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사고일로부터 '''199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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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Wau Apartment Disaster[1]
1. 개요
1970년 4월 8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기슭에 위치했던 와우 시민아파트 15동이 붕괴된 사고이다.
2. 전개
2.1. 배경
당시 서울은 급격한 도시 팽창으로 말미암아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로 인구가 급증했지만, 그에 비해 주택 상황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때문에 많은 서울시민들은 소위 판자촌이라 불리는 무허가 건축물에서 지내게 되었고, 이는 빠르게 늘어나는 중이었다.
2.2. 부실 공사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정부는 당연히 상황을 좋지 않게 여겨 판자촌을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박정희의 충복이었던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 지시하에, 각 구청들은 판자촌 등 무허가 건축물의 현황을 파악한 후 대부분을 철거하고 시민아파트들을 짓게 했다. 이런 과정에서 건설된 시민 아파트 중에 바로 이 와우 아파트도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판자촌이 있던 곳에 아파트를 지었으니 대부분 위치는 산 가장자리였다. '왜 저런 곳에 아파트를 지었냐.'는 질문에 김현옥 시장이 한 답변도 나름 유명하다. "야 이 새끼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라는 도시전설이 유명하지만 물론 정말 그래서 산자락에 지은 것은 아니었다. 아파트 단지를 지을 만한 평지는 당연히 지가가 비쌌기 때문에 예산 문제 때문에 국유지인 산 가장자리에 짓게 된 것. 와우 아파트 위치는 현 홍대거리 뒷산인 와우산 자락에 있었다.
그러나 정해진 기간 안에 아파트를 뚝딱 지어내야 하는 데다가 원가도 턱없이 낮았고,[2] 그나마도 중간에서 업체들과 공무원들이 떼먹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에, 와우 아파트를 비롯한 각종 시민아파트는 당연하게도 날림 중의 날림 건축이었다.
와우 아파트는 건설업체 몇 곳이 나누어 지었는데, 그중 13~16동은 (주)대룡건설 이라는 업체에서 맡았다. 대룡건설은 자신들이 지어야 할 부분을 박영배라는 토건업자에게 하청으로 맡겼는데, 이 사람은 '''무면허 업자'''였다! 거기에 공사비는 1동에 1100만 원 정도로 5층짜리 아파트 한 동을 제대로 짓기에는 금액이 부족했다. 여기에 하청을 주는 과정에서 한 동당 125만 원씩 떼먹었으니 공사비는 더욱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진 코로나나 현대 코티나 같은 자동차가 1백만 원 하던 시절이니 지금으로 따지면 몇 억 주고 아파트 단지를 지으라는 셈이다...[3][4]
또한 시민아파트의 기본설계도 문제였다. 당시 서울시는 기존에 거주하는 빈민층의 생활수준을 고려하여 1 ㎡당 280 kg 정도 하중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설계기준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브로커들이 개입하여 입주권 가격을 크게 올린 탓에, 막상 진짜 입주대상자였던 빈민층은 도저히 입주금을 낼 만한 형편이 안 되어 입주권, 소위 딱지를 팔고 떠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래서 실제 아파트에 입주한 이들은 대부분 중산층들이었다.[5] 이들이 무거운 가구와 많은 세간살이를 들여놓아, 시민아파트에 걸린 실제 하중은 1 ㎡당 900 kg 내외로 설계기준의 3배를 넘었다.
결국 설계도 부실하고 공사비도 부족한 데다 그마저도 중간에서 떼먹은 상황에서 업자도 무면허니 엄청난 날림공사가 진행되었다. 철근 70개를 써야 할 기둥에 고작 철근 5개를 쓰고 만들었으니 말 다한 셈. 콘크리트 강도도 크게 떨어졌는데 시멘트 함량이 적어 자갈 섞인 모래 반죽이나 다름이 없었고, 그 콘크리트를 만들 때 쓰는 물도 불순물이 엄청나게 많은 하수도 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고작 6개월 만에 아파트를 완성하느라 건축물을 세우는 데 필수적인 '''지반공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 1~2층짜리 가건물 같은 걸 세우는 게 아닌 이상, 건물을 지으려면 고정해줄 수 있는 암반층이 나오거나, 고정할 수 있는 공학적 조치를 할 수 있을 때까지 파거나 보강해야 한다. '''농담이 아니라 실제 건축은 그냥 땅 위에다가 자재만 올리면 되는 마인크래프트 따위가 아니다.''' 즉, 어느 정도 땅을 파서 기반을 보강하거나, 연약 지반이면 전봇대 같은 커다란 콘크리트 말뚝(파일)을 더 안 들어갈 때까지 촘촘히 박는다. 그러고 나서 콘크리트로 토대를 만들고 건물을 올리는 것이 건물을 짓는 정석[6] 인데, 애초에 건물을 어떻게 짓는지조차 모르는 작자들이 건설을 맡았으니 어떻게 될지 뻔할 뻔자인 것.
