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7년부터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아시아에서도 축구 약체로 분류되던 베트남 국가대표팀을 맡고 난 이후부터, 2018 AFC U-23 컵(준우승)에 이어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4위)에서도 마찬가지로 매 대회마다 팀의 역대 최고 성적을 갱신하며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있다.
2018년 동남아 축구연맹 대회인 스즈키컵도 10년 만에 우승시켰고, 직후 2019 AFC 아시안컵에서는 8강에 올랐다. 2019년 동남아시안게임(축구팀은 22세 이하 대회. 각국 올림픽위원회 연합 주관)에서 60년만에 우승을 달성했다[4] . 메인 전술은 5-4-1 카운터 어택으로 철저한 실리주의 축구를 추구한다. 2020년 4월 16일자 소식에 의하면 팀 전술의 변화를 시도하려고 한다. 변화 꾀하는 박항서 감독, “상대가 베트남 전술에 익숙해진 건 사실”. 한양대 체육학과 77학번 출신이다.
2. 현역 시절
일본 유학생 출신인 아버지는 경찰 간부로 재직하다 부상으로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었고 어머니도 명문 진주여고를 나왔다. 부모는 고향에서 약방을 운영해서 크게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자랐다. 축구를 굉장히 늦게 시작했는데 중학생때까지만 해도 장래희망이 군인이었고 축구는 논두렁에서 공차는 게 전부인 평범한 학생이었다.
부모의 높은 교육열에 서울로 상경했으나 처음 목표했던 배재고 진학에는 실패하고 경신고에 진학했다. 교실에선 경신고 축구부원들이 공차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이 운명을 갈랐다. 축구에 대한 열망이 강해져 그들 사이에 들어가 함께 땀흘리고 싶었지만 신장 165cm에 비쩍 마른체격, 축구부 경력 조차 없는 범생이를 받아줄 축구부는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축구를 하고 싶었던 그는 이경이 당시 경신고 축구부 감독과 절친한 사이였던 자형의 빽으로 겨우 축구부에 들어갔다. 이런 무경력자에게 기회가 올리 없어 6개월간 후보선수로 지냈고, 운동선수 학사관리가 미흡했던 그 시절 관행을 따라 제때 졸업을 못하고 1년을 꿇었다.
하지만 종일 축구공을 가지고 훈련하며 빠르게 실력을 키웠다. 1976년 고 3때 전국 청룡기 축구대회에서 결승골을 넣어 경신고에 우승컵을 안겼다. 한양대 2학년이였던 1978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에서 청소년 대표팀 주장을 맡아 우승을 하였다.[5]
이후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실업팀인 제일은행 축구단에 입단하며 실업선수로서 데뷔하였으며, 곧바로 육군 축구단에서 군복무를 한 뒤 1984년 럭키금성에 창단 멤버로 입단하며 프로무대에 데뷔하였다. 1985년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리그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86년 팀의 주장으로 선임되어 팀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기도 하였다. 그리고 호적상 만 29살, 실제론 만 31살이던 1988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축구를 늦게 시작했고, 리그 태동기라 실업과 군복무를 거쳤기 때문에 다른 역대 국가대표 감독들에 비해 짧은 4년의 프로선수 시절을 보냈다.[6]
참고로 국가대표로 뛴 A매치는 단 1경기. 1981년 3월 한일정기전에서 전반 17분 교체 투입돼 73분간 뛴 게 전부다. 박항서가 지금도 가장 아쉬워하는 선수 시절 커리어라고.
[image]
[image]
이미 20대부터머리가 빠졌기 때문에 대머리 링커[7]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위 사진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현역 선수 시절''' 사진이다. 절대 코치가 아니다, 참고로 위 사진 당시 나이는 '''25세이다.'''
2.1. 플레이 스타일
선수 시절 미드필더였으며, 짧으면서도 빠른 패스를 상당히 중요시한 선수였으며, 체력이 좋고 항상 전력을 다하는 근성이 있는 선수라는 의미에서 '악바리'와 밧데리 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3. 지도자 시절
3.1. 초기
은퇴 후 친정 팀 LG 치타스의 트레이너로 선임되어 1996년까지 LG의 트레이너와 코치로 활동했다. 1994년에는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 출전하는 국가대표팀 트레이너로 활동하며 김호 감독을 보좌하였으며,[8]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창단 감독을 맡은 김호 감독을 따라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코치로 합류하여 2000년(시즌 전)까지 활동했다.
3.2.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image]
[9]
허정무 감독이 사퇴하여 공석이 된 뒤, 후임 대표팀 감독을 보좌할 수석코치로 내정된 박항서는 2000년 12월 20일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일본과의 한일 정기전에서 감독 대행 자격으로 경기를 지휘했고[10] , 이후 히딩크호의 수석코치로 합류하여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까지 대표팀 수석코치[11] 로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했다.[12] 그렇게 감독과 선수들 간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면서 한국 대표팀 선수단의 융화를 일구어내며 월드컵 4위의 성과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았다.
