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역사
1. 고대
석기 시대 몰타에 거주하던 선주민들은 화전 농업에 의한 섬 환경 파괴와 지력 고갈로 전멸[1] 하고, 한동안 무인도로 유지되다 기원전 4000년경부터 다시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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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진지 6천년 이상인 거대한 거석 구조물 유적들을 많이 지었는데, 그 규모도 엄청난데다 나비 모양 등의 복잡한 구조의 석실이 있는 완전한 석조 건축물이다. 거석 구조물을 건설한 주민들도 기원전 2350년경 역시 화전 농업에 의한 지력 고갈로 몰락했다.
기원전 7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의 식민지가 된 몰타는 페니키아 본토의 도시들이 약화되자 그 후신인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았다.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섬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몰타는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를 잇는 무역 기지가 되었으며, 이 와중에 그리스 문화의 많은 요소가 도입되기도 했으나, 섬 주민은 페니키아계였다. 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몇백년에 걸쳐 지중해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기독교의 사도 바울로가 로마로 압송될 때 배가 풍랑을 만나서 몇십일에 걸쳐 표류하다 기적적으로 도착한 멜리테(Μελίτη / Melítē)가 바로 오늘날의 몰타에 위치한 므디나(Mdina)이다.
2. 중세
5세기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뒤, 6세기 동로마 제국이 다시 섬을 점령했으나 이후 사라센 해적들의 공격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서기 870년에는 아랍 무슬림 아글라브 왕조에 점령당했다. 이후 많은 아랍인들이 해적 기지 삼아 섬에 정착했으나 1091년 시칠리아의 노르만인들이 몰타를 점령하고, 섬 주민들을 다시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그러나 고대 페니키아어와 아람어를 사용해오던 몰타 주민들은 기독교 개종 이후에도 스페인/포르투갈의 레콩키스타의 경우와 다르게 일상 생활에서 한동안 계속 아랍어를 사용했다. 페니키아어, 아람어와 마찬가지로 아랍어는 아프리카아시아어족에 속했고, 아랍어가 별 이질감 없이 중세 몰타인에 문화에 융화되었던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심지어 종교마저 바뀌어도 언어의 변화가 늦어진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몰타어 문서 참조
3. 근세
1522년에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1520~1566)가 로도스 섬을 정복하자 그 섬에 자리잡고 있던 구호기사단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야 했다. 이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왕인 카를 5세(카를로스 1세, 1516~1556)가 1530년에 기사단에게 매년 매(hawk) 1마리를 공물로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몰타를 사실상 무상 증여했다. 이 때부터 몰타는 성 요한 기사단의 영토가 되었다.[2]
몰타 기사단은 이 곳을 거점으로 과거 로도스 시절을 잊지 않고 사라센 선박과 해적선 모두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이들이 자리잡은 몰타 섬은 북아프리카의 항만과 항로들을 기습하기 최적화된 곳이라서 오스만 제국을 곤란하게 했다. 결국 술레이만 1세는 1565년 몰타를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2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지만 세 달에 걸친[3] 공방전 끝에 함락에 실패한다. 당시 방어 병력은 기사단원 500~600 명에 현지 징집병과 전투 직전에 고용한 용병 등을 포함한 6~8천 명 정도였다.[4] 이 승리로 기사단은 명성이 유럽에 퍼져, 몰타의 지명도도 올라갔다.[5] 몰타 공방전 이후 기사단에 입단하는 지망자도 늘어나고, 스페인의 지원을 받는 교황령을 위시로 한 가톨릭 국가들의 기금 원조도 늘어나 기사단은 사라센 해적과 상선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 몰타 기사단의 활동은 17~18세기에도 계속되었다.
4. 근대
19세기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원정가는 과정에서 기사단의 항복[6] 을 받아내서 점령 직후 기사단은 몰타에서 퇴거한다. 그러나 시칠리아 왕국의 요청으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몰타를 점령했다. 이후 빈 회의(1814~1815)의 결과 몰타의 영국 영유가 승인되어 몰타는 영국 영토가 되었다. 다시 쫒겨난 기사단은 교황령이 받아주어 로마로 망명해, 이 때부터는 무력 사용을 포기하고 본업인 구호 사업에 충실하게 되었다.[7]
5. 현대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과 이탈리아가 북아프리카를 원정하면서 지원하기 위한 보급 루트도 중요해졌는데, 몰타의 위치가 세로로는 시칠리아-트리폴리의 독일군, 이탈리아군의 보급선 한가운데였고, 또 가로로는 지브롤터-알렉산드리아의 영국의 보급선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몰타를 점령하는 쪽이 자신의 보급로를 확보하고 반대편의 보급로를 끊어버릴 수 있는 엄청나게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이로 인해 추축군은 '허큘리스 작전'으로 엄청난 공군력을 쏟아부어 몰타 전역을 연일 폭격했다. 크지도 않은 섬을 하도 폭격을 해대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폭격당한 곳'라는 소리를 듣기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영국은 본토를 제외하면 최초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주둔시키는 등 계속해서 몰타의 전력을 증강했으며 그 덕분에 독일은 몰타를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물론 큰 피해를 감수하고 처리할 방법도 있긴 했지만 그 주축이 될 공수부대가 크레타 섬에서 엄청난 피해를 내면서 성공을 거뒀기에 효용성이 없다고 판단해 방치했다.
결국 이로 인해서 이탈리아군의 보급선이 완전히 끊겨버려 북아프리카에 주둔한 이탈리아군과 독일군 모두 전멸하는 결과가 만들어졌다.
1964년 몰타국(영어: State of Malta, 몰타어: Stat ta' Malta)이라는 이름으로 영연방 왕국에서 독립하였다. 몰타국은 영국 국왕 엘리자베스 2세를 국가원수로 하는 입헌군주국이었으나, 1974년에 헌법을 개정해 공화정이 수립되었고, 국호 역시 몰타 공화국(Republic of Malta, Repubblika ta' Malta)으로 변경되었다. 1989년, 몰타에서 냉전의 종말을 확정한 몰타 회담이 열렸다. 독립 40주년을 맞은 2004년에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8]
[1] 과거 윤작과 비료가 발달하기 이전 고대 농업은 지력을 서서히 고갈시켰고, 이는 청동기 시대 수천년 동안 이어지며 비옥한 초승달 지대 사막화의 원인이 되었다.[2] 몰타의 매가 이것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3] 정확히 3개월 3주 3일동안 계속되었다. 최후의 기독교 기사단의 항전이었다는 것 때문에 현재 서구권에서는 몰타 공방전을 'Great Siege'로 칭한다.[4] 이후 스페인령 시칠리아에서 8천여 명의 지원병을 파병해주기는 했는데, 이들은 공방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도착했다. 지원 부대는 조기에 소집되었으나, 함대 손실을 우려한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가 병력 수송을 제지했다.[5] 공방전 당시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앞장서서 싸운 기사단장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는 공방전이 끝난 후 요새를 복구하고 증축하였다. 그리고 본래의 수도 므디나가 공격에 취약하다는 단점을 들어 새로운 수도를 만들 계획까지 세웠고 토목 작업의 토대가 될 주춧돌을 놓는 작업까지 직접 마친 뒤 죽었는데, 이 도시가 바로 현재 몰타의 수도 '발레타'다.[6] 기독교도와는 싸우지 않는다는 기사단의 원칙에 따라, 오스만과의 항전과는 다르게 저항하지 않고 항복했다.[7] 구호기사단은 지금도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다.[8] 2004년은 유럽연합에 새로 가입한 국가 수가 가장 많은 해기도 하다. 몰타를 포함해 무려 10개국이 이 해에 가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