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타 석

 


Rosetta Stone
1. 이집트의 로제타 석
1.1. 개요
1.2. 역사
1.3.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다
1.4. 반환요구
1.5. 대중문화에서의 로제타 석
1.6. 기타
2. 소설 개미에 나오는 번역기


1. 이집트의 로제타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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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개요


고대 이집트어 해독의 시발점으로 꼽히는 발굴품.

1.2. 역사



기원전 196년에 만든 비석으로, 비문의 주요 내용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사제들에게 큰 은혜를 베푼 것을 찬양한다는 것이다. 내용 대부분이 밝혀졌지만 완전번역이라고 하기에는 지금까지도 반론도 많아서 아직까지도 비문을 두고 연구 중이다.
1799년 7월 15일 지중해 해안에 위치한 이집트 도시 라시드에서 진지를 구축 중이던 프랑스군의 피에르 부샤르 육군 중위가 발견했다. 그는 이걸 요새 주춧돌로 쓸 생각으로 막 다루었는데, 프랑스군을 수행한 고고학자들이 보고 기겁하며 받아 모셔뒀다. 학자들은 로제타 석을 프랑스로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1802년 이집트 원정이 실패로 끝나고 나폴레옹 홀로 본국으로 탈출한 가운데, 이집트에 고립된 프랑스군을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시켜주는 조건으로 영국군이 손에 넣어서 현재까지도 진품은 대영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이렇게 로제타 석은 영국의 손에 들어갔지만, 처음 발견한 프랑스에서 가치를 인식하고 탁본 및 복사본을 미리 만들었다. 그 덕분에 아래에 언급할 프랑스 고고학자 샹폴리옹도 로제타 석의 내용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로제타 석이라는 이름은 이 돌이 발굴된 도시인 라시드의 유럽명 Rosetta에서 따온 것이다.
이집트에서 꾸준히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이집트 카이로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중 유일한 모조품이 로제타석 모조품이다. 일종의 항의성.

1.3.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다


로제타석의 가장 큰 가치는 읽는 방법이 수천년간 잊혀 있던 이집트 상형문자를 읽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이집트로의 전파 및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의 이교 신전 폐쇄로 신성문자를 알던 이집트의 신관들은 몰락해버렸고, 신성문자가 변형된 민중문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그리스 계열 파라오가 집권하면서부터 그리스 문자(콥트 문자)가 보급된 상황이었다. 비록 고왕조 시대부터 기록한 파피루스나 건물에 쓰여진 이집트 문자 기록은 고고학이 정착되던 18세기까지도 상당히 남아있었지만 이것을 해석할 실마리가 전무했다.
때문에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에는 사람들에게 악마의 문자나 부적 취급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당시 사람들이 다 무식한 이들만 있었던 건 아니고, 일부 중세 이슬람 학자들은 이것이 파라오 시절에 사용된 고대 이집트의 문자라고 여기고 문자해독을 위해 연구하기도 했다.[1] 하지만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려는 이슬람 학자들의 노력은 모두 실패하고 만다.
그런데 이 정적을 깨는 계기가 바로 로제타 석의 발굴이었다. 이 돌에는 고왕조부터 사용하던 이집트 신성문자와 신성문자를 간소화해 사용하던 이집트 민중문자 그리고 그리스어 문자의 3가지 표기로 동일한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리스어를 토대로 이집트어를 해석해낼 수 있었다.
로제타 석을 해석하려 시도한 이는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1790~1832)과 토마스 영[2]이다. 이 중 샹폴리옹은 당대 서구 지식인이라면 알아야 했던 라틴어그리스어 외에도 히브리어아랍어, 시리아어, 아람어, 칼데아어, 페르시아어, 콥트어 등 당대 웬만한 고전어들을 모두 공부한 지식인이었다. 한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성격이 아니여서 로제타 석 해석 중에도 다른 학문 분야에 접근했던 토머스 영과는 달리 그는 끈기 있게 해석에 매달렸다.
1822년부터 1824년까지 3년에 걸쳐 끈질기게 연구한 끝에, 샹폴리옹은 놀라운 직관력을 발휘하여 이집트 신성문자에서 특정문자들을 띠 모양으로 두른 테두리 속 문자들은 이름일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리고 그 문자들은 뜻 글자가 아니라 각각 하나하나의 분절음을 나타내는 소리글자이리라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상형문자는 그 특성상 (마치 초기의 한자마냥) 그림 자체에 의미가 있는 뜻 글자라고 생각들 했음을 감안하면 꽤나 혁명적인 발상.[3] 이 가정은 순조롭게 맞아떨어졌고, 샹폴리옹은 아래와 같은 대응표를 만들어 가며 마침내 고대 이집트 문자의 음가를 알아내어 이집트어 해독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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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문자를 'ptolmis'에 대응시킨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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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폴리옹은 상형문자의 최초 해독에 성공한 공로로 큰 명성을 얻었다. 샹폴리옹도 자신의 번역이 완벽한지 의문스러워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이집트를 방문하는 등 추가연구를 했으나, 연구 및 이집트 방문 도중 얻은 피로로 중풍에 걸려 42세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유언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그는 아직 못다한 일들이 남아서인지 "너무 일러...아직 할 일이 많은데..." 하는 한맺힌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참고로 샹폴리옹은 프랑스 혁명을 지지한 공화주의자였고 나폴레옹의 열렬한 지지자였는데[4] 이 때문에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도 로제타 석과 이집트어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이 때문에 건강을 크게 해쳐서 요절한 것. 다만 상형문자 해독에 성공한 후에는 왕실에서도 그 공로를 인정해주어 루브르 박물관 이집트관의 큐레이터나 프랑스 최고의 명문대인 콜레주 드 프랑스의 이집트학회 학회장을 맡는 등 중요한 직책을 역임했다.

