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준(농구)

 

'''김상준의 수상 및 감독 경력 '''
[ 펼치기 · 접기 ]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1999'''


'''성균관대학교 농구부 감독'''
'''SUNGKYUNKWAN UNIVERSITY BASKITBALL TEAM'''
'''김상준
金尙駿'''
<colbgcolor=#8dc63f> ''' 출생 '''
1968년 7월 14일 (56세)
[image] 서울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 신체 '''
185cm|체중 95kg
''' 직업 '''
농구선수(스몰 포워드 / 은퇴)
농구감독
''' 학력 '''
예일초등학교(졸업)
명지중학교 (졸업)
명지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졸업)
'''종교'''
불교
''' 실업입단 '''
1991년 한국은행 농구단
''' 소속 '''
<colbgcolor=#8dc63f> ''' 선수 '''
한국은행 농구단 (1991~1997)
[image] 원주 나래 블루버드 (1997~1998)
[image] 대전 현대 다이넷 (1998~1999)
'''감독'''
명지중학교 (2001~2006)
[image] 중앙대학교 (2006~2011)
[image] 서울 삼성 썬더스 (2011~2012)
[image] 성균관대학교 (2014~ )
1. 소개
2. 경력
2.1. 선수 시절
2.2. 지도자 시절
2.2.1. 명지중에서 안성골로
2.2.2. 흑역사로 남아버린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 시절과 총평
2.2.3. 성균관대 감독 시절
3. 여담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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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농구인. 현재는 성균관대학교 농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


2. 경력



2.1. 선수 시절


명지고 시절에 그럭저럭 활약했던 선수로, 그 때문에 중앙대학교 진학 후에도 정봉섭 감독 밑에서 배웠지만 3학년 때까지 화려한 주전들에 밀려 간간히 나오는 수준이었다. 4학년때 겨우 주전 슈터 자리를 차지하긴 했지만 애당초 뛰어난 성적을 낸 것은 아니라서 실업 팀의 스카우트를 받지 못하고, 동기 김영래(192cm, F/C)와 함께 한국은행으로 가게 되었다.[1]
그래도 워낙 전력이 약했던 팀의 사정상 입단 첫해부터 한국은행의 주전으로 활약했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국군체육부대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한국은행으로 돌아와, 없는 선수층에도 꾸준히 주전으로 뛰면서 노장슈터 김재득(179cm, G)과 함께 팀의 주득점원으로 활약하며 한국은행의 마지막을 불꽃을 지켰다.
한국은행이 1996년을 끝으로 해단하면서 다른 선수들은 일반 사무직으로 남았지만, 김상준은 산업은행을 주축으로 새롭게 창단된 나래 농구팀으로 이적하면서 농구선수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그리고 KBL 출범 직전 실업과 아마추어가 모두 같이 뛰는 1996-97 농구대잔치에서 자유투 성공률 1위에 오르면서 트로피를 하나 챙겼다. 한국프로농구 출범 이후 세 시즌을 뛰었는데, 전반적인 활약은 그냥저냥 벤치 멤버 수준. 원년 시즌 돌풍의 팀이던 원주 나래 블루버드에서 정인교의 백업 슈터로 뛰며 팀의 원년 시즌 챔피언 결정전 진출을 도왔고, 1997-98 시즌에도 장윤섭(187cm, F)과 함께 팀의 키 식스맨 역할을 톡톡히 하며 팀의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기여했다. 1997-98 시즌 종료 후에 정경호와 맞트레이드되어 원주 나래를 떠나 대전 현대로 이적했으나, 당시 KBL 최강 백코트였던 트리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시즌의 1/3 정도인 17경기[2]에만 출장하는데 그쳤으며, 1998-99 시즌 플레이오프 들어 단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고 팀의 챔프전 2연속 우승을 벤치에서만 바라본 뒤 은퇴했다.

