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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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3년 대한민국에서 제작되어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소설가 이청준의 연작 단편소설 "남도사람"의 1부 《서편제》와 2부 《소리의 빛》이 원작이다. 김명곤, 오정해, 김규철 등이 주연하였으며 김명곤이 영화 시나리오 각색을 겸임하였다.
2. 등장인물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정처없이 이곳저곳을 방랑하는 소리꾼. 한때 아내와 아들을 두었던 가장(家長)이자 농사꾼으로도 있었지만 아내가 동호를 낳고 병으로 사망한 후 부모를 일찍 여의게 된 송화를 수양딸로 삼아 동호와 함께 판소리를 가르쳤다. 판소리에 대해서라면 황금보다도 더 귀중히 여길 정도로 아끼고 있으며 이후 판소리 방랑에 불만을 품은 동호가 도중에 이탈하게 되고, 결국 송화의 한을 맺어주기 위해 눈을 멀게 하는 약(藥)[1] 을 달여서 송화에게 먹여서 사실상 장님으로 만들정도로 소리에 미쳐있는 미치광이다. 후에 한 폐가에 들렸을 당시 기운이 없어보이는 송화를 위해 남의 집에서 기르던 씨암탉을 서리한 다음 닭백숙으로 삶아 먹인 다음 땅에 묻은 닭털을 오리털이라며 닭주인을 속였다가[2] 결국 꼬리가 밟혀 닭주인에게 심한 폭행을 당하게 된 뒤 건강악화로 세상을 떠난다. 세상을 떠나기 전 송화 앞에서 눈을 멀게 한 장본인은 바로 자신이라고 고백했다. 배우는 김명곤[3] . LA 아리랑 각본을 쓴 바 있던 고 백현락은 아무리 예술이라고 해도 딸 눈을 멀게 하냐면서 이런 아버지라면 미국에서 아무리 좋게 봐줘도 무기징역이라며 깠으며, 예전 호러영화 리뷰로 알아주던 호러존에서 김종철은 유봉을 까면서 "이런 게 최악의 호러물이다. 그리도 예술이 좋으면 너나 독먹고 장님될 것이지, 왜 남의 눈을 멀게하냐며 맞아죽은 것도 참 편하게 죽은 것"이라고 분노어리게 깠다.
- 송화
이 작품의 여주인공이자 유봉의 수양딸. 어린시절 6.25전쟁때 친부모를 여의게 된 후 유봉이 수양딸로 삼게 되었으며 이후로부터 유봉으로부터 판소리를 교육받게 되었고 성장하게 된 후에도 판소리에 대한 애정을 가지며 생활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복 남동생인 동호가 방랑에 불만을 품으며 가출하게 된 후로 소리하는 것을 중단하고 식음전폐까지 했으며 유봉이 눈을 멀게 하는 약을 먹이는 바람에 완전한 장님이 되고 만다. 유봉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한(恨)을 넘어서는 소리를 하라는 유봉의 유언에 따라 판소리를 계속했으며 [4] 이후 의붓남동생인 동호와 판소리를 통해서 무언(無言)의 재회를 하게 되었지만 곧바로 다시 떨어지게 되었다. 영화 맨 마지막에 보면 송화의 길잡이 노릇을 하는 어린 여자아이가 잠깐 등장하기도 하였는데, 송화의 딸로 추측하는 시각도 있으나 확정된 설정은 아니다.[5] 배우는 오정해.
