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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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에메르송 페레이라 다호자
(Émerson Ferreira da Rosa)
생년월일
1976년 4월 4일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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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브라질 히우그란지두술 주 펠로타스
포지션
수비형 미드필더
신체조건
179cm | 74kg
유소년팀
그레미우 (1992~1993)
보타포구 FR (1993~1994)
소속팀
그레미우 (1994~1997)
바이어 04 레버쿠젠 (1997~2000)
AS 로마 (2000~2004)
유벤투스 FC (2004~2006)
레알 마드리드 CF (2006~2007)
AC 밀란 (2007~2009)
산투스 FC (2009)
국가대표
73경기 6골


1. 개요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활약한 선수 가운데 페르난도 레돈도, 로이 킨, 에드가 다비즈, 클로드 마켈렐레, 미하엘 발락, 파트리크 비에라 등과 함께 전술 이해도가 뛰어난 선수로 꼽힌다.
대표팀에서는 제 호베르투, 주니뉴 페르남부카누, 지우베르투 시우바, 에드미우손 등 브라질의 쟁쟁한 중앙 미드필더들이 에메르손의 파트너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다만, 당대 동포지션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이었던 것은 분명한데,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비슷한 위상이나 실력을 지녔던 비에라마케렐레에 비해 유독 언급이 잘 되질 않는 편이다.[1] 이는 에메르손이 레알 이적 후에 급격한 기량 저하가 찾아오고 저 둘에 비해 상대적으로 롱런하지 못하면서 말년을 이렇다 할 임팩트없이 보내고 비교적 일찍 유럽을 떠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2010년대 이후 세리에와 분데스에서의 활약은 아무래도 라 리가나 EPL에서의 활약보다 관심도가 적다. 또, 당대 브라질의 주목은 화려한 공격진 아니면 카푸, 호베르투 카를루스와 같은 풀백들이었고 중앙 수비수나 중앙 미드필더들은 공격적인 능력이 매우 뛰어났던 루시우 정도를 제외하면 아무래도 지단을 필두로 한 프랑스 국대와는 달리 주목도가 적었다.[2] 이런 이유들로 인해, 최근에 해외 축구를 접한 이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일 수 있으나 엄청난 선수였던 것은 분명하다.

2. 우승


  • AS 로마 (2000 ~ 2004)
    • 세리 A : 2000-01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 2001

  • 레알 마드리드 CF (2006 ~ 2007)
    • 라 리가 : 2006-07

3. 커리어



3.1. 그레미우


그레미우 유스 출신으로 94년 17세의 나이로 데뷔하여 3년동안 70경기에 출장하여 10골을 기록하였고,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코파 리베르타도레스[3], 코파 도 브라질(브라질 컵)등 3년간 총 4개 대회 우승을 견인하며 유럽 클럽들의 주목을 끌었고, 97-98 시즌 여름 이적시장을 통해 분데스리가레버쿠젠으로 이적함으로 유럽으로 진출하였다.

3.2.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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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즌 주전으로 연착륙에 성공한 에메르손은 1998 프랑스 월드컵브라질 대표팀으로 선출되는 등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이듬해인 1999년은 에메르손 커리어에 있어서 손에 꼽는 한해이자 진정한 월드 클래스 반열로 올라서게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국가대표 팀에서는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한다. 그리고 99-00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5골 10어시시트를 기록하면서 까다롭기로 유명한 Kicker지의 선수 평가 부분(키커 랑리스테)에서 이 시즌은 전, 후반기 모두 '월드 클래스' 등급을 받는다. 게다가 분데스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로 꼽히는 영광을 얻게 된다. 당대 최강의 리그였던 이탈리아 세리에 AAS 로마의 러브콜을 받고 당시 분데스리가 최고 이적료인 1,800만 유로를 기록하며 이적한다.

3.3. AS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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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 시즌 팀에 합류하자 마자 에메르손은 시즌 시작전 부상으로 팬들의 우려를 샀다. 크리스티아노 자네티, 다미아노 토마시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리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지만 부상 복귀 후 후반기 맹활약을 선보이며 우려를 깔끔히 씻어냈고 이내 팀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며, 18년만의 리그 우승을 이끌게 된다. 4년간 활약하며 로마의 레전드 수비수 아우다이르[4]에 비견되면서까지 로마 팬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03-04 시즌 아쉽게 2위를 차지한 이후 유벤투스의 러브콜을 받고 파비오 카펠로가 유벤투스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로마에서의 행복이 깨지게 된다.