1.4. 반환요구


지난 1999년 영국프랑스는 이 비석 발굴 200주기를 기념하는 자리를 가졌으나 정작 이집트 측은 이 자리에 불참했고 로제타 석 반환요구를 굳세게 하고 있다. 게다가 이 자리에 이집트가 없어도 된다는 프랑스 측 태도에 이집트에서 분노했다. 결국 프랑스의 이런 배째라 여유는 부메랑이 되어 제대로 쳐맞았는데 이집트는 로제타 석과 관련해서 한동안 이집트에서 발굴되는 고대 유적 자료 연구에 프랑스와 영국 학자들에게 1년 동안 참가를 불허하는 보복으로 맞대응해버렸다. 덕분에 이집트 유적 연구에 큰 관심을 가지며 학자들을 보내고 막대한 연구자금을 지원하는 미국독일, 일본 같은 나라들만 반사이익을 얻었고 이집트 문화재 연구를 굉장히 자랑하던 프랑스 고고학계는 충공깽에 빠졌다.
이집트는 해당 사건 외에도 종종 이런 문화재 관련으로 보복을 해왔으며, 이집트가 21세기가 되어서도 꾸준히 출토될 정도로 엄청난 양의 유물을 가지고 있다 보니 그 효력은 상당하다. 그러다보니 프랑스도 결국은 이런 보복에 굴복해 약탈해간 이집트 문화재를 이집트에게 되돌려주기도 한다. 지난 2008년 프랑스가 놀랍게도 이집트 문화재 30여 점을 이집트에 반환했다. 외규장각 관련으로 배째라하는 프랑스를 생각하면 놀랄 일이지만[5], 이집트 측이 그거라도 반환 안 하면 프랑스 학자들의 이집트 출허를 아예 영원히 금지해서 연구를 막겠다고 협박하여 이뤄낸 것이다. 프랑스는 아직도 자신들이 고대 이집트 연구에 기여했다고 자부하는데, 이를 막아버리면 자기들의 자존심에 먹칠이 되어서인지 이렇게 이집트에게 백기를 들며 조금씩이나마 문화재를 반환한다.
피라미드/이집트에서도 나오듯이 2000년대에 와서, 이집트는 고대 이집트 연구에 그야말로 미쳤다고 알려진 문화재청장 자히 하와스 박사의 주도 아래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으로부터 도난당한 파라오시대 고분벽화 5점을 돌려받았다. 영국 런던 대학교에서 보유했던 이집트 석기시대 유물 등 2만 5000점, 미국이 소장했던 3000년 된 이집트 목관 등 유럽과 미국에게 3만 점이 넘는 이집트 고대 유물을 되찾아왔듯이,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이젠 이집트 눈치를 보고 돌려주는 게 많이 늘었다.
프랑스에서는 자신들이 재발굴하고 해석도 했는데 정작 영국에 전시된 것을 불만스러워 하는 이들도 있다. 19세기에는 프랑스에서 영국에게 반환요구를 한 적도 있었는데 문제는 이게 원주인(이집트)에게 돌려주라는 요구가 아니라 자기들한테 달라는 요구였단 거다. 물론 영국에선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1.5. 대중문화에서의 로제타 석


