 있다면 엄청난 비난을 받을 것이다.
3. 교육 방식
3.1. 출생
스파르타의 혹독한 교육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된다. 아이가 태어나면, 다섯 명의 검사관들이 '레세'에서 꼼꼼한 검사를 거친다. 남자아이는 골격에 이상이 있거나 기형, 혹은 지나치게 작게 태어나면 절벽에 떨어뜨려 죽였다. 여성의 경우는 강인한 전사를 낳는 근원이었으므로 귀중하게 생각되었다. 생식기 부위가 이상이 없는지 하체부분이 빈약하지 않은지를 보았다. 여성 또한 16세 이후 2차성징 징후가 나타나지 않으면 절벽에 떨어뜨려 죽였다.
3.2. 합숙 시작
7살까지 집에서 아버지에게 기본적인 전투상식과 소양, 철학, 예절을 배운 뒤 남성들은 7살이면 전사가 되기 위해 아고게(ἀγωγά)를 시작한다.
사내 아이들은 이때부터 집을 떠나서 집단 합숙을 하면서 교육을 받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7살부터 30세까지 군대에 복무'''하게 되는 것이다.[3] 즉, 스파르타식 교육에서 부모와의 접촉과 가정의 따스함은 사치에 불과하다.
입소 즉시 '''벌거벗겨서 채찍질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채찍질을 당하는 동안 비명을 참는 아이들만이 합격이라는데 그렇지 못한 아이는 계속 채찍질을 때렸다고 한다. 아래 생활 방식을 보면 짐독으로 안 죽는 게 이상해 보일 정도다.
합숙지에서 아이들의 침대는 풀을 뜯어 모아서 만들어야 했다. 겨울에도 이불을 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풀 안에 가시를 섞어 놓았다'''. 겨울에 푹 잠들면 얼어 죽으므로[4] 자다가 찔려서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목욕은 '''1년 중 단 몇 번밖에 할 수 없었다'''. 이런 비위생적이고 가혹한 환경 때문에 부상과 질병에 수시로 노출되었음은 물론이다.
3.3. 전투 훈련
합숙 일주일 동안 적응이 끝나면 곧바로 우리가 '스파르타식 훈련'이라고 부르는 훈련에 돌입한다. 하루 24시간 중 거의 10시간을 군사훈련으로 보내며, 기초체력 훈련, 창술, 방패술, 방진, 검술, 근접전, 박투, 레슬링 등을 배웠다. 하루에 평균 7시간의 수면시간과 1시간의 식사시간이 주어졌다.
이 전투 훈련은 음악에 맞춰서 집단으로 춤을 추듯이 행해졌는데, 행군은 물론 창술, 방패술, 검술 등 각각의 분야에서 일정하게 정해진 동작 대로 음악에 맞춰서 움직이는 훈련을 했다. 이렇게 설명하면 뭔가 기묘해 보이는데, 중국권법에서 흔히 하는 투로 수행, 태권도의 품새와 비슷한 무술 수련 방식이 있었다고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음악에 맞춰서 일정한 체조를 하면서 체력과 무술 기술을 동시에 단련했던 것이다.[5]
2주일에 한번씩 훈련생들을 모아놓고 둘로 무리를 나눠 배운 것들을 시험했다. 시험에서는 정확한 대열유지, 신속한 대형교체, 방패술의 팀워크 등이 시험되었다. 또한, 1:1 레슬링을 벌이기도 하였다.
훈련생들은 식용초와 독초에 대한 구분법을 엄격하게 암기해야 했다. 여기까지는 그런데로 쓸만한 실용적인 지식이지만 스파르타는 그걸 넘어 실제로 독초에 대한 면역력을 키운다는 미명하에 이들은 이틀에 한번씩 '''소량의 독초를 복용해야만 했다'''.
