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스텐 프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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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미하엘 발락과 함께 파트너를 이루어 2006 FIFA 월드컵 독일 이후 독일 축구의 부활을 이끌었으며 SV 베르더 브레멘의 중흥기를 이끈 인물. 주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였으나 데뷔 시기엔 스트라이커로 뛰었다. 그리고 국가대표에서는 처음엔 좌우 풀백이 주요 포지션이었으나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선 발락과 함께 중앙 미드필더 파트너로 활약했다.
2000년대 중반 SV 베르더 브레멘의 중흥기를 이끈 주역으로, 챔피언스 리그에서 소속팀 베르더 브레멘이 유벤투스, 첼시, 바르셀로나 등의 강팀을 상대로 대등한 경기력을 보일 수 있게끔 만들어준 선수였다. 또한 세대 교체 및 전술적 전환기인 2000년대 초중반의 독일 대표팀에서도 미하엘 발락의 파트너로서 교과서적 4-4-2의 중앙 미드필더 자리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국내에서의 인지도는 낮은 편인데, 암흑기였던 2000년대 독일 국가대표팀의 선수인데다 월드컵 등 메이저 대회에선 당시 독일의 에이스인 발락의 유명세에 가려진 경향이 있어서다. 그러나 골수 분데스리가 팬들이나 올드팬들에게는 높이 평가 받는 선수.
2. 플레이 스타일
중앙 미드필더가 주 포지션이지만 윙으로도 많이 뛴 경험이 있어서 준수한 기동력을 보유한 선수이고, 공수 전반에 걸쳐 왕성한 활동량, 그리고 스피드를 바탕으로 공격 전개에도 자주 가담하며 수비 상황 시에 최대한 빨리 뛰어내려와 커팅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더욱이 공격수로 뛴 전적도 있어 공격 상황 시의 패스 센스나 정확도도 준수하고, 장거리 슈팅 능력도 있었다. 말 그대로 박스 투 박스형 중앙 미드필더 타입.
프링스가 활약하던 시기 이전의 독일 축구계는 미드필더의 역할과 지역 분담이 꽤 엄격했는데, 이 때문에 분데스리가에선 거의 찾기 힘들었던 타입의 박스 투 박스형 선수였다는게 특기할만한 점이다.
3.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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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헨에서 주력 스트라이커로 활약하였고, 브레멘 이적 후에도 4년 정도 스트라이커로 활약을 하다 이 시기 아일톤, 피사로라는 막강 투톱을 브레멘이 가동하면서 주 포지션을 미드필더로 변경한다.
3.1.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002년 도르트문트 이적 후 제바스티안 켈과 강력한 중원 라인을 보였고, ''크리스토프 메첼더-로베르트 코바치-제바스티안 켈-토마시 로시츠키-얀 콜레르''' 등 남부럽지 않는 스쿼드를 구축했음에도 불구 2002-03시즌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실패하면서 도르트문트는 설상가상으로 재정악화까지 겹치면서 막장테크를 탔고,[1]
3.2. FC 바이에른 뮌헨
2004년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을 한다. 그러나 뮌헨에선 펠릭스 마가트 감독과 불화로 인해 단 1시즌만 뛰고 친정팀인 베르더 브레멘으로 이적했다. 불화의 이유중 하나로 당시 프링스의 주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였으나. 마가트 감독은 공석이 된 뮌헨의 왼쪽 풀백자리에 프링스를 배치했고 여기에 불만을 나타내면서 그대로 뮌헨을 떠나게 된다.[2][3]
3.3. SV 베르더 브레멘
2005년 브레멘으로 돌아온 프링스는 어떻게 보면 클럽 경력의 커리어하이를 찍는다. 2005-06시즌 이른바 클로제-클라스니치의 K-K라인에 프링스-미쿠-바우만-보로프스키의 중원, 나우두-파렌호스트-오보모옐라-슐츠로 이어진 포백은 분데스리가 최고의 전력을 자랑했고, 유벤투스와의 챔피언스 리그 16강전에서 그 네드베드-비에이라-에메르손-카모라네시의 중원과 대등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2000년대 브레멘 전성기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이후 2010-11시즌까지 활약을 하다 서서히 나이가 들면서 기량도 쇠퇴하였고, 2011년 여름 브레멘을 떠나 미국 MLS의 토론토 FC로 이적하게 된다. 토론토에서 2시즌 동안 꾸준하게 출전하다가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인해 2013년 2월 현역 은퇴를 하게 된다.
