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철(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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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이자 국악인이다.'''실험적 음악의 작은 거인'''
엠넷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2. 바이오그라피
1957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난 그는 소싯적 TV에서 신중현의 노래와 기타 연주를 보면서 음악에 눈을 떴고, 광운공대 통신공학과 재학 중이던 1977년에 KBS 라디오 프로 <젊음의 찬가>에서 '퀘스천'이란 밴드 멤버로 데뷔해 이듬해 '작은 거인'이라는 밴드의 프론트맨[1] 으로 활동했다. 그 후 밴드 '작은 거인'은 TBC 동양방송에서 개최한 '젊은이의 가요제'에 참가하여 '일곱 색깔 무지개'로 대상을 수상한다. 1983년에는 멤버들이 여러 사정으로 떠나면서 해체했고, 집안에서도 음악에 대한 반대, 김수철 본인의 대학원 진학 등의 사정으로 '''고별 앨범'''의 형식으로 솔로 1집을 냈다.
솔로 1집에 수록되었던 '못다 핀 꽃 한 송이', '별리', '내일'[3] 등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이듬해 가수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 등 2, 3집 수록곡들이 대박을 잇달아 터뜨리면서 8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떠올랐다. 당시는 가왕 조용필의 시대로 '''가수왕 독점이 후배들에게 못할 짓이라서''' 가수왕 은퇴 선언을 한 1986년 이전까지 반짝 인기로나마 조용필보다 우위에 섰던 딱 둘뿐인 가수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82년 '잊혀진 계절'로 가수왕을 탄 이용.
'정신 차려'[4] 처럼 해학적 비판 속성의 가요들도 불렀으며
90년대 들어서는 대중가수보다 오히려 날아라 슈퍼보드의 주제곡인 '치키치키차카차카'를 만들고 부른 것으로 인기를 얻었다. 주제곡 뿐만 아니라 삽입곡들도 그가 직접 만들고 불렀다.
특히 국악의 현대화와 퓨전에 엄청난 공헌을 하였다. 대부분 대중가수들의 국악 접목 시도가 1회성 이벤트로 끝나기 때문에[5] 국악계에선 오히려 꺼려하는 분위기가 많았으나 김수철은 국악계의 명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몇 년동안 정식으로 배웠다. 그런 노력의 산물이 바로 '황천길' 과 '불림소리' 음반. 이런 활동의 연장선상으로 바로 판소리 영화 서편제의 영화음악을 담당하였고, 이 외에도 태백산맥 등 수많은 영화 음악 작업을 했다.
그의 퓨전계열 음악들 중에 대중들에게 은근히 알려진 사례로는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칠성사이다 CF인데, 비디오 아티스트의 거장 백남준이 만든 영상작품에 입힌 BGM을 작곡하여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스타일의 CF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 행사음악을 비롯하여, 1999년 무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2002 한일월드컵,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등의 행사음악도 담당하였다.
2001년판 KBS2 시그널송[6] 및 현행 KBS1 로고송, 2011년판 KBS 사가, <삼국쥐전> 오프닝도 이 사람의 작품. 묘하게 KBS와 인연이 깊다.
연극 무대 배경음악 작업도 한 적이 있다.
고래사냥과 '금홍아, 금홍아' 두 영화에서 주연배우로 출연한 일도 있으며 평가도 나름 괜찮았던 편. 고래사냥의 경우 음악도 같아 맡아 참여했고 그 뒤로 고래사냥 2, 칠수와 만수, 개그맨 등의 영화에서 OST 작곡가로서 계속 활동했다. 후반작업을 소흘히 하는 한국 영화계 풍토 속에서 영화음악의 자리를 제대로 잡게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며 한국 영화음악의 수준을 높인 작곡가로서 한국 영화음악을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작곡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서편제 이후엔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서 자주 음악을 담당했고 2010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에서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임권택 감독의 최신작 달빛 길어올리기에서도 음악을 담당했다.
유일하게 성공한 국악음반으로 평가받는 서편제 OST는 발매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김수철의 증언에 의하면 홍보용으로 몇백장만 찍고 정식 발매는 안 하려고 했다고 한다. 발매 이후 영화의 성공과 함께 엄청난 주문이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한 거란다(손석희의 시선집중 인터뷰에서). 시선집중에 직접 출연한 김수철이 자신의 국악 앨범에 대한 설명과 함께 짧게 들려주는데 들을 때마다 진심으로 감탄하는 손석희의 추임새가 포인트.
그리고 서편제 OST는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데... 서편제에 수록된 가장 유명한 곡인 '천년학' 의 작곡 비화는 영화 촬영기간인 5개월 동안 작곡 작업을 했으나 한 줄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임권택 감독이 내일 모레 음악 가지고 오라고 했고, "대금으로 연주한다" 라는 생각만 가진 상태에서 다음날 (임권택이 얘기한 전날) 녹음실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대금 연주자가 악보를 달라고 했는데 빈 악보만 가지고 있어서 "내가 쓴 게 없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고 스튜디오 한켠에 있던 피아노 앞에서 25분간 써내려간 곡이 그 유명한 '천년학'이다(꿈꾸는 사람들의 바이오그래피 - 김수철 편).