2.2. 지도자 시절



2.2.1. 명지중에서 안성골로


잠시 주유소를 운영하다가 2001년, 모교인 명지중학교의 감독을 거쳐 2006년에는 은사인 정봉섭 체육부장의 부름을 받아 중앙대학교 감독으로 부임했다.
명지중 재학 시절에는 김시래를 지도하면서 개인기를 배려했고, 중앙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대박을 쳤다.
과거에는 대학농구 하면 한동안 '안암골' 고려대와 '신촌골' 연세대 양강이었고, '안성골' 중앙대는 80년대부터 김유택허재로 인해 강호가 되기 시작했는데, 90년대에도 스카우트가 어려운 평이 있지만 좋은 선수들이 안성골에서 활약했고, 이후 임재현김주성으로도 이어진다.
하지만 스카우트는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젊지만 운동을 병행해야 하고 체력도 강해야 한다.
이 과정을 보면 김상준 감독은 철저한 준비를 한 격이다.
과거 김태환 감독을 중심으로 가드 라인에 황진원임재현을 시작으로 포워드-센터 라인에 송영진김주성 이후 중앙대학교의 전성시대를 열게 된다.
함지훈, 윤호영, 강병현, 김선형, 오세근 같은 우수한 선수들을 조련하고, 일부는 직접 리크루팅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우수한 선수들을 이끌고 40분 풀코트 프레싱을 기반으로 한 질식 농구를 선보이면서 무려 '''52연승'''의 신화를 달성하였다.[3]
김상준 감독은 중앙대에서 무려 117승 9패라는 전례를 찾기 힘든 기록을 남겼다.
한국 대학 농구가 리그전으로 나오면서 '''역대급''' 성적인데, 이건 자율의 연세대와 엄격의 고려대, 그리고 숨어 있는 경희대도 해내지 못한 한국 대학 농구의 사기 성적이다.
더군다나 중앙대 농구부는 중앙대 출신도 아닌데다 학력이 고졸에 불과한 김태환 감독도 못해낸 엄청난 성적이었다.
사실 인력이 많은 고려대와 인력이 다양한 연세대, 그리고 인력이 뭉치는 경희대라는 소위 한국대학농구의 대학 빅4 라인 속에 스카우트 경쟁에서 승리한 격이다.
이렇게 대학 리그를 평정한 활약으로 일약 주목받는 젊은 감독의 반열에 오르면서 프로농구 감독 후보로 등극하게 된다.
2009년 전국대학농구 2차 연맹전에서 중앙대는 충격의 예선탈락을 겪게 되었다. 대회가 끝나고 김상준 감독은 미국 연수를 결정했다. 미국에서 한층 정교해진 전면 강압수비를 배웠고, 다음해 MBC배 대학농구와 원년 대학리그의 챔피언 자리에 오르게 된다. 오세근과 김선형을 중심으로 한 압박수비와 빠른 플레이는 어느 팀에게도 패배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1년 정들었던 모교인 중앙대학교와 이별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앙대 출신 대선배인 허재는 안성캠퍼스를 배신한 김상준 감독을 매우 싫어하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2.2.2. 흑역사로 남아버린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 시절과 총평


