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웅
1. 개요
前 삼성 라이온즈의 야구 선수. 새가슴을 언급할 때 TOP 10에 꼽히던 선수로서,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입단 당시에는 김시진, 김상엽, 박충식 등의 뒤를 잇는 삼성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에이스가 될 것이라 할 정도로 촉망받는 강속구 투수였다.[1] 하지만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초반 몇년간 기대치만 부풀리고, 결국 터지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며 선수 인생이 끝나 버린 투수.
입단 초기 비슷한 강속구 새가슴으로 팬들의 우려를 사던 배영수가, 흔들리지 않는 배짱을 갖춘 진정한 에이스로 거듭난 것과 비교되고 있다.
여담으로 학창시절 및 프로 데뷔시절 김수경의 라이벌이었다는 것이 과거 팬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두 선수 모두 연고지 팀의 고졸우선지명을 받아 입단했을 때 계약금도 적지 않게 받았었다.
2. 데뷔, 그리고 짧았던 전성기
삼성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입단, 데뷔 시즌인 1998년에는 불펜으로 뛰며 3승 4패 ERA 3.17에 그쳤지만[2] , 프로 2년차인 1999년 11승을 기록하였다.[3] 2000년에는 무려 15승을 거두며 명실상부한 에이스로서의 입지를 굳혔으며. 2년 연속 170이닝 이상 소화했을 정도로 이닝 소화력도 좋은 편이었다. 2001년에도 11승을 기록하여 3년 연속 두 자리수 승을 거두며, 향후 삼성을 대표하는 에이스로 성장할 거라는 기대와 함께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2001년 당시 삼성의 김응용 감독은 허약한 중간계투진의 강화를 위해[4] , 구위가 좋다는 이유로 시즌 중 김진웅을 마무리로 돌렸고, 그로 인한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임창용이 2001년부터 선발투수로 전향하면서 외국인 투수 벤 리베라가 삼성의 마무리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구단이 조금 불안한 모습을 보였던 리베라를 퇴출하고 용병을 교체하면서[5] 김진웅은 선발에서 중간계투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뒤 선발에는... '''[6][7]
3. 비운의 시작
2001년 삼성 라이온즈는 정규 시즌을 우승하고 한국시리즈에 먼저 진출하게 된다. 삼성의 상대는 대놓고 열세로 보여지던 두산 베어스였고 모두가 삼성의 우승을 점치던 상황.
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 보자 있는 건 줄곧 얻어맞기만 하는 삼성의 투수들 뿐. 특히 김진웅은 나오는 족족 털리며 새가슴 인증을 제대로 한다. 가장 심각했던 건 4차전으로, 6점차로 앞서고 있던 상황에서 발비노 갈베스와 함께 한 이닝 12실점을 합작했다. 이 때의 평균자책점이 '''무려 130'''에 육박할 정도였다.
그 동안 계속 새가슴으로 지적받아오던 것이, 이 해 한국시리즈의 떡실신이 기폭제가 되어 이후 멘탈이 완전히 무너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결국 이 때의 후유증으로 2002년에는 시즌 첫 승을 완봉승으로 장식했으나, 그것이 그 해의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였고, 얼마 안 가 롯데를 상대로 '''9회 2사 후 최다점수차 역전패'''라는 참사를 일으키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인데다가 부상까지 겹치며 중도 아웃되며 단 1승에 그친 채 그대로 시즌을 마감해버렸고, '''영광의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때 김진웅은 아예 엔트리에 없었다.'''
2003년과 2004년에는 배영수와 함께 삼성 선발진에서 로테이션을 돌며 2년 연속으로 정규 이닝을 채우고 9승씩 거두며 부활하는 기미를 조금 보이기도 했으나, 여전히 포스트시즌에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 줬다. 2003 시즌에는 준 플레이오프 선발로 나왔다가 SK 와이번스에게 털렸고,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3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6이닝 3실점으로 호투하며 데뷔 첫 포스트시즌 승리를 거두었으나, 한국시리즈 최고의 명경기 중 하나로 뽑히는 9차전에 선발로 나와 2이닝만에 5실점을 하며 조기 강판되는 등 약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여담으로 3차전, 5차전에서는 고교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던 김수경과의 대결에서 1번 이기고 1번 비겼다.
