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성당
1. 개요
서울에 세워진 3번째 성당이자, 서울에서 첫 번째로 지정된 근대문화유산 국가등록문화재 제230호 (2006년 3월 지정)
2. 역사
2.1. 태동기
1866년부터 서울 혜화동 일대에 가톨릭 신자들이 거주하여 1918년에 '동소문 밖 공소'[3] 가 설립되었다, 그에 앞선 1909년, 제8대 조선대목구장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의 요청으로,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베네딕토회가 조선에 진출했다. 베네딕토회 수사신부들과 평수사들은 서울 백동(栢洞, 혜화동) 일대 3만 평의 땅에 수도원[4] 을 건설했고, 이 일대의 교우들은 거의 모든 미사와 성사를 이 수도원 성당에서 보았다.
1921년에 원산(元山)교구가 경성대목구로부터 분리되자, 한국 최초의 남자 수도회인 베네딕토회가 그 지역 포교를 맡게 되어, 1927년 혜화동에서 함경남도 원산시 인근의 덕원으로 수도원을 옮겼다.[5] 백동 교우들은 예전 수도원 성당을 비롯한 부대시설을 기반으로 삼아 본당 설립의 기틀을 다졌다.
제8대 경성대목구장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대주교는 1927년 10월 7일 종현본당(현재 명동성당)으로부터 혜화동 일대를 분리하여 새 본당을 설립였고 파리 외방전교회 지사원(Pierre Chizallet, 베드로) 신부를 초대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백동(혜화동) 본당은 약현본당(1893년 창설)과 종현본당(1898년 창설, 현재 명동성당)에 이어 서울의 3번째 본당으로 탄생하였다.
제2대 주임 서기창 프란치스코 신부는 1929년 백동으로 이전한 소신학교[6] 에 옛 수도원 성당을 양보하고, 대신 수도원 부속 건물이던 목공소를 성당으로 개조하였다. 아드리앙 조셉 라리보[7]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고 주보를 ‘성 베네딕도’로 정했다.
제3대 주임 오기선 요셉 신부는 1937년 ‘어린이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배우게 하여 민족의 얼을 심겠다’는 취지로 ‘혜화유치원’을 설립했다.
제4대 주임 성재덕 베드로 신부[8] 는, 1943년 성탄절에 성가소비녀회(聖家小婢女會)라는 수녀회를 창설했다.
자료 : 가톨릭대사전, 혜화동 성당 누리집, 가톨릭 성지
2.2. 자성당 분할
이렇게 서울 지역 내에 본당 수가 적을 때였으므로 신설 혜화동 본당의 관할구역은 매우 넓었다. 남으로는 흥인지문 밖, 서쪽으로는 광희문 밖, 북쪽으로는 종로 3가를 경계로 동소문에 거쳐 그 이북 지방을 관할하는 실로 광대한 넓이였다. 서울을 벗어나서는 경기도 광주군을 비롯하여 양주군, 고양군의 3분의 1, 용인군 일부가 혜화동 본당 관할지역에 속했고 공소 또한 많았다.
이후 신자가 증가하자 혜화동 성당은 1939년 첫 번째 자본당으로 제기동 본당을 분할하였으며, 이어 1945년에는 2번째 자본당으로 미아리 본당, 1955년 3번째 자본당으로 돈암동 성당, 1975년 4번째 자본당으로 성북동 본당을 분할하였다.
2.3. 신축 성당 축성 (발전기)
새 성당 신축은 1950년 9월 서울 수복 이후 11월 7대 주임 정원진 루가 신부가 부임하여 추진하였다. 1954년 숙원이던 성당 신축 기성회를 조직하였고, 1958년 성당 신축 정초식을 거행하면서 본당 주보성인을 기존의 ‘성 베네딕토’와 더불어 ‘성녀 소화(小花) 데레사’로 정했다.
8대 주임 장금구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신축 성당과 사제관(1층)을 완공하여 1960년 5월 노기남 바오로 주교의 집전 미사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9]
1970년에는 강당(2층)을 증축하였고, 1972년에는 성모상 건립 및 조경 공사를 완료하는 등 성당 주변 환경을 단장하였다. 1975년 12월에는 새 사제관(2층)의 축복식을 거행한 뒤 ‘순교 복자 79위 시복 50주년 기념 사제관’으로 명명하였고, 이어 1977년 7월에는 ‘103위 순교 복자 성화’를 제작하였다. 또한 1979년 7월에는 성당 제대 후면 벽을 도자(陶磁)로 장식하였으며, 1980년 3월에는 성당 오른쪽 유리창을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하였다.
3. 교회 미술의 보물창고
3.1. 본당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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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 성당(등록문화재 제230호) 건립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으로 재직 중이던 장발(張勃) 루도비코(1901-2001)[10] 화백의 지휘로 이루어졌으며, ‘절두산 순교성지 기념관’의 설계자이기도 한 건축가 이희태(李喜泰) 요한(1925-1981년)가 설계했다. 그는 기존 성당의 개념을 거부하고 개성을 살려나간 독창적인 건축가였다.
