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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畓洞聖堂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50번길 2 (답동)에 자리잡은 천주교 인천교구 유일의 주교좌 성당이다. 정식 명칭은 '''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 성 바오로 대성당'''이고, 줄여서 '''답동성당(畓洞聖堂)'''이라고 부른다. 주보성인은 '성 바오로'이다.
'''인천광역시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가톨릭 건축물'''로 기독교대한감리회 내리교회[1] , 대한성공회 내동성당[2] 과 더불어 인천에서 유서 깊은 종교시설로 유명하다. 실제로 이 세 교회는 인천을 대표하는 가톨릭, 개신교, 성공회 교회로써 사이가 돈독한 편이고 정기적으로 연합음악회 등을 개최하는 등 교회일치운동에 모범을 보이는 곳이다. 성당 건물은 전체적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1981년 사적 제287호로 지정됐다.
건축물로서도 역사적 가치가 깊지만 천주교 인천교구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현재의 성전 건물이 건축된 것은 1897년이지만 현 답동 본당의 전신인 제물포 본당[3] 자체가 설립된 것은 조선 조정이 프랑스 정부와 수교하면서 가톨릭 신앙에 대한 자유를 허용한 후 3년이 지난 1889년이다. 인천지역 모든 가톨릭 성당의 모(母)본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천교구 연혁을 보면 현재 본당으로 승격된 부평 공소(현 인천 부평2동성당)나 소사공소(현 부천 소사성당) 등 인천시내 여러 공소가 원래 답동성당의 산하 공소였다. 그러다가 공소가 있던 지역의 신자 수가 늘어나면서 답동성당에서 분가해 부평성당과 소사성당을 설립하는 등 본당이 널리 퍼지면서 오늘에 이른다.
인천 지역의 가톨릭 교세가 확장되고 답동성당이 낡고 좁다는 문제가 불거지면서, "현재의 답동성당으로는 교세를 수용하기 모자라며 주교좌성당이 더 필요하다"는 비판 아닌 비판이 있다.[4] 실제로 제2대 인천교구장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가 생전에 "답동성당이 협소함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19세기 말,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7대 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블랑 주교의 결정에 의해 제물포에 건립되었다. 제물포에 성당이 건립된 것은 이곳이 서울의 관문이고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블랑 주교는 제물포에 유진 코스트[5] 신부를 파견하였고, 이후 페낭신학교에 있던 니콜라 빌렘[6] 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인천지역 첫 번째 본당인 제물포본당(답동본당의 원래 이름)[7] 을 1889년 7월 1일에 설립하게 된다.
빌렘 신부는 이듬해 지금의 성당 자리인 답동 언덕에 대지 3,212평을 매입함으로써 성전을 지을 공간을 마련한다.[8]
이후 부임한 마라발 신부는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 신부로부터 성전 설계도를 받아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성전 건립이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결국 1897년 7월 4일에 완공되었다.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과 마찬가지로 여러모로 역사와 전통, 특유의 웅장한 분위기를 보유한 성당이기 때문에 인천교구 관내 신자 중에서는 이 성당에서 혼인성사 거행을 원하는 이들이 많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도 종종 나온 적이 있기 때문에 답동성당에 대한 인기도 높다. 명동성당은 주 10회의 혼배 미사 스케줄이 짜여 있지만 답동성당은 주 2회(토요일 오후 1시, 주일 오후 1시 30분)로 예식 스케줄이 매우 한정돼 있다. 이 때문에 답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치르는 것은 현실적으로 상당히 어렵다. 자세한 혼배 미사 계약 조건은 링크를 참조하자. 보면 알겠지만 조건이 상당히 까다롭다.