황선홍이 조별 리그 첫 경기인 폴란드전 때 선취골을 넣고 안기러 간 사람이기도 하다. 진상은 게임 시작 전에 황선홍이 골을 넣으면 박항서 코치를 안아준다고 농담 삼아 말을 했는데 골을 넣어버려서... 옆에 있던 히딩크는 섭섭해 했다고.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16강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이 결승 골든골을 넣은 뒤 환호하다가 이내 눈물을 글썽거리며[13] 그라운드로 향할 때 다가와서 격하게 환영해주기도 했다. 관련 영상
3.3.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 감독
월드컵 이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을 맡으며 생애 처음으로 감독직을 맡게 된다. 하지만 당시 하늘을 찌르던 대표팀의 사기를 등에 업고도 '''겨우 동메달'''(…)을 땄다는 이유로 AG 이후 해임됐다. 월드컵과 올림픽에 비하면 우승 가능성이 확연히 높은 대회에서, 그것도 대한민국 안방에서 열린 대회임에도 금메달을 못 땄다는 점이 컸다.[14]
9전 7승 2무의 ㅎㄷㄷ한 전적을 기록했으나, 아시안 게임 준결승에서 이란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여 우승은 좌절되었다.
이 대회에 박항서가 지휘했던 스쿼드를 보면 참으로 화려한데, 월드컵 4강 멤버 중 박지성, 이천수, 최태욱, 현영민이 발탁되었고, 비록 월드컵 본선엔 함께하진 못했지만 이동국과 김용대는 히딩크호에도 꾸준히 뽑혔던 멤버였으며, 김은중, 김두현, 김동진, , 박용호, 조병국 등이 합류했고, 더군다나 와일드카드 3명 중 2명을 또다른 월드컵 4강 멤버중 하나인 이운재와 이영표로 선발하는 위엄을 선보였다.[15] 그만큼 군 면제는 둘째치고 무조건 우승만 노리고 참가한 대회였으니 부진한 성적인 건 맞다.[16]
조별예선에서 몰디브와 말레이시아를 각각 4:0으로, 오만을 5:2로 완파한데 이어 8강에서 바레인까지 꺾었지만, 준결승에서 이란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하며 금메달이 좌절되었고, 3-4위전에서 태국을 3:0으로 꺾고 동메달을 차지하는 데에 만족해야만 했다. 참고로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는 박종환 감독 체제로 금메달을 받았었기에 16년만의 안방 금메달을 엄청 기대했던 분위기였다. 월드컵 탈락의 한풀이를 하러 왔던 이동국은 빼도 박도 못하고 시즌 후 군대 확정. 한국을 꺾고 올라간 이란이 결승에서 일본까지 격침시키고 금메달을 차지해 아쉬움을 더했다.
하지만 마냥 박항서 책임으로 묻기는 어려운 게, 당시 축구 협회는 2002월드컵에 올인 하느라 이 대회 준비를 소홀히 했다[17] . 연령별 상비군을 확보해 두긴 했지만, 정작 '''감독과 코칭스태프가 없었다'''. 이 무슨...결국 대회 3달을 앞두고 부랴부랴 아시안 게임 대표팀이 꾸려졌고[18] , 당시 월드컵 엔트리 탈락 후 상심하여 방 구석에서 소주만 빨고 있던 이동국도 차출 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 타임 라인을 살펴보면 박항서 감독이 얼마나 축구협회로부터 '''홀대'''를 받았는지 잘 알 수 있다. 2000년 12월 20일 거스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에 부임하고, 2002년 6월 29일 터키와 3 4위전을 끝으로 지휘봉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8월 6일 아시안 게임을 약 두달 앞두고 박항서 감독이 코앞으로 다가온 아시안 게임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까지 대표팀을 이끌기로 '''졸속''' 계약을 맺는다.
지금이야 홍명보처럼 올림픽 대표와 국가대표 감독을 겸임하거나, 울리 슈틸리케와 신태용처럼 따로 운영하는 등 장기적으로 대표팀의 세대교체를 염두에 두고 각급 대표팀을 운영하지만 저때는 아예 사전에 코칭 스태프를 꾸리지도 않았다는 점을 눈여겨 보자. 즉 히딩크 후광을 업으려고 박항서, 정해성 두 사람을 각각 감독과 코치로 선임한 정황이 뚜렷하다. 그나마 정해성은 이를 고사했다.
그리고 9월 7일 남북축구대회가 열리는데 축협은 '''방한한 히딩크 감독을 기술고문 자격으로 대표팀 벤치에 앉히는''' 미친 짓거리를 저지른다. 9월 9일 박항서 감독은 '''협회와 연봉 문제로 이견차를 좁히지 못해 아시안게임까지 무보수로 맡은 뒤 다시 논의하자고 협회에 제안했다'''라는 충격적인 성명서를 발표한다. 관련기사
한마디로 보수 등 기본적인 계약내용조차 정하지 않고 일단 앉혀놓고 봤다는 얘기. 이에 대한 축협의 반응은 '''협회에 대한 명백한 항명'''이라며 퇴출을 시사했다.관련기사 그래서 일각에서는 동메달은 핑계고 박항서 감독이 비주류 대학 출신인 것과 축구협회 사이의 불화 때문에 경질된 것이라는 주장도 일었다.
