랴오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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辽阳(遼陽) / 요양 / Liaoyang(Yoyang)
순우리말: 오렬홀
중국 동북부 랴오닝성의 지급시. 성도인 선양시에서 서남쪽으로 60km 떨어져 있으며 안산과는 이웃하여 있는 인구 200만명의 도시이다. 시가지는 태자하(=太子河)를 끼고 있으며 랜드마크인 백탑(白塔)은 강 서안에 위치해 있다. 신의주시와 16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나, 중간의 천산산맥 때문에 직선도로가 없어 오래 걸린다.
요양 일대는 머나먼 옛날부터 인류가 거주하였다. 홍산 문화의 동쪽 끝이었고 비파형 동검이 다수 출토되었다. 본래 고조선의 영역이었으나 전국시대에 연나라가 이 지역을 정복하였으며, 진나라와 한나라 대에는 양평현(襄平縣)이라 불리며 요동군의 치소가 되었다. 당시 양평현은 현재 랴오양 시가지의 서북쪽에 있었다. 후한 대에 현도군(玄菟郡)이 고구려의 압박에 후퇴하며 무순으로 왔는데, 요동군의 북부 일대가 현도에 할당되어 양평현이 요동군의 최북단이 되었다.[1]
이후 삼국시대 초기에 요동 반도는 공손씨의 지배를 받는데, 양평현은 그 수도였다. 공손강은 원소 잔당을 조조에게 바치며 그에 귀부하였으나 그의 아들 공손연은 칭제하다가 위나라의 공격을 받아 238년에 공손 정권은 멸망하였다. 양평성 포위전 당시 고구려가 위를 도왔고 이후 서안평를 점령했다가 242년에 관구검에게 대패한 것은 유명한 사실.
조위, 서진, 5호 16국의 전연, 전진, 후연을 거친 후 요동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점령되었다. 고구려는 양평현에 요동성(遼東城)을 세워 중시 여겼다. 수나라 양제는 613년에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지만 645년, 당나라의 당태종은 함락에 성공한다. 이후 고구려가 수복하였으나 결국 670년경 당나라 영토가 되었다. 676년에 나당전쟁으로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가 이곳으로 옮겨졌고 이후 폐지되는데 발해가 요동을 차지하면서 수복한 것으로 보인다.
919년에 거란의 야율아보기에게 리모델링 되었고 928년부터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가 설치되어 현재 지명의 기원이 되었다. 요나라, 금나라 때에 요양은 동경으로 불렸다. 한편, 금나라의 황자로서 동경에 주둔하던 완안옹은 채석기 전투에서 대패한 해릉왕에 대해 반기를 들었고 그가 암살되자 금세종으로 즉위하였다. 백탑은 아마 그 기념으로 지어진 듯 하다.
원나라는 요양 행중서성(遼陽行中書省)을 두었고, 명나라는 1370년경에 요양에 성을 쌓고 요동도사(遼東都司)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1621년에 요양은 후금에게 함락되었고 1622년에 동경성이 축조되었다. 하지만 1625년에 심양으로 천도하며 동경성은 해체되어 성경성 건설에 쓰였다. 청나라 순치제 대에 봉천부(奉天府)가 설치되었다. 20세기 들어서 요양은 러일전쟁의 전장이 되었다. (1904년 8-9월)
백탑(白塔)
광우사(廣祐寺) 8각 13층 백탑(白塔)은 높이 71m의 전탑으로 유명하다. 그밖에도 한나라 대의 묘지, 청나라 대의 동경성(東京城)과 동경릉(東京陵), 백암성 등지가 남아 있다. 요동성은 애석하게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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辽阳(遼陽) / 요양 / Liaoyang(Yoyang)
순우리말: 오렬홀
1. 개요
중국 동북부 랴오닝성의 지급시. 성도인 선양시에서 서남쪽으로 60km 떨어져 있으며 안산과는 이웃하여 있는 인구 200만명의 도시이다. 시가지는 태자하(=太子河)를 끼고 있으며 랜드마크인 백탑(白塔)은 강 서안에 위치해 있다. 신의주시와 16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나, 중간의 천산산맥 때문에 직선도로가 없어 오래 걸린다.
2. 역사
요양 일대는 머나먼 옛날부터 인류가 거주하였다. 홍산 문화의 동쪽 끝이었고 비파형 동검이 다수 출토되었다. 본래 고조선의 영역이었으나 전국시대에 연나라가 이 지역을 정복하였으며, 진나라와 한나라 대에는 양평현(襄平縣)이라 불리며 요동군의 치소가 되었다. 당시 양평현은 현재 랴오양 시가지의 서북쪽에 있었다. 후한 대에 현도군(玄菟郡)이 고구려의 압박에 후퇴하며 무순으로 왔는데, 요동군의 북부 일대가 현도에 할당되어 양평현이 요동군의 최북단이 되었다.[1]
이후 삼국시대 초기에 요동 반도는 공손씨의 지배를 받는데, 양평현은 그 수도였다. 공손강은 원소 잔당을 조조에게 바치며 그에 귀부하였으나 그의 아들 공손연은 칭제하다가 위나라의 공격을 받아 238년에 공손 정권은 멸망하였다. 양평성 포위전 당시 고구려가 위를 도왔고 이후 서안평를 점령했다가 242년에 관구검에게 대패한 것은 유명한 사실.
조위, 서진, 5호 16국의 전연, 전진, 후연을 거친 후 요동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점령되었다. 고구려는 양평현에 요동성(遼東城)을 세워 중시 여겼다. 수나라 양제는 613년에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지만 645년, 당나라의 당태종은 함락에 성공한다. 이후 고구려가 수복하였으나 결국 670년경 당나라 영토가 되었다. 676년에 나당전쟁으로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가 이곳으로 옮겨졌고 이후 폐지되는데 발해가 요동을 차지하면서 수복한 것으로 보인다.
919년에 거란의 야율아보기에게 리모델링 되었고 928년부터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가 설치되어 현재 지명의 기원이 되었다. 요나라, 금나라 때에 요양은 동경으로 불렸다. 한편, 금나라의 황자로서 동경에 주둔하던 완안옹은 채석기 전투에서 대패한 해릉왕에 대해 반기를 들었고 그가 암살되자 금세종으로 즉위하였다. 백탑은 아마 그 기념으로 지어진 듯 하다.
원나라는 요양 행중서성(遼陽行中書省)을 두었고, 명나라는 1370년경에 요양에 성을 쌓고 요동도사(遼東都司)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1621년에 요양은 후금에게 함락되었고 1622년에 동경성이 축조되었다. 하지만 1625년에 심양으로 천도하며 동경성은 해체되어 성경성 건설에 쓰였다. 청나라 순치제 대에 봉천부(奉天府)가 설치되었다. 20세기 들어서 요양은 러일전쟁의 전장이 되었다. (1904년 8-9월)
3. 볼거리
백탑(白塔)
광우사(廣祐寺) 8각 13층 백탑(白塔)은 높이 71m의 전탑으로 유명하다. 그밖에도 한나라 대의 묘지, 청나라 대의 동경성(東京城)과 동경릉(東京陵), 백암성 등지가 남아 있다. 요동성은 애석하게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