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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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윤 (金漢潤 / Kim Han-Yoon)'''
생년월일
1974년 7월 11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경상북도 경산시
혈액형
B형
가족
2남 중 첫째, 부인과 슬하 1남
학력
서울독산초등학교 - 문일중학교 - 문일고등학교 - 광운대학교
선수시절 포지션
센터백, 스위퍼, 수비형 미드필더, 윙백
신체 조건
184cm / 75kg
프로입단
1997년 부천 SK
소속팀
부천 SK (1997~1999), 39경기 2골
포항 스틸러스 (1999~2000), 22경기
부천 SK (2001~2005), 88경기 2골
FC 서울 (2006~2010), 94경기
부산 아이파크 (2011~2012), 57경기 3골
성남 일화 천마 (2013) 27경기 1골
지도자
FC 서울 (2014~2015 /코치)
제주 유나이티드 (2016~2019 /코치)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2019~ /코치)
국가대표
4경기 / 0골
별명
율매기, 한느님, 아버지
1. 소개
2. 경력
3. 지도자 경력


1. 소개


대한민국축구인. K리그 통산 430경기에서 143장의 옐로카드를 받아 이 부분 1위에 올라있다. K리그 사상 최초로 100장의 경고를 받은 선수이며 K리그 통산 9번째, 필드 플레이어로는 6번째로 400경기 출장기록을 세웠다. K리그의 대표적인 '''unsung hero'''. 1997년 데뷔하여 2013년 40세로 은퇴할 때까지 언제나 묵묵히 팀의 후방을 책임지며 팀의 심장 역할을 했다. 거친 이미지에 가려 오랫동안 제대로 된 평가가 드물었지만 그의 성실함을 아는 팬들은 누구나 그의 진가를 인정했다. 상대팀일 땐 그렇게 짜증나다가도 우리편이 되면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 없었던 선수.
국가대표 경력은 A매치 4경기 뿐이지만, 2006 FIFA 월드컵 독일 아시아 예선에 참가하여 수훈을 세웠다.[1]

2. 경력



2.1. 부천 SK


초등학교 시절, 축구부 친구가 먹던 우유에 혹해 축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문일고등학교, 광운대학교를 거쳤고 1997년 부천SK에서 데뷔했다. 대학때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고 프로에서 중앙수비, 윙백, 수비형 미드필더를 넘나든 다재다능한 선수로 부천SK의 르네상스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2] 이 인연으로 부천 FC 1995와 올드 부천SK 멤버들간의 친선경기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허기태, 손종찬, 김상문, 송선호, 이찬행 등 기존 수비자원 대부분이 은퇴한 부천에서 그들의 공백을 훌륭히 메우며 유상수와 함께 지역방어를 완성했다. 이는 용병의 도움을 받지 않고 순수하게 국내 선수들의 힘으로 완성된 것으로 당시로선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높은 축구 아이큐를 활용한 멀티플레이 능력과 끈끈한 수비, 집요하고 근성있는 플레이로 팬들의 성원을 받았다. 다소 거친 수비 스타일로 경고를 많이 받긴 했지만 요령있는 플레이로 통산 퇴장은 3장에 불과하다.[3] 단점은 욱하는 면이 있어서 한번 꼭지돌아 버리면 그 날 경기는 완전히 말아먹어 버린 다는것.[4] 그래서 위기상황 때 후배들의 멘탈을 컨트롤해주는 역할을 잘 못한다. 서울 시절엔 소속팀의 공공의 적 이미지탓에 이 단점만 크게 부각되어 받은 비난을 받았다.
1999년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하였다가 2001년 친정인 부천으로 복귀해 2004년 FA컵 우승에 기여했다. 타고난 내구성에 임기응변이 뛰어나고 자기 관리가 철저해 커리어 내내 기복없이 꾸준한 플레이를 선보였다.
2005 시즌까지 팀의 주축선수로 활약하고, 시즌 종료 후 FC서울로의 이적이 발표되었다. 당시 김한윤의 이적을 놓고 부천팬들의 의견이 분분했는데 최종적으로 남아있으면 좋겠지만 발이 느리고 만 32세의 노장이라는 점이 부각되어 어차피 하락세에 접어들 것이니 이적료 남기고 이적 시키는것도 괜찮다라고 대세가 모아졌으나... 그 이후로도 무려 8년을 더 뛰었다.