설령 계약을 한다고 하더라도 여러 불편사항은 존재한다. 일단 주차공간이 상당히 부족하다. 마당에 주차할 수 있는 차의 대수는 50대가 채 못 된다.[9] 장기적으로는 답동성당 관광자원화 사업의 일환으로 가톨릭회관을 철거하고 답동성당 지하 공간에 250대 수용 규모의 주차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지만 문화재청과의 갈등이 심해지고 있어 이 주차장이 언제 완성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차가 오갈 수 있는 입구가 성당 앞과 뒤에 각각 1개씩 밖에 없고 교구청 뒤쪽의 출구는 일방통행[10] 차로이며 가톨릭회관에서 올라오는 차로 또한 좁기 때문에 주차와 출차 모두 번거롭다.[11] 여기에 피로연장으로 쓰이는 답동문화관 내 식당도 꽤나 좁다. 여기에 결혼식 전날에 상이라도 생기면[12] 주차는 그야말로 헬. 답동성당에서 결혼 예정인 신자들은 반드시 결혼 전날에 사무실에 연락해서 주차장 통제를 제대로 해달라고 확인하자.[13] 꼭 주차를 해야겠다면 신포시장 내 공영주차장 등 성당 외부의 일반주차장을 사용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한다면야 답동성당 만한 결혼식장도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인천교구에서는 혼배 미사를 전문적으로 치를 수 있는 본당을 최근 들어 건립해 이를 적극 홍보하고 있다.[14]
성당 바로 옆에 박문유치원이 있으며 성당 아랫편에 인천교구청 역할을 했던 가톨릭회관이 있었으나 답동성당 일대 개발 작업으로 인해 2018년 5월 철거됐다. 박문유치원 옆에는 답동문화관이라고 명명된 벽돌 건물이 있는데 답동성당에서 혼배 미사를 할 경우 이 건물 2층의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 원래 성당 뒤편에 인천박문초등학교가 있었는데 2001년 연수구 동춘동으로 이전했다. 이전 후 옛 학교 건물이 리모델링된 뒤 인천교구청으로 사용됐다. 교구청이 송림동 옛 박문여자중학교, 박문여자고등학교 건물로 이사간 후에는 가톨릭 사회사목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꽤 넓은 성당 앞마당이 있는데 과거 인천박문초등학교가 있던 시절에는 운동장으로 쓰였다가 학교 이전 후 도로를 포장해 현재는 주차장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 주차 공간은 상당히 협소하다. 대신 대중교통을 통해서도 편리하게 올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18]
인천광역시와 중구가 적극 밀고 있는 개화기 거리 도보 관광 코스에 이 성당이 빠지지 않는데 걸어서 갈 만한 거리에 내리교회와 신포시장, 차이나타운이 있다.
주교좌 성당이기 때문에 주일에 거의 매 시간 미사가 봉헌되는데 오후 4시 미사는 영어로 봉헌된다. 인천지역에 있는 외국인 신자들을 위한 미사인데 대부분은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출신 신자들이 이 미사에 온다. 천주교 인천교구에 파견된 필리핀인 신부가 영어 미사를 집전한다. 더불어 주일 밤 9시에도 미사가 봉헌되기 때문에, 낮미사나 저녁미사 참례가 어려운 이들에게는 미사 참례를 거르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畓洞聖堂
1. 개요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50번길 2 (답동)에 자리잡은 천주교 인천교구 유일의 주교좌 성당이다. 정식 명칭은 '''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 성 바오로 대성당'''이고, 줄여서 '''답동성당(畓洞聖堂)'''이라고 부른다. 주보성인은 '성 바오로'이다.
'''인천광역시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가톨릭 건축물'''로 기독교대한감리회 내리교회[1] , 대한성공회 내동성당[2] 과 더불어 인천에서 유서 깊은 종교시설로 유명하다. 실제로 이 세 교회는 인천을 대표하는 가톨릭, 개신교, 성공회 교회로써 사이가 돈독한 편이고 정기적으로 연합음악회 등을 개최하는 등 교회일치운동에 모범을 보이는 곳이다. 성당 건물은 전체적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1981년 사적 제287호로 지정됐다.
건축물로서도 역사적 가치가 깊지만 천주교 인천교구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현재의 성전 건물이 건축된 것은 1897년이지만 현 답동 본당의 전신인 제물포 본당[3] 자체가 설립된 것은 조선 조정이 프랑스 정부와 수교하면서 가톨릭 신앙에 대한 자유를 허용한 후 3년이 지난 1889년이다. 인천지역 모든 가톨릭 성당의 모(母)본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천교구 연혁을 보면 현재 본당으로 승격된 부평 공소(현 인천 부평2동성당)나 소사공소(현 부천 소사성당) 등 인천시내 여러 공소가 원래 답동성당의 산하 공소였다. 그러다가 공소가 있던 지역의 신자 수가 늘어나면서 답동성당에서 분가해 부평성당과 소사성당을 설립하는 등 본당이 널리 퍼지면서 오늘에 이른다.
인천 지역의 가톨릭 교세가 확장되고 답동성당이 낡고 좁다는 문제가 불거지면서, "현재의 답동성당으로는 교세를 수용하기 모자라며 주교좌성당이 더 필요하다"는 비판 아닌 비판이 있다.[4] 실제로 제2대 인천교구장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가 생전에 "답동성당이 협소함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2. 역사
19세기 말,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7대 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블랑 주교의 결정에 의해 제물포에 건립되었다. 제물포에 성당이 건립된 것은 이곳이 서울의 관문이고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블랑 주교는 제물포에 유진 코스트[5] 신부를 파견하였고, 이후 페낭신학교에 있던 니콜라 빌렘[6] 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인천지역 첫 번째 본당인 제물포본당(답동본당의 원래 이름)[7] 을 1889년 7월 1일에 설립하게 된다.