국내파 건축가로 철저하게 독자적이고 비주류적인 건축인생을 살았던 이희태의 작가의 소신이 녹아 있는 본당 건축은 단순명료한 기하학적인 형태, 비대칭적 입면구성 등 기존 성당 건축의 정형된 틀을 깬 독자적 양식으로 1960년대 이후 교회 건축의 한모델이 되었다.
특히 당시 한국 성당 건축에 보편적으로 쓰이던 붉은 벽돌을 쌓는 고딕양식에서 벗어나 모더니즘 건축 기법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근대적인 모습 띠고 있다.
기념비적인 크기의 계단 위에 올려진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단순한 상자형으로 지어졌고 내부는 기동이 없는 장방형 평면의 강당형 공간을 이루고 있다.[11]
(혜화동 성당 홈페이지)
3.2. ‘최후의 심판도’ 화강석 부조
성당을 정면에서 바라볼 때 먼저 눈에 띄는 현관 위 ‘최후의 심판도’ 화강석 부조는 1961년 김세중 프란치스코(金世中, 1928-1986년) 서울대 교수가 원도를 작성하고 장기은(張基殷, 1922-1961년) 교수와 함께 조각한 이 부조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라”(요한 복음서 14,6), “천지는 변하려니와 내 말은 변치 아니하리라”(루카 복음서 21,33)는 성경 구절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4명의 복음서 저자[12] 상징이 좌우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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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정면 현관 위벽에는 ‘최후의 심판도’ 를 표현한 대형 부조가 자리잡고 있고 왼쪽 붉은 벽돌로 쌓은 종탑에는 주보성인인 성 베네딕토 상이 걸려있어 전체적으로 개성과 균형미를 갖추었다.
서울에서 첫 번째로 2006년 3월 2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30호로 지정된 혜화동 성당은 본당 설립 당시 성당이 아니라, 1960년 5월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문화재청은 아직 50년도 되지 않은 혜화동 성당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붉은 벽돌조 종탑의 대비를 통한 균형미, 비대칭 입면구성 등은 당시 고딕 양식으로 정형화되어 있던 성당 건축의 틀을 깨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건축되는 근대적 성당 건축의 모형이 되는 기념비적 건물이다. 또한 조각가 김세중의 부조 작품으로도 유명하며, 종교사적ㆍ건축사적ㆍ미술사적 가치가 있다.”
3.3. 103위 순교 성인화
혜화동 성당에 있는 수많은 성물들 가운데 일반 신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것으로는 제대 앞 오른쪽 벽면에 걸려 있는 ‘103위 순교 성인화’(1977년, 285×330㎝)를 꼽을 수 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한국 103위 순교성인 시성식을 계기로 한국 천주교의 공식 성인화가 되다시피 한[13] 이 그림은 문학진(文學晋) 토마스 화백이 10개월 동안 전례 · 역사 · 복식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은 뒤 한국적 주체성을 살려 103위 한 분 한 분의 표정을 특색 있게 그려낸 것이다. 시대와 신분이 각기 다른 순교자들이 기쁨에 가득 찬 모습으로 천국 개선을 기다리는 이 그림은 보는 이에게 푸근한 감동과 평화를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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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그 외 성미술품
그 외에 대작만 꼽아도 이남규 루카(李南圭, 1931-1993년) 교수의 유리화 29점이 있고, 권순형(權純亨) 프란치스코 교수가 ‘성사’라는 주제로 제작한 제대 뒤편 도자 벽화가 있다. 김세중 교수가 1958년에 청녹색 대리석으로 제작한 제대는 당시 본당 사목회장이었던 장면 요한(張勉, 1899-1966년) 전 국무총리가 본당에 기증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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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규(루카)교수가 1980년과 1989-1991년에 걸쳐 제작한 유리그림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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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중(프란치스코) 교수가 1958년 청동으로 제작한 십자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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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부활 성수대는 이종상(李鍾祥) 요셉 화백이 1994년에 제작한 성수대 위에 임영선(林永善) 교수가 제작한 예수 부활상을 얹은 합작품으로, 상반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관을 쓴 채 못 자국이 선명한 두 손을 포개 얹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 성당 성모상. 조각가인 최종태 씨가 1996년 제작한 석조 성모 마리아상이다. 한국적인 형태와 정서를 담아낸 성모상으로도 유명하지만, 종교의 화합을 나타낸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최종태 씨는 길상사의 관세음보살 상도 제작했는데, 이 성당 성모상과 관세음보살 상은 마치 친자매처럼 매우 닮았다.