4.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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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부터 국가대표로 발탁된 프링스는 이 시기 독일 대표팀의 좌우를 담당했던 마르코 레머와 외르크 뵈메가 영 좋지 않은 활약을 보이면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불가피하게 오른쪽 윙백을 맡게 된다. 꾸준하게 주전으로 나왔으며, 4강전 한국전에도 주전 윙백으로 출장했다.[4] 이 후에도 프링스는 오랫동안 윙백으로 뛰었는데. 독일은 불세출 풀백인 안드레아스 브레메 이후 대체자를 찾지 못했고 미카엘 타르나트와 마르쿠스 바벨은 각각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와 UEFA 유로 2000에서 재앙과도 같은 경기력을 보인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프링스는 3-4-1-2를 메인으로 사용한 루디 푈러의 전술상 라이트 윙백에서도 제 역할을 해내며 독일의 준우승을 이끌었고, 이 후 유로 2004까지 대표팀에서 거의 라이트백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독일에게 재앙과도 같은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당시 루디 풸러 감독은 4-4-2를 어느정도 간헐적으로 사용했는데 이 때의 프링스의 위치는 중앙이 아닌 윙이였다. 프링스는 윙에서도 어느정도 제 역할을 해주었으나 문제는 중앙에 디트마어 하만을 배치한 것이다.[5] 결국 독일은 유로 2004에서 지난 대회의 데자뷰를 찍으며 광탈을 했고 클린스만 감독이 부임하면서 마침내 4-4-2의 중원의 발락의 파트너로 프링스를 배치하면서 본격적인 프링스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한다.
2006년 독일 월드컵 개막전인 코스타리카전에서 대포알 중거리 슛을 골로 직렬시키며 독일의 4-2 완승을 이끌었다. 활약의 백미는 8강 아르헨티나전인데 당시 아르헨티나는 최고의 폼을 자랑하는 후안 로만 리켈메 - 막시 로드리게스 -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 에스테반 캄비아소의 중원을 필두로 4-3-1-2의 다이아몬드 전술로 안구 정화급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었는데 독일은 시종일관 아르헨티나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고 이에 발락과 프링스의 활약으로 실점만 모면하고 있었으나 결국 세트피스에서 로베르토 아얄라에 의해 실점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이후 클로제가 헤딩을 시도하다 무릎으로 로베르토 아본단시에리 아르헨티나 골키퍼의 가슴을 가격했고 아본단시에리는 이 사고로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당한 채 들 것에 실려갔다. 그제서야 독일은 겨우 득점을 해서 경기를 승부차기까지 끌고 갔다. 승부차기 도중에도 프링스는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차례가 되면 야유를 퍼부으며 아르헨티나의 슈팅을 노골적으로 훼방놨으며 그로 인해 에스테반 캄비아소가 실축하고 말았다. 결국 독일이 승부차기에서 아르헨티나를 꺾고 4강에 진출하였다.
이 경기 직후 '''프링스는 이에 그치지 않고 아무 이유 없이 아르헨티나의 서브 스트라이커인 훌리오 크루스의 얼굴을 주먹으로 강타'''했고 이로 인해 중징계를 받아 4강 이탈리아전을 뛰지 못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프링스에게 장대한 흑역사를 남겼으며 프링스의 돌출행동과 맞물려 올리버 비어호프의 개소리[6] 로 인해 양팀은 주먹을 교환하는 폭력사태가 발생했고 막시 로드리게스는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와 현피를 떠서 이겼다.(...)
