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대학가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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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인기 하락과 폐지, 그리고 부활
3. 여타 가요제와의 관계
4. 역대 수상자
5. 여담
6. 함께 보기
7. 관련 문서


1. 소개


MBC 大學歌謠祭
MBC에서 매년 가을 주최하는 대학생 대상의 가요제로, 1977년에 첫 선을 보였고 2012년까지 매년 개최되었다. 제1회에서는 학생들의 창작곡 외에도 번안곡들도 많이 참가했으나 그 뒤 회를 거듭하면서 차츰 자작곡으로만 채워지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매 대회마다 LP판을 발행하였는데 시대가 시대인지라 상술한 대로 건전가요라든지 다른 기성가수들의 곡이라든지 해당 가요제의 참가곡이 아닌 다른 회차의 참가곡들까지 어물쩡 삽입되었다. 1회 입상곡 및 참가곡이 음반으로 나왔을 때 함중아의 '내게도 사랑이'가 같이 들어간 것이 대표적인 사례.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함중아가 대학가요제 출신인 걸로 착각한다.
촬영 장소도 문화체육관 또는 잠실체육관 등 실내에서 펼쳐졌으나 주철환 PD의 아이디어로 1994년 18회 대회 때 처음 캠퍼스(고려대)에서 펼쳐져 이후에는 대학교 캠퍼스에서 열리는 것이 대학가요제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기성가요계와 대비되는 캠퍼스만의 신선함과 건전함[1]을 주된 콘셉트로 잡아 첫 단계에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수많은 가요제가 본격적으로 번성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당시 정부가 생각하던 '건전함'이 무색하게도 당시 학생운동권에서는 상업주의나 퇴폐를 조장한다 하여 대학가요제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이에 전대협-한총련은 1988~2002년까지[2] '통일노래한마당'이란 대안 행사를 열었다.
대학가요제는 오래된 역사에다 가수의 등용문으로도 큰 기능을 했기 때문에 많은 MC들과 새내기 가수들이 이 대회를 통해 유명세를 얻었고 이들 중 현재까지도 방송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도 많다. '70~80년대의 수상자들은 대학가요제 n주년 특집 무대에 다시 초청되어 당시 수상곡들을 새롭게 선보이기도 하며, 열린음악회나는 가수다 등 지상파 가요 프로그램에서 당시 수상곡이나 히트곡들을 간간이 리메이크되어 무대에 올라오기도 한다. 7080 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컨셉트의 컴필레이션 앨범에도 준 필수요소 급. 역대 MC들도 유명인사들로서 그 일부만 꼽아 보면 현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인 이수만부터 시작해서 명현숙, 초대 뽀미언니 왕영은[3], 임예진, 이덕화, 김희애, 이문세 등. MBC 대학가요제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2003~2011년까지는 남자는 바뀌어도 이효리는 바뀌지 않았다.