명단만 보면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 외화내빈이나 다름없는 팀이었다. 우선 대표팀의 엔진 박지성은 소속팀과 차출 문제로 8강전부터 합류했다.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 유상철이 빠지고 히딩크의 황태자 고종수는 부상으로 대표팀 중원을 신인 김두현이 맡게 된다. 부동의 공격수 황선홍도 빠지고 그 자리를 메꾼 이동국도 월드컵 엔트리 탈락 여파로 멘탈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19] 심지어 홍명보, 김태영(1970), 최진철 3백 수비라인을 통째로 뜯어버리고 새 얼굴 4백으로 바꿔 이식한 팀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세대교체를 이룬 석달짜리 대표팀 치고'''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아시안게임은 연령별 대회에 피파 주관이 아니며, 아시아 한정으로 치뤄지는 대회이기에 여러모로 좋은 성적을 기대해볼만한 대회였고, 한국이 좋은 전력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때문에 괜찮은 전적을 거둔만큼 아쉬움은 남지만, 좋은 성적이라고 하기엔 다소 애매한 부분은 있다.[20]
3.4. K리그 코치
그 후 포항 스틸러스에서는 코치를 거쳐 전남 드래곤즈에서는 기술고문을 맡았는데, 애초에 포항 코치를 그만두고 전남의 감독에 올 예정이었으나, 허정무 감독이 당시 대표팀 수석코치를 그만두고 감독으로 오는 바람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치면서 기술고문은 사실상 명예직 수준이었다.
3.5. 경남 FC 감독
2005년에 경남 FC의 창단 감독으로 취임했다.
첫 시즌인 2006년에는 7승 5무 14패를 기록하면서 12위로 시즌을 마쳤다.
2007 시즌, K리그에서 경남을 4위까지 끌어올리면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다. 플레이오프에서 5위 포항을 만났고, 홈에서 1-1로 비겼으나 승부차기에서 패하면서 아쉽게 탈락했다.
4위라는 성적에도 불구하고 구단 프런트와의 갈등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3.6. 전남 드래곤즈 감독
경남 감독에서 물러난 후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의 감독으로 선임되는 바람에 감독직이 비어 있던 전남 드래곤즈 감독으로 부임한다.
전남 감독 부임시절에도 FA컵에서 준우승을 거두는 등, 지원도 시원찮은 구단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데 뛰어난 능력을 이때부터 보였다.
2010년 11월 5일,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전남 드래곤즈 감독에서 사임했다. 2010년 전남의 K리그 성적은 8승 8무 12패 10위. 후임으로 11월 10일,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당시 대표팀 수석코치였던 정해성이 전남의 새 감독으로 취임했다.
다른 팀 감독을 맡는 대신 잠시 재충전 시간을 가지겠다고 밝혔다. 관련 기사는 여기.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에서 많은 수의 전남 선수들이 2010년에 승부조작을 한 혐의로 대거 구속되면서 2010 시즌 팀의 부진은 박항서 감독의 탓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동안 K리그 승부조작 루머 기사에서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다.'라고 밝힌 익명의 前 K리그 감독이 박항서 감독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3.7. 상주 상무 감독
2012년에는 상주 상무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2013 시즌 팀을 1부리그에 승격시켰고, 덕분에 2014 시즌을 클래식에서 이끌게 되었지만 2014 우승팀 전북 상대로는 원정에서 0대 6으로 패하는 등 1부리그의 벽은 높았고, 결국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 시즌만에 다이렉트 강등당하고 만다.
2014년 10월,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축구 대표팀이 금메달을 따면서 뜬금없이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이번 아시안 게임 대표팀 20인 전원이 군미필자였는데 이들이 모두 병역특례를 받게 되면서 상무는 졸지에 20인 선수를 빼앗긴 셈이 되었으니 속이 쓰리지 않겠냐는 것이 골자. 네티즌들의 농담이라면 몰라도 너무나 질 떨어지는 기사였지만, 박항서 감독은 '그 선수들이 상무에 오려면 5년은 있어야 되는데 내가 그때까지 감독 자리를 보전할지도 장담 못한다.', '20인 엔트리 가운데 내년에 상무에 올 예정인 선수는 골키퍼 김승규 하나뿐이었다.'[21] 고 해명 인터뷰를 했다.
2015년 시즌 팀을 정비해서 간신히 다시 1부리그 승격을 성공시켰다. 그해 12월 11일, 상무와의 계약 기간이 끝남으로써 상주를 떠나게 되었다.