2005 시즌 초반에 팔꿈치 부상을 당하며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이게 그의 1군 커리어가 마지막이 될 줄이야....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토미 존 서저리를 받은 후 병역을 치르기로 하고 그 해 말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였다.
'''그러나 이 때 삼성 라이온즈 구단에서는 팔꿈치 수술을 받은 그에게 사회복무요원이 아닌, 1년 재활 후 상무 입대를 권유했다.'''[8] 이유는 김진웅이 자기관리를 잘 못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었기에, 구단에서는 관리가 엄격한 상무가 최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진웅은 구단 측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팔꿈치 수술을 받아서 1년 간 재활하는 바에는 빨리 입대하여 병역과 병행하고 싶어서 사회복무요원 입대를 강행한다.
'''그리고...'''
4. 몰락
2008년, 김진웅은 삼성 라이온즈로 복귀했지만 공익근무요원 복무 기간동안 '''자기관리가 되지 않아 잔뜩 살이 찐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이대로는 공을 던질 수 없어 당연히 살을 빼야 했지만 '''무릎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살을 뺄 수도 없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스모선수'''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게 된다. 김진웅의 사례는 상무보다 공익근무요원(현 사회복무요원)으로 가는 것이 낫다는 주장의 적절한 반례가 되었다.
소집해제되어 복귀한 이후 단 한 번도 1군 로스터에 등록되지 못한다. 2009년에는 연봉이 1억 3,500만원에서 3,500만원으로 폭풍 삭감을 당하기도 했다. '''지못미''' 일부 삼성 팬들은 매년 부활을 예고하는 기사에는 등장하지만 '''정작 한 번도 1군에서 모습을 비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KIA/LG 강철민 선수의 별명 사이버 투수에서 착안한 별명인 '''사이버 스모선수'''로 부르기도 했다.
2010년에도 결국 한 번도 1군에 올라오지 못했고, 2010시즌 후 임동규 등과 함께 방출 통보를 받았다.
5. 은퇴 후
2013년에는 같이 방출된 임동규와 마찬가지로 사회인야구에서 활동했다. 2013년 통산 기록
2017년에는 대구중학교 야구부 코치로 있었고 2019년에 영문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를 맡았다.
6. 여담
같은 팀 선배들이였던 오상민, 노장진 등처럼 사생활이 막장인 천재형 선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야구는 밥벌이로 하고 자기 하고싶은 일 다 하면서 인생을 즐기는 것 같은 마이페이스형 한량 오상민과 길들일 수 없는 골치덩어리에 천방지축 막가파인 노장진과 달리 이 쪽은 그야말로 무개념에 분위기 파악 못하는 철부지에 심약해서 건드리면 땡깡부리는 일명 노진구 같은 스타일.
이와 같은 성향은 경기에서도 의심의 여지없이 드러나는데, 즐기는 한량답게 배짱 넘치는 투구로 어떤 상황에도 긴장한 표정 하나 안 보이고 항상 자신만만했던 오상민과 가끔 불질을 할때도 맞으니까 혼자 빡돌아서 한 가운데에다가 한번 더 쳐보시지, 하면서 냅다 빠른 공을 던져대는 노장진과 달리, 잘 던질 땐 분위기타서 얼굴이 희희낙낙, 주자 나가면 심장이 콩닥콩닥 갈피를 못잡다가 나중에 볼넷을 주거나 자신의 불질로 인해 연속으로 실점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결국 얼굴이 붉어지며 눈물이 그렁그렁 하는 모습이 매우 확실하게 드러났다.
프로 입단 3년차가 되던 2000년에 친구와 놀러 가야 한다는 이유로 팀 소집을 무시한 적이 있다고... 결국 이 일로 당시 코치였던 류중일에게 엄청 맞았다고 한다. 그 온화한 성격의 류중일 감독이 코치 시절 노장진과 함께 손찌검을 한 둘 뿐인 선수[9] . 결국 이러한 성격이 소홀한 자기 관리로 이어지고 말았고, 나아가 그의 선수 생활까지 일찍 끝내 버렸다.