3.4. 유벤투스 FC


03-04 시즌부터 이미 AS 로마는 칠공주로 대표되던 90년대 후반 막대한 자금을 사용했고 그 빚이 고스란히 되돌아와 선수들의 급료가 연체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5] 에메르손은 시즌 내내 인터뷰를 통해 로마에 남는다며 팬들을 안심시켰지만 1년도 남지않은 재계약 제의를 계속 거부하면서 로마팬들의 불안함은 계속 커져갔다. 결국 보다 못한 로마는 왈테르 사무엘을 적당한 가격에 넘겨줬던 레알 마드리드 CF에 에메르손을 제의했고, 레알 마드리드마케렐레의 이적으로 붕괴된 중원을 땜빵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수미였던 에메르손에 관심을 가지고 오퍼를 하였다. 하지만 왠걸? 에메르손은 유벤투스가 아니면 이적하지 않는다며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고[6] 유벤투스에 가지 않으면 브라질로 가고 만다는 인터뷰로 로마 팬들의 분노를 이끌어내고, 여름 전지 훈련 참가 또한 아프다는 핑계로 참여하지 않자 고소하겠다며 분위기는 점점 살벌해져 갔다. 결국 재정 문제 등으로 에메르손을 잡을 처지가 되지 못했던 로마는 에메르손을 자유 이적으로 유벤투스로 넘겨주고 에메르손은 로마 서포터들에게 유다라 불리게 된다.[7]
그렇게 험악하게 유벤투스로 이적하고, 파비오 카펠로감독과 로마 시절 한솥밥을 먹던 조나단 제비나와 다시 재회하게 된다. 유벤투스에서 주전 미드필더로 뛰었고 유벤투스는 AC 밀란을 밀어내고 2시즌간 세리에 A를 지배한다. 05-06 시즌에는 파트리크 비에이라가 유벤투스에 입단하면서 강력한 중원 조합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05-06 챔피언스리그 8강, 비에이라의 친정 팀인 아스날 전에서 풋내기 세스크 파브레가스의 맹활약 앞에 무너지면서 균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시즌 후 칼치오폴리가 터지면서 또다시 카펠로 감독을 따라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다.

3.5. 레알 마드리드 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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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갈락티코 시절 마케렐레첼시 이적과, 수비진의 붕괴등으로 레알의 선수단 밸런스는 말이 아니였다. 05-06 시즌 팀의 챔스, 리그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 플렌티노 페레즈의 뒤를 이어 비센테 칼데론이 부임하고 칼치오폴리로 인해 유벤투스를 떠날 것이 확실시 되었던 파비오 카펠로 감독을 부임시킨다.
마하마두 디아라, 파비오 칸나바로, 뤼트 판니스텔로이, 등을 영입하며 체질개선에 나선 레알은 초반기 부진을 선보였고 에메르손 또한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한다. 후반기 베컴의 재등용과 전술이 맞물리면서 승점 차이가 꽤나 많이 났던 바르샤를 제치고 역전 우승을 일궈내지만 결국 카펠로는 언론과 선수단, 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질되고, 에메르손 또한 레알에 입상한지 불과 1시즌만에 AC 밀란으로 쫒겨나듯이 이적한다.

3.6. AC 밀란, 산투스 FC,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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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노쇠화가 가속화되던 밀란에 에메르손이 합류하자 팬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이에 반증하듯 활약은 커녕 부상등으로 서브 선수로 활약하다 자유 계약으로 산투스로 이적후 은퇴한다. 많이 나오진 못했어도 나올 때 만큼은 나름대로 괜찮은 모습이긴 했으나 피를로, 암브로시니와 함께 조합되며 장점의 시너지는 고사하고 단점 의 시너지가 발휘되었다.