2.2. FC 서울의 심장


2006년 FC 서울로 이적했다. FC 서울 이후 김한윤은 많은 축구팬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지나치게 거친 플레이와 감정 조절 실패로 이따금 지나친 흥분과 몸싸움을 벌여 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고 그걸 덮을 만큼 압도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술적인 면에서 김한윤의 존재감은 당시 FC 서울의 그 어떤 선수보다 거대했으며 그가 있고 없고에 따라 스타군단 서울의 경기력은 크게 흔들렸다. '''30대 중반을 넘긴 노장이었지만 서울은 끝내 그를 대체할 플레이어를 키워내지 못했다.'''[5]
세뇰 귀네슈 감독이 이끌던 시절 FC 서울의 주전술은 4-4-2. 귀네슈 부임 초기 김치곤과 센터백 듀오을 이뤘던 김한윤은 이민성의 부상과 김진규 영입 이후 주로 기성용과 짝을 이뤄 미드필더진을 담당했다. 김한윤의 헌신적인 플레이 덕분에 파트너 기성용은 공격에 전념할 수 있었고 서울은 중앙 높은 지점에서 기성용을 중심으로 한 수준 높은 공격전개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고요한이나 고명진이 중앙에서 공격 전개를 맡을 수도 있었지만 당시 그들이 중원에서 가지는 파괴력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게다가 이 경우 기성용이 수비적인 롤을 수행해야 했는데 기성용은 수비적인 면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는데다 그의 공격력을 희생해야 한다는 점에서 서울에도 그다지 이롭지 않다. 궁여지책으로 김진규나 아디에게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길 수도 있지만 자칫 왼쪽 혹은 중앙 수비까지 덩달아 약해지는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김한윤과 그를 대체할 한태유가 부상으로 동시에 결장하면서 문제점이 드러난 대표적인 경기가 움살랄과의 09년 AFC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이다. 이날 서울은 기성용과 고요한이 플랫 4-4-2의 중앙 미드필더로 나섰다. 둘 중 수비 능력이 그나마 더 좋은 기성용이 수비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의 공격 가담 횟수는 줄어들었다. 이는 센터 공격의 약화를 가져온 동시에 수비력이 떨어지는 기성용이 중앙 미드필더로서 중앙 지역과 측면 오버래핑을 동시에 커버하는 바람에 포백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해 수비에도 부담을 주는 상황을 연출해냈다.
특히 후반전 서울이 상대에 만회골을 내준 뒤 흔들리는 상황에서 움살랄의 마그노, 다비 등 공격수를 집중마크하고 필요할 땐 센터백의 역할까지 하는 전문적인 수비형 미드필더가 없다는 점은 여러모로 김한윤의 부재를 아쉽게 만들었다. 결국 서울은 이날 3-3으로 비겨 4강 진출에 실패했다.
젊은 스타 플레이어가 즐비한 서울이지만 김한윤 같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노장이 팀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은 축구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닐까? 다만 어린 선수들의 전투의욕을 고취시켜주는 데에는 큰 공헌을 했지만 거꾸로 위기상황에서 선수들의 멘탈을 잡아주는 것은 못 했다는 평가가 많다. 본인이 먼저 꼭지가 돌아버려 누구 멘탈 잡아줄 상황이 아녔고, FC서울은 중요할 때 스스로 고꾸라지며 우승을 놓쳤었다.[6]
2010 시즌 현영민이 영입되며 기존의 레프트 백 아디를 다른 포지션으로 돌릴수 있게 됨에 따라 2010 시즌 초반 아디가 주전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하며 마당쇠 노릇을 하고 김한윤은 백업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시즌 중반 수비진에 공백이 생겨 아디가 센터백으로 내려가자 김한윤은 다시 중원으로 돌아왔고 변함없이 팀의 심장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2010년 시즌 종료 후, 팀과의 재계약이 무산되며 은퇴하게 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FC서울 홈페이지에 남긴 글은 많은 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아래는 전문.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는군요. 운동장에서 저는 언제나 주연이기 보다는 조연이길 바라며 항상 최선을 다해 달려왔다 생각합니다. 때론 거친 플레이로 여론의 비난을 받은적도 있었지요. 그러나 항상 제자신보다는 팀동료를 먼저 생각하려고 했던 플레이들이였으니 너그럽게 좋은 추억으로 남겨 두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기쁠때나 슬플때나 언제 어디서나 여러분들과 함께였기에 행복한 저 김한윤이였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뜨거운 함성을 뒤로하고 정든 그라운드를 떠나려 합니다. 제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여러분들이 주셨던 사랑...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고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제가 그라운드 밖에서 방황하고 실수 할땐 언제든지 "정신차려 한윤!" 이라고 외쳐 주세요! 이제 그라운드가 아닌 곳에서 서포터즈 여러분들과 함께 "FC 서울"을 응원하겠습니다. 또 땀흘리고 몸을 던지는 후배들에겐 여러분들의 뜨거운 함성이 언제나 필요할 겁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응원 뿐만 아니라 모든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그동안 감사했고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__)