2.3. 붕괴
이런 탓에 튼튼한 암반이 아닌 물렁한 부토 위에 아파트 기둥이 세워졌다. 그나마 겨울에는 땅이 얼었기 때문에 겨우 버텼지만, 봄이 되고 땅이 녹자 결국 기둥이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는 추위가 풀리는 봄에 자주 일어나는 현상으로 봄비가 내리면 산사태가 자주 난다. 겨울 동안 내린 눈이나 물이 바위나 흙 속으로 들어가 언다. 물이 얼면 부피가 커지기 때문에 바위나 흙을 지면에서 밀어내는데, 봄이 되어 녹으니 땅이 꺼지면서 녹은 물과 함께 그대로 쓸려 내려간다. 봄철에 TV나 라디오 등등의 대중매체에서 해빙기 사고 예방 캠페인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멀쩡하게 지은 아파트라면 내구성을 위해서 어느 지형이든지 지반을 튼튼하게 공사한다.
와우아파트는 1969년 12월 26일에 완공되어 입주가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 이미 문제의 업자가 시공한 13~16동에는 금이 간 채였다고 한다. 특히 14동은 콘크리트 받침 기둥이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나 붕괴시점(1970년 4월 8일)에는 주민이 대피한 상태였다. 해빙기가 되면서 땅이 녹자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기둥도 내려앉고 아파트가 산 아래로 넘어가듯이 무너져 아래에 있는 판자집 세 채를 덮쳤다.[7] 결국 '''70여명이 매몰당해 34명이 사망[8] 하고 40명이 부상'''당하는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그나마 이 시점이 30세대 중 15세대만 입주된 상태였기에 이 정도였지 만일 모든 세대가 입주해 있었다면 사상자가 더욱 크게 늘었을 것이다. 만약 30세대가 다 입주하였다면 거의 80명~100명정도의 사망자가 나올정도로 엄청난 인재사고 였다.
2.4. 결과
이 사고로 '불도저'라고 불리던 서울시장 김현옥은 사직했다. 모양새는 사직이었지만 사실상 경질이었다. 문제의 하청업자 박영배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이외에도 3명이 징역을 선고받았다.
붕괴 직후 서독의 건축 전공 대학원생들이 사고 원인을 분석하려고 시도하다가 난색을 띠고는 귀국했는데 그 이유가 '''아파트는 커녕 농가 헛간을 짓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자재로 어떻게 아파트를 지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건축공학적인 분석과 규명을 하러 왔더니 그냥 집 짓는 재료가 두부였다는 명쾌한 결론이 나와 황당함에 치를 떨고 돌아갔다는 소리다. 국책사업의 수준이 이렇게나 미개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게 당연하니...
3. 붕괴 이후 와우아파트
15동 붕괴가 일어난 지 이레 후 문제의 시공업자가 시공한 13, 14, 16동도 철거됐다. 콘크리트 질이 너무 떨어져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철거하는 데도 애먹었다고 한다. 1972년 서울시 항공사진으로 먼저 이 4개 동이 철거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와우아파트는 총 19개 동이었는데, 남은 15개 동은 붕괴 이후에도 어느 정도 보강한 후 계속 사람들이 살았다. 1976년과 1984년, 1988년과 1989년 네 차례에 걸쳐 차례로 철거하고, 1991년까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4개 동(3, 4, 5, 가)도 결국 철거한 뒤 남은 터에 공원을 조성했다.
그런데 지금도 이 일대 지적편집도를 잘 보면 와우아파트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다.[10][11] 와우공원 북쪽의 지번주소가 183~199(1-12동)까지 여러 필지로 쪼개져 있고, 남쪽으로도 201, 201((나), (다)동)로 두 개의 필지로 쪼개져 있는 것이 그 흔적. 다만 붕괴한 15동을 비롯한 13, 14, 16동은 곧바로 철거돼서인지, 이 동들이 있었던 곳은 23임으로 한 필지로 되어있다. 그리고 200번 지번주소로 표시된 (나)동의 동쪽에도 (가)동이 더 있었는데, 이 동의 부지는 현재 신촌금호어울림아파트의 부지로 되어 있다. 와우아파트 동 부지 중에 유일하게 아파트가 들어선 곳. 당시 사고현장 위치도를 보면 현재 와우산 공원 남쪽에도 동들이 있었는데, 그쪽에 붕괴된 15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당 지도의 동 위치와 현재 지적도 구획은 상술한 것처럼 필지가 바뀐 동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일치한다.