비슷하게 우완 강속구 에이스로 기대받았던 후배 배영수와 비교되는데, 이쪽은 2006년의 오버 피칭과 성급한 복귀로 인해 구속이 10km나 감소[10] 하는 혹독한 시련을 맞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 2014년까지 주전 선발로써 제 역할을 다했고 우승반지를 무려 7+1번 (2002, 2005, 2006, 2011, 2012, 2013, 2014, 2019(두산))이나 쓸어담는 등 보답도 받은 반면, 김진웅은 말 그대로 가능성에서 멈춘 채로 우승 반지 하나 없이[11] 쓸쓸하게 KBO를 떠나고 만다.
투수들이 군경팀 입대보다는 사회복무요원으로 병역을 이행하는 게 낫다는 주장의 반례로 흔히 인용되기도 한다.
7. 연도별 성적
[1] 이후 삼성의 에이스 계보는 배영수-윤성환으로 이어진다.[2] 김진웅이 중간계투로 시작한 것과는 달리 고교 시절 라이벌인 현대 김수경은 첫 해부터 선발투수 자리를 꿰차고 12승을 거두며 신인왕과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영광을 동시에 누리게 된다.[3] 11승 13패. [4] 2001년 당시 중간계투진을 살펴보면 김현욱, 박동희, 라형진, 정현욱 등이 있었는데, 김현욱을 제외하면 모두 평균자책점이 높은 편이었다. 그리고 박동희는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화끈하게 불을 지르고 이듬해 웨이버 공시되어 방출당했다.[5] 당시 마무리를 맡았던 리베라는 단순간에 20세이브 이상을 올렸을 정도로 구위가 좋았지만 표면적으로 보이는 성적이 살짝 애매해 삼성은 리베라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자유계약으로 방출할 경우 타팀으로 이적해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판단하여 타 팀이 영입하는 걸 막기 위해 임의탈퇴로 공시한 뒤 잔여연봉을 모두 지급하는(보통 임의탈퇴 공시될 경우 잔여연봉을 지급하지 않는다) 편법을 써서 퇴출시켰다.[6] 그래도 갈베스는 5월 중 영입되어 바로 특급 활약을 보였고 2001 시즌 승률왕이 되었다. 하지만 시즌 막바지에 갑자기 집안 사정을 들어 모국으로 귀국한 뒤 돌연 잠적해 몇 차례나 귀국을 연기했고, 어찌어찌해서 다시 데리고 왔으나 운동을 쉬어서 몸이 덜 만들어져서 그런지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불쇼....로 인해 갈베스는 삼성 라이온즈의 팀 분위기를 다운시켜 버린 X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팀 분위기가 다운되면서 KS 우승을 놓쳐 버린 게 14년 후 똑같은 팀을 상대로 벌어지고 말았다.[7] 그런데 갈베스는 리베라의 대체 용병이 아니라 시즌 초 퇴출당한 살로몬 토레스의 대체 선수다. 리베라의 대체 선수는 내야수 카를로스 바에르가.[8] 비슷하면서 정반대인 경우가 대구고 3년 후배 손승락인데, 군 팀 입대를 거절하고 사회복무요원으로 입대한 김진웅과 달리 손승락은 2006 시즌을 마치자마자 토미 존 수술을 받은 뒤 1년간 재활을 마치고 2007년 경찰청에 입대했다. 수술과 병역으로 4년 간 1군 공백이 생겼지만, 손승락은 제대 후 복귀 시즌인 2010년에 히어로즈의 마무리를 맡아 바로 세이브왕에 오르며 포텐이 터지는 등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이후 꾸준히 히어로즈의 뒷문을 지켜 주었고 2013년~2014년 2년 연속 세이브왕에 오르며, 오승환을 이은 KBO 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자리매김했다.[9] 스프링캠프 도중 밤새 술 마시고 숙소로 돌아오다 감독에게 걸린 양용모에게도 손찌검했지만, 아직 현역 선수로 활동하던 백인천 감독 시절에 벌어진 일이었다. 화가 난 감독을 진정시키기 위해 팀 내 최고참으로서 대신 나선 것.[10] 구속 내려가는 게 좋은 투수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특히 우완 강속구 투수에게는 매우 치명적이다.[11] 노장진과 오상민은 모두 우승 반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