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태(1975)

 


'''김경태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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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기록
'''2004년 KBO 퓨처스리그 북부리그 최우수 평균 자책점'''

''''''LG 트윈스''' 등번호 28번'''
신동수
(1995~1997)

'''김경태
(1998~2001)
'''

최만호
(2002~2006)
''''''두산 베어스''' 등번호 36번'''
강규철
(2000~2001)

'''김경태
(2002~2003)
'''

김만윤
(2004)
''''''SK 와이번스''' 등번호 42번'''
정상호
(2001~2003)

'''김경태
(2004~2005)
'''

김종민
(2006)
''''''SK 와이번스''' 등번호 17번'''
김종민
(2004~2005)

'''김경태
(2006~2008)
'''


''''''LG 트윈스''' 등번호 64번'''
박영주
(2006~2007)

'''김경태
(2009)
'''

유경국
(2010~2011)
''''''SK 와이번스''' 등번호 71번'''
이광길
(2007~2011)

'''김경태
(2012~2020)
'''

손지환
(2021~)
''''''LG 트윈스''' 등번호 71번'''
최일언
(2019~2020)

'''김경태
(2021~)
'''

현역



[image]
<colbgcolor=#c30452><colcolor=#fff> '''LG 트윈스 No. 71'''
'''김경태
金京泰 / Kyeong-Tae Kim'''
'''생년월일'''
1975년 11월 6일 (48세)
'''국적'''
[image] 대한민국
'''신체'''
178cm, 75kg
'''학력'''
서울구암초 - 성남중 - [image] 성남고 - [image] 경희대[1]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8년 2차 1라운드 전체 7순위 (LG)
'''소속팀'''
[image] LG 트윈스 (1998~2001)
[image] 두산 베어스 (2002~2003)
[image] [image] SK 와이번스 (2004~2008)
[image] LG 트윈스 (2009)
가가와 올리브 가이너스[2] (2010)
'''지도자'''
[image] SK 와이번스 2군 재활코치 (2012~2014)
[image] SK 와이번스 루키군 투수코치 (2015)
[image] SK 와이번스 1군 불펜코치 (2015)
[image] SK 와이번스 루키군 투수코치 (2016)
[image] [image] SK 와이번스 2군 투수코치 (2017~2020)
[image] LG 트윈스 2군 투수코치 (2021~)
'''등장곡'''
다이나믹 듀오 - 고백
'''종교'''
개신교
1. 개요
2. 선수 경력
2.2. LG 트윈스 2기 시절
2.3. 일본 독립리그 시절
3. 지도자 경력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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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G 트윈스, 두산 베어스, SK 와이번스 소속의 투수.
대한민국에서 마일영과 같이 너클볼을 던졌던 선수였다.
현역 시절은 안습의 커리어에 방출, 부상의 신화(…)로 기억된다. 위의 소속 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참 이것저것 많다. LG에 입단했다가 4시즌 만에 방출, 두산에서 방출, SK 신고선수 불합격, SK 방출, LG 재입단 후 방출로 같은 팀에서 2번 방출당한 선수이기도 하다. 그 정도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평범하게 지나갈 중간계투 투수였지만, 그나마 기억되는 이유가 바로 그 너클볼 때문이다.

2. 선수 경력


성남고와 경희대 시절에는 팀의 에이스로 성남고를 2개 대회 준우승으로 이끈 선수이고, 그와 같이 경희대 때도 상당한 좌완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좋은 건 그걸로 끝'''.
1998년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계약금 2억 원을 받고 LG에 입단하여 투수 유망주가 되었으나, 성적은 평균자책점 7점대-6점대-10점대(…)로 좋지 못했고 결국 2001년을 끝으로 '''방출되었다'''. 이렇게 흘러 간 투수가 되는가 했지만, 그는 두산 베어스신고선수로 이적했다. 그리고 또 망했다. 10경기에 등판하여 8이닝 '''평균자책점 15.75'''에 4피홈런 2패에 그쳤다. 그리고 시원하게 '''방출되어''' 해외 진출을 타진, 대만 프로리그에서 뛰었으나 대만 프로리그에서도 부진한 모습을 보여 실패한 후 대한민국으로 돌아와서 잠정 '''은퇴했다.''' 사실 애초에 최고 구속이 140km/h 언저리에 불과했고, 구위가 좋지 못하다 보니 한 번 맞으면 정말 시원하게 쳐맞을 수밖에 없는 투수 유형이었다.