게다가 아직도 이 구역이 제1종일반주거지역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서울시가 부지를 매각한다면 아파트를 다시 지을 수도 있겠지만, 참사가 일어났던 곳인 만큼 다시 아파트가 지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12][13]
4. 사고 이후 시민아파트
이 사고 이후 아직 건설되지 않은 시민아파트는 건설계획이 모두 폐기되었고 짓고 있던 시민아파트는 골조를 더 보강해서 완성했다. 사고 이후 시민아파트는 434개 동이 완공된 상태였는데, 안전도를 검사하자 무려 349개동이 보수가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결국 쓸 만한 아파트는 계속 보수해서 쓰고 못 쓸 정도가 된 아파트는 하나씩 철거했다.
2019년 기준 서울 시내 시민아파트 대부분이 철거되고 남은 것은 소월로 근처 '''회현시민아파트''' 한 동뿐이다. 무한도전 '여드름 브레이크' 특집 초반의 바로 그 아파트.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이후에 준공된 아파트라서 시민아파트답지 않게 골조가 튼튼하다고 하다. 물론 그 마저도 지은지 50년이 넘은 탓에 몇 년 전부터 재건축이 논의되는 상황.
또한 아파트 대부분이 재개발/재건축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70년대 구조형 아파트라서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를 위시해 관광 명소 일종이 되지만, 이곳도 계속 노후화되므로 어떻게든 재건축하든지, 아현동 남아현 시민아파트처럼 리모델링이라도 하든지 해야 하는 상황. 그러나 이미 서울시는 과거 약수 금호 지역 재개발(지금의 남산타운 아파트 일대) 당시 주민들의 반발에 관한 기억 때문인지 이 지역을 상대로 삼은 확실한 출구 전략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서대문 금화시민아파트 재건축 때도 이것 때문에 내홍을 치른 서울시였기에 더욱 그렇다.
이 사고 탓에 아파트를 불신하는 감정이 팽배해지자 정부는 시범아파트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중산층을 겨냥한 새로운 형태의 아파트를 짓기로 했다. 더욱 높고 더욱 쾌적하고 안전한 아파트를 목표한 것. 이에 여의도를 시작으로 시범 아파트들이 성공했다고 할 만하게 세워졌고 이것이 지금의 아파트의 전형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와우 아파트 붕괴 사고는 지금도 대한민국 주거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5. 여담
와우아파트의 '와우'를 영단어 감탄사 ''''Wow''''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며, 옛날부터 이를 영어로 번역할 때 ''''Wow Apartment Disaster''''라고 번역해버리는 웃지못할 해프닝도 여러번 벌어진다. 때문에 이를 들은 외국인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14] 그러나 '와우'는 영어가 아닌 "누워 있는 소" 라는 한자단어 ''''臥牛''''이다. 알고있는 사람이 매우 적은데다 대부분 영단어 감탄사 Wow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영어로 표기하면 'Wau Apartment Disaster'가 맞는 표현.
조성된 와우공원은 현재의 홍익대학교 뒷편에 바로 위치한다. 테니스 코트나 각종 헬스기구도 있고 밤마다 사람들이 운동하러 오는 좋은 근린공원이지만, 와우산과 바로 맞붙은 홍익대 시설물들(C동, I동, P동 등)에서 가끔 귀신 목격담이 나오는 등 일종의 심령현상 장소가 된 모양이다. 너무나 어이없는 사고 전말을 생각하면 이해할 만하다. 물론 근처 거주자의 말에 따르면 그런거 없다.
이 사고 이후로도 대한민국의 건설업계는 별로 개선되지 않다가, 결국 1990년대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무너지면서 정점을 찍고 말았다.[15] 이 때문에 대한민국 내에서뿐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대한민국 건설사들의 신뢰도가 크게 추락했고, 이 여파를 회복한 것은 200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였다.[16]
1980년대에 재산의 공유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무계급 사회를 지향한 책을 보면, 북한에서는 철근 대신에 싸리나무를 쓴 공법으로 건설하기에 1970년대 아파트 붕괴 사고가 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서술이 있는데 당시 정부에서 고의로 유포한 낭설이었다.[17] 이 때까지는 남북한 간 체제 경쟁이 계속되던 때였으니...물론 1990년대 이후 경제력이 악화된 북한에서 부실 공사가 성행한 적이 있으며 2014년에 결국 일이 터졌다.
앵커 최일구가 와우아파트에서 살았었다고 무릎팍도사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안성에서 서울로 이사했던 당시에는 이미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가 일어난 후였지만, 어린이의 눈으로 보기에도 당시 상황이 꽤 참혹했던 모양. 이때의 기억 탓에 MBC의 기자가 된 후 '''"부실공사"라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인연이었는지 최일구는 MBC에서 한강 교량의 보수관리 실태를 취재하게 되었고 보도한 지 1년 후 실제로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사고 당일 MBC 뉴스데스크를 진행하던 엄기영 앵커의 극딜은 덤. 최일구는 성수대교 붕괴 이후 당산철교의 균열을 발견하여 당산철교로 올라가 직접 촬영하였고 결국 안전 검사에서 딱 걸린 당산철교는 수도권 전철 5호선의 개통과 함께 철거 후 재시공이 결정됐다. 그리고 당산철교는 1997년 철거를 시작했을 때, 기존 교량이 알아서 무너진 후 1999년에 다시 완공했다. 원래 1997년 3월에 철거를 시작하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이보다 2개월 앞당긴 1월에 시작되었다.