- 동호
이 작품의 남주인공이자 유봉의 아들. 현재 파트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화자 역할을 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산후병으로 잃고 아버지의 밑에서 의붓누나인 송화와 함께 판소리를 배우기도 하였지만 서투른 근성으로 인해 판소리를 하는 대신 등에 판소리 북을 직접 치고 북을 짊어져야 하는 보조역할만 맡았다. 지겨운 방랑과 가난 등에 불만을 품으며 아버지 유봉과 실랑이를 벌이게 된 끝에 결국 가출을 하게 된다. 이후 서울에서 큰 한약방의 직원으로 일하고, 결혼도 하여 아이도 얻지만, 누나를 그리워한 나머지 약재를 모은다는 핑계로 전라도로 내려와 송화를 찾아나선다. 맨 처음 도달했던 곳은 자신이 가출했을 때 맨 마지막으로 있었던 집이었는데, 그곳은 이미 소릿재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고 어떤 아낙이 주막을 하고 있었다. 이후 송화가 남긴 흔적을 따라 전라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지만, 송화가 오랫동안 떠돌이 생활을 한 터라 계속해서 헛걸음만 하게 된다. 그나마 마지막 단서가 있던 술집도 망하여 흔적이 없어졌고, 반 포기 상태로 발길을 돌리려는 때에 낙산거사를 만난다. 낙산거사는 몇 해 전에 송화를 보성읍의 주막에서 보았다는 최신 정보를 알려주고, 동호는 다시 송화를 추적한다. 마지막에는 영광군의 한 주막에서 송화와 재회하고, 소리로 모든 한을 풀어낸 뒤 다시 헤어지게 된다. 배우는 김규철.
- 낙산거사
유봉의 친구이자 길거리 화공. 그림으로 생계를 잇는 사람이며 유봉과는 절친한 친구 사이이기도 하다. 특이하게도 한자와 그림을 혼용한 그림(혁필)을 그리는 편이라 보는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들었고 한국인 한자이름 세 자(字)까지도 그림으로 표현하는 재주를 지녔다[6] . 배우는 안병경.
- 세월네
영화 초기에 등장하는 여인으로 동호가 처음 등장했을 때 '소릿재' 라 불리우는 고개에서 '소릿재 주막' 을 지키는 아낙이다. 한때 송화로부터 판소리를 익혔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동호가 치는 북장단에 맞춰서 판소리를 하였다. 그리고 동호 앞에서 송화가 눈이 멀게 된 사연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배우는 강선숙.
- 금산댁
유봉의 아내이자 동호의 친어머니 그리고 송화의 수양 어머니로 마을 대가집에서 떠돌이 소릿꾼으로 있던 유봉을 처음보고 나서 그와 인연을 맺게 되었지만 전쟁 때 임신을 하게 되었으나 산통으로 아이를 유산한 채 세상을 떠났다. 배우는 신새길.
- 송도상
유봉의 친구로 유봉과 술자리를 같이하였던 적이 있다. 유봉이 나머지 친구들과 다툼을 벌이게 되어서 토라지게 되자 유일하게 남아서 유봉의 술 대접을 하였으며 나중에 노년이 되어서 다시 등장했다. 배우는 최동준.
- 천가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술집 남자로 한때 송화를 보살펴주었으며 동호가 자신의 술집에 찾아오게 되자 처음부터 그가 송화의 남동생이라는 것을 눈치챈듯 보였다. 배우는 최종원.
3. OST
메인음악 천년학
김수철이 맡은 사운드트랙도 대박을 거뒀다. 영화 대박 속에 이 앨범도 무려 70만장이 넘게 팔리는 대박을 거둬들여 국내 OST 앨범에서도 대박을 거둔 것으로 유명하다. 김수철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홍보용으로 몇백장만 찍고 정식 발매는 안하려고 했다고 한다. 발매 이후 영화의 성공과 함께 엄청난 주문이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한 것.(손석희의 시선집중 인터뷰에서).
그리고 서편제 OST는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데... 서편제에 수록된 가장 유명한 곡인 '천년학' 의 작곡 비화는 영화 촬영기간인 5개월 동안 작곡 작업을 했으나 한 줄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임권택 감독이 내일 모레 음악 가지고 오라고 했고 "대금으로 연주한다" 라는 생각만 가진 상태에서 다음날 (임감독이 얘기한 전날) 녹음실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대금 연주자가 악보를 달라고 했는데 빈 악보만 가지고 있어서 내가 쓴 게 없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고 스튜디오 한켠에 있던 피아노 앞에서 25분간 써내려간 곡이 그 유명한 '천년학'이다(꿈꾸는 사람들의 바이오그래피 - 김수철 편).