2. 인기 하락과 폐지, 그리고 부활


초기 대학가요제는 참신한 노래와 신인의 발굴로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고, 대학생의 상품화로 비판받았다.[4] 1990년대에 들어서는 지나친 상업화, 경쟁적인 가요제 개최로 수준 저하가 지적되기도 했다. [5] 이후에도 대중의 무관심이 지적되었는데, 그 주요 이유로 대학문화의 변화, 대학의 특수성 희석, 대중의 취향 변화, 가요계 진출 경로 다양화, 가요제의 권위 상실, 실험성이 강한 창작곡 부재 등이 제시되었다.[6] [7]
90년대 이전의 대학가요제는 그야말로 신규 음악인을 발견하는 ‘등용문’ 이었다. 당시에는 음반산업이 막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였고 음악인들의 정규화된 성장 및 데뷔 과정이 없었다. 음악인들은 대학가나 일부 클럽 등에서 공연을 하며 명성을 쌓은 뒤 소수의 프로듀서에 의해 발탁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취약한 미디어 체계, 변화적인 시대상황 등으로 인해 예술에 대한 민중적 갈망은 컸고 MBC 대학가요제는 공영방송 주도의 프로그램으로 압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가요제로 자리매김해갔다. 당시 대학가에는 ‘대학가요제 수상’을 목표로 하고 학업은 뒤로 한 채 밴드활동만 하던 학생들도 다수 있었다.
90년대 이후에는 음반산업이 기업화하면서 호황기를 이룬다. 특히 이전까지 주류를 이루던 솔로 남성 혹은 가요제 출신의 가수들과 달리 아이돌 가수들이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HOT와 SES 등이 전무후무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부터는 ‘연습생’ 이라는 이름으로 외모, 실력 등을 키워 갖추게 하는 시스템이 생겼고 기업화된 음반회사들의 자금력 및 기술력을 등에 업고 가요계는 한층 성장한다. 반면, 대학가요제는 아직까지는 과거의 명성을 등에 업고 유지하고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기업화된 기성음악에 밀리고 가요제를 통해 ‘일약 스타’로 발탁되는 가수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지기 시작했다.
이후부터는 몇 가지 이유로 대학가요제는 점점 인기가 식고 위세가 약해져 가는데, 첫 번째 이유는 더욱 심해진 음반시장의 산업화이다. 작곡, 편곡, 인재육성 등을 전문화하여 분담하고 자금력으로 키워내는 회사들의 음악에 비해, 한 명이나 소수의 뮤지션들이 전적으로 컨텐츠를 제공해야 하는 가요제의 음악은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또한 음악 관련 기업 들 중 몇몇은 거대기업으로 성장했고 그들은 자신들이 키우는 ‘연습생’ 들을 데뷔시키기에도 바빴다. 이 시기 이후의 대학가요제들은 산업적 논리보다는 창작을 위한 예술인들의 열정으로 유지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또한 인터넷이 보급화 되었지만 아직 인터넷 문화가 정착되지 않아 많은 연예인들이 고초에 시달렸다. 최진실, 유니, 장채원 등 많은 연예인들의 악플 자살이 2000년대 중후반에 발생했고 그 즈음에 개최된 대학가요제 참가자들도 수상논란이나 표절놀란, 악플에 시달리고 그로 인해 활동이 제한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대학가요제를 위축시킨 것은 2010년대 이후 케이블 방송등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대히트를 치면서부터이다. 이들 오디션 프로그램은 창작곡이 아닌 가창만을 심사하였으며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다고 해서 참여의 폭을 넓혔는데, ‘작곡이 가능한 대학생’ 이라는 극소수의 인원을 대상으로 하는 MBC대학가요제에 비하여 큰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30회 MBC 대학가요제는 2006년 9월 30일 토요일 경북대학교 대운동장에서 펼쳐졌다. 