빌렘 신부는 이듬해 지금의 성당 자리인 답동 언덕에 대지 3,212평을 매입함으로써 성전을 지을 공간을 마련한다.[8]
이후 부임한 마라발 신부는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 신부로부터 성전 설계도를 받아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성전 건립이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결국 1897년 7월 4일에 완공되었다.
3. 결혼식장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과 마찬가지로 여러모로 역사와 전통, 특유의 웅장한 분위기를 보유한 성당이기 때문에 인천교구 관내 신자 중에서는 이 성당에서 혼인성사 거행을 원하는 이들이 많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도 종종 나온 적이 있기 때문에 답동성당에 대한 인기도 높다. 명동성당은 주 10회의 혼배 미사 스케줄이 짜여 있지만 답동성당은 주 2회(토요일 오후 1시, 주일 오후 1시 30분)로 예식 스케줄이 매우 한정돼 있다. 이 때문에 답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치르는 것은 현실적으로 상당히 어렵다. 자세한 혼배 미사 계약 조건은 링크를 참조하자. 보면 알겠지만 조건이 상당히 까다롭다.
설령 계약을 한다고 하더라도 여러 불편사항은 존재한다. 일단 주차공간이 상당히 부족하다. 마당에 주차할 수 있는 차의 대수는 50대가 채 못 된다.[9] 장기적으로는 답동성당 관광자원화 사업의 일환으로 가톨릭회관을 철거하고 답동성당 지하 공간에 250대 수용 규모의 주차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지만 문화재청과의 갈등이 심해지고 있어 이 주차장이 언제 완성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차가 오갈 수 있는 입구가 성당 앞과 뒤에 각각 1개씩 밖에 없고 교구청 뒤쪽의 출구는 일방통행[10] 차로이며 가톨릭회관에서 올라오는 차로 또한 좁기 때문에 주차와 출차 모두 번거롭다.[11] 여기에 피로연장으로 쓰이는 답동문화관 내 식당도 꽤나 좁다. 여기에 결혼식 전날에 상이라도 생기면[12] 주차는 그야말로 헬. 답동성당에서 결혼 예정인 신자들은 반드시 결혼 전날에 사무실에 연락해서 주차장 통제를 제대로 해달라고 확인하자.[13] 꼭 주차를 해야겠다면 신포시장 내 공영주차장 등 성당 외부의 일반주차장을 사용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한다면야 답동성당 만한 결혼식장도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인천교구에서는 혼배 미사를 전문적으로 치를 수 있는 본당을 최근 들어 건립해 이를 적극 홍보하고 있다.[14]
4. 역대 주임신부
5. 교통
- 수도권 전철 1호선 동인천역 : 동인천역에서 도보 10분. 동인천역과 연결된 신포지하상가 29번 출구로 나오면 성당 입구인 옛 가톨릭회관 터가 나온다.
-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 신포역 : 신포역 5번 출구에서 도보 5분.
- 인천광역시 시내버스 : 4, 7, 9, 12, 15, 16, 23, 24, 28, 45, 72, 112, 307, 517, 519, 521번 버스 탑승 후 신포시장 정류장 하차.
6. 주변 시설 및 기타 정보
성당 바로 옆에 박문유치원이 있으며 성당 아랫편에 인천교구청 역할을 했던 가톨릭회관이 있었으나 답동성당 일대 개발 작업으로 인해 2018년 5월 철거됐다. 박문유치원 옆에는 답동문화관이라고 명명된 벽돌 건물이 있는데 답동성당에서 혼배 미사를 할 경우 이 건물 2층의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 원래 성당 뒤편에 인천박문초등학교가 있었는데 2001년 연수구 동춘동으로 이전했다. 이전 후 옛 학교 건물이 리모델링된 뒤 인천교구청으로 사용됐다. 교구청이 송림동 옛 박문여자중학교, 박문여자고등학교 건물로 이사간 후에는 가톨릭 사회사목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꽤 넓은 성당 앞마당이 있는데 과거 인천박문초등학교가 있던 시절에는 운동장으로 쓰였다가 학교 이전 후 도로를 포장해 현재는 주차장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 주차 공간은 상당히 협소하다. 대신 대중교통을 통해서도 편리하게 올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18]
인천광역시와 중구가 적극 밀고 있는 개화기 거리 도보 관광 코스에 이 성당이 빠지지 않는데 걸어서 갈 만한 거리에 내리교회와 신포시장, 차이나타운이 있다.
