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공(주)

 




'''주읍 초대 국군
노 초대 국군
문공
文公
'''

왼쪽이 주 문공, 가운데는 성왕. 오른쪽은 소공
'''시호'''
문공(文公)
'''작위'''
공작(公爵)
''''''
(姬)
''''''
(旦)
'''아버지'''
주문왕(周文王) 희창(姬)
'''가족관계'''
형: 백읍고(伯邑考), 주무왕(武王)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1. 개요
2. 생애
3. 후대의 평가
4. 대중문화에서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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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나라의 인물. 성은 희(姬), 이름은 단(旦). 그냥 "주공(周公)" 혹은 주공 단(周公 旦)[1]이라는 말로도 자주 불린다. 그러니까 주공은 제후의 벼슬 이름이다. 영지가 주(周)[2] 지역이라서 주공이라고 불렸다. 생몰연도는 알려져있지 않으나 문왕의 넷째 아들이다. 첫째 형이 백읍고, 둘째 형이 무왕 희발. 시호는 문공(文公).
중국 고대사에서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로, 다른 성인인 탕왕, 문왕, 무왕은 자기가 신하의 입장에서 군주를 쫓아냈기에 역적이라고 비판받는 경우도 있지만,[3] 주공은 그런 거 없다. 다만, 이런 사건을 군신 관계로 파악한 것 자체가 지극히 유교적 관점이 반영된 것이므로 주의. 또 그 당시 중앙 집권 국가라는 개념이 없었던 청동기 시절 부족 간의 세력 다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2. 생애


강태공과 함께 형 무왕을 보좌하여 주왕의 폭정을 하는 상나라를 멸망시켰다. 달기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달:女+旦) 문공이 상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훈련시킨 미녀라는 설도 있다. 주나라를 건국할 때 60세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노나라의 제후로 봉해졌다. 노나라는 현재 중국의 산둥성 곡부(취푸) 부근이며 공자의 고향이기도 하다. 문공은 장남 백금에게는 멀리 있는 노나라를 주고 차남 군진에게는 사후 자신의 주공 자리를 주니 그가 주 평공이다.
무왕 사후 나이 어린 조카, 성왕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자신의 형제인 관숙[4], 채숙, 곽숙과 은나라 주왕의 아들 무경[5]이 끊임없이 문공을 헐뜯자, 그는 성왕에게 '올빼미(鴟鴞)'라는 시를 지어 올려 자신의 무고를 호소했다. 이 시는 시경에 실려있는데, 올빼미는 자신을 모함한 관숙 등을 비유한 것이다.[6]
결국 무경과 관숙 등이 훗날 삼감(三監)의 난[7]이라 불리는 반란을 일으키자 문공은 출정하여 3년 만에 반란을 진압하고 당시 황하 중류에 머무르던 중국의 영역을 황해까지 넓혔다.[8] 당시 중국 동부지역은 이족(夷族)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환빠들의 떡밥이 된다. 이후에 호경 동쪽 낙수가 흐르는 땅에 도시를 세웠는데 이를 성주(成周)라고 했다. 지금의 낙양.
그리고 시경 빈풍편에 실린 시는 대부분 문공과 관련된 시이다.
사실 문공의 행동도 그가 순수하게 도덕군자라서가 아니라 실제로는 매우 현실적인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주나라는 친족 기반의 봉건 체제라서 국왕 본인의 권력은 한정되어 있었고 위치 자체도 그다지 튼튼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왕위를 찬탈해 다른 제후들의 지지를 잃고 본인의 영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불안정한 왕위를 차지하느니, 영지를 유지하면서 제후들의 지지와 존경을 받으며 실권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오히려 문공에겐 명분과 실리 모두를 얻는 방법이었다는 것.