사임 후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박 감독은 그러면서“4년간 세 분의 부대장을 모셨는데, 지난 두 번의 부대장들은 지도자의 의견을 존중해 줬다. 소통도 잘 이뤄졌다. 그런데 이번 부대장은 선수들을 전투병 비슷하게 만들었다. 세계 군인 선수권 대회가 있다며 선수들을 숙소가 아닌 운동장에서 쉬라고 시켰다. 시즌 중에도 아침마다 4~6㎞씩 구보를 시켰고, 리그 경기 하루 전에 (선수들을) 산에 올려 보냈다. 그러면 선수들 근육에 무리가 간다. 지난해까진 구단에 국장이 있어 부대하고 소통했는데, 올핸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 부대장이 올 때마다 정책이 바뀌었다. '''선수들이 군인은 맞지만 전투병은 아니잖느냐?''' 개인적으로 면담을 요청해 우승하지 못하면 결과 갖고 책임진다고도 했다. (그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겠지만, (상무의) 30개 종목 특성이 다 다른 거 아니겠나? 축구 감독 처지에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라고 그동안 불편했던 심경을 토로했다.“작년까진 어느 정도 감독의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선수 선발에 권한이 없었다. 세계 어딜 가도 그런 기준은 없다. 일정 부분에선 감독이 선수를 뽑을 수 있는 재량권을 줘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선수 선발 부정) 예방 차원이라지만, 그러면 (감독을) 처벌하면 되는 거다. 올해 유독 문제가 많았다”
즉, 군 당국에 의해 선수 선발이나 훈련에 대한 간섭이 지난 날들보다 극심하게 이루어졌음을 밝혔다. 이미 상주 상무의 승격은 확정되었으나, 그 동안 상주를 잘 이끌어온 덕장에 지나친 간섭을 가한 군 당국에 대한 비판이 이뤄졌다.
3.8. 창원시청 축구단 감독
[image]
상주에서 사임한 후 고향인 산청군으로 돌아가 짧게 고등학생 유소년들을 코칭하다가, 2016 시즌을 끝까지 책임지고 타계한 박말봉 감독의 뒤를 이어 내셔널리그 창원시청 축구단의 제2대 감독으로 취임했다.
프로 팀 감독 경험이 풍부한 박항서의 취임은 큰 기대를 모았다. 전반기만 해도 창원시청은 중상위권을 유지하며 리그 3위까지 주어지는 플레이오프를 충분히 노려볼 만했으며, 6월에 개최한 내셔널선수권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후반기가 접어들수록 여름 이적시장에서 전력 보강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한계를 드러내며 순위가 8팀 중 7위로까지 급하락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결국 여기서도 1년만에 사임하고 최경돈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지도자 세대교체가 워낙 빠르게 진행 중이라서, 환갑이 다 되어 가는 박 감독 스스로는 그렇게 프로팀 커리어는 끝이구나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 아내가 동남아는 어떠냐고 물으며 직접 에이전트와 연결해 줬고, 솔직하게 나는 지금 무직이며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며칠 후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제의가 오고 박항서 감독은 기뻐했으나 한편으로는 외국인 감독들의 무덤 자리라는 소문을 듣고는 잘못 선택했나하는 의구심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선택은 자신의 인생은 물론 한 국가대표팀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3.9.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박항서/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 참고. 문단이 길어서 분리함.
4. 여담
- 외모로 보기에는 차범근이나 김호곤, 허정무 같은 감독들과 비슷한 세대 감독으로 보이겠지만, 감독 생활을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감독 경력 자체는 짧은 편. 젊은 감독의 대표주자로 손꼽히는 최순호 감독보다도 경력이 짧다.
- 상당한 노안[22] 인 탓에 묻히는 사실이지만, 차범근 감독의 5년 후배이며, 또한 황선홍 감독과는 9살 차이다. 심지어 김학범 올림픽 대표팀 감독보다 3살 연상이다.
- 경남 FC 시절, 조광래 감독과 더불어 K리그에서 몇 안 되는 육성형 감독으로 꼽힌다. 조광래 감독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약팀이든 6강 전력은 만들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다.
- 2018년 '한국 국민이 뽑은 올해 최고의 인물'에서 2위로 선정되었다. #
- BBC의 러닝잉글리쉬닷컴에서 외국인을 위한 영어 스피킹 코너를 만든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영어 인터뷰가 영어 스피킹의 좋은 예로 제시된 적이 있었다. 술집을 뜻하는 영어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비어샵이라고 한다던지...[23]
- 2014년 상주 상무 감독 시절 경기 중 조는 것처럼 보이는 영상이 찍혀서 슬리핑 원이라는 별명이 있다. 참고로 이 경기는 2014년 3월 23일에 있던 상주 vs 전북 경기이며 무승부로 결과가 났다. 그리고 이게 베트남에서도 퍼졌는지 감독 선임 당시 환영 인사와 함께 슬리핑 원 드립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 이후 이 모습까지도 재평가되면서 잠자는 명감독 - 대모리 코골이, 히띵크, 과로디올라, Zzzi단, 졸리뉴, 잠드로따, 쿨쿨롭, Pho체티노, 자미오네, 베트콩테 등 다양한 드립들이 쏟아져나왔다. 베트남에 귀국해서 카퍼레이드를 하면서도 잤다고 한다. 참고로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서 출연해서 그때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때는 졸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 가로채널에서 가진 인터뷰에서도 자세(?) 때문에 그렇게 보여서 그렇지, 절대로 졸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손현주 거지짤처럼 사실상 박항서의 흑역사(?) 취급이다.
[image]
-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수원 삼성 블루윙즈 코치 시절 당시, 무명으로 입단 테스트를 받은 박지성을 탈락(...)시킨 적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2018년 4월 22일에 박지성 본인이 박항서 감독에게 "그때 왜 저를 안 뽑았습니까?"라고 물어보니 "그때 나는 2군 감독이라서 결정권이 없었다."라고 대답하였다.
