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고이치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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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 표기 (일본어): 田中耕一 (たなか こういち) [1]
1959년 8월 3일 출생. 도야마 현이 고향이며, 도호쿠대학 전기공학 '''학사'''로 1983년 시마즈 제작소(島津製作所)에 입사한 후 주임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중 연성 레이저 이탈기법을 개발한 공로로 2002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학계와 관련이 없는 민간 연구원이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역사상 4번째 사례이며[2] , 모든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 중 '''유일한''' 학사 출신 수상이다. 이공계 부문 노벨상 수상자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출생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수상 당시 43세였는데, 이는 일본에서 1949년에 42세의 나이로 자국의 첫 노벨상을 수상했던 유카와 히데키의 뒤를 잇는 최연소 2위의 기록이다.
2. 생애
가정환경이 약간 복잡한데, 그가 출생한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서 삼촌(친부의 동생)이 맡아서 기르다가 추후에 정식으로 입양되었다. 그래서 그는 줄곧 삼촌 부부를 친부모로, 사촌 형들(2명)과 누나(1명)를 친형제로 알고 자랐다.
그러던 중 대학 진학을 위해 발급받은 호적 초본에 자신이 양자로 등재되어 있는 걸 보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때의 충격으로 방황하다가 성적미달로 일 년 정도 유급한 적도 있다. 거의 성인이 될 즈음에야 자신이 양자라는 사실을 알게된 것으로 봐서, 삼촌 부부와 사촌 형제들은 그를 친가족과 다름없이 여겼던 것 같다. 다나카 본인 역시 방황한 것은 처음뿐이고, 늘 가족과 사이가 좋았던 듯.
노벨상 수상 후 처음으로 친가에 찾아갔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어머니(혈연상으로는 숙모)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백내장 수술을 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는데, '노벨상 수상자의 금의환향'을 취재하러 몰려든 기자들에 의해 사방에서 미친 듯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가 혹시 어머니의 눈에 안 좋을까봐 손으로 양모의 눈을 가리며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다고.
1995년 중매로 같은 고향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
3. 연구 업적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대표적 연구 업적인 연성 레이저 이탈기법(Soft Laser Desorption/SLD)은 거대분자의 질량을 측정하는 데 쓰이는 분석기법이다. SLD보다는 Matrix-assisted Laser Desorption/Ionization(MALDI)[3] 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데, 이 질량분석법은 대개 레이저로 분자를 이온화시킨 뒤 자기장 하에서의 비행 궤적을 통해 질량을 계산하는 방식인데, 단백질과 같은 거대분자는 레이저를 쬘 때 결합구조가 파괴되는 문제가 있어 분자 개개의 질량을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이에 다나카는 코발트 나노입자와 글리세롤의 혼합물 상에서는 레이저를 쪼아도 단백질이 파괴되지 않고 이온화되는 현상을 발견해 종래의 방법으로 질량분석이 가능케 했다. MALDI 기법으로 이온화시킨 단백질을 자기장하에서 비행시켜 (Time of Flight(TOF)) 최종적으로 질량을 얻어내는 일련의 분석법을 MALDI/TOF 라고 한다.
생물학 관련 학과에서는 '''학부 단계'''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내용 중 하나이다. 그만큼 현대 생명공학에 있어서 기본적인 도구라는 얘기. 또한 화학공학 및 고분자공학과에서도 다루는데 고분자의 분자량 측정법[4] 을 배우면서 반드시 언급되는 기법이다. 덤으로 이걸로 노벨상 받았으니 너희도 놀지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교수의 훈시도 들을 수 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에디슨처럼 matrix 후보로 아무 거나 조합을 시도하면서 우연히 얻어낸 것이긴 하지만, 다나카가 코발트 + 글리세롤 조합을 얻기까지 시도한 횟수는 200여 회가 넘는다.[5] 본인도 그 많은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승진하지 않고 연구원 주임으로 남았을 만큼 연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다. 그동안 회사에서 승진 대상에는 늘 올라 있었으나 본인이 연구에만 몰두하고 싶다며 고사했다.
4. 노벨화학상 수상
2002년 10월 9일 수요일 오후에 다나카 고이치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약 15분 뒤에 외국에서 중요한 전화가 걸려올 테니 받아 주세요"라는 전화가 왔다. 조금 뒤 외국에서 영어로 전화가 걸려왔는데, 통화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해외에서 주관하는 상을 받게 되다니 영광이군. 설마 노벨상이 '''그 노벨상'''은 아닐 테고, '노벨'하고 이름이 비슷한 상이 또 있던가?' 속으로는 동료들의 몰래카메라가 아닌가 상상도 했다.