- 참고할만한 자료
4. 흥행
1993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종로3가)에 있는 고풍 영화관이었던 '단성사[7] '에서 개봉하였으며 서울 관객 103만명을 동원하였다.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관객 100만'''을 넘겼다. 이후 쉬리가 나올 때까지 6년 동안 한국 영화 역대 흥행 1위 자리를 고수했다. 그 해 개봉작으로서도 클리프행어, 쥬라기 공원에 이어 흥행 3위였다.[8] 이 영화 총 관객수의 추정통계[9] 는 290만 정도이다.[10] 비록 국내 한정이지만 세계적인 대박작인 클리프행어와 쥬라기 공원과 흥행 순위를 다툰 대박 작품이었다.
이게 얼마나 엄청나냐면, 당시 어지간한 블럭버스터급 외화도 서울관객 100만 명 정도면 뉴스에 나올 대흥행이었다. 사랑과 영혼이 서울 152만, 전국 350만 정도 관객이 보았다고 집계되었는데 당시 영화지나 신문에서는 충격이라는 반응이었고 이문세가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이에 대하여 경악을 금치 못했다. 1991년 개봉작 흥행 1위였으며 초대박을 거뒀다는 늑대와 춤을이 서울관객 98만 명, 터미네이터 2조차도 서울 92만 관객을 기록했다. 게다가 당시는 할리우드 영화에 비해 한국 영화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던 시기였고,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의 전체 점유율도 10%-20%대 정도에 머물고 있었다.[11] 그런 상황에서 아무도 흥행할 거라고 예측 안했던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와 맞먹는 국내 관객 수를 냈으니. 그리고 이 영화의 개봉으로 인해 당시 판소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사실 서편제는 흥행에 큰 기대를 안 하고 만든 작품이었다고 한다. 장군의 아들 시리즈로 태흥영화사에 큰 수익을 안겨준 임권택 감독은 오랫동안 연출을 준비해왔던 작품인 태백산맥을 드디어 영화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땐 아직 노태우 군사정권 시절이라 좌우익의 대립을 주제로 다룬 태백산맥을 개봉하기에는 여전히 꺼림칙한 시대분위기가 남아있었다. 그때가 1992년 경이었는데, 어차피 그 해 연말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든지간에 민간정권이 들어설 테니 조금만 기다렸다가 정권이 바뀌면 그때 태백산맥을 제작하자는 쪽으로 영화사 측과 합의를 보게 된다. 그렇게 해서 1년 정도 시간이 붕 뜨게 되었는데, 평생 영화만 100편 가까이 만들었고 1960년대에는 한 해에 서너편씩 연출하는 건 예삿일이었던 임감독이 그냥 놀고 있을 인물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차피 노느니 간단한 거 하나 만들어보자 하는 생각으로 흥행 신경 안 쓰고 만들고 싶은 작은걸 만든 게 바로 서편제였다고 한다.[12] 그런데 그 결과는 초대박.[13]
단성사 한 극장에서만 194일[14][15] 을 상영 한 후, 같은해 11월 26일까지 서울 9개관의 극장을 옮기며 231일간 연속 상영을 이어 나갔다. 이 때문에 역대 영화 중 가장 오래 연속 상영한 영화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멀티플렉스도 없던 시절 반년 넘게 상영되었기 때문에[16] 깰 수 없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듯 했지만 날씨의 아이(신카이 마코토) [17] 가 2020년 6월 17일 상영이 확정되며 박스오피스 최장 연속 상영 타이틀을 내주게 되었다.
5. 평가
당시 서구 문화의 개방으로 되려 전통 문화를 낡았다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던 일부 사람들의 눈길조차 돌릴 정도로 한국적인 미를 잘 살린 작품.
