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천(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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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전 농구 선수 및 감독, 현 KBS N 스포츠 농구 해설위원.
2. 선수 시절
고향은 여수지만, 고등학교는 서울체고를 나왔다. 서울체고 재학 시절에 이미 고교에서 손꼽히는 유망주 센터로 군림했고,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 끝에 연세대학교가 그를 손에 넣었다. 연세대학교 시절에 착실히 성장하면서 대학 무대에서도 괜찮은 센터로 활약했고, 한 때는 고려대학교의 49연승 기록을 바라만 봐야 했지만, 4학년 때는 주장으로 고려대를 누르고 다시 패권을 연세대가 가져오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대학 졸업 무렵에는 고교 졸업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거취를 두고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의 승리자는 현대전자.
실업 무대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선보이면서 현대전자의 농구대잔치 3회 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남자 농구가 중국을 누르고 사상 첫 금메달을 목에 거는데 이바지하였다. 당시 대표로서 활약하면서 농구 금메달을 차지하며, 일약 스타급 선수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 뒤로는 점차 무릎 부상이 악화되면서 다소 이른 나이인 28세에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이후에 현대증권에서 평사원으로 근무하면서 농구와는 멀어졌다.
3. 지도자 시절
3.1. 지도자 1기 - 여자농구에서의 괜찮았던 출발
농구계로 다시 복귀한 계기는 1994년에 학교 선배이자, 팀 선배이자, 직장 선배인 신선우[1] 가 현대전자의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아끼는 후배인 박종천을 코치로 지명하면서부터였다. 박종천은 이 때부터 2002년까지 현대 - KCC[2] 의 코치로 재직하면서 신선우를 보좌해 두 번의 한국프로농구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2002년, 한국여자프로농구 청주 현대 하이페리온[3] 의 새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처음 감독 자리를 맡게 되었다. 2002년 5월에 감독에 부임했는데, 놀랍게도 2002년 8월에 여름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데뷔 3개월 만에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현대는 창단 이래로 농구대잔치와 한국여자프로농구에서 단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콩라인 구단이었는데, 이를 말끔하게 깨뜨린 것. 이 우승으로 박종천은 일약 농구 감독 인재 풀의 촉망받는 인재로 떠올랐고, 앞으로 탄탄대로가 열릴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했지만...
우승하고 그 다음 달에 사임했다. 이유는 프런트와의 심각한 불화. KCC 코치 당시 받았던 연봉 1억 5백만원에서 2천만원을 깎고 여자 농구 감독으로 왔는데, 우승을 했는데도 당시 어렵던 그룹 사정을 이유로 보너스도 안 주고 날로 먹으려고 한 것이다.[4] 이 때문에 박종천은 프런트와 심각한 불화를 거듭하다가 자진사퇴했다.
이후 해설자로 1년 재직한 후, 창원 LG 세이커스의 수석코치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그의 흑역사가 개막한다'''.
3.2. 지도자 2기 - 남자농구에서는 '''희대의 흑역사'''
김태환 감독을 보좌해서 수석코치로 시즌을 보낸 그는 2004년, 김태환 감독이 물러난 이후 LG의 새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문제는 이 경우 일반적으로 수석코치는 감독과 운명을 같이한다는 것인데, 혼자 감독에 임명되었다는 것. 이 때문에 박종천은 김태환을 배신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딱히 근거는 없다. 단지 모양새가 나지 않았을 뿐. 이런 상황에서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면 성적을 내야 하는데, 문제는 박종천은 그 전해까지 6강 PO에 꾸준히 오르던 LG에게 6강 PO 탈락과 9위 추락[5] 이라는 굴욕을 선사하고 말았다는 것. 결국 한 시즌만에 자진사임 형식으로 짤렸다.
그 후 한동안 야인으로 있다가 다시 얻게 된 자리가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의 수석코치직. 연세대학교 선배인 최희암이 불러서 간 것인데, 여기서도 LG와 똑같이 최희암이 2009년, 재계약에 실패하자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또 똑같은 소리가 나왔는데, 다만 이번에는 최희암이 나서서 자기가 추천했다고 실드는 쳐 줬다. 사실 최희암은 한동안 쉬다가 모기업의 부름을 받고서 고려용접봉 해외 지사장으로 영전한 케이스인지라 잘렸다고 보기도 애매했다.
