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수(야구선수)
1. 개요
前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쌍방울 레이더스, SK 와이번스, 해태 - KIA 타이거즈, 두산 베어스에서 활약했던 KBO 리그의 대표적인 저니맨이자 前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3천만 원짜리 선수든 3억짜리 선수든 경기장에선 모두 똑같은 야구선수다.'''[1]
2. 프로 생활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2년 삼성 라이온즈에 곽채진과 함께 지역 연고 우선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입단 첫해와 두번째 해까진 2군에만 전전했지만, 3년차인 1994년 2군 홈런왕과 타점왕에 오르며 상승세를 보였고, 1군에도 잠깐 얼굴을 비추는 등 앞으로를 기대하게 하였다. 이듬해인 1995년, 주전을 차지하며 곧바로 활약을 보이는데, 타율 2할 8푼 8리, 22홈런(2위)[2] , 81타점으로 입단 4년차에 '''중고 신인왕'''에 등극하게 되며 삼성의 미래를 짊어질 오른손 거포로 주목받았다.[3] 인상 깊은 경기로, 당해 7월 25일 vs 한화전 9회말 2사에서 구대성에게 역전 끝내기 그랜드 슬램을 날린 적이 있는데, 이는 '''국내 최초로 3점차를 뒤집은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이었다.[4] 하지만 이후 성적을 이어가지 못하고 경쟁자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게 되고, 1997년 롯데자이언츠로 트레이드 된다. 이후 1998년엔 쌍방울 레이더스, 2001년엔 KIA 타이거즈, 2003년엔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 되며 저니맨의 모습을 보이다 은퇴하게 된다. 비록 확실하게 자리잡지 못하고 스타급으로 성장하지 못한채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지만 밀어치는 힘이 좋아 타격에 있어 좋은 잠재력을 지닌 타자였다.[5] 물론 프로에 좋은 잠재력을 지닌 선수가 많고 이들 중 여러 이유로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거나 활약을 이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그들 중 대표격인 선수 중 하나라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다.
1996년의 이야길 하자면, 전년도에 주전 3루수로 뛰었지만 수비 불안의 이유로 3루에 자리잡지 못하였고, 지명타자나 1루수로 출전해야했지만[6] 1루에 이미 붙박이 주전으로 자리 잡으며 많은 기대를 받고 있던 이승엽이라는 존재가 있어서 주로 지명타자로 나서며 가끔 1루나 3루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1995년의 강한 임팩트가 있긴 했지만, 기회를 받기 어려워진 상황과 두드러지던 장타에서도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게 되며 입지가 많이 줄어버린 그는 결국 1997년 6월 27일 박석진과 함께 김종훈, 박동희를 상대로 롯데 자이언츠에 트레이드된다. 이동수 본인도 고향 팀을 떠나야 했던 아픈 기억이긴 하겠지만 당시 감독이 이동수 대신 다른 선수를 택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는 일설도 있으며, [7] 이는 최상의 선택인지는 모르나 결과적으로 매우 좋았던 선택이 되었다.[10]
롯데로 간 후에 부상과 부진으로 별 활약을 못하다가 1998년 6월 5일 쌍방울 레이더스로 박계원과 함께 또 다시 트레이드 된다. 이후 김성근 감독 밑에서 다시 재기에 성공하지만[11][12] , 이후로도 나쁘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지만, 기대만큼의 활약을 펼치진 못하고 약간의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러다 2001년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는데, 주로 1루수로 나오며 장성호, 산토스와 함께 클린업을 구축하며 재기하나 싶었으나 이후로 큰 활약을 보이지 못한다. 그리고 2003년 시즌 도중 두산 베어스에 김원섭을 상대로 트레이드되며 그 시즌 후, 방출되며 현역에서 은퇴하게 된다.
위에 서술된 대로 타격에 재능이 있었음에도 수비에서 문제를 보이며 꾸준히 자리잡지 못하였고, 여러 팀을 다녔기 때문에 외야수였던 최익성이나 동봉철 못지 않은 저니맨으로 살아야 했다. 처음 입단한 삼성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 뛰었고, 삼성의 미래를 짊어질 오른손 거포의 잠재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급으로 성장하지 못한건 아쉬운 결말이다. 일각에선 1996년 시즌에서의 부진은 자신의 은사인 김충 2군 감독의 해임과 1군에서의 부담감으로 인한 심리적인 문제가 컸다고 하며, 이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 크기 때문에, 조금만 더 잘 풀렸더라면 팀을 이끌었을 선수 중 한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결국 좋은 잠재력으로 신인왕까지 차지했지만, 프랜차이즈 스타로 성장하지 못하였고, 그 영광은 김한수, 이승엽 등 팀레전드로까지 성장한 당시의 경쟁자들에게 돌아갔다.