마침내 2011년, 전격적으로 서울 삼성 썬더스의 감독이 되면서 프로 감독으로써도 첫 발을 내딛게 된다.
'''프로 무대에서는 가히 최악의 평가를 남겼는데''',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프로농구 원년의 농구 명가인 삼성이라는 명문팀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하게 말아먹으면서 감독도 아닌 금지어로 굴러떨어졌다[4].
체력이 약한 세컨가드인 강혁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로 트레이드 시키고 반대급부로 수비가 뛰어났던 스윙맨인 이병석을 영입하면서 풀코트 프레스라는 강한 수비에 이은 속공을 준비하게 된다.
물론 삼성 썬더스는 재건을 할 정도로 기다려 주는 팀이 아니고, 이름값은 전자 라이벌인 창원 LG 세이커스서울특별시 라이벌인 서울 SK 나이츠에 걸맞는데, 삼성 프런트는 오직 정상 도전만 외치고 있다.
사실 서울 삼성 썬더스는 김상준 감독과는 대학과 농구대잔치 및 프로에서도 아무 인연이 없는 팀으로, 고려 썬더스 혹은 연세 썬더스 및 합성어인 고연 썬더스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고려대파와 연세대파 사이의 팀에 감독이 선수단을 장악하기 매우 어려운 팀으로 악명높다. 안준호 전 감독과 서동철 전 수석코치도 사실 강혁이규섭의 라인이었다. 오히려 삼성의 큰 천둥이었던 KBL 대표 명장이자 KBL 대표 행정가인 김동광 감독과 삼성 매니저(주무) 출신이었던 전창진 감독 정도가 장악이 가능했다[5].
코칭스태프는 모교에서 함께 했던 박수호 수석코치를 영입했고 영원한 클래식 라이벌인 현대-KCC이자 전자 라이벌인 LG 출신의 스타였던 이상민의 1년 선배이자 선수 시절 딱 1년만 함께 했던 조성원코치로 선임했다.
각설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중앙대 시절 보여주던 40분 풀코트 프레싱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애당초 2m 23cm의 라모스를 뽑았다가 풀코트 프레싱에 맞지 않는다고 교체하는 촌극부터 '''프랜차이즈 스타강혁을 내쳤다'''가 가드진의 줄부상으로 가드난에 시달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김승현을 트레이드하는 과정에서 팀의 핵심 포워드인 김동욱을 내주면서 팀 전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었다[6]. 더구나 김상준 감독은 삼성의 각종 불명예 기록들도 세우는 진기록을 보여주기도 했다. 삼성 팀 창단 이래 최다 연패인 '''14연패''', 한국프로농구 홈경기 최다 연패인 '''홈 14연패'''[7], 2012년 1월 12일 부산 kt 소닉붐과의 홈경기에서 시즌 최다점수차 '''41점차 참패''' 등등. 이렇게 속절없는 부진이 계속되자 급기야는 김상준 감독을 성토하는 삼성 팬들이 상당히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전술 또한 단 한 가지도 좋은 부분이 전혀 없었다. 특히 작전타임 때 제대로 된 전술조차 없었던 것도 모자라 두고두고 많은 이들의 놀림감이 되었던 일명 선수 출석체크와 출첵 이후의 특색없는 아이솔레이션은 많은 비난을 샀다. 전임자도 출첵작전타임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해진 패턴을 복습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른 거였다. 더군다나 이때는 (안준호의) 재임 내내 포스트시즌 개근에 세번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해서 우승도 1번 하는 등 삼성 썬더스의 2차 리즈 시절이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것들이 겹치면서 결국 직전 시즌까지 9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면서 포스트시즌 단골 손님이던 삼성은 단 한 시즌만에 치욕적인 최하위에 최약체 전락이라는 수모를 당하고 만다. 이 때문에 비단 자팀 팬들뿐만 아니라 타팀 팬들로부터도 10개 구단 감독들 중에서 가장 무능한 감독으로 낙인#s-1.1찍혀 아예 감독 취급도 전혀 못 받는 추악한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김상준 감독은 삼성 팬들에게 시즌 내내 '''돌상준'''이라는 굴욕스런 별명으로 불리며 결국 시즌 종료 후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초라하게 사퇴했다.
거기다 그 해 드래프트에선 8순위에 걸렸는데, 삼성에 꼭 필요한지 의문이었는지 '''중앙대 출신'''의 신인인 박병우와 이동하를 뽑으면서 삼성 팬들을 어이없게 만들었는데, 그 의도를 영영 알 수 없게 된 것이 금방 나가서(...)...[8] 결과적으로 떠나는 마당까지 일그러진 제자 사랑만 한 강을준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사실 허재는 김상준이 이렇게 될 것을 아는지 분노를 했지만, 강동희는 안타까워하면서 감싼 후문이 있었다.
이렇게 10년 가까이 봄농구 단골 손님이던 강호 삼성을 불과 한 시즌만에 팀을 밑바닥까지 떨어뜨린데다 후임 감독 마저 수습하기 힘든 심한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농빠들 사이에서는 박수교, 박종천, 이충희, 현주엽 등과 함께 프로농구 5대 졸장으로 취급될 정도로 아예 감독 취급조차 받지 못한다. 그나마 박종천은 여자농구에서 현란한 인터뷰 솜씨와 괜찮은 지도력으로 명예회복을 노리는 등 그나마 평가가 나아지는 듯 했으나, 이 희대의 사기꾼 선수 한 명 때문에 여자농구에서도 평가가 나빠지고 말았다. 이상민 또한 자신의 재임 시절보다 2승 더 작은 최하위 2번과 함께 딱 한해 KBL 파이널 진출 외에는 딱히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스타 출신 이름값으로 인해 두번의 꼴찌 속에도 불구하고 꽤 오래 살아남고 있다[9]
'''결과적으로 중앙대 52연승 신화 이후 이 선택은 최악의 한 수가 되고 말았다'''.
더 못할 꺼라는 강을준 감독이 명지대학교에서 대학종별선수권 2년 연속 우승 이후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으로 어록과 함께 3년 연속 6강 플레이오프로 무영웅론 속의 성리학자가 된것과는 엄청난 비교가 되고 말았다.
후임 감독은 2000-2001 KBL 통합우승을 이끌었던 큰 천둥인 김동광 감독이 재선임되었다. 2003-2004 시즌 이후 우승 실패를 이유로 퇴진한 뒤 또 다른 친정이었던 SBS 스타즈-KT&G 카이츠 감독을 역임했다가 8년만에 60대라는 제법 많아진 나이에 친정인 삼성에 돌아왔다. 자신이 혹독하게 키운 제자인 김상식 수석코치를 데리고 친정의 명가 재건을 위해 비장한 각오를 드러냈다. 1년 전 MBC SPORTS+ 해설위원 시절에도 평소 방송해설 때는 자신도 SBSSBS 스포츠 방송 해설위원이었는지 SBS 스타즈-KT&G 카이츠의 후신인 안양 KGC인삼공사와는 다르게 삼성 썬더스는 모두까기 위엄의 발언을 역대급으로 드러내며 매우 혹독한 비판을 날을 세웠고, 열정을 다해 삼성의 명가 재건을 위해 최선을 다짐했다[10].

