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곤

 


'''김형곤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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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대상 대상'''
-[27]

'''김형곤
(1987년)'''

심형래
(1988년)

'''TV부문 남자 코미디연기상'''
이창훈
(1995년)

'''김형곤
(1996년)'''

김국진
(1997년)
김국진
(1997년)

'''김형곤
(1998년)'''

남희석
(1999년)


'''이름'''
김형곤 (金亨坤)
'''출생'''
1960년 5월 30일[1]
경상북도 영천군 영천읍 (현 영천시)
'''사망'''
2006년 3월 11일 (향년 45세)
서울특별시 광진구 혜민병원
'''발인재'''
2006년 3월 13일,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국적'''
[image] 대한민국
'''본관'''
김해 김씨[2]
'''신체'''
165cm[3], 85kg[4], O형
'''가족'''
형: 김형준, 동생: 김형진, 김형섭
아들: 김도헌
'''학력'''
장충중학교 (졸업)
중경고등학교 (졸업)
동국대학교 (국어교육학 / 학사)
'''종교'''
불교
'''데뷔'''
1980년 TBC 개그콘테스트 은상
'''취미'''
골프, 독서
'''별명'''
날으는 돈까스, 공포의 삼겹살
'''링크'''
미니홈피
1. 개요
2. 생애
3. 시사개그의 대부
4. 성 소수자 지원 활동
5. 수상


1. 개요


1980~90년대에 활동한 대한민국코미디언이다.
시사 코미디에서 맹활약하였다. 통통한 체형을 코미디에 이용하기도 했는데, 체중감량 전에는 "김형곤" 하면 바로 '공포의 삼겹살'이었다. 당시 대 유행어가 되고, 지금도 김형곤은 모르더라도 "공포의 삼겹살"이란 표현은 널리 쓰이고 있다. 원래는 보통 체형이였다가 개그맨이 되기 위해 일부러 살을 찌웠는데 나중에는 살이 안 빠져서, 굉장히 후회했다고 한다.
형 김형준은 연극배우[5], 동생인 김형진은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2. 생애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나 서울 중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6] 대학교 재학 중 1980년 TBC의 개그 콘테스트에서 은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개그맨 생활을 시작했다.[7]엘리트 개그맨. 참고로 현재도 서울의 중상위권 대학인 동국대학교가 들어가기 쉬운 학교는 아니지만[8] 1970년대 후반 당시는 (전문대를 포함하는) 대학 진학율이 20%도 되지 않던 시절이다.
1980년에 데뷔하자마자 뚱뚱한 몸에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 재치있는 입담으로 젊음의 행진, 젊은이의 토요일 등에서, 장두석과 함께 워낙 비싸요~ 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키며 인기를 모았고, 그 다음해 영화도 찍었다. 이 당시 활동했던 개그맨들 중 가장 돋보였던 세 명이 바로 주병진과 김형곤 그리고 MBC에서 활약한 서세원이었다.
김형곤을 기억하는 이들은 주로 KBS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많이 아는데, 잠깐이긴 해도 MBC에서도 활동했으며 이 시절에 앨범도 냈다. <어허! 그것 참>이 이 시절에 부른 노래. MBC에 나와 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선배 MBC 개그맨들이 이 노래에 맞춰 뮤직비디오같이 나와서 가사 대로 뜀뛰기하고 그렇게 지쳐서 헥헥하다가 노래부르던 김형곤보고 "아니, 당신이 한번 뛰어봐!"라고 화내고 노래부르던 김형곤이 무안해하던 개그씬도 나오기도 했다.
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유머 1번지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과 <탱자 가라사대>[9], <꽃 피는 봄이오면> 등의 코너에서 시사 개그를 선보이면서 사회적인 붐을 일으켰다. 그러나 김형곤의 거침없는 시사개그와 풍자에 위기감을 느낀 전두환 군부가 그를 협박하여 방송 코너가 해체되고 한동안 연예활동을 중지했다. (사실은 더 일찍 해체될 수 있었는데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80년대 중반에 개그맨 선후배간 폭력문제로 구설에 오른 흑역사도 있다. 폭행 피해자 중엔 김형곤과 비슷한 연배인 최양락도 있었다. 당시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고 넘어가기는 했지만, 군기를 내세워서 후배들에게 폭력을 자주 휘둘렀다는 소문이 있었다. 실제로 당시 신인이었던 서인석을 폭행해서 다치게 한 사건 때문에 뉴스로 보도될 정도로 일이 커졌다.