4강 이탈리아전에서 독일이 패배했을 때 결장한 프링스의 존재가 너무 컸으며 뛰어난 기동성과 넒은 활동량을 가진 프링스가 정상적으로 출전했다면 그 막강한 이탈리아의 미들진 또한 충분히 고전할 수 있었다. 이런 프링스를 대신해 나온 세바스티안 켈의 경우 활동량에 한계를 보여주며 피를로를 마크하지 못했고 결국 체력전 한계를 노출하며 패배하게 된다.
이 후 UEFA 유로 2008에도 선발되어 조별리그 전경기 선발 출전했지만 결승전을 제외한 토너먼트에서는 주로 교체에만 머물렀고, 이후 독일의 세대 교체와 더불어 사미 케디라와 윙어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한 슈바인슈타이거가 주전으로 중용되면서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프링스는 2009년 2월 11일 노르웨이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국가대표에 소집되지 못하면서 2010 남아공 월드컵에도 선발되지 못했다.
5. 지도자 생활
2013년에 베르더 브레멘 2군의 수석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14년부터 2016년 9월까지는 같은 팀의 1군 수석코치직을 수행했다.
2016년 12월 시즌 도중 다름슈타트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강등이 거의 확정적인 상황에서 3연승을 기록하며 지도력을 서서히 인정받았지만 팀은 전반기의 부진으로 인해 최하위로 강등되었다.
17/18 시즌 2. 분데스리가에서도 개막전에서 승리하고 이후에도 8라운드까지 4승 3무 1패를 기록하면서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지만, 이후 9경기에서 3무 6패로 부진하면서 강등권인 16위까지 떨어졌다. 결국 17라운드 종료 이후 경질되었다.
2020년 3. 리가의 SV 메펜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4라운드가 지난 현재 1무 3패로 좋지 않은 시작을 보이는중.
6. 기록
6.1. 리그 기록
6.2. 대회 우승
- SV 베르더 브레멘 (1997/08 – 2001/02, 2005/06 - 2010/2011)
- FC 바이에른 뮌헨 (2004/05)
- 독일 분데스리가 (1) : 2004/05
- DFB-포칼 (1) : 2004/05
- DFB-리가포칼 (1) : 2004
- 토론토 FC (2011 - 2012)
- 캐나다 챔피언십 (1) : 2012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1999 - 2009)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 준우승
- 2006 FIFA 월드컵 독일 : 3위
- UEFA 유로 2008 : 준우승
[1] 로베르트 코바치를 당시 2800만 유로라는 거액을 들여 영입했는데 하필 이 때 챔스 플레이오프에 클럽 브뤼헤에 패해 UEFA컵으로 떨어졌는데 거기서도 광탈당하게 된다.[2] 당시 신예인 람은 슈투트가르트에 임대되면서 본격적인 전성기를 펼치는데 뮌헨이 1년도 아니고 무려 2년씩이나 임대를 보냈으니 왼쪽은 그야말로 흉년 그 자체[3] 원래 뮌헨의 래프트백 자리는 비셴테 리사라수였다. 그러나 너무 늙었고 그 자리에 제 호베르투와 사무엘 쿠포르를 임시 방편에 두지만 그러자니 중원의 무게감이 영 좋지 않아져서 결국 프링스를 그 자리에 배치 시킨 것이다.[4] 후반전 초반에 차두리와 올리버 칸의 1대1 상황이 될뻔한걸 멋진 태클로 막아냈다.[5] 하만의 경우 중장거리 킥능력이 장점이라 미드필더 후방에서 공을 이어받아 전방으로 공격을 전개시키는 역할이 어울린다. 레지스타라고 불리기엔 테크니션이 부족했으나 그의 장거리 킥 능력은 충분히 유럽무대에서 명성을 날렸고 그 포지션이 어울렸는데... 푈러의 독일 대표팀은 이런 선수를 그저 박스 투 박스로만 주야장천 활용한 것.[6] "아르헨티나는 멍청해서 독일어를 못알아들으니까 마음껏 욕해도 된다"는 발언을 한 건데 독일어 구사가 가능한 가브리엘 에인세가 이 말을 알아들어버렸다. 물론 이 말은 기레기들에 의해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한 것으로 와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