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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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영의정'''
'''《第 44 代》'''
'''世宗 9年~
燕山君 4年'''

'''제44대'''
'''1495.3.20~
1495.9.16'''







盧思愼
1427년(세종 9년) ∼ 1498년(연산군 4년).
1. 개요
2. 사극에서


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교하. 자는 자반(子胖), 호는 보진재(葆眞齋)·천은당(天隱堂).
혈통으론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외손자이다. 소헌왕후의 이종조카이기도 하다.[1] 그리고 그의 할머니는 민제의 딸로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는 그의 이모할머니가 된다. 왕족과 얽힌 대단한 혈통인 셈.
1451년(문종 1년) 생원시, 1453년(단종 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곧 집현전 박사에 선임되었다.
1463년에는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홍문관 직제학을 겸하여 세조가 주석(註釋)한 '''역학계몽(易學啓蒙)'''의 주석서 '''요해 (要解)'''를 증보하여 편찬하고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1465년에는 호조판서가 되어 최항과 함께 경국대전 편찬을 총괄하였다. 같은 해에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67년 말에는 건주위 여진족 정벌의 공으로 군공 2등을 받았다. 1468년에는 남이, 강순 등의 역모[2]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3등에 올라 선성군(宣城君)에 봉해졌다.
1471년에는 성종 즉위를 보좌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82년에는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492년에 좌의정, 1495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훈구파의 일원으로 생전에 사림파들에게는 엄청난 경계와 비판의 대상이었다. 이유는 연산군과 대간들[3] 간의 대립 때 연산군의 편을 들었기 때문인데 그 때문에 늘상 간신이란 딱지가 붙어야 했다.[4] 그러나 무오사화 때는 대승적 차원에서 사림파를 구제하려고 노력하였다.[5] 실제로 무오사화 때에는 그나마 노사신의 탄원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몇 달 뒤에 "신이 바라는 것은 특별한 것은 없으나, 다만 경연에 부지런히 임하시고 형벌과 시사는 법도에 맞게 하소서."라는 유언을 연산군에게 남기고 사망한다. 물론 연산군은 그의 유언대로 하지 않았다. 그래도 연산군 초기에 연산군을 많이 지지해 준 경력 덕인지 자기와 함께 했던 훈구파인 이극균, 한치형, 성준, 이세좌 등이 갑자사화부관능지당하는 등 끔찍한 결말[6]을 맞은 것과는 달리 본인은 무덤 속에서 편안히 있었다.
개인적 평으론 척을 지던 사림파에게 소인배 소리를 들었는데, 이러한 평과는 달리 실제 정사와 실록을 보면 인격적으론 대범하고 유능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일화로 노비송사 문제로 소송까지 있었는데 상대편이 영의정의 권력을 이길 수 없으니 노비 문서를 헌납했다. 그런데 노사신이 이것을 보고서 '내 아무리 영의정이라고 하지만 남의 재산을 부당하게 가로챌 수 없네. 이건 자네에게 돌려주겠고 이런 소송은 다시는 하지 말도록 하세.'하며 노비 문서를 상대방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훈구대신이지만 공과 사는 구분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중종반정 후에도 이는 인정받았는지, 신수근이나 임사홍과는 달리 명예를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다. 그나마 처벌받은 것이라곤 무오사화 때 연산군에게 받았던 상금을 일부 몰수당하는 정도. 노사신을 비판한 사림파들도 한편으론 '폐주(연산군) 밑에서 잘못한 점도 있지만 잘한 것도 없지 않다'는 식으로 중립에 가깝게 평가했다. 사실 연산군의 편을 들어서 당대와 후대의 사림파들이 비판했다지만, 노사신 생전 때까지의 연산군은 비교적 멀쩡한 왕이었고, 폭군 연산군의 시작의 계기가 된 무오사화[7] 때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림파들에 대한 무분별한 처벌에 반대하고 무마시키고자 노력했으니 그리 흠이 잡힐 일은 아니다. 그리고 무오사화 이전에 노사신이 연산 편을 들었을때의 연산과 대간의 대립 과정을 보면, 아무리 잘 봐줘도 막나가는건 연산이 아니라 대간 쪽이었다.
학자로서는 의미있는 서술을 많이 남겼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고, 1478년 역시 서거정과 함께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하였다. 1481년에도 서거정과 함께 《동국통감》의 수찬에 참여하였으며, 또 그 해에 서거정, 강희맹(姜希孟), 성임(成任),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주도했다.
여담으로 노태우가 이 사람의 후손이다.

2. 사극에서




[1] 즉, 문종과 세조는 노사신과 이종사촌 관계이다.[2] 물론 강순은 역모를 꾸미거나 준역모급이나 역모에 가까운 행위를 하지 않았다. 단지 남이의 물귀신 행보에 같이 휘말려서 죽었을 뿐.[3] 이들 다수가 사림파 출신이었다.[4] 근데 사림파는 자기 편 아니면 다 소인배로 몰아갈 뿐 아니라, 이중잣대내로남불도 서슴치 않는다. 성종 때에도 유자광을 이중잣대 겸 내로남불로 탄핵했을 정도.[5] 조정에 청론하는 선비가 없으면 안 된다며 사림파를 다 쓸어버리려는 유자광을 만류한 것도 이 일환. 다만 이게 정리 기록인데다가 유자광이 강겸에 대한 정상 참작을 주장한 일도 있는지라 진위 여부가 애매하다.[6] 윤필상 같이 그 당시까지 살아있던 인물들은 다수가 처형되었다.[7] 하지만 무오사화 자체는 세종대왕 이상가는 성군이더라도 김종직김일손을 대역죄로 다스리는 것은 물론이고 사림파에 대한 피의 숙청을 벌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김일손이 김종직이 쓴 시 등등을 악용해 왕실을 능멸했기 때문. 연산군이 폐위되고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사화로 인정받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