판소리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외면받아왔던 대한민국의 다른 전통문화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던 영화이다. 영화 장면마다 '진도 아리랑', '춘향가', '심청가' 등 판소리 노래들이 등장했으며 판소리에 대한 구절 대목도 등장한다. 참고로 맨 마지막 대목 송화가 심청가를 부르는 대목은 나이 든 명창의 소리가 필요했기에 대사도 성우의 목소리였고, 소리 또한 안숙선 명창의 소리로 대신했다 한다. 이것만 그렇고 나머지 판소리는 오정해의 실제 목소리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본래 오정해는 배우 생활을 하기 전부터 김소희 명창의 제자(안숙선 명창도 김소희 명창의 제자 출신)로서 체계적으로 판소리를 배운 국악인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연기자 생활 보다는 국악인으로서의 활동이 더 많다.
6. 수상
- 중국 상해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 및 감독상 수상[19]
7. 여담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서편제를 관람하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 본격화되기 시작한 세계화 정책에 대한 불안을 물타기하기 위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구호에 예시로 동원되기도 했다. 대통령선거 출마 전에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 있었던 김대중 前 대통령도 단성사에서 관람했으며, 이 때 오정해를 알게 된 김대중은 오정해의 결혼식 때 주례를 맡기도 했다.
한때 단성사 바깥에 걸려있던 서편제 영화 포스터 간판 중 '송화(오정해)' 가 입었던 갈색 한복 상의 부분이 장기간 햇볕의 자외선에 노출된 탓에 색깔이 바래져서 영화관측이 이 부분을 새로 덧칠했던 에피소드도 있었다.
주인공 일행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멀리서부터 돌담길을 따라 걸어오는 롱테이크 씬이 굉장히 유명하다. 이곳은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에 있는 청산도. 청산도 슬로길 1코스를 돌면 지나갈 수 있는데, 1코스의 이름도 이 영화 이름을 따서 '서편제길'이라고 붙였다. 여기서는 이외에도 드라마 봄의 왈츠가 촬영되기도 했다.
영화의 남주인공 동호 역을 맡은 김규철 배우는 1960년 생으로, 누나인 송화 역을 맡은 오정해 배우보다 11살 많고 아버지 유봉 역의 김명곤 배우와는 8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판소리에서 북을 담당하는 '고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경험 많은 배우를 기용해야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청년기부터 아버지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고 남동생이 아닌 오빠, 혹은 삼촌처럼 보이는 미묘한 갭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유튜브에 이 영화를 공개했다가 2017년 4K 복원을 완료해 블루레이 출시할 예정인지라 잠시 내렸는데, 다시 올라왔다. 2017년 7월 6일 블루레이가 출시되었다.
[1] 유봉은 당시 그 약을 '몸을 보호하는 약(藥)' 이라고 거짓말을 했다.[2] 유봉에 의해 땅에 씨암탉의 털을 묻어서 지푸라기로 가렸고 닭주인이 나타나 지푸라기를 치우고 털을 확인해보니 오리털이 아닌 유봉이 서리했던 씨암탉의 갈색털로 확인되었다.[3] 연기 외에도 이 작품에서 각색 담당도 직접 하였다.[4] 이렇게 자신에게 학대에 가까운 호통, 약을 먹여 눈을 멀게만드는 등 양부인 유봉이 수양딸 송화에게 한 행적을 보면 송화도 정말 이정도면 엄청난 대인배다.