이 30회 대학가요제에서 '뮤즈그레인' 은 네티즌 등에게 인기를 얻었으나 수상을 하지 못해 이슈가 되었다. 수상결과에 대해 네티즌들은 수상자와 심사위원들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에 해당 프로그램 PD는 별 문제 없다고 일축했다. [8] 또한 2000년대 이후의 수상자나 참가자들이 일부 전공자들을 제외하고는 이후 가수의 길을 걷지 않았으며 참가자 대부분이 당시 대학생이고 소속사 등의 이권 없이 참가한 것을 고려할 때 당시의 논란은 과한 것으로 보인다. 당사자인 '뮤즈그레인' 멤버들은 오히려 이런 반응이 부담스럽다고 말했다.[9] [10] [11]
이번에도 일부 판정시비가 있었다. 일부 누리꾼들은 '어쿠스틱 브라더스'가 대상을 받지 못하고 금상을 받은 것이 이상했는데, 그것이 심사위원 박해미가 유독 그 팀에게만 점수를 짜게 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2006년 뮤즈그레인 파동과는 달리 기사화될 정도로 심각하게 문제화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사화된 부분은 대상팀이었던 B2의 노래 표절의혹이다. [12] 물론 당사자인 B2측은 표절이 아니라고 밝혔고, 또한 표절 대상이었던 팀 측에서 표절정도 까진 아니라는 의견을 밝힘으로써 논란이 가라앉았다.[13] [14]
2009년에도 논란이 있었는데, 인천대학교 대운동장에서 열린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이대 나온 여자의 〈군계무학〉이라는 곡이 힙합 듀오 리쌍의 〈광대〉와 드라마 소울메이트의 삽입곡인 누벨 바그의 〈This is not a love song〉과 도입부와 비슷하여 표절 논란이 일었다가 가라앉았다. [15]
그 뒤, 2014년 11월 8일에 역대 대학가요제 출신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대가회(대학 가요제회)가 직접 공연을 주최해 2년 만에 다시 세종문화회관부터 공연을 시작해 전국투어를 펼칠 예정이다.
2015년 10월 말에 여주시가 주최하는 국제대학가요제로 부활했다.[16][17] 제1회 대회에서는 동국대학교 국제통상학과 동기생들로 결성된 5인조 밴드 '1/N'이 '피버'(fever)를 불러 대상을 받았다. 2016년 9월 말에 제2회 대회를 개최하였으나 결국 이 대회를 끝으로 여주국제대학가요제가 폐지되었다.
2016년 7월 말에 부천시가 주최하는 전국대학가요제로 부활했다. 제1회 대회에서는 양남진 밴드가 '마스크 걸'을 불러 대상을 받았다. #
2019년 9월 21일에 5년 9개월간의 공백을 깨고 부활하였다. 단, 지상파 MBC가 아닌 케이블 MBC 플러스 계열 방송국에서 2019년 10월 5일에 일산 호수공원의 노래하는 분수대 야외 특설무대에서 열렸던 가요제 본선이 10월 17일에 방송되었다.
대학가요제라는 이름은 아니었지만 보컬플레이 시즌 2가 대학가요제처럼 다양한 대학교의 학생들이 나와 경연을 치루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2010년대 초반까지는 imbc에서 자사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통해 과거 대학가요제 영상을 서비스했다. 하지만 MBC 홈페이지 개편의 영향인지, 다시보기 서비스가 '''없어지면서''' 다시 보고 싶다면 MBC C&I에 DVD를 주문해야 하거나 MBC 아카이브를 써야 된다. 2017년 8월 12일부터 MBC 유튜브 채널의 과거 방송 영상을 국내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됐으나 대학가요제 영상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가 5월 10일부터 일부 영상이 풀렸고 8월달부터 거의 모든 영상이 풀렸다.

