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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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기아그룹 회장.
2. 상세
1932년 9월 25일,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익산 웅포초등학교, 전북공립중학교 [3]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1958년 1월, 기아산업에 공채 1기로 입사해 말단 사원으로 출발해 90년대 국내 재계 8위의 기아그룹 총수로 등극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엔지니어 출신의 경영인이였으며, 1969년 이사, 1973년 상무이사, 한국 최초의 일관공정 시스템을 갖춘 종합자동차 공장인 소하리 공장 건설을 주도했고 1977년 전무이사를 거쳐 기아그룹 입사 32년 만에 이사에 선임된 지 12년 만인 1987년에 회장직으로 취임 되었다. 그의 별명은 '''한국의 리 아이아코카.''' 1981년 기아산업 사장에 취임해 1년만에 '''봉고신화'''로 적자에 허덕이던 기아를 일으킨 과정이 아이아코카 회장 재직 때의 미국 크라이슬러 회생 과정과 비슷하다고 해 얻은 별명이다. [4][5]
자동차를 근본으로 하여 원가가 더 들더라도 제대로 된 차를 만들도록 지시해 기아그룹 실무진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으며, '새로운 경영, 새로운 일터, 새로운 기술'이라는 3대 경영방침을 세웠다. 1987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가 해제 됨에 따라 이 때다 싶어 프라이드, 캐피탈, 콩코드 등을 출시하여 승용차 라인업을 강화, 그의 노력으로 1988년 자동차 생산 1백만대를 돌파하였고, 1992년 한국 최초의 독자 고유 모델 세피아, 이듬해 자사의 두번째 독자 고유 모델이자 최초의 도심형 SUV인 스포티지 출시 및 세계시장 개척, 1995년에는 수출 1백만대, 이듬해에는 자사의 자동차 누적 생산량 500만대 기록 등 기아그룹을 재계 8위로 성장 시켰으나, 국제 경쟁의 격화,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한 경기침체, 무리한 사업 확장, 계열사의 부실한 경영 실적, 삼성의 무리한 인수추진과 갑작스런 자금 경색에 따른 일시적 위기 등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1997년 봄부터 위기설에 휩싸이다 결국 1997년 7월 15일 부도유예협약 적용대상이 되었고, 김 회장 및 기아그룹 임직원 측에서 여러 자구책을 마련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법정관리로 넘어가고 김선홍 회장 등 경영진은 완전 퇴진하게 되었고, 기아그룹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선홍 회장은 1998년 6월 기아사태와 관련하여 부실 계열사 지급 보증, 회사 공금 횡령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 된 후 2000년 6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으며, 2002년 말 특별사면을 받았다. 2003년 가을, 북한 남포공단의 평화자동차 고문을 맡으면서 업계에 복귀했지만, 얼마 못가 다시 고문직을 그만 두었으며, 오늘 날에는 교회 장로 활동과 독서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등 야인이 되었다.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교수 겸 고등과학원 석좌교수인 김명식씨가 김선홍 전 회장의 아들이며, 2016년 6월 1일, 호암상 시상식에서 과학상 수상을 받게 되었는데 이 날 오랜만에 김 전 회장의 근황이 사진에 실렸다. 유명과학자 아들의 헌사에 눈시울 붉힌 김선홍 전 기아회장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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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산 김우중 前 대우그룹 회장과 친분이 있었다. 1994년 2월 18일, 대우자동차가 서울 남산의 힐튼 호텔에서 대형세단 ‘아카디아’를 발표한 날, 김선홍 회장이 기꺼이 경쟁업체의 신차 발표식에 참석, 덕담을 건넸으며, 기아그룹 사태가 터진 직후인 1997년 9월, 두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 현장에서 만나기도 했다. 김우중 전 회장이 기아차 전시장을 찾아갔으며, “기아차가 삼성으로 넘어가면 대우차가 위험할 수 있다, 기아차를 지원하겠다”고 말했지만 기아차는 결국 현대차로 넘어갔고, 대우그룹도 1999년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2005년에는 김선홍 전 회장이 김우중 회장의 병문안을 찾아갔다. 검찰 조사를 받던 김우중 전 회장은 심장혈관 수술로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었으며, 김선홍 회장은 쾌유를 비는 덕담과 자동차 회사를 경영하던 시절을 회고했었다고 한다.# 우연히도 두 노장은 같은 광산 김씨집안. 단 김우중 전 회장의 항렬이 더 높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대우그룹, 기아그룹이 무너지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지금의 현대자동차와의 경쟁구도가 더 재밌었으리란 결과론도 있다.