  • 대항해시대 2에서는 D급 발견물 중 하나로 등장하며, 알렉산드리아 부근에서 발견할 수 있다. 왜인지 유적으로 분류되며, 초반에 별 무리없이 찾을 수 있다.
  • 대항해시대 3에서도 등장하며, 스핑크스 발견 이후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스핑크스가 알렉산드리아 동쪽에서 고대 이집트의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며, 그 말대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정동쪽으로 직진하면 바로 발견할 수 있다. 발견 이후 로제타 석을 해독하면 아부심벨 대신전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탐색 4랭크, 고고학 6랭크에 발견할 수 있는 역사유물 발견물이며 발견 이후 발견물 카드를 이용해 131,600 두캇에 장식물로 만들 수 있다.
  • 미야자키 하야오가 공동으로 연출한 애니 명탐정 홈즈(1984)에서도 프랑스인이 영국에 있는 로제타 석을 훔쳐 프랑스로 가져가려는 게 나온다.
  • 더블 드래곤 3편에서 게임 주제로 나온다. 물론 내용은 판타지.
  • 크레이지레이싱 카트라이더에서는 로제타 석으로 만들었다는 설정의 골든 로제타 킷이라는 킷 파츠가 등장한다. 부스터 게이지 충전 속도와 스피드전 부스터 길이를 높여주는 최상급 파츠로 평가받는다.
  • 던전 앤 파이터에서 90제 에픽 마법석으로 나왔다. 아이콘 역시 원본 로제타석과 똑같이 생겼다.
  • 모여봐요 동물의 숲에서 여욱이 판매하는 수집품으로 등장한다. 진품과 가품 두가지가 존재하며, 가품의 경우 빛을 내는 파란색 돌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쉽게 구분이 가능하다. 오히려 가품이 더 낫다며 마을 배치나 소장용으로 가품을 사는 유저들도 있다.

1.6. 기타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 같은 문구는 쓰여져 있지 않다. 피라미드에 쓰여져 있는 문구라고 인터넷에서 떠돌던 말이 반박 당하자 로제타 석으로 이동한 것뿐이다. 다만 더 오래된 '''수메르 점토판'''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며 그리스 철학자중국 역사가 등 과거부터 꾸준히 이러한 요지의 발언이 나온 것 또한 사실이다.

2. 소설 개미에 나오는 번역기


에드몽 웰즈가 만든 개미언어번역기계이다. 이 기계는 개미가 내뿜는 페로몬크로마토그래피를 이용하여 분리, 해독한 다음 이 것을 전자화 해서 언어를 합성하여 소리로 들려주고, 인간이 내는 소리를 해독한 다음 기계 안에 있는 페로몬들을 내뿜으면서 개미들에게 말을 할 수 있다.
처음 이 기계를 만들었을 때는 농도를 너무 짙게 한 탓에 개미가 그대로 숨막혀 죽는 일이 있었다. 때문에 농도를 줄여 실험을 했지만, 개미가 한 말이 "당신이 내뿜는 페로몬이 너무 짙어요. 개미 살려!" 였다. 이에 에드몽 웰즈는 계속 실험하여 농도가 0에 가깝게 한 뒤에야 개미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이 기계를 소형화하여 개미 로봇에 장착하여 벨로캉 왕국에서 불개미들과 대화를 시도 했다.

[1]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당연한 게 그냥 그림이나 기호가 큼지막하게 그려진 것도 아니고 알파벳처럼 기호들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으며 심지어 같은 모양의 기호가 반복되어 나오기까지하면 이건 부적이나 기호가 아니라 당시 쓰인 옛날 문자라고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2] 의 파동성을 증명한 바로 그 토머스 영이다.[3] 그 이전에 상형문자를 연구하던 중세 이슬람 학자들은 이런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그냥 상형문자니까 맨땅에 헤딩하듯 비슷하게 생긴 형상들을 닥치는 대로 대입하여 해석하려다가 막혀서 포기했다. 물론 중세 이슬람 시절에는 로제타석이 발견되기 전이라서 이슬람 학자들은 그냥 맨땅에 헤딩하듯 연구하는 수밖에 없었지만...[4]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을 공화주의와 모순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나폴레옹도 그렇게 홍보했다. 고대 로마도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변화했기 때문.[5] 사실 외규장각의 경우 기간제 대여 형식이긴 하지만 '자동 갱신, 갱신 횟수 무제한'라는 조건을 달아서 사실상 영구대여로 만들었기에 상당히 좋은 조건으로 들여온 사례다. 물론 중간에 프랑스 측이 가치가 비슷한 다른 문화재를 달라고 억지를 부려서 협상이 난항을 겪었음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