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시커 사건

 


李師科案 / Li Shike Inc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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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사건
4. 왕잉셴 사건(王迎先事件)
5. 리시커 체포 및 처형
6. 후폭풍


1. 개요


1982년 발생했던 중화민국(대만)의 범죄 사건. 은행강도총기 살인이 겹친 사건이다.

2.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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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커 체포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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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커 동상.
리시커(1927년 3월 5일 ~ 1982년 5월 26일)는 산동성 창러현 출신의 외성인으로 초등학교만 졸업한 상태였다. 중일전쟁 당시 국민혁명군에 참가하였다가 국공내전홍콩하이난 섬을 거쳐서 1954년 대만으로 들어왔다. 대만으로 들어온 이후 자동차 수리업에 종사하다 1959년 병으로 은퇴하고 택시 기사가 되었다. 가족과 이웃들에 친절한 사람이라고 기억되었다. 문제는 리시커의 택시 기사 영업이 신통치 않아[1] 리시커가 은행을 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리시커는 택시 기사로 열심히 일해도 은행 빚만 늘어나는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범죄를 계획했다.

3. 사건


1979년 리시커는 신분을 철저히 감춘 채 실탄 1발이 들어있는 권총삼합회를 통해 입수하였다. 그리고 1980년 1월 타이베이시에 있는 대만 주재 교황청 대사관에 쳐들어가 경비원을 살해하고 실탄 5발이 들어 있는 리볼버를 훔쳤다. 그리고 리시커는 재빨리 사라졌다. 대만 정부에서는 해당 사건의 범인을 찾으려 했으나 2년 넘게 범인을 찾지 못했다. 리시커는 이 틈에 철저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일상으로 복귀했다.
1982년 4월 14일 오후 3시 20분(한국시간 16:20), 리시커는 변장한 채로 대만토지은행 구팅지점[2]에 쳐들어가서 은행 부지점장을 총으로 살해하고 420만 신 대만 달러의 돈을 강탈했다. 리시커는 이 때 '''"대만의 모든 돈은 국가에 속한다! 은행은 국민한테 빚을 지울 권리가 없다!"'''고 소리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는 대만 계엄령이 진행중인 시대로, 치안을 대만 경찰과 육군 헌병대가 동시에 관리했다. 강도 신고를 받고 대만 경찰중화민국군 육군 헌병대가 사건 발생 5분만에 현장에 도착했으나 이미 리시커는 도망친 후였다. 대신 경찰과 헌병대는 한 택시를 리시커의 택시로 특정하고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4. 왕잉셴 사건(王迎先事件)


사건 23일 만인 1982년 5월 6일, 택시 기사 왕잉셴(王迎先)이 리시커와 인상착의가 비슷하고 왕잉셴의 택시가 리시커의 택시와 같은 것으로 판정되어 체포되었다. 대만 경찰은 왕잉셴이 대만토지은행 강도사건의 범인이 아니냐며 추궁했고 4명의 경찰이 왕잉셴을 고문했다. '''문제는 왕잉셴이 진범이 아니었다는 것'''. 체포 하루만인 5월 7일 새벽 3시, 왕잉셴은 경찰서를 탈출하여 슈랑대교로 달려갔다. 왕잉셴은 슈랑대교에서 경찰들의 고문을 비난하며 투신자살했다.

5. 리시커 체포 및 처형


리시커는 체포될 때까지 420만 대만 달러 중 실질적으로 20만 달러만 사용하였다. 5만 달러는 전기밥솥을 사는 데 사용했고, 15만 달러는 텔레비전을 사는 데에 사용하였다. 나머지 400만 달러는 싼충구에 있는 친척의 계좌로 입금했는데, 이 친척이 "리시커가 이렇게 돈이 많을 리가 없는데?" 하면서 5월 6일 밤에 경찰에 해당 돈이 의심된다며 '''대만군 헌병한테''' 제보한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1982년 5월 7일 오후 6시, 중화민국군 육군 헌병대가 대만 경찰과의 협조로 진범인 리시커의 집에 들이닥쳐 리시커를 체포하였다. 리시커는 쉽게 범행을 인정했고, 1980년의 교황청 대사관 테러 사건도 본인이 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5월 24일 대만 계엄령에 따른 군사재판에서 리시커는 사형을 선고받고, 이틀 후인 5월 26일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6. 후폭풍


이 사건으로 대만은행에서는 마스크헬멧 등 '''신분을 감출 수 있는 모든 것'''을 착용할 수 없게 바뀌었다. 또한 은행 지점에 들어갈 때 지나치게 큰 가방의 경우 은행원이나 청원경찰이 의무적으로 내용물을 검사하도록 바뀌었다.
또한 왕잉셴 사건에서 벌어진 고문을 막기 위해 대만형사소송법 제27조가 개정되었다. 대만 수사기관[3]에서 피의자에 대해 고문을 할 경우 고문으로 얻어진 증거 및 증언, 자백 등은 법원에서 효력이 부인되며, 피고인의 증언만 있으면 고문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대만에서는 리시커 사건 이후 고문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구속 수사 자체가''' 매우 드물어졌다. 구속수사 한 것을 피고인이 법정에서 "난 그거 고문으로 느꼈다!"고만 말하면 고문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살인사건의 진범 역시 재판 이전에는 쉽사리 구속시키지 않는다.

[1] 대만한국보다도 택시가 과포화된 상태이다. 그래서 대만 택시 기사들의 생활고가 이미 1960년대부터 심각했다.[2] 대만토지은행2020년 지금도 대만의 대형 은행 중 한 곳이나, 구팅지점은 리시커 사건으로 인해 1984년 폐쇄되었다. 2020년 현재 리시커 사건이 벌어졌던 토지은행 구팅지점 자리는 재개발로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3] 대만 경찰, 대만 검찰국, 중화민국군 헌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