연예활동이 중지된 후부터는 주로 소극장에서 스탠드 업 코미디 공연을 했는데, 노태우 정권 때 대통령방귀뀌는 스타일이라는 코미디를 공연에서 했다가 국가안전기획부에 끌려가 곤혹을 치룬 적이 있다.
대통령과 부하들이 회의를 하는데 방귀를 뀌면 어떻게 할까라는 조크였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방귀를 뀌면 당당하게 "괜찮아, 임자도 뀌어." 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뀌면 부하들이 "각하, 제가 뀌었다고 하겠습니다."라면서 자기가 전두환 대신 덮어쓰고 노태우 대통령이 뀌면 괜히 자기가 뀌어놓고서 부하한테 "네가 뀌었제?" 하니까 부하들이 "제가 각하 방귀 대신 뀌어줍니까?"라면서 맞먹는다는 내용이었다. 물태우라고까지 불린 노태우의 유약한 리더쉽을 풍자한 것이었는데……. 이후 김형곤은 자다가 날벼락 맞는 식으로 국가안전기획부에 끌려가서 "각하 방귀뀌는 걸 네가 봤냐?"라며 개발살났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김형곤이 공연한 술집과 바에서 음란 퇴폐쇼를 했다[10]는 명목으로 대표[11]를 구속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진상은 위에 설명한대로... 후에 자신의 공연에서 "아니, 내가 대통령 방귀 뀌는 걸 꼭 봐야 개그를 할 수 있단 말이야? 그게 어디 대한민국 안기부가 나설 일인가?"라며 회고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러한 해방적 분위기는 노태우가 당선 이후 "날 개그프로 소재로 써도 좋다"라고 말한 탓이 크다. 이는 안기부의 과잉충성 내지는 노태우의 말바꾸기이며 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으로 공안정국이 형성된 이후 안기부가 과거 모습으로 회귀한 것도 작용했다. 국내 웹하드에 김형곤의 공연 mp3 파일이 돌아다니니 듣고 싶은 사람은 다운받아 들어보자.
1989년, 당시 영등포구 을에서 재야 단일 후보로 출마한 고영구 후보[12]를 지지하면서 의식있는 연예인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나[13],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는 여당후보였던 민주자유당김영삼 후보를 따라다니며 유세지원을 하였다.[14] 여기서 그치지 않고 15대 대선에서는 국민신당 이인제를 지원했다.
군사정권에 의해 탄압받던 대중의 아픈 속마음을 달래준 일과 군사정권에 의해 억압받았다는 두 가지 경력으로 1997년 명예친선대사에 선정되었으며 1999년에는 자유민주연합의 명예총재특별보좌역을 역임하여 당시 개판이던 자민련의 이미지 개선에 일조하였다. 하지만 비정치권 출신이라는 태생적 문제와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독주에 질려 탈당했고 16대 총선이 있었던 2000년 성동구[15]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큰 차이로 낙선.[16] 이후 정치권에서 물러나게 되고 '''"개그 잘 배워갑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정치권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폭소클럽, 뮤지컬과 대본작성, 다양한 저서의 집필 등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2006년 3월 11일 운동사우나를 거친 뒤 화장실에서 대변을 보던 도중 갑작스러운 급성 심근경색으로 향년 46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17] 과도하게 땀을 흘렸던 것이 화가 된 것으로 추측. 원래 혈압이 높은 사람은 사우나가 매우 위험한데, 거기다가 볼일 볼 때는 더더욱 혈압이 높아지므로 주의해야 한다.[18]
대한민국 개그맨 최초로 카네기 홀 공연을 앞두고 있던 터라 아쉬움은 더했다. 젊어서는 덩치도 있고 해서 전국 뚱보들의 권익을 위한다며 전국 비만인 협의회 회장을 자처하면서 나섰으며 나중에는 다이어트 광고에 출연할 정도의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중간에 말이 좀 꼬여서 평이 엉키기도 했지만. 문제는 사망 원인이 과도한 다이어트와 운동과정에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말이 돌았다는 것인데…. 사망 후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는 알 길이 없다.
실제로 몰라볼 정도로 다이어트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일단 사우나로 땀을 쭉 뺀 이후에, 다시 운동을 하면 그냥 운동할 때보다 땀이 더 쭉쭉 나온다며 방송에서 자신의 운동 비법을 소개하기도 했었다.[19]
사후 시신은 연구용으로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 카데바로서 기증되었다.
명랑히어로 두 번 살다 이경규 편에서 이윤석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경규가 당시 김형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굉장히 슬퍼했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둘이 대학교 동갑내기 동창이기도 한데 이경규는 방송에서, 김형곤은 무대에서 활약했으면서도 서로를 미워하고 상처 준 일이 있었던 모양. 김형곤 사망 후 이경규가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울면서 술을 마시다 정신을 잃는 바람에 술집 점원이 이윤석에게 전화했다고 한다.
무명의 트로트가수 김갑순[20]에게 나훈아를 본뜬 "너훈아"라는 예명을 준 사람이다.
군기반장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까마득한 어린 후배들에게는 잘 대해줬다는 미담이 좀 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조원석이 개그맨이 되고 싶다면서 무작정 자신을 찾아오자 연락처를 교환했고, 8년 동안 낙방을 계속 반복한 조원석에게는 김형곤이라는 존재가 버팀목이었다고 한다. 또한 생전 양희성이 계속 무명으로 사는 것[21]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대본을 마련해주려고 했지만, 급사해버리고 만다. 김형곤이 아끼던 두 후배인 조원석과 양희성은 이후 개그야에서 커플 역할로 등장하며 히트를 친다. 코너의 이름은 '''최국의 별을 쏘다'''. 인기를 얻게 된 조원석은 생전 김형곤과의 추억을 얘기하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양원경 같은 일개 양아치와는 비교 자체가 실례인 인물이다.