2018년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가운데 김수철 1집이 32위에, 작은 거인 2집이 47위에 선정되었다.
3. 평가
자신이 이끌던 밴드인 작은 거인 활동 당시에 무대 매너는 거의 지미 헨드릭스와 AC/DC의 앵거스 영에 비견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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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단순한 연출이 아니라 진짜로 80년대 김수철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기타 들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저 포즈일 정도로 열정적인 무대 매너로도 유명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 돌던 농담은 "이름 때문에 용수철처럼 뛰어다닌다."
사실 기타 실력도 뛰어나고 국악과 록 음악을 접목시키거나[7] 최근 가수들과 콜라보도 하는 등 실험적인 음악성에 국내 최초의 원맨 밴드[8] 를 했다. 해외에서도 인정도 받고 있는 80년대 대한민국의 대표 가수지만 가왕 조용필의 위광이 너무 대단한 나머지 그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
4. 디스코그라피
- 주요 음반
- 작은 거인 2집(1981) - 국내 하드록 음반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 김수철 1집 못다 핀 꽃 한 송이(1983)
- 김수철 2집 젊은 그대(1984)
- 김수철 3집 생각나는 사람(1985)
- 88서울올림픽 음악(1988)
- 황천길(1989) - 국악과 락의 어우러짐을 추구했던 성과물
- 기타산조(2002)
- 주요 영화음악
- 고래사냥(1984)
- 두 여자의 집(1987)
- 칠수와 만수(1988)
- 그들도 우리처럼(1990)
- 베를린 리포트(1991)
- 경마장 가는 길(1991)
- 날아라 슈퍼보드 주제곡(1992)
- 서편제(1993)
- 태백산맥(1994)
- 축제(1996)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
5. 기타
코미디언 김형곤의 장충중학교 선배(김형곤-76년 졸, 김수철-73년 졸)이며 이런 이유로 김형곤의 영결식 때 자리를 찾았다.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 MBC FM4U의 장수 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오프닝 음악을 정해준 장본인이다.
오뚜기 라면의 전신인 청보식품의 청보곱빼기라면의 모델에 이주일과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ㅣ
6. 관련 문서
[1] 본인 역시 '작은 거인'이라 불리는 경우도 많다.[2] 이는 김수철이 EBS 스페이스 공감 프로그램에서 밝혔다. 실제로 5.18은 당시 대학생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많은 곡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1981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곡인 '바윗돌'이 5.18 당시 죽은 친구들의 묘비'''라고 당당히 말하고 바로 금지곡으로 묶여서 활동을 못한 정오차 같은 용자는 예외중의 예외였고, '바위섬'을 발표한 김원중이나 김수철 같은 경우는 대놓고 말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진 이후에는 5.18 추모식에 이 노래가 불리기도 한다. 2018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공연 단, 부른 사람은 뮤지컬 공연을 한 남경읍과 민우혁이다.[3] 별리와 내일은 작은 거인의 앨범에 수록되었던 곡들을 재녹음하여 수록한 곡들이다.[4] 국악 앨범을 몇개 만든 후 진 빚이 2억 가까이 되었는데 소속사의 권유로 빚을 갚기 위해 만든 곡이라고 한다. 당시 우스꽝스러운 안무로 인기를 끌었는데, 그 안무가 탄생하게 된 배경은 춤을 출 줄 모르는 김수철이 춤을 춰달라는 방송사 PD의 말에 어정쩡한 자세로 중학교에서 배운 체조를 따라했는데, 그게 안무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결국 빚을 다 갚았는데, 이후 다시 국악 앨범을 만들어서....[5] 수많은 가수들이 국악과의 접목 운운했지만 대부분 기존 대중음악에 국악기 한두개 혹은 사물놀이를 어설프게 끼워넣는 수준이었고 그나마 1회성이었다. 정식으로 국악을 공부해서 시도한 사람은 김수철 뿐이다. 다만 신중현이 기타를 가야금에 가깝게 개조해서 연주하고 기타 산조 등의 형식을 앞서서 실험한 적은 있다. 그리고 김도균이 슬라이드 바를 이용해서 가야금의 농을 표현한 주법이라던지 # 그 외에 이선희가 국악인 임영동을 프로듀서로 기용해서 13집 전체를 국악가요로 낸 적이 있다.[6] 좋은 방송 밝은 세상 KBS 한국방송.[7] 기타 산조의 확립에 큰 공헌을 하였다.[8] 간단히 말하면 음악에 사용된 모든 악기를 한 명이 연주하는 것. 단 최근에 유행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나 신디사이저를 활용한 1인 작업은 원맨밴드로 치지 않는다. 김수철의 원맨밴드 CD 뒷면에 아주 간단히 적혀있다. 작사/작곡/편곡/연주/노래-김수철. 기타, 베이스, 키보드, 피아노, 드럼을 모두 혼자서 직접 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