- 해외축구 갤러리의 한 유저가 박항서와 베트남 대표팀 사이의 일화라는 주작글을 올렸다가 수많은 사람들과 유사언론 기자들을 낚는 일도 있었다. 사실 올린 목적도 평소 사실무근의 썰을 방송에서 풀어대는 모 해설위원을 낚아보기 위해서였다고...다만, 모 다큐에서 밝혀진 일화에 따르면 선수들에게 "국가를 위해서 열심히 뛰어야 한다." 정도로 말하긴 했던 모양이다.
- 4남 1녀 중 막내다. 96세이신 어머니가 형 한 명과 함께 경상남도 산청군에 살고 계시는데, 정작 어머니는 막내아들 얘기만 나오면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시는 통에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전하는 중이란 얘기도 매우 조심스럽게 했다고... 막내아들 보러 베트남에 가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다고 한다. 또한, 어린 시절 공부도 축구도 잘 했다는 게 어머님의 이야기. #
-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이 한창 진행 중이었을 때, 베트남을 16강에 진출시킨 박항서 감독이 직접 발 마사지 기계를 들고 한 베트남 선수의 발을 정성스레 문지르고 있는 장면을 베트남 대표팀 수비수 쩐딘쫑(Trần Đình Trọng)이 인스타그램에 올려 화제가 되었는데, 박 감독에 의하면 "베트남에 처음 왔을 때 현지어도 못하고 영어도 못했기 때문에 선수들에게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스킨십뿐이었다"고 밝힌 바 있었다. 말이 안 통하기 때문에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감정을 전달하는 원초적인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image]
- 베트남의 영웅이라고 불리지만, 베트남어는 잘 하지 못하며, 간단한 회화(Xin chào 같은 인사말) 정도를 구사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항상 베트남 현지에서 한국어 어학당을 운영하는 축잘알 현지인 통역사를 거쳐서 대화하는 중. 이에 베트남 푹 총리가 '당신은 이제 베트남 사람(?)이니 베트남어를 배우세요'라고 농담섞어서 권유하기도...
- 베트남 현지에서 팔리고 있는 박카스의 모델이 되었다. 박카스가 옆나라 캄보디아에서는 국민음료급으로 자리잡았지만, 베트남에서는 레드불 등 타 자양강장제에 밀려서 그리 잘 팔리던 음료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박항서를 광고 모델로 선정하고 나서는 점유율이 급속하게 상승해서 잘 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또한 베트남 기준으로 발음도 비슷한 덕분인지, 베트남 현지에서 박항서 감독의 별명으로 굳어지는 중.
[image]
- 박카스와 비슷한 이유로 박항서 때문에 한국산 인삼 제품도 베트남에서 불티나게 팔린단다. 선수들의 체력을 위해서 박 감독이 인삼을 달여서 먹게 했는데 이 때문에 입소문이 크게 퍼져서 인삼이 많이 팔린다고.
- 2018년 국군의 날 행사 때 유명인들의 응원 메시지 영상이 나왔는데 박항서 감독의 응원 메시지도 나왔다.
- 현재 베트남에서 여러 CF를 찍었고, 박항서를 주제로 한 책도 나온데다[24] 박항서 다큐멘터리 영화도 스즈키컵 결승기간에 개봉했다. 또 베트남 내에서는 정부관료, 공산당 고위간부, 대기업이나 국영기업 사장 및 임원직 정도가 아니면 만나기도 힘들 정도로 엄청난 위상을 갖고있다.[25] 한국 기업에도 마찬가지로 한국 기업 현지 법인이 아니라 한국 본사 중역 아니면 만나보기가 힘들다.
- AFF 2018 조별리그 3차전에서 박항서 감독은 꽁푸엉 등 베트남 선수들을 윽박지른 미얀마의 안토니 헤이 감독과 신경전을 벌였다. 끝내 경기 후 악수도 안 하고 경기장을 나오자 헤이가 이 일을 두고 SNS로 저격을 했고, 베트남 팬들은 독일인들의 약점인 2:0 드립을 치며 응수했다. 그리고 미얀마는 마지막 경기서 말레이시아에게 0:3으로 지며 스즈키컵 4강 진출에 실패했고, 헤이 감독은 경질당했다.
- 한참 위의 프로필에서 봤듯이 개신교를 믿는 크리스천이며, 경기 전후, 혹은 주요 승부처에서 잠시 기도를 한다. 그런데 앞서 나온 슬리핑 원 사진 덕분에 몇몇 사람들은 기도가 아니라 졸고있는 게 아닌지 착각하는 경우도 생긴다(...).
- 스즈키컵 우승 다음날 현지 자동차 업체의 기념 행사에서 받은 격려금 10만 달러를 베트남 축구발전과 불우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그 자리에서 격려금 전액을 기부했다.