3. 시사개그의 대부


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이후 대한민국 풍자개그와 시사개그의 명맥은 사실상 끊겼다란 것이 정설로 통하고 있다. 그리고 봉숭아 학당을 다시 일으킨다면 그의 복귀가 유력했는데 결국 영원히 이뤄지지 못했다.
2000년대 초반에 김구라가 인터넷으로 김구라 황봉알의 시사대담이라는 시사개그를 시작하여 다시 시사개그가 부활하나 싶었지만, 김구라의 시사개그는 아픈 속을 긁어준다기보단 단순한 사회에 대한 반발심을 자극하고 거친 욕설로 불만을 토하는 데에 지나지 않아 수준미달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거기다 김구라의 개그는 시사가 아닌 남들이 꺼려하고, 터부시되는 걸 건드리는 게 본질이라서 그다지 시사개그를 하는 사람이라고 보기엔 힘들다. 설상가상 최근엔 이것도 그만두고 욕만 해댄다. 자세한 것은 김구라 항목으로.[22] MBC에서 유행한 삼자토론 등의 배칠수/전영미 위주의 시사개그도 모두 성대모사에 더 가까웠다.[23][24]
그러다 SNL 코리아의 방영을 기점으로 시사개그의 맥이 다시 이어지는 듯했지만, 그마저도 단순한 패러디에 가까웠다. 그러던 것이 여의도 텔레토비를 접으면서 섹드립이랑 GTA 드립에 더 집중하고 시사개그 역시 시사개그라고 쓰고 시사대담이라고 읽는 식으로 안 그래도 수준미달인데 그보다 더 퇴화한 모습을 보여주는 등 기대 이하로 침전하게 되었다.
그나마 2010년대에 이르러 개그콘서트가 제대로 된 시사개그를 좀 하나 싶었지만 당시 서수민 PD에 대한 반감[25]이 심한 시기라 호응도가 적었고, 거기에 인터넷 정치 커뮤니티 활성화와 <나는 꼼수다>류 시사풍자 인터넷방송이 인기를 끌면서 얼마 안 가 SNL 코리아와 동일한 테크를 타면서[26] 사실상 시사개그의 명맥은 김형곤 사후에는 끊긴거나 다름없다.

4. 성 소수자 지원 활동


한편 우리나라 트랜스젠더들에게는 대부 격으로 추앙받던 사람이었다. 그가 운영하던 술집과 성소수자들인 게이와 트랜스젠더들이 많이 모였다. 이것과 관련해서 본인이 방송에서 가끔 자기는 게이는 아니지만, 소수자로서 음지에 숨어사는 그런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 하리수의 성공 이후 트랜스젠더들의 양지 진출과 연예인 지원을 많이 도와 주었기 때문.
실제로 자주 트랜스젠더 바 등에서 토크쇼를 진행하기도 했고, 연예계의 중견인 그가 지원했기 때문에 TV 등을 통해 일반에 트랜스젠더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이 많이 생기기도 했다. 또한 이태원동에서 하하호호라는 극장식 바를 운영해서 트랜스젠더들이 댄서로 일하는 등 많은 지원을 하였다. 그의 사후로는 이전처럼 그쪽 문화와 성소수자들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보내는 유명인이 적어졌다는 견해도 많았다.