2.1. SK 와이번스 시절


[image]
하지만 김태한이 망한 뒤 은퇴하고, 이상훈은 마음이 떠나 에이스 이승호 말고는 쓸 만한 좌완투수가 없다시피했던 SK 와이번스에서 그를 2004년 5월에 데리고 간다. 이 때 좌완 스페셜리스트 불펜으로 활약하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다. 의외로 생각 이상으로 대활약하며, 후반기에는 SK의 불펜을 이끈다. 21경기에 등판해 연승을 기록하여 무려 5승을 가져가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SK에서 김경태의 활약은 그것뿐이었고, 2005년과 2006년에는 다시 평균자책점 5점대로 리셋되는 등 영 좋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2007년 다시 뭔가 되기 시작해, 평균자책점 2점대를 찍으며 원포인트로 활약했다.
하지만 부상으로 말아먹고 '''또 방출되었다'''. 그가 또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면 좌완 왕국인 SK에 또다른 좌완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나, SK와 프로야구가 팬이 늘기 바로 전에 방출되어 그저 아쉬울 뿐이다.

2.2. LG 트윈스 2기 시절


커리어의 황혼에 이른 그에게 너클볼이 찾아온다. 사실 커리어의 대부분은 너클볼을 던지지 않았지만, 2009년 LG에 2번째 입단을 하기 전에 불완전한 너클볼을 습득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기삿거리가 되고 기억이 되었으며 이 항목이 작성될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던졌다 뿐이지, 그 너클볼로 똑딱이 이종욱에게 홈런을 맞았고, 역시 똑딱이인 인구사와라에게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대형 홈런을 허용하는''' 등, 성적은 좋지 않아 '''또 방출되었다'''. 그야말로 안습.

2.3. 일본 독립리그 시절


그는 기를 쓰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독립리그 팀에 입단하여 활동했다. 이 때 찍은 기록은 '''31경기에 등판해 1승 2패 3세이브 14홀드, 평균자책점 1.09'''. 하지만 그걸 끝으로 독립 리그를 나와 또 한국프로야구 팀 입단을 재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멕시코로 이동하여 무려 7번째 입단을 타진한다. 하지만 레퍼런스에 별다른 자료가 없는 걸로 보아(KBO 때 자료뿐이다)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선수 생활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저렇게 파란만장한 생활을 했음에도 나이는 김재현보다 적어서,[3]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김재현은 조금 일찍 은퇴했다는 생각이 들 만하다.

3. 지도자 경력


한 때 몸담았던 팀이자 코치진이 초토화된[4] SK 와이번스의 2군 재활코치로 영입되어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재활코치 영입에 대하여 SK 팬들은 대부분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정영일SK 와이번스에 입단한 후 병역 문제로 인해 상무행을 결정하자, 에 차린 SK의 재활 캠프에서 정영일이 입소를 위해 조기 귀국할 때까지 투구 밸런스를 잡아 주기도 했다.
2015년 8월 15일 부로 김상진 1군 투수코치가 재활군으로 내려가면서 김원형이 1군 투수코치로 이동하자, 1군 불펜 투수코치로 승격되었다.
2015 시즌 후 3군 투수코치로 이동했고 2017시즌부터는 2군 투수코치를 맡고 있다.
2020 시즌 후 재계약이 불발되며 팀을 떠났다. SK 팬들은 대체로 아쉬워하는 분위기다. 최근 SK의 주축 투수로 성장한 대부분 선수들의 신인 시절에는 김경태 코치의 지도력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5] SK의 고위 관계자도 능력 문제 때문에 재계약이 불발된게 아니라 팀 분위기 쇄신 차원이라고 밝혔다.
SK와 결별한 후 친정팀인 LG 트윈스로 12년 만에 코치로서 다시 돌아왔다. SK에서 맡았던 보직과 그동안의 성과를 고려할 때 2군 투수코치를 맡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예상대로 2군 투수코치로서 지도 업무를 맡게 됐다.

4. 관련 문서


[1] 1994학번[2] 일본 독립리그 팀[3] 김재현은 프로필상 1975년생으로 김경태와 동갑이지만, 김재현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김재현의 실제 나이는 1974년생으로 김경태보다 1살이 많다.[4] 2011 시즌이 끝나자마자 김정준부터 시작하여 김성근 감독과 인연이 있는 박상열, 이홍범, 계형철, 가토 하지메, 김태균, 이철성 등의 코치들이 줄줄이 SK에 사표를 내고 만다.[5] 특히 시즌 중에는 아예 서울의 집을 떠나 강화도 퓨처스 파크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선수들의 육성에 매달렸다. SK 구단에서도 그의 성실성과 지도력에 매우 높은 점수를 줬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SK를 떠난다고 하자 퓨처스 파크에서 일하던 분들이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