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우(축구선수)

 


'''루시우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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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카푸
(1998~2006)

'''루시우
(2006~2010)'''


치아구 시우바
(2010~2014)

'''루시우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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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2002'''

'''루시우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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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
'''이름'''
'''루시우
Lúcio'''
'''본명'''
루시마르 페헤이라 다 시우바
Lucimar Ferreira da Silva
'''출생'''
1978년 5월 8일 (45세)
브라질 플라나우치아
'''국적'''
브라질 [image]
'''신체'''
188cm, 81kg
'''직업'''
축구선수 (센터백 / 은퇴)
''' 소속 '''
''' 선수 '''
SC 인테르나시오나우 (1997~2000)
'''바이어 04 레버쿠젠 (2001~2004)'''
'''FC 바이에른 뮌헨 (2004~2009)'''
'''인테르나치오날레 (2009~2012)'''
유벤투스 FC (2012)
상파울루 FC (2013)
SE 파우메이라스 (2014~2015)
FC 고아 (2015~2016)
SE 가마 (2018)
브라질리엔시 FC (2018~2019)
'''국가대표'''
105경기 4골 (브라질 / 2000~2011)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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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센터백이었다.
현역 시절 뛰어난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한 훌륭한 수비력과 세계 최정상급의 공격력을 보유했던 수비수이다. 레버쿠젠바이에른 뮌헨의 주전 센터백으로 활약했으며 인터 밀란에서는 트레블을 이끌었고, 브라질 국가대표로서는 2002 한일 월드컵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2. 클럽 경력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데뷔해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레버쿠젠으로 이적한다.

2.1. 바이어 04 레버쿠젠


레버쿠젠에서 뛰게 된 루시우는 예의 그 투지넘치는 플레이를 앞세워 레버쿠젠에서 호성적을 내게 되었으며 이듬해 팀의 분데스리가 준우승에 공헌하게 되고,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미하엘 발락, 제 호베르투 등과 함께 막강한 전력을 구축하며 결승전까지 진출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시즌이 2001-02 시즌인데, 위키질 좀 해본 축덕이면 이 시즌에 레버쿠젠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잘 알것이다. 루시우는 레알 마드리드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골까지 넣었지만 곧 지단에게 역대급 발리골을 내주며 1-2로 패배, 결국 트리플 러너업의 비극을 겪고 만다.
이후 레버쿠젠에 후앙이 합류하여 브라질 듀오 수비진을 이루게 되는데 이 수비진은 훗날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5년간 합을 맞추게 된다.

2.2. FC 바이에른 뮌헨


그리고 2004년 부터 FC 바이에른 뮌헨이 위에서 언급한 미하엘 발락, 제 호베르투를 1년 주기로 영입해가고, 2004년에는 본인까지 이적하게 된다. 비유를 하자면 오늘날 바이에른이 도르트문트에서 마리오 괴체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듀오를 영입하고 거기에 한술 더떠 마츠 후멜스까지 데려갔다고 보면 된다.
이적한 루시우는 팀이 팀이다보니 각각 3번의 분데스리가DFB-포칼 우승을 경험하고, 2번의 DFB-리가포칼 우승을 경험하게 된다.

2.3.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009년, 루시우의 삶을 크게 바꾸게 된 이적을 하게 되는데, 인테르로 이적을 하게 된다. 본래대로라면 이적을 할 생각이 없었으나 루이 판 할 감독이 취임. 그 동안의 활약이 무색하게 재계약에 실패한다. 반 할 감독과의 불화로 인하여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이적료 없이 '''공짜'''로 넘어가버린 케이스. 그리고 바이에른은 시즌이 끝날 즈음에 이를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된다.
이를 놓치지 않은 인테르의 주제 무리뉴가 그를 영입하고, 마이콘, 월터 사무엘, 크리스티안 키부, 하비에르 사네티, 에스테반 캄비아소 등과 함께 그야말로 철벽을 구축하며 피지컬로는 최강급이라고까지 일컬어지던 디디에 드록바,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를 비롯한 수 많은 타겟맨들을 그야말로 담궈버리면서 트레블이라는 업적을 이룩한다.
특히나 인테르가 첼시에 맞서 2-1로 승리한 경기가 절정인데, 왈터 사무엘과 함께 디디에 드록바를 지워버렸다. 그 시즌에 29골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면서, 절정의 폼을 보여주던 동시에 몸싸움으로 밀리는 일 자체가 보기 힘든 드록바가 아무것도 못하고 처참하게 지워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공교롭게도 친정팀 바이에른 뮌헨을 만나게 되었는데 변함없이 철벽같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2-0 승리에 공헌하였고 팀은 트레블을 달성하게 된다. 트레블을 이룩하는데 결정적이었던 활약을 인정받아 2010년 FIFA FIFPro 월드 XI에도 선정된다. 월드 클래스 반열에 오른지는 오래되었으나 소속팀이 약해서 주목받지 못했던 그에겐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1]

2.4. 유벤투스 FC


인테르에서 이탈리아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12-13 시즌 여름 이적시장때 자유계약으로 같은 리그 라이벌인 유벤투스 FC로 이적했다. 이 이적 때문에 트레블의 주역임에도 인테르 팬들은 루시우에 대해 떠올리면 안 좋은 말 밖에 안한다.
하지만 만 34세 노장이었던 루시우는 인테르 시절과는 달리 노쇠화와 부상으로 인해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결국 같은 시즌 겨울 이적 시장 때 유벤투스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2.5. 이후