2.3.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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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은퇴를 선언했던건 경기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2010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결정했으나 2011 시즌을 앞두고 부산 아이파크 감독으로 발탁된 안익수 감독이 김한윤에게 부산으로의 이적을 제의했다. 아이도 8개월밖에 안됐고 그래서 고민을 많이 하다가 결국 축구에 대한 미련을 못버리고 부산에 플레잉코치로 입단을 결정했다. 3개월동안 놀다가 몸만드느라 고생이 심했다고한다.
서울 시절 김한윤은 부산과는 악연이 많은 선수였다. 부산과 경기 도중에 몸싸움을 하거나, 심한 태클을 하거나 해서 경고나 퇴장을 받은 적이 여러번 있었다. 당연히 부산팬들이 바라보는 눈이 고울리 없었다.
하지만 이내 이 영입은 신의 한수임이 드러났다. 4월 20일 러시앤캐시컵 상주전에서 골을 기록했고 4월 24일 K리그 7라운드 대전전에도 득점을 올리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한상운 등 젊고 빠른 선수들을 대거 보유했지만 뒷심 부족으로 최악의 3월을 보낸 부산에게 산전수전 다 겪은 그의 노련미와 녹슬지 않은 수비력은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재산이었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팀의 든든한 후방지원조이자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어 주었고 이를 믿고 겁없이 돌격한 젊은 선수들은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룩해냈다.
그리고 2012년 부산은 마침내 '''질식수비'''라는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으며 닥공에 이은 K리그의 또다른 히트 상품이 되었다. 분석 기사
덤으로 질식수비가 길러낸 김창수, 박종우, 이범영 선수는 런던 올림픽 동메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K리그의 레전드 중 한 명 임에도 지난 몇년 연고이전 팀의 선수라는 색안경과 거친 플레이로 저평가 받았던 이 노장은 실력으로 다시 한번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었다. 물론 서울 팬들은 아버지라고 불렀던 그가 은퇴 후 다른 팀에서 현역 복귀를 하는 것을 보며 터지는 복장을 부여잡아야 했다.

2.4. 또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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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식수비의 중핵으로 커리어 마지막을 장식하고 부산 아이파크에서 명예롭게 은퇴를 맞이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2012년 축구판에 일대 나비효과가 밀어닥친다. 2012년 12월 성남의 신태용 감독이 성적부진을 이유로 해임되고, 돌연 부산의 안익수 감독이 성남 감독으로 취임한다. 앞서 김인완 수석코치가 대전 감독으로 취임한 상황에서 감독까지 내주며 부산은 코칭스태프가 완전한 공백이 된다. 이를 두고 축구팬들은 당시 프로축구연맹 회장이었던 정몽규 부산 구단주가 대한축구협회 회장 선거출마를 앞두고 박규남 성남 사장과 모종의 딜을 했다는 것이 중론.
이후 뜬금없이 부산 감독으로 세제믿윤이 취임하고 구단이 재계약 의사를 보이지 않아 자유 계약(FA) 신분으로 풀린 상태가 되었다. 얼마간 팀을 더 알아보다 없으면 은퇴할 예정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2013 시즌 안익수 감독을 따라서 성남에 이적했다. 초기엔 많은 나이와 별로 좋지 않은 이미지 때문에 팬들 사이에선 그리 좋은 영입으로 보지 않았지만[7] 5라운드 부산전부터 투입되면서 이어지는 강팀들-전북, 서울, 울산-과의 3연전에서 전승하면서 완벽히 팀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FA로 영입했기 때문에 이적료 한 푼 안들인 최고의 영입중 하나.