3.4. 학문 교육
하루 2시간씩 총 6시간 동안 수학, 문학, 철학을 배웠다. 하지만 이들의 교육은 글을 읽고 쓰고, 간단한 계산을 하는 것 정도로 끝났다. 생각 많은 전사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은 잘했다. 아테네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스파르타인들은 수사법의 달인으로, 꼭 필요한 말만 가끔 가끔 하지만 그때마다 치명적인 언변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과묵한'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laconic'의 어원이 바로 이 스파르타가 있던 라코니아 지방의 이름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스파르타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스파르타인들은 적이 얼마나 되는지를 묻지 않는다. 다만 '''적이 어디에 있는지 물을 뿐이다.'''" 또 소크라테스 대화편에서는 프로타고라스가 스파르타인은 모든 면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모르는 척'''을 할 뿐이라며 그들과 대화를 하면 짦은 언명으로 그대의 지식은 어린애 수준임을 폭로시켜 줄 것이라고 말했다. 프로타고라스가 소피스트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임을 감안하면 의심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3.5. 인내심 단련
스파르타인들은 맞으면 맞을수록 피부가 단단해진다고 생각했다. 15세 이전에 일 년에 한 번씩 훈련생들을 나무 형틀에 묶어놓고 회초리나 채찍으로 온몸을 피멍이 들어 터질 정도로 때렸다. 그 다음, 뜨거운 물을 수차례 몸에 끼얹어 피부를 연하게 한 다음 자갈밭에 굴렀다. 그렇게 하면 피멍이 든 곳이 약해져 터지는데, 그때 차가운 강물에 재빨리 몸을 담가 몸을 식혔다. 그렇게 하여 전신의 피부를 단단하게 단련시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단련법에 견디지 못하고 쇼크사나 파상풍으로 죽는 아이들도 있었다. 방법이 잔인하고 무식해서 그렇지 맞으면 맞을수록 피부가 단련된다는 이야기는 아주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굳은살이 박히는 것도 있고, 타격에 대한 정신적인 저항력이 강해지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피부에 굳은살이 배어 작은 자상에 대한 어느정도 두꺼워진 피부의 저항력이 올라가 격렬한 전투나 행군중의 작은 긁힘이나 베임같은 왠만한 작은 자상엔 갑옷이 커버하지 못하는 부위가 크게 안다치는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칼이나 창 같은 날붙이에 베여도 버티는 금강불괴가 되는건 아니었다.
거기에 근본적으로 이 아이들은 15세 이전, 그러니까 아직 성장중인 아이들로[6] 아직 뼈와 근육이 다 자라지 못한 이 시기에 아동을 험하게 때렸다가는 평생의 장애를 가져올 수 있다. 결국 훈련이라는 변호조차 못 할 고문이고, 앞으로 전사로 자라날 인재들을 죽이거나 장애인으로 만드는 짓밖에 되지 않는다. 물리적인 효과보다는 차라리 정신적인 효과, 그러니까 지속되는 고통으로 개개인의 정신을 왠만한 고통엔 인내하고 쉽게 참을수있게 만들거나 두려움엔 둔감하게 만든다던지 죽음의 공포에 보다 무감각하게 만들거나 하는 '''원시적인 인격 말살 효과''' 혹은 '''정신력 단련 효과'''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군사적으로 신체 단련의 필요성을 경시하거나 단련하지 않는 군대는 없었지만, 스파르타식 교육은 정도가 심하고 비효율적이었다.
아고게의 일환으로 스파르타에서는 소년들을 대상으로 채찍질을 하고, 소년들은 채찍질을 버티는 것을 겨루는 대회가 있었다. 이 대회는 로마 제국 시대까지 지속되었는데, 로마 제국 시대에는 그냥 관광용 퍼포먼스였다.[7]
3.6. 전사로의 인정
12세가 되면 자신이 입던 셔츠를 반납하고 망토를 걸쳤다.[8] 이것이 스파르타의 군복 역할을 했다. 12세가 된다는 것은 어엿한 '전사'로 취급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 300에서처럼 거추장스럽게 망토만 두르고 알몸으로 싸우지는 않았다. 전신을 갑옷으로 두르고 나서[9] 망토를 걸치고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망토를 벗어던지고 전투에 임했다.
16세가 되면 저녁은 부대에서 먹었지만 나머지 두 끼는 알아서 구해먹어야 했다. 알아서 구해먹는 방법은 단 하나, 마을로 내려가서 음식을 훔쳐먹는 것이었는데 상대가 노예 계급인 헤일로타이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권장했다.[10] 물론 시민들에게도 훔치도록 엄격한 교육을 시행했다. 음식을 훔치다 걸리면 죽도록 두들겨 맞았는데, 두들겨 맞은 이유는 음식을 훔쳐서가 아니라 '''들켰기''' 때문이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떤 소년이 여우를 훔쳤다가 죽었는데, 품 속에 안겨있던 여우가 갑갑함을 못 이기고 소년의 내장을 물어 뜯어서 그렇게 됐다고 한다. 여우 주인의 언급에 따르면 소년이 여우 주인에게 붙잡혀 심문받는 중이었는데, '''들키지 않기 위해서 아픈 척도 안 하고 계속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고 있다가 갑자기 쓰러졌다고 한다.'''