-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감독으로서의 연봉은 월급 2,500만 원으로 연봉 3억 원(세금은 35%)이다. 이는 주변 나라 국대감독들에 비해서 엄청 낮은 편이다. 2018년 동남아시아 선수권대회 4강에서 맞붙은 필리핀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만 해도 스벤예란 에릭손이다. 커리어를 보면 박항서보다 압도적으로 비싼 돈을 내줄 수밖에 없긴 한데, 다른 주변 나라 감독들 커리어를 따져봐도 박항서가 엄청난 헐값이다. 이를테면 인도네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다누르윈도(Danurwindo)만 해도 인도네시아 자국 클럽 선수 출신이자, 국대 선수이고 감독 경력도 싸그리 인도네시아 클럽 감독뿐인데도 연봉이 25억 원이나 되니 박항서의 8배가 넘는다. 물론 포상금과 CF, 엄청난 협찬 공세를 생각하면 경제적 성공까지 거두었으나 연봉이 곧 감독으로서의 가치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분명히 낮게 책정된 셈. 박항서 감독 스스로는 커리어를 마감할 뻔하다가 다시 잡은 기회이기 때문에 연봉에 대해 만족한다고 얘기하지만 오히려 베트남 국민들이 박항서 감독에게 이 연봉을 주는 것은 결례이자 주변국에 대한 자존심 문제라며 연봉 인상을 베트남 축구 협회에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베트남 최대 기업인 호앙아인 질라이 컴퍼니의 대표로 유명한 두안 응우옌 둑 씨가 "베트남 축구협회와 상관없이 내가 연봉을 주겠다.", "계약기간이 끝날 때 박항서 감독이 연봉 인상을 원할지 모르겠지만, 베트남에 남게 하고 싶다."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 2019년 11월 7일 재계약을 하면서 9일 베트남 현지 언론이 밝힌 바에 따르면, 연봉이 약 11억원(96만 달러)으로 인상되었다고 한다. # 11억 연봉도 '엄청 많다'라고 간주하긴 어렵겠지만[26] 베트남의 나라 사정을 감안한다면 상기 언급한 베트남 내 대기업이 정말로 연봉을 대준 것이 아닌 한 베트남 축협의 예산을 싹싹 털어 준 셈이나 다를바없다.
-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지라 인터뷰를 항상 겸손하게 한다. 스즈키컵 결승을 앞두고 우승에 대한 베트남의 열망이 최고조로 달아올라 있을 때에도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저는 베트남 축구 대표팀을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람이고, 다음에 올 더 훌륭한 세계적인 감독을 위해 선수단을 단련시켜 놓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고 밝혔다. 특히나 지금의 찬사가 언제라도 비난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주변에서 자신을 베트남에서는 국가적 영웅, 한국에서는 최고의 민간외교관이라고 부르지만 그저 축구 하나밖에 모르는 평범한 축구지도자일 뿐이라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낮추고 있다.
- 꽁병지tv에서 박항서 감독 본인이 집 3채와 보너스 25억 설에 대한 해명을 하였다. 베트남에 본인의 명의로 등기한 집은 하노이의 한 채뿐이고, 언론에 등장한 거액의 격려금도 선수,감독등을 포함한 대표팀 전원이 1/N로 분배해야 하고, 베트남의 경제수준까지 고려하면 생각처럼 거액은 아니라고 한다.[27] #
- 교체카드를 매우 잘 쓰는 편이다. 베트남 현지 언론에서는 상당히 화제가 되는 내용으로, 교체되어 투입된 선수가 골을 넣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스즈키컵 필리핀과의 준결승전에서도 85분 교체 투입된 응우옌꽁프엉이 87분에 골을 넣었고, 말레이시아와 최종전에서 6분 만에 골을 넣은 응우옌아인득도 체력안배를 위해 1차전에서 휴식을 취했던 선수이다.
- 가로채널 8~9회에 출연했는데, 이전부터 강호동을 꼭 보고 싶어서 섭외에 응했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실제 생일이 1957년 10월 1일인 것을 공개했는데,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실제 생일인 57년 생으로 졸업장을 받았지만 또래들에 비해 축구를 늦게 시작한 탓에 더 잘하고 싶었던 맘에(고등학교에 입학 당시만 해도 축구특기생이 아닌 일반학생으로 입학했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니면서 변경했다고 밝혔다. 강호동과 테이프 미식축구를 했는데, 명장답지 않은 실수를 범해 고양이 모양으로 오징어 먹물을 그려 탁본이 찍히는 굴욕을 당했다.
