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수(1962)
1. 개요
前 해태 타이거즈,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의 투수이자 前 KIA 타이거즈의 투수코치.
정규 시즌 통산 18시즌 92승 77패 34세이브로 뛰어난 성적을 보여 주었고, 특히 한국시리즈 최다 우승 공동 1위(8회)[1] 선수이자 '''7승 3패 1세이브'''의 기록으로 '''KS 최다승 기록 & 최다 경기 등판 기록 2위(23경기)'''[2] 을 보유해 해태 타이거즈의 불멸의 기록 V9을 가능하게 한 주인공으로 인정받는 선수. 가을야구에서 선동열을 능가하는 활약을 한 것과 평소 까치발같은 피칭 동작 때문에 '가을 까치'란 별명을 갖고 있다.
전라남도 화순의 광부촌 출신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훗날 중·진흥고 입학[3] 및 연세대 입학 당시에도 스카우트 경쟁을 이용하여 몸값을 올려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광주로 이사간 후 4학년 때에 야구부에 입단하면서 오른손잡이인데도 왼손으로 공을 던지는 '좌투우타' 스타일이 되었다. 마라톤 선수도 능가할 정도의 폐활량과 몸의 유연성이 장점으로 호리한 몸매로 휘청거리듯 피칭한다고 하여 처음의 별명은 '낙지'. 그 덕인지 이상윤이 은퇴한 후 무려 10년간 해태 투수진의 최연장자였고, 선동열이 떠난 후에는 투수진의 최고참으로 1996~97의 우승을 이끌었다.[4]
왼손 파이어볼러로서는 파천황격인 선수. 덕분에 많은 왼손 파이어볼러 후배들이 등번호 47번을 선호하는 경향이 생겼다. 대표적인 선수가 이상훈[5] , 권혁, 나성범[6] .
2. 선수 시절
2.1. 해태 타이거즈 시절
정통파가 아닌 쓰리쿼터에 가까운 스타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당시로선 보기 드문 좌완 강속구 투수였지만, 그에 반비례하여 나쁜 제구력을 가져 볼넷과 몸에 맞는 공을 많이 내주었다. 그러나 '강철심장'을 가진 담력 센 투수로서의 특징이 KBO 한국시리즈에서는 큰 빛을 발하였다.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 당시, 우승의 주역이 될 거라고 많은 이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선동열이 투런 및 밀어내기로 9이닝 동안 3실점씩이나 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강판된 후 계투로 올라와 2이닝 4삼진 2볼넷 1안타로 틀어막고 승리 투수가 되었다. 그 다음 3차전에서도 기존의 해태 에이스 이상윤이 1이닝을 못 넘기고 난타당하는 등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등판하여 5이닝 2실점으로 틀어막고 구원승, 5차전에는 선발로 등판하여 당시 상대 팀 삼성 라이온즈의 에이스였던 김시진과의 맞대결에서 5이닝 2실점으로 판정승을 거두었다. 그 해 팀의 한국시리즈 4승 중 혼자 3승을 기록하면서 신인 최초로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였다. 이후에도 한국시리즈에서 맹활약을 펼쳐 한국시리즈 최다승 기록을 보유. 정규 시즌에서는 그렇게 두드러지는 투수가 아니었으나, 한국시리즈만 되면 펄펄 난 특이한 케이스로,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쁜 제구력''' 덕이었다고도 한다.[7] 하지만 김정수가 가을의 사나이가 된 가장 큰 원인은 '''부상 때문'''이다. 데뷔 초창기에는 매년 시즌 중에 부상을 당한 덕분에[8] 정규시즌 중에는 크게 활약을 하지 못하다가[9] 가을쯤 되면 부상이 완치가 되고 비로소 제 컨디션을 찾는 패턴을 반복하다보니 정규시즌의 성적에 비해서 한국시리즈의 성적이 특출나게 좋아보이는 효과를 가져왔고 이 때문에 여름까지는 안 보이다가 가을만 되면 돌아와서 맹활약하는 가을까치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타격 기계"로 유명한 장효조 선수에게 꽤 강한 편이었다.
1991년에는 정규시즌 중 빈볼을 던져 퇴장당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은 7월 14일 대구 원정경기에서 삼성이 좌투수용 오더와 우투수용 오더를 준비해 놓고 배대웅 코치가 해태 선발투수로 선동열이 등판한다는 사실을 슬쩍 확인한 후 우투수용 오더를 제출하려다 해태 김봉연 코치에게 들켜 난리가 났는데 해태 측에서 경기를 못 하겠다고 항의하는 걸 삼성 측에서 좌투수용 오더를 대신 제출하는 것으로 겨우 무마해서 경기는 진행되었는데 이 경기에서 선동열이 난타당해 1:7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구원등판 후 류중일과 이만수에게 연속 빈볼을 던져 퇴장, 이후 10경기 출장정지와 제재금 50만원의 징계를 받았다.
