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서아프리카

 

1. 개요
2. 독일령 남서아프리카(1884-1914)
2.1. 역사
2.2. 식민 활동
2.3. 헤레로 제노사이드
2.3.1. 독일을 향한 사죄 요구
3. 남서아프리카 위임통치령(1915-1990)
3.2. 나미비아 독립전쟁(1966-1989)

나미비아의 역사

1. 개요


아프리카의 남서부 일대. 서남아프리카라고도 한다. 남아프리카 서부 또는 서아프리카 남부, 중앙아프리카 서부와 남부 등이 포함된다.
역사적으로는 현 나미비아 일대를 가리키는 지역명으로도 쓰였다. 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중앙아프리카 공화국과도 유사하다.

2. 독일령 남서아프리카(1884-1914)


나미비아의 선사시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남서아프리카 위임통치령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Deutsch-Südwestafrika'''
독일 제국의 식민지
[image]
[image]
국기
휘장
[image]
1884 ~ 1915
위치
나미비아
수도
빈트후크
정치체제
독일 제국 식민지
지도자
독일 황제
언어
독일어
1885년부터 1915년까지 독일 제국이 오늘날 나미비아 지역을 식민통치하던 시기.

2.1. 역사


1883년, 독일인 상인이었던 아돌프 뤼더리츠(Adolf Lüderitz)가 원주민 족장으로부터 앙그라 페케나(Angra Pequena) 인근의 땅을 구입했다. 이후 이 지역은 뤼더리츠의 이름을 따, 뤼데리츠로 개명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나미비아의 주요 항구 도시로 기능하고 있다. 뤼더리츠는 이곳에 무역 거래소를 설치하고 본토에 영국으로부터 자신의 땅을 보호해주길 요청했는데, 이가 바로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의 시초이다.
1884년, 독일 제국은 자국의 영향력 하에 있던 나미비아 지역을 보호령으로 선언하였다. 이는 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대영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술수였다. 1885년, 서양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분할하기 위해 개최된 베를린 회담을 통해, 독일 제국은 나미비아, 카메룬, 탄자니아를 손에 넣었다. 이 중 나미비아는 '남서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독일 제국 식민지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이후 독일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면서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는 1915년 대영제국에 속해 있던 남아프리카 연방의 일부로 편입되었다.[1] 남아프리카 연방에 합병된 이후 1920년에는 이곳이 남아프리카 연방 위임통치령으로 지정되었다.

2.2. 식민 활동


독일 제국은 다른 식민지에서 하듯이 원주민의 토지를 강매하고, 자국 민간 기업들을 남서아프리카에 진출시켜 식민지 경제를 본국에 종속시키려 했다. 1885년 4월 설립된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식민 회사(Deutsche Kolonialgesellschaft für Südwest-Afrika)'는 독일 제국으로부터 광산 개발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 개발이 시작되면서 점점 더 많은 독일인들이 이곳에 정착했고, 독일 당국은 본토인과 식민지인들간에 차별적인 정책을 펼쳤다. 1886년 4월 17일 통과된 분리적용법에 따라, 본토인과 식민지인들은 서로 다른 법의 적용을 받았다. 토지 강매와 자원 약탈 역시 자행되고 있었다.

