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프랑스대사관
[image]
주한프랑스대사관
'''Ambassade de France en Corée'''
홈페이지
1. 개요
프랑스공화국이 대한민국에 설치한 외교공관. 위치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소문로 43-12 (합동)이다.
현재 서소문로 대사관 건물의 리노베이션 공사가 진행되면서, 2021년 1월 8일부터 서소문로 합동 공관이 폐쇄되면서 2021년 1월 13일부터 서울특별시 중구 칠패로 42, 우리빌딩 18층으로 이전하였다.# 기존 대사관보다는 공간이 협소하여 모든 내방 업무는 예약제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2. 역사
정식 외교관계를 맺기 전인 1835년에 이미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가톨릭 주교와 신부들이 조선에 선교하러 왔다. 당시 조선에 왔던 사제들은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1] 주교, 성 모방 나 베드로[2] 신부, 성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이다. 이들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했으나, 이후로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신부들이 꾸준히 조선에 잠입하여 사목 및 선교활동을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계속 천주교를 박해하고 있었고, 이후로 입국한 프랑스인 사제들도 1866년 병인박해 때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순교했다.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인 사제 12명 가운데 9명이 순교했는데, 살아남은 3명 중 하나인 펠릭스 클레르 리델[3] 신부에 의해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와 프랑스인 사제들의 순교가 프랑스에 알려진다. 그 때문에 조선과 프랑스 간에 군사적 충돌이 있었고(1866년 병인양요), 사이가 안 좋았다가 1886년에 비로소 수교하였다.[4]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년)과 신미양요(1871년)를 겪은 미국과는 1882년에 빠르게 수교한 걸 생각하면, 프랑스에 대한 감정이 더 안 좋았나 보다. 1905년에 을사조약으로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가 1949년에 다시 수교하였다.
1886년 수교 후 건립한 구 프랑스공사관은 정동 28번지에 있었는데, 을사조약으로 공사관이 영사관으로 격하되고 경술국치 이후 현대의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는 민영환의 집터 자리로 옮겼다. 이 영사관 부지가 현대의 주한프랑스대사관의 전신이다. 한편 구 프랑스공사관 부지에는 서대문소학교가 들어서면서 공사관 건물을 철거하였다. 이 학교는 서대문국민학교로 전환하였다가 1973년 폐교되고 창덕여자중학교가 이전했다.
3. 건축
대사관이 예쁜 걸로 유명하다. 그냥 다른 대사관보다 예쁜 수준 따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건축가들이 한국 최고의 건축으로 인정할''' 정도의 걸작으로,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이라는 순위선정에서 2위를 먹기도 하였다. 건축가는 김중업. 그때 2위가 이거고 1위가 김수근의 공간사옥이었는데, 한국 역대 최고의 건축가를 뽑을 때 1명 뽑으면 김수근이 뽑히고 2명 뽑으면 김중업도 뽑히는 상황이 여기에 반영되었다고 본다면 2위라는 것은 숫자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최소한(...) 멋대가리 없는 주한일본대사관보다는 낫다말 할 수 있다. 주한러시아대사관의 경우에는 뛰어난 건축이지만 폐쇄적인 성격 탓에 사랑받지는 못하고 있고, 주한영국대사관도 건물은 예쁜 편인데, 이쪽은 그야말로 근대건축이라서 문화재에 가까운 경우.
4. 대사
2015년 9월 14일 파비앙 페논(Fabien PENONE)대사가 취임했다
4.1. 국방무관
[image]
랑젤라 육군대령이 맡고 있다.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군 참전자를 추모하는 행사를 했는데 왼쪽의 한국 영 현병들 뒤에 선 육군예복 차림의 남성으로 추정된다.
4.2. 영사관
따로 영사관은 없지만 부산광역시 동구(부산), 동래구, 해운대구에 각각 명예영사관이 존재한다.