1996년에는 선동열이 일본에 진출하면서 공석이 된 마무리 자리를 맡았는데 쓰리쿼터에서 더욱 팔 각도를 내린 것이 주효하여 호성적을 기록했다.[10]
2.2. 해태 타이거즈를 떠난 이후
그러나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에서는 다소 푸대접을 받았다. 패넌트레이스에서는 별로 활약하지 못한 탓도 있고, 또 해태가 그다지 선수들에게 돈을 후하게 쓰던 팀이 아니었기도 했고..[11][12] 결국 2000년 당시의 FA 선언 때 구단에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여 사인 앤드 트레이드로 신생팀 SK 와이번스로 이적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사령탑이었던 강병철 감독은 젊은 선수들을 선호하는 편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기량 하락과 겹쳐 예전의 기량을 보여 주지 못한 채 2000년 시즌 후 방출되어 한화 이글스로 옮겨 갔는데, 당시 사령탑인 이광환 감독은 김정수 등의 베테랑 선수들을 등용하는 편이었다.
그 결과 이적 2년 째인 2002년까지는 2년 연속 10홀드 이상을 기록하며 좌타자 전문 원 포인트 릴리프로 좋은 활약을 했고 이 과정에서 이상열은 2001년 시즌 중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2002년 시즌 후 젊은 선수들을 선호하는 유승안 감독이 부임하면서 설 자리를 잃은 채 2003년 시즌 중 현금 트레이드로 SK 와이번스로 돌아와 그해 리그 최고령 선수로 활동하며 8홀드의 성적을 거두었다.
정규 시즌 후, 이대로 은퇴하나 싶었지만 2003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만 41세 2개월 23일'''의 나이로 구원 등판하며 '''KBO 한국시리즈 최고령 출장기록'''을 세웠다. 다만, 4차전 구원등판 상황에서 첫 타자인 전준호의 머리를 맞추고 칼같이 퇴장당한 것은 옥에 티로 남았다. 빈볼은 아니었지만 그 나이까지 여전했던 제구력 불안 때문에(…) 1996년 최해식에 이어 '통산 2번째 KBO 한국시리즈 퇴장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마지막 시즌에 출장한 한국시리즈에서 소속팀 SK가 준우승에 그치면서 최고령 우승선수는 되지 못했지만 당시 시점에서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경기 출장'''과(31경기, 한국시리즈만 계산했을 시 23경기) '''최고령 출장선수'''(41세 2개월 27일) 기록에 이름을 남기고 은퇴할 수 있었다.[13]
3. 지도자 생활
은퇴 후, KIA 타이거즈에서 2005년부터 코치로 재직하였고 스카우트로도 활동하였다. 2010 시즌 데스기모토가 성적부진으로 2군으로 내려가면서 1군으로 콜업, 기존에 이강철 코치가 맡았던 1군 불펜코치를 맡았다.
2011 시즌 이후 전력분석 팀장으로 보직을 옮겨 잠시 지도자 생활을 내려놓았으나, 2013 시즌에 앞서 다카하시 투수코치가 해임되고 이강철 투수코치가 넥센 히어로즈의 수석코치로 이동하여 투수코치 자리에 공석이 생기면서 다시 2군 투수코치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2013년 8월 17일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1군으로 올라왔다.
2014 시즌 KIA 마운드는 최악이었다. 시즌 보정 없다면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의 팀 평균자책점보다 안 좋은 최악의 수치. 타고투저를 고려한 시즌 보정을 하면 타이거즈 역사상 안좋은 쪽으로 4위 정도였다. 야구는 선수가 한다지만 투수코치로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 그의 보직이 3군 코치로 변경되기 직전 시점인 6월 10일 KIA의 팀 평균자책점은 6.16이었다.
끝내 1군 메인 투수코치 자리를 이대진에게 넘기고 3군으로 내려갔으며, 대타로 불펜코치로는 홍우태가 올라왔다. 팬들 사이에서는 철밥통이라며 반응이 나쁘다.
이후 2015년부터 2019년까지는 3군과 2군을 오가면서 투수/재활코치를 맡았지만, 맷 윌리엄스가 신임 감독으로 취임한 후 2020 시즌 코칭스태프 인선이 완료되면서 자리를 잃고 팀을 떠나게 되었다. 2006년 이후 거의 13년 가까이 팀에서 코칭 스태프로 일하다가 떠나게 된 셈.
4. 연도별 성적
5. 여담
- 대표적인 별명이 까치인데 까치발을 드는 듯한 투구폼에서 까치라는 별명이 유래됐다는 설이 있지만 실제로는 국산 야구만화 중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 떠돌이 까치의 주인공 설까치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프로 입단 당시 김정수의 헤어스타일이 억센 더벅머리였고 반항심이 깊은 설까치처럼 김정수도 정서불안에 가까울 정도로 성격이 들쭉날쭉했는데 그 모습이 만화 속 설까치의 모습과 비슷했던 것. 그래서 까치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가을야구만 나가면 에이스가 된다고 해서 가을까치가 별명으로 굳어졌다. 김정수와 비슷한 원리로 별명이 생긴 선수가 가을거지 박정권. 그리고 타이거즈 내에 심동섭이라는 비슷한 후배도 있다
- 2017년 한국시리즈 1차전의 시구자였던 문재인 대통령에게 시구 지도를 했다. 평소 야구에 관심이 많았던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수 코치를 반갑게 맞으며 "한국시리즈 최다승 투수 아니시냐"고 하자 "존경합니다"라고 화답한 것은 덤.