- 이천수하고는 한동안 원수지간이었다. 전남 감독 시절 온갖 사건사고 일으킨 문제아를 자기가 책임지고 구제하겠다고 영입건을 밀어붙여서 데려왔더니[28] 문제 일으키고 계약관련으로 말썽부리고 급기야 깽판쳐가면서 싸우고 나가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몇 년 후 이천수를 용서하기는 했지만 박항서 감독에게 이 당시 이천수와 일을 거론하는 건 금기사항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나중에 축구인 행사가 있을 때는 서로 어깨동무하는 장면도 보여주는 등 겉으로는 사이가 진전된 것처럼 보여줬고 이후 2018년 11월 이천수가 인천 유나이티드 전력강화부장이 되어서 응우옌꽁프엉을 영입하려고 박항서 감독에게 "꽁프엉을 인천에 데려오려는데 직접 설득 좀 해주세요."라고 요청해서 그걸 들어준 걸 보면 갈등은 해소된 듯하다는 의견이 있다. 다만 박항서 감독이 K리그 감독을 맡고 있는 자기 후배들한테 평소에 "우리 베트남 애들 좀 데려가서 키워주라"고 틈만나면 권유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일화만 가지고 개인적인 갈등이 해소됐다고 확신하기엔 아직 애매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 베트남 남자 대표팀 전체를 감독하다보니 체력적·정신적 부담이 상당해서, A대표팀만 감독하고 나머지 팀들을 이영진 코치에게 맡기려고 했으나 베트남 정부가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국 대표팀을 연령에 관계 없이 전부 담당하게 되었다. 온 나라가 박항서 하나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릴만큼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29] 이니 좋은 일이긴 한데 부담도 그만큼 너무 크다. 베트남 정부에서도 한국인 코치들을 더 추가로 고용하겠다고 했으나 박항서의 운영에 제동을 걸게 될 가능성이 있다. 기사
- 박항서가 AFC 챔피언십 준우승과 아시안 게임 4위 등의 성적을 거두며 베트남 축구의 전설로 급부상하자 '박수칠 때 떠나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제로 네티즌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시안컵에서 첫 3라운드 진출까지 일궈내자 이런 경향은 더 심해졌으며 급기야 언론에서는 베트남 축구협회가 박항서 재계약 협상 조건으로 '아시안컵 결승 진출'이라는 터무니없는 목표를 제시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이는 '아시안컵 본선 진출'을 오역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네티즌들이 이를 받아들일 정도로 베트남 여론의 기대감이 한껏 부풀긴 했을 것이다.
- 그런데 2020년에 같은 베트남 내 팀 감독이기도 해서 막역한 절친 사이이던 정해성 前 감독과 이태훈 前 감독의 경질•전보 후 연패행진으로 인한 재계약 시도에 최종적으로 거부의사를 밝힌 것이 밝혀지면서, 이전의 해맑았던 분위기는 싹 사라지고 엄하고 냉랭한 분위기만 돈 훈련현장이 되었다. 훈련 전 기자회견에서 인사를 요청한 기자들을 향해 거두절미 하고 질문부터 하시죠라고 밝힌 것을 시작으로.
그래도 일단은 위와 같은 베트남축구협회와의(또는 일부 베트남 프로팀 프런트들과의) 갈등설에 대해서 박항서 본인은 부정하고 있다.
5. 둘러보기
[1] 20세기 이후의 인물이므로 베트남에서 공식적으로 Phác Hằng Tự(팍항뜨)로 적지 않는다. 다만 애칭식으로 팍항뜨라고 적는 경우는 있다. [2] 1959년 1월 4일은 호적으로 등록된 생일. 생일에 관한 이야기는 여담 문단 참조.[3] 반남 박씨 집성촌이다.[4] 남베트남이 첫 우승을 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통일 베트남으로는 사상 최초.[5] 당시 4강에서 북한과 붙었고 승부차기 1번 키커로 나서 성공시키기도 했다.[6] 실업시절과 육군 축구단까지 합하면 현역 시절은 7년이다.[7] 당시에는 미드필더를 링커라고 불렀다고 한다.[8] 도하의 기적 당시에도 현장에 있었다.[9] 박항서의 주민등록상 생일로만 따져도 2002년 월드컵 당시 '''만 43세'''였고, 실제 나이로 환산해도 '''만 45세'''를 앞둔 시점이었다. 히딩크 감독보다 무려 10살 넘게 어렸다! 대개 서양인이 동양인보다 노안이라는걸 생각하면 놀랄만한 상황이지만, 2002 월드컵으로부터 20년이 다 되어가는 현 시점에서 히딩크는 세월의 흐름이 엿보이는 반면 박항서 감독은 차이가 거의 없는 편.[10] 해당 경기는 안정환이 전반 14분에 선제골을 뽑아냈으나 후반전에 실점하며 1-1 무승부로 끝났다.[11] 일각에서는 핌 베어벡이 수석코치라고 알려져 있지만, 2002 월드컵 대표팀 수석코치는 박항서가 맞다. 굳이 따지자면 핌 베어벡 또한 박항서 못지 않은 비중으로 히딩크를 보좌했으나 실제 히딩크와 선수들의 가교 역할을 하는 수석코치는 엄연히 박항서였고, 핌 베어벡은 히딩크가 데려온 코치들을 대표했던 셈. 당장 2001년에 히딩크호가 출범하기 직전이었던 2000년 12월 한일전에서는 박항서가 대표팀 수석코치 자격으로 대신 선수들을 지휘했고, 이후에도 히딩크가 휴가 등의 이유로 자리를 비웠을 때 박항서가 감독대행 역할을 맡았다. 