도둑질과 살인은 심지어 철저하게 긍정하고 권장되어서, 최후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강자라는 그야말로 스파르타다운 약육강식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3.7. 통과의례
10년 이상을 보내고 20살까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전사로 인정받기 위해서 또 다시 목숨을 건 훈련과 선발과정을 거친다. '''스파르타의 노예계층 마을, 그러니까 메세니아 지방을 습격하여 노예로 삼은 헤알로타이들을 죽이는 것.''' 들통나면 법의 처벌을 받는데, 실제 행해졌는지는 불명. 애초에 이런 짓거리를 하면 노예들이 너죽고 나죽자고 다 같이 자포자기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기록상으로 남아만 있고 실제로는 그런 짓까지는 안했다는 주장도 많다. 다만 불순분자에 속하는 헤일로타이를 암살해 의도적으로 반란을 차단할 때 일부러 소년들에게 통과의례로 시켰을 가능성은 있으며, 기록에 헤일로타이들이 자주 반란을 벌이다 진압된 것으로 보아 실제로 벌인 짓일 가능성도 높다. 물론 이거 말고도 메세니아-라코니아가 스파르타에 반란을 일으킬 이유는 차고 넘쳤지만...
아고게를 끝낼 20세가 되면, 최후의 통과의례 혹은 졸업시험으로 산에 창을 들고 홀로 올라가 야생동물을 잡아와야만 했다. 영화 300에서처럼 육식동물을 잡은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 산양이나 사슴 같은 초식동물을 잡아오는 편이었다. 그러나 훈련생들은 늑대나 멧돼지를 사냥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는데, 이유는 강한 동물을 잡아올수록 자신이 강한 전사임을 입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1]
[1] 아고게의 악영향을 그때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비록 성차별적 오류가 있었으나 아고게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했다.[2] 레오니다스는 비록 왕자였으나 형이 둘이나 있었기 때문에 아고게를 거쳐야 했다. 두 형이 모두 죽는 바람에 예기치 않게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3] 현실로 치자면 유치원 졸업 1년 앞둔 나잇대부터 시작해서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갖다가 죄다 군대에 부어버리는 짓이다.[4] 사실이긴 하다. 너무 추운 곳에서 잠들었다가 영영 깰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어서 혹한지에서 조난당할 땐 잠들지 않거나, 누가 옆에서 깨우는게 중요하다. 사실 이 추울 때 잠이 온다는것부터가 단순히 피곤해서 그런게 아니라 몸이 견디질 못해서 의식을 잃는 과정이다. 그래서 그 전에 스스로 깨어나거나 누가 깨워주는게 중요한 것. 이는 저체온증의 증상 중 하나로 실제로 저체온증 상태에서 수면까지 겹치면 죽을 확률이 높으며, 전문가들도 잠들기 전에 깨어나야 한다고 말한다.[5]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페르시아의 전사 양성 체육 프로그램인 주룩하네도 타악기를 곁들여 음악에 맞춰 동작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6] 영양보충이 부족할 리 없는 현대에도 남성은 만 20세까지 성장하는 경우도 있는만큼 이 시대에는 더했을 것이다. 흔히 어른들이 조금 키가 작은 중고등학생에게 군대 가서도 큰다 라고 말하는게 이것이다.[7] 로마 제국 시대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높이 사서 속주세를 면제해줬는데 취급이 미묘하게 달랐다. 아테네가 문화 도시라면 스파르타는 관광 도시였다. 산천이 아름답고 문화유산이 대단한 관광이 아니라, 스파르타인의 풍속을 보고 원주민 보듯이 '관광'을 즐겼다는 것이다. 21세기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서구 사람들이나 우리들이 외국, 특히 개도국 쪽의 관광 쇼를 보고 즐기는 것을 생각하면, 이 당시 스파르타의 취급이 어땠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8] 영화 300처럼 붉은 망토는 아니었다. 그 당시 붉은 망토는 희귀한 물건이었다.[9] 하지만 스파르타는 가난했던 도시국가라서 흔히 생각하는 그리스식 갑옷으로 무장한 중보병은 매우 적었다고 한다. 대부분은 철로 만든 중갑옷보다는 가죽으로 만든 경갑옷을 입고 다녔으며, 그리스 전역에서 그랬듯 천으로 만들어졌던 린넨 갑옷도 각광받았을 것이다.[10] 일부러 건장하고 힘센 헤일로타이들을 죽이게끔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살려두면 혹시나 반란의 주동자가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11] 그러나 만일 만났더라도 사냥 성공할 가능성이 적기도 한데 알다시피 늑대와 멧돼지는 동물들 가운데 가장 강한 편에 속해서(특히 늑대는 무리 지어 다닌다.) 아무리 창 한 자루를 쥐어줘도 인간이 사냥하기란 무척이나 힘들다. 질긴 가죽과 더불어 사나움을 비롯해 엄청 빠른 기민함이 제 아무리 강하게 훈련 받은 스파르타인일지라도 결국은 사람이기에 이런 맹수들을 사냥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사실 산양이나 사슴도 늑대나 멧돼지에 비해 안전한거지 인간보다 일단 훨씬 민첩한데다 작정하고 얘들이 들이받는다면 인간 쪽이 더 크게 다친다. 그나마 인간이 맨손으로 안전하게 잡는게 가능한건 저것들보다 더 작은 토끼같은 소동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