3. 은퇴 후
은퇴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영남대학교에서 코치를 맡아오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6년간 대구방송(TBC)에서 프로야구 라디오 중계 해설 위원으로 활동했다. 해설 스타일은 정말 차분하고 경기흐름을 잘 읽는 스타일. 그러나 배영섭이 호수비를 보일 때는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중계했다(...). 2012년에는 해설 중 류중일 감독과 김상수를 계속해서 디스하기도 했다. 그리고 차우찬이 만루홈런을 맞은 다음에는 방송사고로 오해할 정도로 침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실황녹음
2013년에는 TBC를 떠나 대구 중/남구 케이블TV SO인 TCN에서 대구지역 유명 MC인 이도현 씨와 함께 삼성 홈 전경기를 중계방송했다. 다만, 현장 중계가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화면을 보며 중계하는 방식이었다. TCN의 야구중계방송은 2013년 단 1년만 하고 폐지되면서 해설에서도 물러났고, 계명대학교 코치로 부임하였다[13] .
2016년 SK 와이번스 2군 퓨쳐스팀의 타격코치로 다시 프로야구계에 복귀하였는데, 구단 측에서는 중장기적인 신인 육성을 위해 영입했다고 한다.[14] SK 팬들은 2016 시즌에 돌아온 짠물타선과 변비야구로 인해 김무관과 정경배를 좀 밀어내 달라고 기원하는 중. 하지만 17시즌 종료 후 코칭스태프 개편과 동시에 계약이 해지되었다.
2020년부터 같은 삼성 라이온즈 출신의 김상엽, 정병곤 등과 함께 경북고등학교의 코치로 부임하였다.[15]
4. 연도별 성적
5. 관련 문서
[1] 연봉에 연연하지 않고 경기에만 집중하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는 말이다.[2] 1위는 김상호로 마지막 22호 홈런을 칠 때까지만해도 이동수가 1위였지만 OB 베어스의 김상호에게 시즌 막판에 역전 당하며 2위가 되었다.[3] 이동수가 중고 신인왕에 오르며 두각을 보이게 건 은사인 김충 2군 감독의 가르침과 백인천 타격인스트럭터의 역할이 컷다고 한다.[4] 참고로 이 이색 기록은 이동수와 김응국만이 유이하게 가지고 있다.[5] 신인왕을 차지한 1995년을 제외하고도 1999년, 2000년, 2001년에 규정 타석에 미치지 못하지만 각각 19홈런, 14홈런, 15홈런 등 두 자릿 수 홈런을 3시즌 기록할 정도로 파워가 있었다.[6] 사실 원래 포지션은 1루수였다. 신인왕 시즌도 1군에서 뛰기 위해 여의치 않지만 3루수로 전향했다고 봐야 할 듯.[7] 이동수는 95년 신인왕을 차지하고도 96년 개막전에 대타로 출전했다..[8] 그러나 이 시기는 오랫동안 팀을 이끌었던 삼성의 주축 선수들의 노쇠화와 부상이 있었음을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다.[9] 하지만 그 1995년과 1996년은 오히려 관중몰이를 동원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그 시기는 한국프로야구의 인기가 절정기에 달하는 시기였으니[10] 여담으로 삼성은 이동수가 1군에 있었던 1995년과 1996년에는 부진했고[8] 오히려 이동수가 없었던 1997년부터 2008년까지는 항상 좋은 성적을 내며 12년 연속 포스트시즌 기록을 세웠다.[9] 재미있는 사실은 삼성 시절 3루수 경쟁을 했던 김한수에게 나중에 부인의 후배를 소개해 주기까지도 했다는 것이다...?[11] 1999년에 시즌 전의 손목 부상으로 6월부터 출장하기 시작해 규정타석은 미달이었으나 86경기 타율 0.320 출루율 0.431 장타율 0.595 19홈런을 기록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실제로 이 해에 스탯티즈 기준으로 WAR 4.56을 기록하였다. 다만 이는 당시 주로 지명타자와 1루수로 출전했음에도 3루수로 출전한 걸로 집계된 결과라 재평가되면 수치가 하락할 소지가 농후하긴 하다. 다만 타격으로만 봐도 인상적인 활약을 한 건 사실이다.[12] 1999년에 친정 삼성과의 전주 홈경기에서 3홈런(8월 5일 더블헤더 1차전에서 1개, 2차전에서 2개)을 기록하기도했다.[13] 검색해 보면 신일중학교 코치 또는 서울중구리틀야구단 감독도 이동수로 되어 있지만 동명이인이다.[14] 공교롭게도, 복귀 날짜에 한때 몸담았던 두산 베어스와 SK 와이번스의 1군 경기가 있었다.[15] 그런데 이동수와 김상엽 모두 대구고등학교 출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