-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의 지분은 불과 1%로 소유주가 아닌 전문경영인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김선홍 회장은 비등기이사였다. 이 때문인지 김 전 회장은 가끔 "나는 기아그룹 회장으로 불리기보다 기아의 대표사원으로 불리길 원한다" 고 말했다. 유사한 혐의로 처벌 받은 대기업 CEO들이 채권단의 거액소송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과는 달리 김 전 회장의 경우는 검은 돈 1원 한푼도 갖지 않았다는 점, 털어봐야 고작 가지고 있던 마지막 재산인 서울 잠실동의 한 아파트가 전부였다. 그것도 2004년 하반기 예금보험공사의 압류로 넘어갔으며, 그 이후 현재까지 미아동의 한 서민 아파트에 전세로 거주하고 있다. 기아그룹 사태 당시 검찰도 김 회장이 이렇게 가난할 줄은 몰랐다는 후문. #
- 김 전 회장은 자동차 독자기술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고, 당시 현대,대우,쌍용 등 경쟁 업체들에 비해 기술자립도가 높았던게 기아차였으며, 엔지니어의 정신으로 기술과 성능에 대한 열의 만큼은 국내 자동차 업체 중 최고였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결국 이것이 과도한 기술투자와 지나치게 많은 차종의 생산을 유지함에 따른 채산성 악화가 누적되어 그룹이 위기에 빠지게 된 원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6] 단적인 예로 옆 집에선 소형차를 베이스로 2도어 스포츠 루킹 카를 만들 때 기아는 제대로 된 스포츠카를 만들어 당시 보수적인 국내 자동차 문화에서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차를 만들어 기술 과시를 했고, 이 프로젝트 역시 임직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 전 회장 및 엔지니어들의 의지였을 정도니...
- 자사의 자동차만을 꼭 탈정도로 자사의 차들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고 한다. 대외적으로 90년대 중반까지 1세대 프라이드, 그룹이 해체되고 구속되기 전까지는 슈마를 개인 자가용으로 사용하였고, 관용차로는 포텐샤, 엔터프라이즈를 탔었다. 그룹 회장직 퇴진 후에 개인 차량으로 어떤 모델을 이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 기아산업 말단 사원 시절, 선배 엔지니어들도 고장의 원인을 모른다는 기계를 고쳐 작동시키는 등, 김철호 회장으로부터 많은 신임을 받았다. # 기아그룹이 전문경영인 체제가 된 이유는 김선홍에 대한 학산의 신임과 당시 김석환 삼천리자전거 회장이 기업의 규모에 겁에 질려 자신의 아버지인 김상문 회장[7] 에게 스스로 기업을 맡지 못하겠다고 하소연을 했다는 점을 보면 그 배경을 알 수 있다. #여느 대기업 마냥 기업의 경영권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과 달리, 기아그룹의 경우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원에게 경영권을 부여해주는 등 국내 재계에서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
4. 수상경력
- 대한민국 과학기술상 (1986)
- 한국의 경영자상 (1986)
- 은탑산업훈장 (1987)
- 금탑산업훈장 (1989)
- 인촌상 산업기술부문 (1991)
- 제 1회 다산경영상 (1992)
- 제 1회 한국공학기술상 대상 (1997)
5. 저서
- 이대로 멈출 수는 없다 - 고려서적. 1997.
6. 관련 문헌
- 아직 갈 길이 멀다 - 매일경제신문사. 1993.
[1] 아시아자동차 사장 겸직[2] 40세손[3] 현 전주고등학교[4] 기아 브리사 등 승용 라인업을 이미 갖췄던 기아산업은 제5공화국 시절 말도 안되고 어이 없는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로 인해 기아는 2륜차 사업부인 기아기연(주)를 대림으로 뺏기다시피 매각 당하고 승용 라인업이 통째로 사라져 그룹의 이윤이 한 순간에 없어지는 바람에 존망의 위기에 처했었다.[5] 봉고 코치 역시 망해가는 기아의 상황에 "망하더라도 자동차 하나 더 만들고 망하자"는 작정으로 출시 시켰는데 이것이 잭팟을 터뜨렸다.[6] 90년대의 기아차 라인업을 보면 단번에 느낄 수 있는데 프라이드와 후속차종인 아벨라가 병행 생산이 되었었고, 캐피탈과 세피아가 중복되는 등.[7] 김철호 창업주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