4.3. 기타
주한프랑스대사관 산하에 있는 프랑스 문화원은 초기 한국 시네마테크 운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프랑스대사관은 한국 법률이 적용되지 않아, 독재 정권의 검열에서 자유로웠고 [5] 무자막으로 필름 상영을 했다고 전해진다. 정성일, 김홍준, 듀나가 프랑스문화원 세대로 꼽힌다.
때문에 영화에 대한 자부심 때문인지, 자국 영화 상영회 협찬에 상당히 적극적인 대사관이다. 이외엔 일본문화교류기금을 통해 지원하는 주한일본대사관과 주한이탈리아대사관이 있다.
5. 사건사고 및 논란
5.1. 종부세 납부 면제 요청 및 거부 논란
주한프랑스대사관 측이 2020년 10월 외교부에 서울시에 있는 직원용 사택에 부과돤 종합부동산세에 대해 종부세를 면제해달라는 요청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사관 측은 외교부에 "프랑스에는 종부세 개념의 세금이 없고, 프랑스 정부가 현지 재외 공관에 부과하는 재산세와 비교해도 과도하다는 취지로 항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항의했다고 한다. 외교부는 주무 부처인 기획재정부에 대사관 측 민원을 전달했지만 재정 당국은 면제가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기재부 관계자는 본지 통화에서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양국이 별도의 협약을 체결하지 않는 한 세금 면제는 어렵다'''”고 했다.
주한프랑스대사관은 2007년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당시 부과된 종부세 1억 5천만원에 대해 프랑스에는 종부세가 없다며 거부를 했었다. 그러자 국세청이 반포동 빌라 등에 대해 압류조치를 했고, 양국 간 외교 문제로 비화된 적도 있었다.
5.2. 무슬림 주한프랑스대사관 협박전단 사건
2020년 11월 1일 밤, 외국인 무슬림 2명이 '''주한프랑스대사관'''의 담벼락에 협박성 전단 5장을 붙이고 도주하였다. 이에 프랑스 대사 부부가 위협을 느껴 한국 경찰에 신고했고 한국 경찰이 범인 추적에 나섰다. 대사관 관계자들은 협박성 전단에 상당한 압박감을 받았다고 한다.[6]1234
협박성 전단물의 내용은 한국어와 영어로 '우리 종교를 파괴하지 말라',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는 자, 그 칼에 죽임을 당하리라', '무슬림을 무시하지 말라' 등이 적혀있고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의 얼굴에 신발자국과 함께 빨간색으로 X자를 그린 전단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범인은 중앙아시아 출신 무슬림 남성 2명이고 '외교 사절에 대한 협박 혐의'를 받고 있다. 범인 중 1명이 먼저 충남의 한 도시에서 검거되었으며, 그는 최근 프랑스의 이슬람에 대한 정책에 불만이 동기였다는 진술을 했다고 한다. 얼마 후 나머지 한명도 검거되었다. 범인 2명 모두 경기도에서 거주하며 충청지역 공장에서 일해왔다. 범인 1명은 학생비자로 입국해 국내 한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학하고 있었고, 나머지 한명은 불법체류자로 밝혀졌다.
[1]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2]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최방제는 도중에 병으로 죽었지만, 김대건과 최양업은 무사히 살아남아 신부가 되었다.[3]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4] 이때부터 한국에서도 가톨릭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한편 조선에서 순교한 프랑스인 사제들은 조선인 순교자들과 함께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 1984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한국 103위 순교성인).[5] 1960년대 중후반 프랑스 영화는 전위적인 성격이 강한데다, 정치적 성향 때문에 제대로 수입이 안 되었다. 이 경향이 제일 강한 고다르 같은 경우엔 프랑스문화원에서밖에 볼 수 없었다.[6] 2020년 말 유럽 내 무슬림들의 테러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중동 등 이슬람권에서 거센 반프랑스 감정 확산에 대한 반응들이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32&aid=000304113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