그가 통화를 마치자마자 회사 전화기 50여 대가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의아해하며 다시 전화를 받았다. 다나카 고이치를 찾는 전화였다. 그는 그때까지도 상황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라며 전화를 끊었다. 회사에는 '다나카 고이치'라는 동명이인이 3명이나 있었다. 수상자 발표 직후 회사에 기자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는데 회사에서도 문의전화에 '잘못 아신 게 아니냐'라고 되물을 정도였고,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건 잘됐는데, '''도대체 '다나카 고이치'가 누구냐?''''며 어리둥절했다. 심지어 가족들조차도 갸우뚱했을 정도. 가족들은 동명이인으로 착각한 거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본인임이 확인된 이후에는 말 그대로 '''눈 뜨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었다. 쏟아지는 강연 요청, 인터뷰 요청에 일을 못 하고, 양복이 고작 2벌뿐이라서 새 걸 사러 갔다가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인 요청 공세를 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질 않나, 그의 노벨상 수상으로 다니던 직장도 덩달아 엄청 유명해지고 주가까지 수직상승해서 사장에게 당장 이사로 승진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는데 겨우 사양해서 부장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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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회사에서 마련한 수상자 인터뷰 장면으로 작업복 차림으로 나와서 화제가 되었는데, 막상 본인은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로''' 정장을 미처 못 챙겼다고 몹시 송구스러워했다. (...) 본인 성격도 무척 소탈하고 연구를 좋아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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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시상식에서의 모습. 이때는 물론 예복을 차려입었다.
실제로 인터뷰 등을 보면 굉장히 겸손한 사람으로, 대학 시절에도 그다지 두각을 보이는 학생은 아니었다고 한다. 인간 승리의 미덕에 어울리는 사람. 자세한 것은 '멋지다 다나카' 라는 자서전격 책과 '일의 즐거움' 이라는 자서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금도 같은 회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연구소의 실장으로 재직 중이다. 소개 페이지
5. 수상 관련 뒷이야기
다나카가 노벨상을 받게 된 배경에는 학계의 힘싸움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노벨상은 규정상 3명까지만 공동 수상이 가능하고, 당시 노벨화학상의 절반을 고분자 질량분석법에 수상하면서 다나카 고이치와 존 펜[6] 을 각각 1/4 수상자로 결정했는데, 다나카가 수상한 레이저를 이용한 고분자 이온화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쌓은 미카엘 카라스와 프란츠 힐렌캄프를 수상에서 제외한 바람에[7] 유럽계와 비유럽계 사이의 알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나돌았던 것.
하지만, 이는 '''최초 발견'''을 중요하게 여기는 노벨상의 특성이 잘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래 노벨상은 중대한 과학적인 개념 또는 탐구 방법을 최초로 생각해내거나 만들어낸 사람에게 수여되는 것이다.
한편, 수상 당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수상 계기가 된 연구는 일본 내에서만 일본어로 발표하고 영어로는 발표하지 않았다.[8] 이 연구는 1985년 '레이저 이온화 질량분석계용 시료 작성 방법'으로 특허가 신청되었는데, 상술한 힐렌캄프와 카라스가 논문 작성 도중 이 연구를 인용했다고 기재하면서 알려졌다고 한다.
일본어로 작성된 특허 출원을 어떻게 서양 학자들이 인용했는가 의아할 수 있는데, 이는 특허 출원 이후 1987년에 일본 질량분석학회에 보고되어 연례회의에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9] 실제 논문에도 출처가 이쪽으로 되어있다.
[1] 밭 전, 가운데 중, 밭갈 경, 한 일.[2] 민간 연구원이 노벨상을 수상한 첫 번째 사례는 존 바딘과 윌리엄 쇼클리, 월터 브래튼 세 사람으로, 셋 다 트랜지스터의 발명자들이었다. 참고로 존 바딘은 나중에 노벨상을 또 받았는데 (분야는 동일) 이때는 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중이었다. 이후 IBM, 잭 킬비(텍사스 인스트루먼트)[3] MALDI 기법은 1985년도에 개발되었다.[4] 다나카가 발견한 최초의 방식은 요즘에는 쓰이지도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원래 노벨상은 중대한 과학적인 개념 또는 탐구 방법을 처음으로 생각해낸 사람에게 수여되는 것이다. 그렇게 치면 요샌 아무도 1906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앙리 무아상이 하던 방법대로 플루오르를 정제하지 않으며, 1911년 수상자인 마리 퀴리가 하던 방법대로 라듐을 분리하지 않는다. [5] 물론 노벨상 받으려면 이런 노력은 당연하다. 화학에 대해 잘아는 사람도 콕집어 코발트와 글리세롤을 합친게 정답이라고 단번에 알아차릴리는 없고 수많은 원소들을 계속 조합해야 했을 것이다.[6] 전자스프레이 이온화법으로 노벨상 수상.[7] 카라스와 힐렌캄프의 방식이 훨씬 감도가 좋고, 현재 학계에서 주로 사용되는 방법이긴 하다.[8] 다나카 본인이 자신의 발견을 유용하긴 하지만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노벨상은 대체로 충분한 검증을 위해 세월을 두고 상을 주는 경향이 있기에, 수상 계기가 된 연구를 신경쓰지 않고 지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9] 즉, 해당 연구는 중간에 과학자와 학회를 거쳤기 때문에 노벨상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최초임을 검증할 수 있는 공신력있는 학회와 학자가 있었기에 최초임을 인정받고 노벨상을 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