- 천하무적야구단에서 2010 올스타 경기때 삼진을 당해 퓨처스 레전드 코치들이 섹시댄스 벌칙을 받게되는 굴욕을 맛봤다.
[1] 또 다른 한명은 한국시리즈 최다 경기 등판 기록 1위(25경기)인 배영수. [2] 배영수가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 통산 24경기에 등판하며 기록을 깼다.[3] 당초 전남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진흥고 전학 전 목포상고에 잠시 몸담았다[4] 선동열이 실제 생년월일이 1962년 10월생이라고 쳐도 생일로 따지면 그가 연장자. 다만 학번은 선동열이 1981학번, 김정수는 1982학번이다.[5] 다만 이상훈은 톰 글래빈을 존경해서 달았다고 밝혔다.[6] 프로 데뷔 전까지는 투수였다. 2015 플레이오프에서도 1이닝이지만 투수로 나왔을 정도. 게다가 나성범은 진흥고-연세대로 김정수의 직속 후배다.[7] 단기전 승부에서 '''어디로 공이 올지 모르는 상황'''이니 타자들이 쉽게 현혹되었다고 한다. 특히 삼성 라이온즈의 장효조는 '''"김정수가 던지는 공은 내 머리로 날아올 것 같아서 쉽게 상대 못하겠다"''' 라며 진저리를 쳤다고 한다.[8] 실제로 1987~89년의 정규시즌 성적은 아주 초라하다.[9] 그렇다고 통산 출장수가 적은 건 아니다. 2015년 현재 통산 9위.[10] 여기에는 다른 이야기가 하나 있다. 원래 선동열의 뒤를 이를 차기 마무리 후보는 임창용이 유력했다. 그러나 선동열은 임창용을 거르고 김정수를 직접 지목했고, 그로 인해 김정수가 마무리 보직을 맡게 됐다. 꼭 이것 때문은 아니지만 임창용과 선동열의 반목을 얘기할 때 꼭 나오는 에피소드이긴 한데.... 실상은 '''후대에 이르러 누군가가 선동열을 까기 위해 날조한 에피소드'''이다. 해당 에피소드애서 선동열이 임창용을 거르고 김정수를 지목한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당시 포수였던 최해식이 팀 내에서 가장 좋은 패스트볼을 던지는게 임창용이었다는 인터뷰 때문에 열폭해서였다고 하는데, 실상 이 인터뷰는 최해식이 은퇴한 후 한참 지나서 회고 형식으로 한 것이라서 당시의 선동열이 그걸 듣고 열폭할 일 자체가 없었다. 무엇보다 임창용의 데뷔시즌 성적을 보면 당시 마무리 후보가 임창용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넌센스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14경기에 등판에 29와 1/3동안 37피안타를 얻어맞고 0승 2패 0세이브 평균자책점 5.83 WHIP는 1.43이었다. 어디까지나 구위가 눈에 띄는 유망주에 지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당시 해태는 임창용을 선발투수로 육성하려 했다.''' 그래서 데뷔시즌 가을야구 좌절 이후 시범으로 2경기를 선발로 등판했고 2년차였던 이듬해 1996년은 5월까지 선발투수로 뛰다가 프라이머리 셋업으로 보직 변경을 해 대박을 친 후 이듬해 자연스레 마무리를 물려받게 된 것이 실상이다.[11] 선동열도 연봉이 동결된 적이 있을 정도... 1987년 시즌 후에 그랬는데, 이 해 평균자책점 1위를 했지만 시즌 중 부상을 당해 한 달정도 등판을 하지 못했기 때문. (원래는 삭감당할뻔하지만 해태 특유의 햇빛효과로 동결된다.)[12] 김응용 감독이 좌완을 좋아했다고 하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정작 김응용 감독은 끝끝내 제구가 교정되지 않은 김정수를 많이 깠다. 심지어는 "발로 던져도 내가 더 잘 던지겠다"고까지.. 결정적으로, 김응용 감독이 좋아하는 타입은 그냥 좌완이 아니라 권혁, 강영식같은 '''덩치 좋고 볼 빠른 좌완'''이었다.(그래서 한화에 부임하면서 송창현을 데리고 온 것.) 타자로 범위를 넓히면 양준혁.[13] 포스트시즌만 계산하면 한화 송진우가 2007년 플레이오프 등판으로(만 41세 7개월 28일) 기록을 경신한 후 LG 류택현이 2013년 플레이오프에 등판하면서(만 41세 11개월 26일)로 다시 경신되었다. 한국시리즈 최다경기 출장 기록 또한 2014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배영수가 타이를 이루었기 때문에 경신이 유력하다. 그리고 한국시리즈 최고령 등판 기록도 2017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임창용이 그 기록을 경신하였다.(41세 4개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