4. 여담
혜화동 본당은 1936년 3월 수품 사제 심재덕 마르코 신부를 시작으로 2016년 2월 수품 사제 김한솔 도미니코 신부까지 성직자 34명을 배출하였다. 홋날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 은퇴한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정신적 지주로 잘 알려진 원주교구 원로사목자 신현봉 안토니오 신부, 춘천교구 교구장으로 은퇴한 장익 십자가의 요한 주교[14] 등이 혜화동 본당 출신이다.
혼인성사 장소로 꽤나 인기가 있다. 성미술품으로 가득 찬 성당 내부가 매우 아름답고 지어진 지 시간이 꽤 흘러 분위기도 있는 데다가, 도심에서 가깝고 지하철[15] 을 이용하기도 불편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다. 워낙 인기가 많은 곳이다 보니 이곳에서 혼인 미사를 드리려면 적어도 몇 달 전에는 예약을 해야 한다. 예약 일정은 성당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랜 전통을 가진 성당이어서인지, 미사 중 신앙고백으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하는 것, 성찬의 전례 중 장궤를 하는 것 등 원칙에 충실한 면을 볼 수 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삼종기도 시간에 치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성당 바로 앞 길이 편도 3차로의 큰 길로 하루 종일 차가 다니는 대로이고, 주변에 가정집이 없기 때문에 종소리가 소음 공해라는 시비에서 자유롭다.
2017년 8월말에 대대적인 바닥공사와 천장공사를 하여 낡은 바닥 타일과 천장을 새 것으로 교체하고, 천장에 거대한 원 모양의 샹들리에를 설치하여 비교적 어두웠던 성전 내부 분위기가 밝아졌다. 또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다니기에 편해졌다.
장면 박사와 탁원제 성우가 사목회장을 지냈다.
주일 미사에는 한국인 신자들뿐만 아니라 필리핀인 신자들도 많이 온다. 서울대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산하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필리핀 공동체가 있는데, 여기에 소속된 필리핀인들이 이 혜화동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기 때문이다. 공동체 소개 성당 인근의 혜화동 로터리에는 필리핀인들이 여는 길거리 시장이 열린다.
[1] 1929년[2] 1958년 6월 성당 신축 정초식이 주보 성인 추가의 계기이다. 주보성인이 복수인 또 다른 성당은, 천주교 의정부교구 덕정성당[3]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지역. 자세한 것은 공소 참조.[4] 현재 이 자리에는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이 있다.[5] 남북분단 후 북녘에서는 공산당이 종교들을 탄압했다. 많은 베네딕토회 소속 한국인과 독일인 신부, 수사, 수녀들이 순교했고, 베네딕토회는 월남하여 현재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본원을 두고 있다.[6] 중고등학교 과정의 신학교를 소신학교, 학부와 대학원 과정의 신학교를 대신학교라 한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신학교를 졸업해야 하는데, 연세 지긋하신 신부님들을 보면 중고등학교까지 소신학교를 졸업하신 분들이 많다. 현재 동성중학교와 동성고등학교의 전신인 동성상업학교에는 신학생 학급과 일반 학생 학급이 있었고, 이후 소신학교인 성신중학교와 성신고등학교가 생긴다. 그러나 성신중에 이어 성신고도 1983년 폐교되었고, 성신중고의 시설은 동성중고에 흡수되었다. 이로서 한국 가톨릭에서 소신학교는 사라지고, 대신 각 교구마다 예비 신학생 모임을 만들어 대신학교 입학을 희망하는 남학생 및 남자 청년들을 관리하고 있다. 2010년대 들어 동성고등학교에서는 예비 신학생 학급을 만들어 기숙사 생활을 시키고 기초 신학과 어학을 가르치는 등, 부분적으로 소신학교를 부활시켰다.[7]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9대 교구장이자, 천주교 대전교구 초대 교구장[8]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프랑스인 신부. 본래 이름은 피에르 생제르, 한국명은 성재덕.[9] 축성 시기는 가톨릭 대사전에는 5월, 본당 누리집에는 6월 25일로 되어 있다.[10] 장면 전 국무총리의 동생[11] 서울에 지어진 3번째 성당이지만, 앞선 두 성당과 건축 시기 차이가 많아서인지, 건축에 전문지식이 없는 눈으로 보아도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윗 소개글에도 있듯이 내부 기둥이 없으며, 이전 고딕 양식에 비해 직사각형이지만 정사각형에 가까이 간 모습이다. [12] 마태오, 마르코, 루카, 사도 요한[13] 한국 순교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하는 성당에는 이 그림의 복제품이나 이를 바탕으로 한 성인화가 반드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제 인쇄한 캔바스화, 모작 유화 같은 회화 뿐만이 아니라 스테인드 글라스, 청동 부조 등 다양한 형식으로 있다. 주보 성인이 다르더라도 사무실이든 교리실이든 소성당이든 주임신부 집무실이든 성당 어딘가에는 이 그림의 복제품이 놓여 있다.[14] 혜화동성당에서 사목회장을 지낸 장면 전 국무총리의 아들.[15] 서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과 혜화역에서 아주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