4. 브라질 국가대표팀


카를로스 둥가의 재림이라 불리며 98 프랑스 월드컵에도 참여했지만 당시로써는 까마득한 대표팀 선배인 둥가에게 밀려 주전으로 뛰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1년 후 1999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주전으로 참여하여 맹활약 끝에 히바우두와 함께 코파 아메리카 2연패를 이끌었다. 1999년 한해 동안 에메르손은 총 17경기의 A매치를 뛰며 소속팀 레버쿠젠에서의 활약과 더불어 최고의 한해를 보낸다.
2002 월드컵 예선에서는 극도의 부진속에 팀의 주장으로써 팀을 추스려 가까스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만 최종 엔트리 선발 후 훈련 도중 골키퍼를 보다가 어깨를 다치는 어이없는 부상으로 결국 낙마하고 만다.
2006 월드컵에서는 브라질 대표팀이 이른바 '''매직 스퀘어'''로 불리던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카카, 아드리아누 등을 앞세워 대회 최고의 우승 후보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당시 브라질 내에서는 이번 대표팀은 1970년 드림팀 이후 최강의 멤버라는 평도 많았다. 그러나 에메르손은 파헤이라 감독의 시대 착오적인 4-2-4 전술의 중앙에 포진하여 제 호베르투와 함께 분전한다. 결국 본인은 출전하지 못한 8강 프랑스 전에서 티에리 앙리에게 한대 얻어맞아 1:0 패배로 탈락한다. 이 경기에서 브라질은 지네딘 지단의 원맨쇼와 파트리크 비에라의 맹활약 앞에 중원이 완전히 싸먹혔는데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만약에 에메르손이 출전했다면 적어도 경기 내용은 달라졌을 거라 보는 시각도 많다. 이 대회 후 에메르손은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한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월드컵 운 참 지지리도 없다.
[1] 사실 조목조목 짚어보면 비에이라는 유벤투스 시절부터 하락세였고, 인테르에서는 잔부상과 폼저하로 주전경쟁에서 아예 도태되었지만 2006 독일 월드컵에서 대회 베스트 XI에 선정될 정도로 맹활약을 펼쳤고, 마케렐레는 비록 첼시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2007-08 시즌에서 리그 출장은 19경기 밖에 못출전 했지만 챔스에서는 조별리그부터 결승전까지 모든 경기에 출전하는 노익장을 보여주었고, PSG 이적 후 나름 활약하고 은퇴하였다.[2] 당대의 브라질은 풀백의 공격적 오버래핑과 1-2선 선수들의 자유로운 스위칭 플레이를 주무기로 삼았다. 현대에는 당연시되는 공격진의 수비가담에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기에 중앙미드필더 라인은 에너자이저 유형의 선수들로 채워넣는 포메이션을 가동하였다.[3] 남미 대륙 클럽 대항전[4] 로마의 유일한 영구결번에 지명된 6번 유니폼의 주인공이다. 참고로 케빈 스트로트만이 6번을 달게됨으로써 로마는 영구결번을 해지했다.[5] 비단 로마만의 상황이 아닌 막대한 자금줄이 있던 AC 밀란, 인터 밀란, 유벤투스등의 거대 구단을 제외하면 상위권 팀들이 파산하거나 선수들을 전부 팔아치웠다. 라치오는 주축 선수였던 파벨 네드베드, 알레산드로 네스타, 에르난 크레스포등을 전부 팔아가며 빚을 메꾸었지만 턱없이 부족했고, 피오렌티나는 결국 파산하여 강등후 팀이 재창단 되는 굴곡까지 겪은데다, 파르마는 스폰서의 파산으로 릴리앙 튀랑, 지안루이지 부폰, 파비오 칸나바로등의 선수들을 전부 팔아치운뒤 그저그런 하위권 팀으로 추락하고 만다. 그나마 건실해 보였던 양 밀란은 00년 후반 재정 문제가 생겨서 최근의 AC 밀란은 돈이 없어 선수 영입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며, 인테르는 결국 구단주 마시모 모라티가 자회사 사라스의 불황과 부채로 인해 2013년에 구단을 매각하였다.[6] 당시 로마의 구단주 프랑코 센시는 유벤투스의 루치아노 모지와 견원지간이라 불릴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센시는 당시 모지의 승부조작설을 제시하기도 했으며 니콜라 레그로탈리에,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등 선수 영입에서 계속 유벤투스에게 패배한 상황에서 팀 감독이던 카펠로까지 데려가자 프랑코 센시의 분노가 극에 달해 언론에 대놓고 로마를 무너트리려 한다고까지 할 정도.[7] 그의 로마 시절 태업 등 서술한 행동도 있지만 결정타를 가한것은 프란체스코 토티를 비난하는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