3. 여타 가요제와의 관계


MBC 대학가요제의 최대 라이벌은 좀 당황스럽게도 같은 MBC가 주관하는 MBC 강변가요제였다.[18] 이 둘은 강변가요제가 7~8월 사이에 열리고, 대학가요제가 9~12월 사이에 열린다는 것 외에는 차이가 별로 없었다.[19] 그나마 늦게 시작한 강변가요제가 1999년에 대학생 외에도 참여가능이라는 식으로 학력제한을 없애면서 차별화를 시작했지만 그 뒤 인기가 떨어지면서 강변가요제는 2001년 대회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7080 세대의 레퍼런스 넘버들은 현재도 대학가요제 보다는 이 강변가요제 그리고 밑에서 얘기할 TBC 해변가요제에서 더 많이 배출되었다.
타 방송사에서도 MBC 대학가요제가 인기를 끌자 유사한 가요제를 만들었으며 그중 대표적인 곳이 TBC였다. MBC 대학가요제 바로 다음해인 1978년에 개최된 TBC의 가요제 명은 '''TBC 해변가요제'''였다. 사실 1회 대학가요제는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아 몰라서 참가하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한 해 늦게 출발한 해변가요제에는 캠퍼스의 숨은 강자들이 대거 출연하였다. 대상은 한양대 혼성그룹 징검다리가 '여름'이라는 곡으로 수상했는데, 이 그룹멤버중 한 명이 뽀미언니로 알려진 왕영은이었다. 실력보다는 대학생다운 신선함과 곡 제목이 가요제의 취지와 부합되어 대상을 수상한 케이스라고 할수 맀다. 진짜 실력자들은 금상부터인데, 블랙테트라에는 이후 송골매에서 활동하는 구창모가 소속되어 있었고, 본명 이용균으로 참여한 벗님들의 이치현은 이후 짚시여인이라는 곡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2회 대학가요제에도 참여하게 되는 활주로에는 역시 송골매에 참여하게 되는 배철수가 있었다. 그외 90년대 회상 으로 유명해지는 김성호가 속한 블루드래곤, 이명훈이 속한 휘버스 등 실력파 팀들이 대거 배출되었으며, 주병진 또한 누나 주선숙과 듀오로 참가하였다. 다음해에 해변가요제는 '''TBC 젊은이의 가요제'''로 이름을 바꾸었고[20] 2회가 진행되었다. 이 때 유명해진 곡은 금상수상곡인 불놀이야를 부른 옥슨80인데, 이 그룹의 보컬이 홍서범이다. 그리고 1981년 방송통폐합의 영향으로 '젊은이의 가요제'는 TBC 방송국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사실 억지로 말하자면 1981년 '젊은이의 가요제'도 존재는 했지만 이건 TBC가 주관한 것이 아니고 국풍81에서 벌어진 가요제가 '젊은이의 가요제'라는 이름을 걸고 나온 것이다. 한편 1981년에 KBS가 해변가요제의 포맷을 본 딴 행사를 주최했는데, 라디오로 녹음하여 방송된 '사랑의 듀엣 가요제'다.
MBC 대학가요제와 역시 MBC의 강변가요제가 인기를 끌자 KBS도 1987년 부터 KBS 대학가요축제를 만들었다. 1회 KBS대학가요축제 대상은 '물안개'의 석미경이며 이때 인기상을 받은 블랙세인트의 보컬이 유숙이다. 이후 김준선, 이정봉, 박경서(미스미스터) 등의 가수들이 이를 통해 등장했으나 KBS대학가요축제는 크게 흥행하지는 못하고 1993년 쯤 막을 내렸다.