[5] 영화 평론가 정성일과의 인터뷰집인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2권 308페이지에서 인용하면, 임권택 감독이 의도한 바는 이렇다. "그거를 송화가 낳은 씨냐, 아니면 동네 누구가 안내하냐 하는 것인데, 근데 나는 그런 관심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하는 게, 그것은 송화의 애여도 상관없고, 동네 애여도 상관없다고. 왜 그러냐면 이 장님을 그 눈길에, 먼 데 어디까지 보내는데 혼자 보낼 리 없다고, 주막집 주인 저도 살 붙이고 산 년인데, 그러면 누구라도 붙였을 것이고, 혹시 씨라면 씨인 대로 같이 가고. 요컨대 그것이 겨울이지만, 판소리가 완전히 시들어버린 세상을 가고 있지만 언젠가 저런 어린 생명력처럼 불씨로 남아서 살아낼 것이다라는 쪽으로 봐주기를 원하는 거요. 판소리의 생명력 같은 것을, 물려주어도 그거는 그 삶 속에서 발전할는지는 몰라도 그런 어린 생명을 딸려 보냄으로써 판소리가 살아날 수 있는 생명의 씨앗처럼 보이게끔 찍어낸 거요. 애의 빨간색 코트가 인상적이지 않았어요?"[6] 나중에는 송화의 '松花' 도 마찬가지로 그려주었다. 하지만 이 당시 송화는 이미 앞을 못 보는 장님이었기 때문에 그림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7] 종로3가역 사거리에 위치해 있던 구 CINUS 단성사, 현재는 폐관하여 '단성골드빌딩'이라는 일반 상가가 되었음[8] 이 흐름은 이후로도 쭉 이어져 대한민국 영화는 중박 이상의 작품들을 계속 만들어내며 존재감을 어필하다가, 쉬리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할리우드 대작영화들과의 국내경쟁에서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발전하였다.[9] 공식통계도, 확정통계도 아닌 추정치. 왜 추정통계만 있냐면, 현재의 멀티플렉스와 달리 당시는 단관뿐이었고, 관객 집계도 수작업으로 되었다는 데 기인한다. 그나마 서울은 배급사에서 직접 집계했지만 지방은 집계도 하지 못했다.[10] 현재와 직접비교는 어렵지만 요즘 시대에 멀티플렉스로 개봉했다면 천만 정도는 됐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는 없지 않아 있다. 당시 영화 총 관객수는 1980년부터 1999년까지 대략 4000만에서 5000만명대 박스권에 갇혀있던 시절이었고 2억명을 넘는 2010년대와는 영화시장이 비교도 할수없이 작았다.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관람하는 등 각종 단체/학교에서 단체관람이 많았으므로, 개봉관 공식 집계만 했던 당시 관객수를 몇배로 해야 하는지는 각자 판단바람. 참고로 쉬리, 친구의 경우, 총 관객수는 서울관객수의 3배 정도였다.[11] 작품성뿐만 아니라 흥행 경쟁력에서 한국 영화계가 할리우드와 동등해지거나 할리우드를 능가하게 된 건 쉬리가 개봉한 뒤에야 가능했다.[12] 사실 서편제의 구상은 10여 년 전부터 하고 있었다고는 한다. 그렇지만 외모와 판소리가 동시에 가능한 여배우를 찾기가 어려워서 그냥 보류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TV에서 오정해를 발견하고는 드디어 서편제에 어울리는 배우를 찾을 수 있었다고.[13] 하지만 그 이듬해 정작 잔뜩 신경써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제작한 태백산맥의 흥행 성적은 망했어요.[14] 또는 196일. 기록마다 엇갈린다.[15] 단일 극장에서 한 작품이 최장 상영된 기록이었으나 날씨의 아이가 메가박스 군자점에서 200일동안 상영되면서 기록이 깨졌다.[16] 아래에 있는 포스터 비화도 그때문이다. 반년넘게 직사광선에 노출된 포스터가 멀쩡했을리가...[17] 너의 이름은.으로 한국 영화시장에서 일본 영화로는 최고의 성적인 370만 관객을 기록했던 그 감독이다. [18] 최우수작품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신인여우상, 촬영상, 한국영화 최다관객상.[19] 심사위원으로 온 올리버 스톤이 오정해에게 추파를 던졌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제에 출품작 일로 참석해 이 영화를 본 북한 영화인들이 저질이라고(...) 홀로 깠는데 정작 북한 출품작 영화들은 듣보잡 악평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