주교좌 성당이기 때문에 주일에 거의 매 시간 미사가 봉헌되는데 오후 4시 미사는 영어로 봉헌된다. 인천지역에 있는 외국인 신자들을 위한 미사인데 대부분은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출신 신자들이 이 미사에 온다. 천주교 인천교구에 파견된 필리핀인 신부가 영어 미사를 집전한다. 더불어 주일 밤 9시에도 미사가 봉헌되기 때문에, 낮미사나 저녁미사 참례가 어려운 이들에게는 미사 참례를 거르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1] 동인천역과 답동성당 사이 언덕에 있다.[2] 자유공원 인근에 있다. 대한성공회 최초의 성당.[3] 당시 본당 이름이 제물포였던 것은 본당 설립 시기 이 지역을 제물포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현재 제물포역 인근 수봉공원 밑에 제물포성당이 있기는 하지만, 답동성당의 전신이었던 제물포성당과는 전혀 무관하다. 현재의 제물포성당은 1970년대에 설립됐다.[4] 주교좌성당이 꼭 하나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국내에도 대구대교구, 광주대교구, 수원교구, 부산교구 등 주교좌성당이 2곳인 교구들이 있다.[5] 서울대교구 명동성당과 중림동 약현성당을 설계한 프랑스인 신부.[6] 안중근 토마스 의사 및 그의 집안과 친분이 있었으며,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기 전 고해성사를 주었던 프랑스인 신부.[7] 역사적 의미에서 원래 제물포를 의미하는 지역은 현재 제물포역 인근 지역이 아니라 현 인천-동인천역을 인근으로 하는 포구지역까지 가리키는 지역명이였다.[8] 1890년 용산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된 빌렘 신부에 이어 르 비엘 신부(신 바오로 1890~1893)가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해 성당 건립 기금을 마련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병으로 인해 휴양을 떠나면서 성전 건립은 1893년에 부임한 마라발(서요셉 1893∼1904년) 신부의 몫으로 넘어가는 등 건립을 위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9] 성당 바로 앞마당과 가톨릭회관에서 성당으로 올라가는 고갯길 중턱에 주차공간이 있다. 그러나 여기를 다 합쳐도 산술적으로 60여대 밖에 주차할 수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 교구청 신청사 앞과 답동문화관 앞에도 약간의 주차공간이 있지만 여기는 박문유치원 버스 주차장이자 교구청 상주 신부들의 전용 주차장이기 때문에 쓸 수 없다.[10] 신포시장 앞에서 기독병원 방향으로만 갈 수 있다. 기독병원 앞에서 신포시장 쪽으로 오려면 애관극장 앞으로 와야 한다.[11] 후술하겠지만 다행히도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가 상당히 쉽다는 장점이 있다. 답동성당을 중심으로 개화기 문화재 도보관광코스도 있으니 타지 하객 중 인천시내 나들이를 원한다면 주변 지역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12] 성당 사무실 바로 옆에 장례식장이 있다. 답동성당은 노인 신자 비율이 높아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13] 혼배미사가 있는 날에는 답동성당으로 올라가는 가톨릭회관 입구 초입에서부터 주차 통제 아르바이트 요원이 통제를 한다. '만차' 푯말이 세워졌다면 실갱이 하지 말고 그냥 들어가지 말자.[14] 예를 들면 동막역 인근에 있는 동춘동성당이나 인천논현역 바로 앞에 있는 논현동성당이 그렇다.[15] 한국 천주교 94번째 신부. 답동성당 최초의 한국인 주임신부. 이 당시는 천주교 인천교구가 설정되지 않았던 시점이었기에 경성대목구 소속 신부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성당의 종이 군수품으로 공출될 뻔한 상황에서 일본군 관계자에게 "종을 무기로 만들기보다 마을에 설치해 주민들이 경계태세를 갖추는 용도로 쓰자"고 제안하는 기지를 발휘해 종을 지켜낸 분이다. 1986년 선종.[16] 한국 천주교 447번째 신부이자 천주교 인천교구가 1961년 설정된 이후 최초로 배출된 천주교 인천교구 소속 1호 한국인 신부(1963년 2월 서품). 현재 천주교 인천교구 소속 사제 중 서품 순번이 가장 빠르다. 현재 생존 중인 천주교 인천교구 소속 사제 중 가장 큰 어른이시다.[17] 한국 천주교 617번째 신부이며 인천지역 민주화 운동과 가톨릭계 노동 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원로 사목자다. 문재인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다고 한다. 2020년 4월 25일 선종했으며 민주화 운동에 대한 헌신을 기리기 위해 선종 이후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됐다.[18] 동인천역과 신포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아울러 수많은 시내버스들도 가톨릭회관 앞 또는 신포시장 앞에 정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