특히 월드컵 기간중이었던 2002년 6월 5일에 수원에서 열린 D조 미국 - 포르투갈 경기의 전력분석을 위해 히딩크가 직접 갔는데 코치들중에서는 박항서만 동행했고, 6월 16일 스페인 - 아일랜드 16강전 때도 히딩크가 8강전을 대비하여 전력분석차 관전했지만 정작 애인 엘리자베스와 함께 간지라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을 대비한 한국 팀의 훈련은 박항서가 대신 지휘했다.[12] 사실 월드컵 직전에 이영표가 부상 당했을 때 히딩크가 불같은 성질을 터트려서 박항서도 울컥했지만, 인내하고 넘어갔다고 한다. 다행히 이영표의 부상이 심각하지 않다는 게 알려진 후 히딩크가 자신이 지나쳤다며 사과를 하면서 훈훈한 마무리...[13] 이 날 경기에서 안정환은 전반 초반 '''페널티킥을 실축하면서''' 자칫 역적이 될뻔했다. 그러다가 지옥에서 천당으로 워프했으니...[14] 심지어 남자 농구, 야구, 배구는 모두 금메달. 특히 농구와 배구는 결승전에서 각각 아시아의 최대 강호인 중국과 이란을 꺾었다.[15] 또 한명의 와일드카드였던 김영철은 2006년 독일 월드컵에 발탁되어 주축 수비수로 활약한다.[16] 이 대회에서는 실패했지만,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던 81~83년생을 주축으로 2년 뒤의 2004 아테네 올림픽 축구에서는 56년 만에 8강 진출에 성공했다. 이천수, 최태욱, 조병국, 박용호, 김두현, 김동진, 등이 아테네 8강 멤버이다.[17] 여기에 당시 연령별 대표팀의 성적이 참혹했던 탓도 있다. 조영증 감독이 이끌던 U-20 대표팀은 중국에 일격을 당해 세계 대회에 나가지도 못했다. 이 당시 대표팀에 이천수, 최태욱, 박지성 등이 있었는데 불구하고 말이다.[18] 윗 표의 첫 경기였던 북한과의 친선경기는 2002년 9월 7일이다. 무려 아시안게임 첫 경기를 불과 20일 남겨둔 시점에야 첫 실전 경기를 치룬 것이다.[19] 아마 아시안게임에 전념해서 면제 받으라고 사전에 캐어해 줬으면 멘탈과 경기력이 터져나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다만 2004년부터 보여준 이동국의 한결 성숙해진 플레이를 보면 이때 아픔을 겪은 만큼 한층 성장한 건 분명하다. K리그에서 해트트릭도 상무에서 처음 해냈다. 2006년 월드컵 때는 대표팀 모두가 이동국의 부재를 아쉬워 했을 정도니...[20] FC 코리아는 15년 이상 지난 이 시기를 가지고 축협의 실체가 이렇다며 '''마치 지금도 이런 것 마냥 욕하는''' 어이 없는 추태를 보이고 있다.[21] 울산에서 금메달 획득에 실패하면 김승규를 입대시킬 계획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김영광이 있는 이상 김승규를 빨리 군대 보내는 쪽이 이득이라고 판단한 듯.[22] 선수 시절부터 탈모가 있었다. 사실 이 부분이 노안으로 보이는 가장 큰 이유.[23] 다만 BBC 러닝잉글리시닷컴은 온전히 영연방 국가에 정착 혹은 체류하고자 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영어 교육 프로그램이라 네이티브 같은 영어 구사가 아닌, 서툴러도 화자의 의도를 적절한 시간 내에 잘 전달하는 영어를 좋은 예로 드는 경우가 흔하다. 애초 프로그램들이 거의 모두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단어들만으로 영어권 사람들도 잘 모르는 단어를 설명하며 가르치는 수준. 상술된 예시도 모범적인 영어가 아닌, '이 정도면 충분한 영어'의 예시다. 굳이 말하자면 아이엘츠 영어. 자세한 건 링크의 홈페이지를 참조.[24] 제목: Phong Cách Quản Trị Park Hang Seo - Bí Quyết Thành Công Của Doanh Nghiệp Hàn Quốc(박항서 리더십 - 한국 기업의 성공비결) 베트남에서 베스트 셀러에 올랐다. 단 책 출판 당시 감수에 도움을 줬던 통역 레후이코아(Lê Huy Khoa)가 당시 대표팀 내 이야기를 너무 자세히 풀어놔서 베트남 축구협회가 통역을 해고했…으나 한국어 잘 하는 축잘알 베트남 인이 없었는지 재취업했다고.[25] 안정환은 언제 한번 박항서 감독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박항서 감독이 "나 베트남 국회의장(Nguyễn Thị Kim Ngân(응웬티낌응언/응우옌티킴응언))과 저녁식사 중이니까 이따 다시 걸어."라고 통화를 끊은 걸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증언했다.[26] 한국에서 2년여간 감독직을 했던 울리 슈틸리케의 연봉이 1년에 약 20억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27] 실제로 60년만에 우승이라는 동남아시아대회 후 받은 격려금이 축구협회, 정부(문화체육부), 민간기업 등을 다 합해 3억 5000만 원 정도이다.[28] 당시 전남 구단측에서는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상황에서 박항서 감독이 적극적으로 영입한 것이었다.[29] 올림픽 예선에서 조 최하위로 탈락하는 굴욕을 당했을 때도, 베트남에선 '박항서느님은 대체가 불가한 존재입니다. 비난을 자제해 주십시오'라고 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