그리고 고향 브라질 리그의 명문 클럽 상파울루 FC와 계약을 맺었다.
2015년 6월 5일, 인도 슈퍼 리그의 FC 고아에 입단했다. 등번호는 3번. 2015년 인도 슈퍼 리그에서는 우승 플레이오프 포함 16경기 중에서 14경기를 소화해냈다.
이후 2017년 고향 브라질로 돌아가 가마를 거쳐 2018년 4월 브라질 4부 리그인 브라질리엔시 FC에 입단했다. 그리고 2020년 1월 29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3. 국가대표 경력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데뷔했다.
발락과 함께 콩의 아픔을 딛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출전, 브라질 내에서 어째 나사가 하나 풀린 것 같다는 평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이겨서 우승까지 차지하는데, 이게 커리어 사상 첫번째 우승이다. [2]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이끌었지만 8강에서 네덜란드에게 1-2 역전패를 당하며 본인의 마지막 월드컵을 마무리 지었고 2011년에 국가대표를 은퇴했다.

4. 플레이 스타일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상대를 짓눌렀던 전형적인 파이터형의 센터백. 센터백임에도 공격 가담이 굉장히 활발했는데 일반적인 빌드업은 물론 188cm의 큰 키를 활용한 헤딩, 시원하게 찔러 넣는 슈팅에 프리킥까지 정말 다양한 옵션을 갖고 있었다. 다비드 루이스, 세르히오 라모스의 선배라 할 수 있는 선수.
피지컬이 정말 빼어난 선수였는데, 무려 디디에 드록바를 상대로 우세를 점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경합능력 만으로도 어지간한 공격수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일텐데 그 체격에 발까지 빨랐다. 루시우와의 속도 대결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건 세계 최정상급 스프린터들뿐이었다. 한창 때 100m를 10초대 중반에 끊었다는 티에리 앙리가 루시우와의 속도 대결에서 간신히 승기를 잡았을 정도이다. 그리고 브라질 선수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발재간도 괜찮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히 몸싸움에 능한 센터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능적인 태클 능력과 더불어 상술했듯 빌드업 능력까지 갖추고 있으며 뛰어난 상황 판단 능력까지 갖춰서 필요할 때는 영리한 파울로 끊어 내기도 했다.
다만 이 공격 가담은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아무리 월드클래스라도 사람 몸은 하나이니 당연히 그 뒤에 빈공간이 생기기 마련, 이를 메워 줄 파트너가 반드시 필요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는 주력과 수비력을 모두 갖춘 영혼의 파트너 후앙에메르송, 에드미우송, 제 호베르투, 지우베르투 시우바 같은 월드클래스 중앙 미드필더들이 2000~2010년까지 줄 서서 대기하고 있어서 문제가 없었고 인테르 시절에도 마찬가지로 강인한 피지컬을 통한 뛰어난 대인 마크와 공중볼 경합 능력을 가진 왈테르 사무엘하비에르 사네티, 티아고 모타, 데얀 스탄코비치, 에스테반 캄비아소 같은 월드클래스 중앙 미드필더들이 존재하였지만,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토르스텐 프링스의 적응 실패 등으로 중원에 공백이 생겨 버린 데다 발 느린 파트너 다니엘 판 바위턴, 마르틴 데미첼리스 등이 루시우의 오버래핑을 뒷받침해 주지 못해 뒷공간을 내주는 약점이 생겨 빠른 발을 가진 침투 성향의 공격수, 또는 오프사이드 트랩을 교묘하게 부숴 버리는 공격수에게 취약한 면모를 보였다. 대표적인 예가 필리포 인자기.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 FIFA FIFPro 월드 XI: 2010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토너먼트의 팀: 2009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페어플레이상: 2009
  •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2000-01, 2001-02, 2002-03, 2003-04, 2004-05, 2005-06
  • VDV[3] 올해의 팀: 2008-09
  • ESM 올해의 팀: 2001-02, 2005-06, 2009-10
  • 인터 밀란 올해의 선수: 2012
  • 볼라 지 프라타: 2000
[1] 레바뮌, 레바뮌하는 2010년대에는 이해가 안가겠지만 마가트부터 클린스만까지 이어지는 2000년대 중후반 바이에른 뮌헨은 2010년대의 그 강팀이 아니었다. 애초에 당시의 분데스리가가 리그앙보다도 못한 5위 리그였던 데다가, 리그에선 잘 나가는 편이었지만 슈투트가르트나 볼프스부르크에게 우승을 내주기도 했고 07년엔 아예 유로파로 밀려났었다. 챔스는 8강을 넘어가본 적이 없었고 분노의 영입으로 당연히 우승할 것 처럼 여겼던 유로파에선 제니트에게 깨져서 떨어지는 전형적인 안방 호랑이였다. 축구 스타일도 극도로 단순해서 측면에 크랙+피지컬 좋은 중앙 공격수+뜬금 중거리포가 끝이었다. 지금의 위상으로 끌어올린건 반 할과 하인케스 두 감독의 업적이다.[2] 사실 월드컵을 날로 먹었다는 카카조차도 Torneio Rio-São Paulo(상 파울루 컵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를 한번 우승한 적이 있다.[3] 독일프로축구선수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