2.3. 헤레로 제노사이드


독일 제국의 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남서아프리카의 한 부족이었던 헤레로족이 봉기를 일으켰다. 독일군은 헤레로족에게 저항을 중단하라고 경고했으나, 그 동안의 식민지인 차별 정책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헤레로족은 독일군의 경고를 무시했다.
봉기를 도모한 인물인 사무엘 마하레로의 주도 아래 헤레로군은 독일인 이주자의 마을을 습격해 농지를 불태우고, 독일군 140여명을 사살했으나 여성과 어린이는 건드리지 않았다. 이 봉기에는 나마족도 가세하였다.
이에 독일군은 즉각 반격을 시작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로타 폰 트로타(Lothar von Trotha)를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4000명의 독일군을 병력으로 보내 헤레로족을 진압하였다. 트로타는 헤레로족이 “더 이상 독일 제국의 신민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눈에 보이는 헤레로족은 무기를 손에 들고 있지 않아도, 그리고 여성과 어린이들일지라도 절멸할 것을 명령했다.
독일군에 의해 물 보급로가 끊기고 보이는 대로 사살당하던 헤레로족 측에서는 어마어마한 피해자가 나왔으며 이에 봉기 주도자들이 항복을 위해 접근했으나 역시나 사살당하는 등 독일군은 항복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독일군은 헤레로족을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보이는대로 모두 무참하게 죽였으며, 독일군의 진압 과정에서 1904년부터 1907년까지 8만 5천명이었던 헤레로족이 1만 5천명까지 줄었다. 이 학살에 의해 헤레로족의 80%가 몰살되었고 나마족은 절반이 몰살당했다.
살아남은 부족인들은 노예 수용소에 수감되어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복지에 기아나 질병에 시달려서 죽었다.
당시 독일에서 유행하던 우생학의 실험 대상으로 해부되어 죽은 부족들도 부지기수였다. 훗날 '''나치가 저지른 악행의 전초전이 독일령 아프리카에서 가해졌다'''고 볼 수 있다. 아돌프 히틀러요제프 멩겔레 등에게 우생학적 영향을 준 오이겐 피셔(Eugen Fischer) 역시 독일령 아프리카에서 소위 연구 활동을 했다. 이는 '나마쿠아 헤레로족 대학살'이라는 이름으로 '''20세기 최초의 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학살'''로 기록되었다.
이 즈음의 나마족, 헤레로족에 대한 대량 학살에 저항한 나마족 추장인 ""치프(추장)" 헨드릭 비트보이(?-1905)는 나미비아의 전설적인 인물로 불린다. 그의 초상은 모든 금액의 나미비아 달러에 새겨져 있다. 뱀발로, 같은 헨드릭 비트보이인 "캡틴(대장)" 헨드릭 사무엘 비트보이(1905-1978)는 나미비아 사람으로,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에 대항한 인물이다.

2.3.1. 독일을 향한 사죄 요구


지금도 나미비아에선 이 문제로 이를 갈고 있다. 헤레로 부족은 명확한 사과와 나미비아 내에서 소수 인종인 자신들에 대한 직접 배상을 요구했다. 결국 헤레로족 후손들은 독일 정부와 당시 식민 정책으로 이득을 본 독일 기업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미국 법정에 제출했다. 그에 대해 법률 전문가들은 헤레로족의 승소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고 있으나 인권단체들은 "독일 정부는 이 소송을 자신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값싼 변명을 하는 기회로 삼지 말라"며 배상 책임 인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독일 정부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
독일은 "이 사건은 유태인 배상과는 다른 문제"라며 만만한 나미비아에 공식 배상을 거부하고 있다. '''홀로코스트와 달리 독일 제국의 일이라는 입장이다.[2] 2004년에 최초로 독일의 장관이 나미비아가 사과를 받을 것을 요청했다. #
대신 독일은 부족이 아닌 국가에, 배상이 아닌 경제원조라는 명목으로 지원하였다. 1990년 이후 5억 유로를 지원해 왔다. 그나마도 2003년과 2004년에는 2천 300만 유로로 줄었다. 결국 제노사이드에 대한 사과가 없는 것은 식민 행위를 수수방관하는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다른 서방 국가들과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이 때문에 나미비아 및 과거 독일의 식민 지배를 겪었던 탄자니아, 토고, 카메룬아프리카의 국가에서 독일의 UN 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하고 있다.[3]

2019년에 재건되는 프로이센 왕궁 내에 헤레로족 학살을 비롯한 식민지에서 자행된 만행을 반성하는 전시 공간을 마련한다고 한다. 그리고 독일과 나미비아 정부가 독일제국 당시 있었던 나미비아 학살 사건을 '''집단학살(genocide)'''로 명확하게 규정하는 공동 선언을 놓고 양자 회담 중이며 이를 2016년 연말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 그러나 독일 측 대변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사과로 인한 배상 조처나 법적 결정이 도출될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어 한계가 있다. 또한 역사 기술의 관점을 바꿀 여지 역시 보이지 않고 있다.