3. 지도자 경력


2013 시즌을 마지막으로 기나긴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후 FC 서울의 코치로 선임되어 2015 시즌까지 재직하다가 2016 시즌부터는 제주 유나이티드의 코치로 이직하였다.
2019년 5월 1일 뜻밖에도 베트남 국가대표 코치로 간다는 기사가 나왔다.
박항서 감독이 A 대표팀을 이끌고 태국 킹스컵에 참가하면서, 6월 7일 베트남에서 열린 U23 팀의 미얀마와의 평가전을 대신 지휘해 2-0으로 이겼다.
역시 박항서 감독이 인도네시아와의 월드컵 예선 일정으로 자리를 비운 10월 13일, UAE와의 U22 경기를 맡아 1-1로 비겼다. 이후 박 감독이 월드컵 예선을 치르던 중인 11월 17일에는 U22 미얀마와의 시합을 이끌어 2-2로 무승부.

[1] 예선에서 수비수 세대교체를 시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발탁된 2000 시드니 올림픽 올대 출신 박재홍 - 박동혁 콤비가 대형사고를 쳤다. 베트남전 박재홍의 자살골과 우즈백전 박동혁의 치명적인 미스는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최종예선 이란전에서 김영권의 삽질이 나오기 전까지 대표팀을 말아먹을 뻔한 최악의 실수로 손꼽힌다. 결국 이 두 명은 김영철, 김진규 등에 밀려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다.[2] 부천의 전성기를 이끈 핵심으로 미드필더에선 윤정환, 조셉, 김기동, 남기일, 윤정춘, 이을용 수비에선 이임생, 김한윤, 유상수 등이다.[3] 한번에 레드카드 받고 퇴장한 횟수이다. 경고 숫자에서 보듯이 경고 누적 퇴장은 많다.[4] 물론 그라운드 안에서의 모습. 밖에서는 후배들에게 조언도 많이 해주고 잘 챙겨주는 선배라고 한다.[5] 귀네슈 재임기(07~09) 중앙에서 마당쇠 노릇 해줄 선수는 김한윤을 제외하면 한태유와 아디 정도였다. 하지만 한태유는 군복무에 이은 부상으로(2007~2008 시즌은 여효진, 김승용 등과 함께 상무에 있었고, 2009 시즌은 부상으로 허비했다.) 2012 시즌을 제외하면 팀에 별 보탬이 되지 못했고 아디는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도 리그 정상급으로 수행할 순 있지만 이 경우 수비진이 약해진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빙가다 감독 재임이후 신예 최현태를 기용했지만 활동량만 많을뿐 한참 모자라다는 평가를 들었다. 2012년 우승의 원동력 중 하나가 꾸준한 기회제공으로 어느정도 성장한 최현태와 후반기 부상에서 복귀해 괜찮은 폼을 보여준 한태유의 후방지원 이었는데 한태유가 다시 하락세에 들고 최현태가 지지부진 하면서 헐거워진 서울의 중원은 최용수 감독의 혹사와 합쳐져 성적하락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 포지션은 2014 시즌 앞두고 오스마르가 영입되고서야 완전히 해결됐다.[6] 이 시절 다른 고참 선수론 이을용과 아디가 있었는데 아디는 흠잡을데 없는 선수긴 하지만 외국인이니 이런쪽으론 한계가 있을수밖에 없었고 이을용은 전투적이기론 김한윤에 버금갔던지라 냉정하게 멘탈을 잡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7] 사실 부산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한윤을 영입한다고 하면 팬들은 늘상 거의 거친 이미지를 거론하며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막상 시즌 들어가면 노련하고 투지 넘치는 플레이에 환호를 보냈다. 수비형 미드필더의 숙명을 보여주는 선수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