4. 역대 수상자




5. 여담


  • 대학 내에서 한번 만들어진 밴드나 팀이 기수별로 이어지다 보니 같은 팀의 후배들이 선배들의 뒤를 이어 다시 수상명단에 오르는 경우도 보인다. 샌드페블즈, 징검다리, 활주로, 샐러맨더스, 쌍투스, 소리느낌 등이 대표적.
  • 제1회는 서울대학교 농생대 소속 밴드 동아리인 샌드페블즈가 차지했다. 사실 이 대학가요제로 유명해진 것은 샌드 페블즈가 아니라 산울림이다. 산울림은 당시 무이라는 밴드명으로 예선을 1위로 통과했지만, 김창완이 이미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자격요건 미달로 본선출전 자격을 박탈당했다. 참고로 6기가 주축이었던 샌드페블즈의 대상곡은 해당 시점 기준으로 탈퇴한 5기 선배가 작사 작곡한 곡이었는데, 그 5기 선배가 바로 산울림 중 김창훈이고, 그 노래가 바로 산울림의 초기 대표곡중 하나인 '나 어떡해'다.
  • 샌드페블즈가 우승을 차지하고 난 뒤, 제2회 참가자들은 심적으로 고무되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록그룹 활주로기타리스트 배철수는 제1회 대회에서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가 우승을 차지하는 것을 보면서 "뭐야? 저 정도가 대상이야?" 라면서 다음 회차에 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배철수는 당시 2회 참가자들 대부분이 1회 대회를 보고 "나 정도면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몰려든 것이라고 여러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 제1회 참가곡 '당신은 모르실거야'는 혜은이의 원곡을 합창 풍으로 리메이크한 것으로 핑클의 2001년도 3.5집에 해당곡을 리메이크한 바 있다. 세 곡을 연달아 들어보면 갭이 장난 아니다. 제1회에는 당시 가요계의 흔한 풍조였던 번안곡도 많았는데 그 원곡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폴 모리아(Paul Mauriat)의 Mother of Mine, 사이먼 앤 가펑클의 The Boxer, 그리고 디즈니랜드 내부의 테마곡인 It's a Small World까지 상당히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 [21] 심민경이라는 본명으로 출장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임백천과 고영선이 불렀던 '한마음'[22], 노사연의 금상곡 '돌고돌아 가는 길', 배철수가 소속된 그룹 활주로의 은상곡 '탈춤'은 대상곡이었던 부산대 중창단팀 썰물의 '밀려오는 파도소리에'를 압도하는 인기를 누렸다. 특히 심수봉의 '그 때 그 사람'은 이 대회에선 무관이었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가장 히트한 노래가 되었다. 애초에 떨어진 이유가 황당하게도 너무 '프로 같아서' 였으니… 예전에 1983년 프로야구에서 장효조가 신인상을 타지 못한 이유인 '참신성이 부족해서'보다 더 기막힌 이유가 되겠다.
  • 1980년 4회 은상 수상곡 연극이 끝난 후의 보컬 조선희는 훗날 한서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2001년 영화 친구에서 레인보우 밴드 보컬 진숙 역을 맡은 김보경이 학예회에서 부른다.
  • 2005년 대상 수상 그룹인 Ex는 <잘 부탁드립니다>로 큰 사랑을 받았다. 당장 자우림의 뒤를 잇는 여성 보컬 밴드가 나왔다는 평도 있었고 각종 cf까지 섭렵하지만 MBC에서 데뷔도 안 한 그룹을 논스톱 시리즈에 카메오로 출연시키는 등 상업적으로 이용해먹는 바람에 비판을 받았다. 그 결과 신선한 이미지만 소모하면서 정작 데뷔시에는 이렇다할 주목을 못 받고 소리 소문 없이 묻혀 버리면서 대표적인 원 히트 원더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상 마지막으로 대중들이 기억하는 가요제가 배출한 스타다.
  • 대학가요제의 인기는 통계적으로 보면 국내 대졸자 비율과 역비례한다고 보면 된다. 대학가요제 개최 전후 대졸자의 비율은 10-20%에 지나지 않았으나, 2000년대 이후 대졸자의 비율은 70%에 육박했다. (OECD중 1위) 따라서 가요제 초기의 출연자들은 지금의 연예인의 입지를 대신했다. 똑똑하고, 젊고, 노래도 잘하고, 미래의 인재(..) 도 될 수 있는 모두의 아들딸들이었던 셈. 그런데 대학생=대중이 되어버린 시대 이후에는 대학가요제 참가자들은 모두의 아들딸이 아니라, 흔히 옆에서 볼 수 있는 밉살스러운 엄친아(혹은 엄친딸)이 되어버린 것이다.
  • 이 대회가 컬러로 첫 방영된 것은 1981년 제5회부터였지만,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당시 영상은 1977년 제1회 MBC대회부터 일부 컬러 영상을 볼 수 있다. 1회 때에는 카메라 1대에 해당하는 영상, 2회부터는 거의 대부분의 영상이 컬러였다. 1980년 제4회 대회가 되면 야외 촬영용 카메라[23]를 제외하면 모든 방송장비가 컬러 장비로 바뀌었다. 컬러방송이 시작될 걸 염두에 두고 컬러방송용 방송장비를 꾸준히 들여온 과정을 볼 수 있는 셈.