하지만, 역시나 성적이 개막장(...). 초반 10연패라는 개막장 성적을 내면서 스트레스로 입원하는 우여곡절 끝에[6] 결국 총감독으로 물러나는 형식으로 12경기만에 유도훈에게 지휘봉을 넘기고 중도 하차하고 만다. 이는 같은 팀 제이 험프리스의 20경기를 경신한 역대 최단명 감독 기록이다(...).
2012년에 농구 해설가로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가 8월에 중국 요령성 청소년 여자농구팀의 감독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중국 무대로 건너갔다.
2014년 4월 1일에 한국여자프로농구 하나외환 여자농구단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관련 기사.
3.3. 지도자 3기 - 여자농구로 화려한 컴백일 줄 알았으나...
하나외환이 몇 년 전부터 하위권에서 놀던 약팀이던 탓에, 감독 부임 첫 시즌은 6팀 중에서 5위로 마감했다. 남자농구에서의 연이은 실패 때문에 현재까지 농구 팬들로부터 지도자로서의 평판은 그다지 좋은 편이 못 되나, 하나외환 감독 부임 이후 카메라를 주시하는 현란한 인터뷰 기술로 팬들의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어록까지 등장했다.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다른 팀 감독들의 인터뷰는 조회수가 보통 세 자릿수를 찍지만, 박종천의 인터뷰 조회수만 봐도 유난히 독보적인데 1,000건 이상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2만 건이 넘는 인터뷰도 있었다. 여기에 인터뷰 중 질문하고 있는 아나운서를 보며 방긋이 미소를 짓는것은 하나의 컬트적인 볼거리기도 하다. 오죽하면 그의 인터뷰를 보기 위해 하나외환을 응원한다는 팬들도 생겨나고 있으며 심지어 이런 기사까지 떴다. 코트에 나타난 국회의원?…박종천 감독 인터뷰 '화제'
마지막 라운드를 전승으로 마감하며 인터뷰를 기대하는 팬들에게 막판 선물 보따리를 안겼다. 남자농구 때와 달리 강이슬, 신지현 등 유망주들이 시즌 후반에 들어갈수록 가능성을 터트리며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하고 있다. 그의 어록대로 짱인팀이 되지 않을까 라고 기대하는 팬들이 하나 둘 늘고 있다.
에는 지난시즌 최고 외국인 선수였던 샤데 휴스턴을 드래프트 선발하고, 혼혈선수인 를 영입하는 등 팀 전력이 크게 상승하여 중위권 싸움을 벌이고 있다. 팀이 승리하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박종천 감독의 인터뷰를 볼 기회도 더 많아져 승장 인터뷰를 기대하는 팬들의 만족도를 높이고 있는 중. 다만 신지현이 무릎을 다쳐 재활군에 머무르게 된 게 흠이다.
인터뷰만이 아니라 작전타임도 웃기기로 유명하다. 선수들을 닦달하고 질책하는 것 같은 작전타임이 나오다가도 간간히 '''"알았죠~~~ㅇ"'''[7] 같은 귀여운 말투가 섞이면서 팬들을 웃게 하고 있다.
를 마치 '''칼 루이스 같았다'''라며 아재 인증을 하거나, 지난 시즌 영상을 보면서 선수들에게 '''너희는 뇌파 검사가 필요해'''라고 드립을 치는 등 인터뷰마다 명대사를 쏟아내고 있다.
은 오랜 암흑기를 청산하고 시즌 2위로 마무리지으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다. 전신인 부천 신세계 쿨캣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2010~11시즌 이후 5년 만에 포스트시즌이자, 부천시 입성 이후 처음으로 맛보는 봄 농구다. 그리고 국민은행에 역전승하며 결승에 진출했다.