3. 남서아프리카 위임통치령(1915-1990)


나미비아의 역사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남서아프리카 위임통치령'''

나미비아


'''남서아프리카'''
'''South-West Africa'''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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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휘장
[image]
1915 ~ 1990
위치
나미비아
수도
빈트후크
정치체제
국제연맹 위임통치
지도자
남아공 대통령
언어
영어, 독일어
1915년부터 1990년까지 존속한 남아프리카 연방남아프리카 공화국위임통치령이다.
독일 제국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던 남서아프리카는 남아연방에 합병되었다. 1920년 국제연맹에 의해 이곳은 위임통치령으로 지정되었다. 이 시기 위임국인 남아연방의 정책이었던 아파르트헤이트 같은 인종차별 정책의 영향도 받았다.
독일어 가사의 비공식 국가가 존재한다. 곡명은 Südwesterlied(남서아프리카의 노래). 독일 군가 판처리트의 선율 일부를 차용했다.

3.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신탁통치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국제연맹이 해체, 그 후신인 국제연합(UN)이 탄생하여 기존의 위임통치령신탁통치령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유엔은 남아연방 치하의 남서아프리카 역시 신탁통치령으로 전환하기 위해 남아연방과 접촉했으나 남아연방은 이를 거부하였다. 남서아프리카(나미비아) 자체도 인구도 워낙 적고 산업도 낙후되어 남아연방의 경제에 종속되다시피 했으니 사실 독립을 할 자체적 힘도 부족했다.
그렇지만 남아연방이 영국이 자국의 인종차별 정책을 비난하자 영국이 자국 일에 아예 간섭하지 못하도록 영연방을 탈퇴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선포하는 등 막장 행각을 벌이는 바람에 국제 사회에서 점차 고립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나미비아의 독립운동은 국제적 동정과 지지를 받게 되었다. 유엔은 남서아프리카 건으로 지속적으로 남아공을 압박하였으나 남아공은 이에 반발하였다. 이는 독립을 요구하는 남서아프리카 주민들을 중심으로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South West Africa People's Organization, SWAPO)가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3.2. 나미비아 독립전쟁(1966-1989)


SWAPO를 중심으로 남서아프리카를 독립시키기 위한 무장 투쟁은 전쟁으로 발전했다. 1966년 나미비아 독립 전쟁이 발발, 남아공군과 남서아프리카군(나미비아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오고 갔다. 이 전쟁은 1990년 3월 2일 남서아프리카가 나미비아로 독립하면서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무려 1966년부터 1989년까지 '''23년'''간 지속된 지독한 전쟁이었다. 단순히 나미비아 독립뿐만 아니라 현 앙골라인 포르투갈령 앙골라 독립 및 내전 문제까지 엮여 있다.
소련, 쿠바는 아프리카의 공산화를 돕는답시고 대규모 파병을 한 데다가 미국이 우파 앙골라 독립군을 뒤로 지원하고 중국이 미국 손을 들어줌으로써 사실상 미국-중국과 소련-쿠바의 대리전으로 흘러갔다.
점입가경으로 포르투갈 역시 다른 아프리카 식민지들처럼 포르투갈계 백인들이 앙골라의 부를 독점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카네이션 혁명으로 70년대 독재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포르투갈령 앙골라를 안 내놓으려고 파병했다. 여기에 같은 소수 백인이 지배했고 70~74년까지 군사적으로 동맹 관계였던 남아공, 로디지아 등이 파병하는 등 여러모로 아수라장이었다.
뒤로 가면 포르투갈군이 철군함으로써 사실상 남아공 군대 vs 좌파 계열 앙골라 독립군으로 압축되는데, 숫자가 달렸던 남아공 군대는 우습게도 흑인들인 우파 계열 앙골라 독립군을 돕기 시작한다. UN을 통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비난하던 미국이 남아공 군대와 우파 계열 앙골라 독립군을 도와준 건 덤.
[1] 이 과정에서 남서아프리카(나미비아)와 남아프리카 연방(영국 연방 자치국)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지금의 상호 국력을 비교하면 상대도 안 됐을 것 같지만, 1899~1902년까지 치뤄진 보어 전쟁의 여파로 남아연방에서 기득권을 잃고 이를 갈던 보어인(네덜란드계 아프리카 거주자들)이 전면 나미비아를 지원했기에 어느 정도 싸움이 되었다.[2] 이는 아르메니아 학살을 두고 터키가, 러시아 제국소련 시절 소수민족에 대한 각종 범죄에 대해 러시아가 대하는 태도와 유사하다.[3] 독일은 이 문제가 아니어도 제2차 세계 대전 침략 피해국인 네덜란드, 벨기에, 폴란드,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체코, 덴마크에게서 상임이사국 반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