5. 수상


'''수상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1987년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인기상
유머 1번지
KBS 코미디 대축제
'''대상'''
1996년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 코미디연기상
MBC 세상 엿보기
1998년
KBS2 쇼! 행운을 잡아라

[1] 호적생일1957년 6월 23일로 적혀 있지만, 자서전('형곤이도 하는데')과 명랑히어로 '두 번 살다' 이경규 편에서 이경규가 "(김)형곤이는 나랑 대학 동창이자 동갑이다", '명랑 토론회' 최양락 VS 이경규 편에서 김구라가 "(이경규씨는) 김형곤 씨랑 대학교 동기다"라 말한 것을 보아 1960년이 정확한 생년이다.[2] 본인과 형제 이름의 형태가 김X곤(金X坤)이 아니라 김형X(金亨X)니 삼현파 22세손, 수로 70세손이라고 단정짓지 말 것. 애초에 김해 김씨 사람들 중에선 파를 알 수 없는 사람이 대다수다.[3] 이용식과 비슷했다.[4] 왕년에는 115kg.[5] 연극배우 활동 이전에는 삼성전자 상무로 재직하였다.[6] 대학을 졸업하면서 취득한 교원 자격증도 있다고 한다.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한 만큼 2급 정교사 자격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만약 개그맨이 되지 않았다면 일선 학교의 국어 교사가 됐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7] 같은 TBC 출신들로는 주병진, 김학래, 엄용수, 장두석, 임하룡, 이성미 등이 있다.[8] 다만 연예인들이 유독 많이 배출된 학교 중 하나다. 동국대 출신 연예인의 대부분은 연극영화학과 출신이며 김형곤의 학력이 다소 특이한 경우로 볼 수 있다.[9] 초반에는 '꽁자 가라사대'였다.[10] 밑에 말한 트랜스젠더 댄서들이 나왔다는 이야기.[11] 당연히 김형곤이지만 서류상으로는 김형곤의 아내였다.[12]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후에 참여정부 시절에 국가정보원장을 역임한다.[13] 당시에 야권 후보를 지지하는 연예인들은 음양으로 후에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에 이는 매우 용기있는 행동이었다.[14]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여당후보였지만 군사정권에 큰 반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당선 후 하나회를 쓸어 버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김형곤이 김영삼을 지지했던 것도 크게 이상하진 않다고 할 수 있다.[15] 당시엔 성동구 선거구가 갑/을로 분구되지 않았다.[16] 3위였다. 12,258표를 얻어서 8.6% 득표를 했다. 사실 독자후보론 적잖은 득표긴 한데...그 때 당선자는 새천년민주당임종석 의원.[17] 흔히 토일렛 쇼크(Toilet Shock)라고 불리는 사인으로 고혈압이 있는 사람이 화장실에서 힘을 주거나 무리한 힘을 주는 등의 행동을 할 경우 뇌혈관에 일시적인 혈압이 상승하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힘 주다가 풀렸을 때 어지러우면 괜찮지만 몇몇은 아예 의식이 잠깐 끊긴다. 만약 보고 있는 자신이 그런 케이스라면 함부로 화장실에서 힘 주지 말 것. 처음 인터넷 속보 기사는 축구하다가 사망했다는 것으로 떴다. 아무래도 허준호의 아버지인 고 허장강 선생을 연상해서 그런 오보가 났을지도...[18] 발살바 효과 문서로. 2008년 대법원은 2005년 집무실에서 휴식 중에 변을 보다 발살바 효과로 급사한 근로자에 대해 업무상 재해로 인정한다는 판결을 내놓은 바 있다. 당시 증언에 의하면 김형곤은 그 직전 과도한 체중감량으로 인해 체력이 많이 저하된 상태였다는데 이 무리한 다이어트 후유증과 그에 따른 체력저하가 급작스러운 사망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19] 다이어트 차원에서는 수분을 빼는 위주의 관리는 몸을 망치는 지름길인데 이걸 위주로 했다면...[20] 개그맨 김철민의 친형으로, 2014년 1월 12일에 간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21] 정종철, 조수원, 윤석주 등과 입사 동기니, 김형곤이 사망한 년도까지 6년을 무명으로 지냈다.[22] 또한 아래에도 나와 있듯이 김형곤은 성 소수자를 지원하는 등 그쪽으로 의식이 깨인 인물이었으나 김구라, 황봉알 등은 트랜스젠더 연예인인 하리수를 심하게 욕하는 등 편견에 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김구라만 보면 채널 돌리는 사람들이 꽤 있다.[23] 이 맥은 최양락 라디오의 "삼김" 개그 등으로 이어졌다.[24] 김형곤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개그맨들은 문화검열이 삼엄한 시기에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치인 모사 등을 특기로 가진 경우가 많은데(대표적인 예가 엄용수), 이는 김형곤이 주도한 코너에서 시사풍자가 많았고 그 맥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특기가 필요했기 때문. 코너의 캐릭터도 정치인과 유사한 포지션의 성격을 잡아주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지금은 그런 특기를 살리기 위해 시사개그를 선보이는 주객이 전도된 형태가 되었다.[25] 이유없는 반감이 아니라, 정치적인 편향성이 있었기에 호불호가 갈릴 수 밖에 없었다.[26] 물론 지상파라 섹드립은 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