앞서 상술한 대로 KBL에서의 처참한 성적 때문에 농구 팬들은 진작에 WKBL에서만 머물러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그 정도로 남자농구와 여자농구 팬들 사이의 입장이 천차만별로 갈리는 감독.
별명은 '''국회의원''' '''기호 1번''' '''부천갑''' 등이 있다. 그의 감독시절 인터뷰 하이라이트 모음을 보면 이해가 빠르다. ##
다만 신세계 때부터 몇 시즌 동안 봄 농구를 하지 못해서 큰 경기 경험이 부족했던 하나은행이 챔피언결정전에서 우리은행에게 매 경기 15점 차 이상으로 털리면서 스윕당해 준우승에 그친 데다가, 2년 계약이 종료되었기 때문에 다음 시즌에도 박종천 감독을 여자농구에서 볼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지만, 그래도 하나외환 최초의 챔결진출에 더 의의를 두어 2년 재계약이 결정되었다. 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면서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는 게 중요할 듯이 보였으나...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2016년 7월 5일에 감독직에서 자진 사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KEB하나은행의 2015-16시즌 전적도 전부 몰수패 처리되었다.
4. 해설자 시절
그런데 같은 해 10월 10일, 하나은행 감독직에서 사퇴한 뒤 3개월만에 KBS N 스포츠의 해설위원으로 복귀한다는 충공깽스러운 소식이 들린 바람에 여자농구 팬들은 뒷목을 잡아야 했다. 사태의 사기극에 중심에 있던 인물의 복귀였기 때문인데 감독직에서 물러났음에도 부천 KEB하나은행에서도 고문 자격으로 급여까지 받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그 와중에 2017년 대학농구리그 4강전 중앙대 - 연세대 전에서 양홍석이 얼리 엔트리 진출로 대회에 불참하자 대학을 배신했다는 말투의 발언을 해 농구팬들에게 까임지분을 꾸준히 누적시키고 있다.
이후 소식이 뜸하다가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사태로 인해 중국 우한의 후베이성 청소년 농구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사. 다행히 귀국했다고 한다.
5. 결과론
연세대 - 현대전자 - 현대 다이넷/걸리버스 출신의 모든 역사를 보여준 사례로, 대선배인 최희암과 신선우를 보면 이들은 최고로 성공했지만 반대로 제자들이 성공하지 못했다.
유일한 열외는 자신의 전자랜드 감독 후임이 된 유도훈.
반대로, 고려대 - 삼성전자 - 삼성 썬더스 출신은 지도자로서 대다수 성공가도를 달렸거나 달리고 있다.
심지어는 중앙대 - 기아자동차 - 기아 엔터프라이즈 출신들은 선수와 지도자로 모두 성공사례까지 섰다.
선수 시절의 성공을 감독으로 남농은 실패했고, 여농은 절반의 성공이었으며, 코치로는 남녀 모두 선전했다.
결과론으로 선수와 지도자의 영역 차이. 더 실패한 김상준과 현주엽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오늘도 농구인 어록제조기인 박총전의 농구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6. 관련 문서
[1] 신선우 역시 현대산업개발 여자농구단 코치를 잠시 지낸 뒤 현대증권의 영업부장으로 재직하다가 농구계로 컴백한 것이었다.[2] 이 시절 팀이 계속 개편되었다. 현대전자 실업농구단 → 대전 현대 다이냇 → 대전 현대 걸리버스 → 전주 KCC 이지스.[3] 모기업인 현대건설이 경영난에 빠지면서 한국산업은행이 임시로 관리하다가 2004년에 신한은행에 팔렸다.[4] 근데 당시 모기업인 현대건설의 상황이 심각하긴 했다. 결국 엄청난 액수의 공적자금이 투입되고, 자산매각 과정에서 여자농구단도 팔아치운다.[5] 최하위 전자랜드와 승차는 같았으나 연승에서 앞서 9위.[6] 사퇴한 결정적인 원인이 된 동부와의 경기에서 3쿼터까지는 10점차 이상으로 잘만 이기고 있다가 4쿼터에 '''야투 성공률 0%''', '''2'''-21을 남기는 바람에 역전당했다.[7] 글로 표현하기 굉장히 미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