3. 후대의 평가


'''공자가 매우 존경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논어에서도 그의 꿈을 꾼지 오래되었다고 한탄하는 일화가 나온다. 유교의 창시자를 공자가 아니라 주 문공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 이유는 조카를 왕으로 앉히고서도 자기가 찬탈하지 않은 인의지사라는 점. 하지만 삼감의 난은왕조 부활이란 명분과 문공의 섭정을 핑계로 일어난 걸로 봐선 왕위만 빼앗지 않았을 뿐 주공이 주나라의 국정을 혼자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였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문공의 이러한 행적은 이후 군주의 종친이나 유력자가 섭정이란 명목으로 권력을 장악할 때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이용해 먹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계유정난 직후의 수양대군이다. 또한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비슷하게 비판받는 것이 바로 선양이다. 본디 요가 순에게, 순이 우에게 전위한 것은 일종의 미담이었지만, 훗날 조비에서 이성계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찬탈 행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써 악용한다. 다만 그렇다고 주공 단을 비판해서는 안 되는 것이, 후대에서 문공 핑계를 대면서 진짜 찬탈을 해버린 것과 달리 그는 성왕을 해하지도 않았고 왕위를 빼앗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랬으면 추앙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문공은 조회를 볼 때면 친히 어린 성왕을 등에 업고 나타나 자신은 그저 왕의 대리인에 지나지 않음을 분명히 하였으며, 성왕이 장성하여 직접 정무를 보게 되자 권력에 집착하지 않고 심지어 관직에 물러나라는 그의 요구에도 순순히 따르는 등 극히 모범적인 신하의 모습을 보였다.
하여튼 문공의 전철(前轍)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용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전한을 멸하고 신나라를 세운 왕망인데, 왕망은 선양을 받기 직전 전한의 마지막 황제인 어린 유자영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옛날 주공(周公)이 섭위했을 때에는 끝내 복벽하여 성왕(成王)에게 제위를 돌려 드렸는데 지금 나는 천제의 지엄한 명령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구려.'라고 짐짓 탄식했다고 한다. 물론 왕망 따위가 문공의 이름을 판 것 자체가 훌륭한 고인드립. 후에 조선 세조계유정난을 일으키고도 똑같은 고인드립을 쳤고, 단종은 수양대군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양대군을 주 문공이라고 대접해야 했다. 그러나 결국 진짜 주공이랑 같이 시해당했다.
삼국지 시대 공융조조원소 세력의 본거지를 함락하고 원씨 집안의 많은 여자들을 취하고 조비문소황후를 취하는 것을 보자 "무왕주왕을 정벌한 후에 달기를 주공(周公)에게 주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 일로 세간의 비난을 두려워하던 조조는 공융이 자신을 두둔한다고 착각했다. 워낙에 박식한 사람이었기에 조조 자신이 모르는 경전에서 인용한 것이려니 하고 믿었던 것. 하지만 그 이후 조조가 아무리 책을 들춰 봐도 그런 고사를 찾을 수 없어 공융에게 어떤 책에 나온 이야기냐고 묻게 되었는데, 공융은 태연하게 "지금의 일을 살펴보니 과거에도 당연히 그랬을 것 같았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즉 조조에게 '''너는 역사와 고전을 모르는 무식한 새끼''' + '''남의 처 뺏어다 아들 주는 니놈의 윤리의식이 레전드'''라고 2단으로 디스를 건 것이다.. 조조가 공융이 후일 끔살을 시킨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런 일도 아예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흠 없는 인물로 추앙받는 주공 입장에서는 은나라를 말아먹은 주범으로 지목된 달기를 취하라는 제안을 받아들였을 리가 없다.
나중에 문화대혁명 당시에 4인방주은래(周恩來)를 까고 싶었는데, 주은래는 너무나 거물이었고, 인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역풍이 불 것을 우려해 이름이 중의적일 수 있는 주 문공을 대신 깠다는 이야기가 있다.

4. 대중문화에서


코믹스 봉신연의에서는 깡마르고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깐깐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성우는 세노 마사히코/최원형(선계전), 타쿠미 야스아키(패궁). 하리센을 기본무기로 장착해 태공망이 헛소리를 한다 싶으면 그때마다 후려치는 츳코미 역을 담당.
고우영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문공이 달기를 일부러 훈련시켜서 주왕을 타락시킨 걸로 그렸다. 달기가 문공의 수양딸로 등장하고, 문공도 내심 달기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달기는 문공이 자신을 일부러 훈련시켰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어서 은나라가 멸망한 직후 끌려온 자리에서 "시키신 일은 잘 처리했습니다. 조금 오래 걸렸지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문공은 역성혁명의 당위성을 지키기 위해서 냉혹하게 달기를 처단해 버린다. 달기가 처형될 때 뒤돌아 선 채 섬뜩한 눈빛을 낸다.

5. 기타


  • 정몽주의 이름은 두번 바뀌었는데 마지막 이름 정몽주의 주는 이 주공에서 따온 것이다.
[1] 주공은 후술하겠지만 주나라의 관직명이자, 주읍 지역의 제후이다. 그리고 이름이 단이니 주공단이 아니라 주공 단 혹은 주문공이라고 칭하는 것이 옳다.[2] 다른 이칭으로는 소주(小周), 주읍(周邑)이 있다.[3] 이에 대한 반론은 맹자제선왕에게 한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며, 잔적지인(殘賊之人)을 단지 "그 놈!"이라고들 하니, "무왕께서 그 '주'라는 놈을 처형하셨다"라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하였다"라는 말은 들어 본 바 없습니다."[4] 문왕의 셋째 아들, 즉 문공의 바로 위에 형이다. 관숙과 뒤의 채숙, 곽숙은 모두 무왕과 문공의 (어머니까지 같은) 친형제.[5] 상나라 세력을 달래기 위해서 무왕은 그를 제후로 삼았다[6] 이외에도 훗날 성왕이 성인이 되자 주공을 꺼려 쫓아내는데 그해 가을 갑자기 비바람이 일고 벼락이 쳐 커다란 나무가 뽑히고 익은 벼가 다 쓰러지는 불길한 일이 벌어진다. 이에 놀란 성왕이 점을 치려고 점괘를 모아둔 금등(金縢)으로 된 궤를 열어 보는데 거기서 예전에 아버지 주무왕이 큰 병에 걸렸을 때 주공이 소공(무왕과 주공의 이복동생이자 주나라 초기의 명재상. 연나라의 시조이기도 하다)과 함께 무왕의 쾌유 여부를 점친 뒤 하늘에 제사 지내며 "'''제 목숨을 대신 거두시고 형님은 살려주십시오.'''"라 기도했던 제문을 발견하고는 문공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는 고사가 있다. 이것이 바로 영화, 영원한 제국의 화두로 잘 알려진 '금등지사'다. 이 기도문은 서경(書經) 주서(周書)에 동명의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다만 안타까운 것은 현존하는 서경은 후대의 위작으로 밝혀져....[7] 삼감이란 말 그대로 관숙과 채숙, 곽숙을 가리킨다. 본디 관숙 형제들은 무경을 감시하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8] 형제 간의 다툼을 마음 아파하던 주공은 귀환하면서 시를 짓는데 이 시, '아가위 나무(常棣)' 또한 시경에 실려 있다. 형제의 깊은 정리(情理)를 노래한 훌륭한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