6. 함께 보기



7. 관련 문서



[1] 이 무렵 한국은 여전히 연예계의 대마초 파동이나 금지곡 지정이 횡행했고 건전가요도 앨범마다 삽입되었다. 제3회 대학가요제 앨범에도 건전가요 '나의 조국'이 삽입되어 있다.[2] 1991년 4회까지 정기적으로 개최됨.[3] 비록 대학가요제는 아니지만, 왕영은은 TBC 해변가요제 출신이기도 하다.[4] 大學歌謠祭 바람직한가…《동아일보》, 1980.11.12[5] MBC 대학가요제 「기성」흉내 경쟁무대 전락, 《경향신문》, 1992.12.15.[6] 가요제 출신 가수들은 어디로 갔나, 《스타뉴스》, 2009.5.1.[7] MBC 대학가요제, 존재 이유 전혀 없다, 《뉴시스》, 2009.9.27.[8] 창작곡으로 참여하는 가요제의 특성 상 대중적 기호와 수상기준이 다를 수 있으며, 당시 심사위원 자질논란으로 언급되던 이수만은 MBC 10대 가수상, 신인가수상, SBS 가요대전 프로듀서상을 수상하는 등 가수와 제작자로써 이미 상당한 경력을 인정받은 상태였다.[9] “대학가요제 수상결과 논란”. 한국일보. 2006년 10월 2일. 2004년 10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0월 7일에 확인함.[10] “'무관의제왕' 뮤즈그레인, "출연제의 와도 못나간다"”. 뉴시스. 2006년 10월 2일. 2004년 10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0월 7일에 확인함.[11] “대학가요제 대상팀 ‘JJMP’, 악플과 악성문자메시지에 시달려”. 헤럴드 생생뉴스. 2006년 10월 2일. 2004년 10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0월 7일에 확인함.[12] “2007 대학가요제 대상곡 표절의혹 논란”. YTN STAR. 2007년 10월 9일. 2004년 10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0월 11일에 확인함.[13] “대학가요제 대상받은 b2, 표절 의혹 부인!”. 스포츠서울. 2007년 10월 8일. 2004년 10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0월 11일에 확인함.[14] “대학가요제 대상 B2 표절논란? "표절은 아니다"”. 마이데일리. 2007년 10월 8일. 2004년 10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0월 11일에 확인함.[15] “대학가요제 대상곡 '군계무학', 리쌍 '광대'를 표절?”.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 2009년 9월 26일. 2009년 9월 26일에 확인함.[16] MBC가 1978년부터 1988년까지 MBC 서울국제가요제라는 이름의 가요제를 매년 개최해서 외국의 가수를 초청한 적도 있다.[17] 다만 1987년~1988년은 전야제 형식으로 진행됐다.[18] 강변가요제가 배출한 가수들로는 주현미, 이선희, 권진원, 박미경, 이상우, 이상은, 육각수, 빅마마의 신연아, 박혜경, 김현성, 장윤정 등이 있다.[19] 단지 강변가요제는 MBC 라디오국에서 주최했다는 것의 차이다. 그래서 그런지 초창기에는 'MBC FM 강변축제'였다.[20] 이때 제 2회 젊은이의 가요제라는 명칭을 썼는데, 제 1회 젊은이의 가요제는 존재하지 않는다.[21] '밀려오는 파도소리에'는 큰 히트를 기록했으며 썰물은 이듬해 1979년 1집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노래에 '뒹굴며 노래해'라는 가수가 남녀상열지사를 의미한다고 해서 방송금지처분 됐다. 이후 멤버들이 흩어지면서 잊혀졌다. 반면 노사연, 배철수, 임백천, 심수봉은 훗날 연예계에 남았고 이들의 데뷔 무대인 78대학가요제를 회상하다보니 자연스레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가 밀리게..됐다.[22] 내 마음은 하나요 내 뜻도 하나요 어젯밤의 꿈도 하나요'로 시작하는 노래. 임백천의 초기 대표곡이다.[23] 당시의 방송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