이 사건을 다룬 소설로는 최인훈의〈하늘의 다리〉(1970) 정도가 있다. 당시 와우 아파트 붕괴사건을 다룬 몇 안 되는 드문 작품이다.[18]
조정래의 대하소설 한강에서도 이 사건이 한 챕터로 나온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의 할머니가 와우아파트에 살았는데, 붕괴한 동이 아닌 다른 동이라 무사했다는 설정이라 피해자를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았다.사월에 들어서 준구는 또 한 번 그의 캔버스가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마포에 있는 아파트가 무너진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중략) 그것이 무너져 내린 일은 어떤 오싹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아마 모든 사람의 느낌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보통 사람이 죽는다거나 집이 무너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산다. 사람은 언제까지나 살고 아는 사람들은 늘 주변에 있겠거니 하고, 눈 익은 집은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알고 산다.''' - 최인훈, 〈하늘의 다리〉(1970)
웹툰 작가 강풀의 작품 어게인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1] 옛날에는 Wow Apartment Disaster라고 번역이 돠었지만 명백히 잘못된 번역이다. [2] 당시 서울시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단가에 입찰하게 하고, 거부하면 이후 관급공사에서 불이익을 주었다.[3] 당시 자동차가 흔치 않은 시절이었으므로 현재 액수로 환산해보면 대충 몇십억 정도이겠지만, 그 정도 액수로도 당연히 아파트는 지을 수 없을 정도다.[4] 다만 당시 시민아파트는 5층정도의 높이에 평수도 10평이 좀 넘는 정도로 넓지 않았으므로 현대의 아파트라는 개념은 아니다.[5]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에 이런 상황이 잘 나온다. 실제 개발 독재 시절에는 재개발, 재건축 아파트 입주권 소위 딱지를 팔고 떠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이를 중산층, 부유층들이 사들여서 부동산 재테크를 하였다. 2010년대 이후에나 기존 거주민들이 신축 아파트에 100% 입주하는 재개발 지역이 나왔다. [6] 이탈리아에 있는 피사의 사탑은 거진 10층 다 되는 탑을 쌓는데도 밑으로는 고작 3 m밖에 파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달이 난 것.[7] 판자집들은 현재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었다.[8] 와우 아파트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33명이며, 건물이 무너지면서 아래에 있는 판자집을 덮치면서 1명의 사망자가 더 나왔다.[9] 1978년이 V-World로 볼 수 있는 서울 항공사진 중 가장 오래된 연도이다. 후술할 사고현장 위치도와 대조하면 13, 14, 15, 16동은 물론 1, 9, (다)동도 철거되었음을 알 수 있다.[10] 사실 이곳 말고도 지적편집도에 흔적만 남은 시민아파트도 더러 있다. 시민아파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공원화되다보니 굳이 지적 정리를 할 이유가 없어서 그냥 그대로 둔 듯.[11] 시민아파트 외에도 몇몇 초창기 주공아파트도 지번이 여러 개로 분할되어 있다.[12] 삼풍백화점 참사가 있었던 곳은 아크로비스타가 들어섰지만, 이쪽은 손해배상을 이준이 서울특별시청에 헌납한 전 재산에서 대부분 충당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매각했던 측면이 있었다.[13] 게다가 이 부분은 인근 주민들의 반대 등 여러가지 변수도 있기 때문에 마냥 쉬운 일은 아니다.[14] 위의 오역된 영단어를 다시 한국어로 바꾸면 '우와 아파트 참사'이다.(...) 와우를 Wow로 번역해버리는 사례는 90년대부터 보이는 것으로 보아 역사가 오래된 오역사례인듯 하다.[15] 성수대교는 1979년 완공. 삼풍백화점은 1989년 완공이다. [16] 그 대표로 1990년대 말레이시아의 스팡에서 기존의 공항을 대신할 신공항을 건설할 때 대한민국 기업들이 빠졌던 적이 있었다. 당시 한국이 말레이시아를 서서히 앞서가던 시기였다고 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도 대한민국의 건설사들을 믿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얘네들도 이전인 1993년에 한번 일이 터진 적이 있었다.[17]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실제로 철근 대신 대나무를 써서 지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도 2010년대에... # [18] 자세한 내용은 송은영, 『서울 탄생기: 1960-1970년대 문학으로 본 현대도시 서울의 사회사』(2018)를 참고하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