2.2.3. 성균관대 감독 시절


2012년 미국 곤자가 대학에서 연수를 받은 후 스포츠 관련 사업을 하면서 잠시 농구계를 떠났었지만, 2014년 성균관대학교 농구부 감독을 맡으며 농구계로 복귀했다. [11] 서울 삼성 썬더스 팬들은 팀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잘도 돌아왔다며 이를 갈고 있다.[12] 현재 성대의 상황이 꽤 막장#s-1.2스러운지라[13] 주위에서는 이번이 김상준 감독의 진짜 역량을 평가하는 장이 될 거라고 보고 있다.
부임 후 첫 3년 동안에는 10위 - 12위 - 12위를 기록하며 중앙대 시절의 평가마저 퇴색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역시 삼성 썬더스 시절 흑역사를 반복하고 있었다.[14]
하지만 그는 프로라면 모를까 아마에만큼은 치밀했고, 마침내 신뢰를 얻었다.
2017년 종별농구선수권대회에서 7년만에 성균관대 농구부를 '''우승'''으로 이끌고 대학농구리그에서도 9승 7패로 대학농구리그 출범 이래 최고의 성적[15]을 거두면서 성균관대 농구부와 본인 커리어의 부활을 알렸다. 그리고 2018년에도 종별농구선수권대회에서 2년 연속 정상에 올랐으며, 대학농구리그에서는 12승 4패로 성균관대를 리그제 전환 후 가장 높은 순위인 3위에 올렸다. '''여기까지만 해도 어쨌거나 대학 무대에서만큼은 유능한 감독임을 증명한 수준이었는데'''......
2019년에는 시즌 초반에 연세대에게 2번 모두 두 자릿수 점수차로 패배하고 경희대와 중앙대에게도 한번씩 덜미를 잡히는 등 리그 절반을 지날 때까지 4승 4패로 고전하였으나, 5월 30일 건국대와의 경기를 시작으로 리그 8연승을 달리면서 지난 시즌과 같은 12승 4패로 2년 연속 정규리그 3위에 올려놓는 것에 성공하였다. 8월 MBC배에서 비록 1점차 승부였으나 연세대에게 정규리그에서의 참패를 설욕하고 4강에 진출한 것은 덤.
그리고 대학농구리그 플레이오프에서도 8강전에서 단국대를 상대로 손쉬운 승부를 거두고 대학농구리그 역사상 첫 4강에 진출하였으며[16] 4강전에서는 무려 '''고려대를 격파하고 결승에 진출하였다'''! 비록 연세대와의 결승전에서 아쉽게 패하기는 했으나 성균관대 부임 이후 여기까지의 성과를 놓고 보더라도 '''중앙대 52연승에 버금가는 업적'''[17]이자, 대학농구에서 '''역대 최고 수준의 명장 반열에 들어설 가능성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
이러한 성과로 2019년 점프볼#s-2이 뽑은 올해의 농구인 지도자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이후 2019 KBL 드래프트에서는 모처럼 성균관대 출신의 1라운드 역사가 새로 쓰이게 되었다. 바로 정훈, 이한권, 진경석 이후 1라운더 배출을 하게 된 것.
그리고 2019 KBL 드래프트에서는 센터 이윤수 선수는 6순위로 DB 프로미에 입단하게 되었고, 2020 KBL 드래프트에서 가드 양준우 선수는 정훈과 진경석 이후 18년만에 로터리인 4순위로 전자랜드 엘리펀츠에 입단하게 되었다. 프로에서의 실패를 아마추어 농구에서만큼은 확실한 지도력으로 털어낸 셈. 김상준 감독 : 뚝심으로 일궈낸 성공시대

3. 여담


이 문서는 리그베다 위키 시절부터 이 당시의 한이 제대로 맺힌 썬더스 팬들에게 잦은 문서 훼손을 당했다가 나무위키로 내용이 넘어온 시점에서도 한동안 수정되지 않고 방치가 되었을 정도였다. 스타플레이어와 마케팅 면에서 같은 잠실팀 SK에게 밀려 팬덤이 크다고 하기 힘든데다 김상준 시대의 여파가 오래 지속돼서 있던 팬들도 떨어져나갔던 썬더스 팬들이 얼마나 크게 화가 났으면 반달 면에서 어지간한 인기 팬덤급의 활동량을 보여줬는지 짐작이 간다.
중앙대학교 감독 시절 현직 축구인이자 당시에도 축구부였던 김신욱에게 농구부로 오라고 제의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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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30일에 방송된 MBN 자연스럽게에서 정경호, 김승기, 신기성과 함께 중앙대학교 선배 허재의 친분으로 출연했다.

4. 관련 문서


[1] 졸업반 시절 참가한 1990-91 농구대잔치 2차대회 도중 김영래와 함께 한국은행 행원연수에 참석하는 바람에 중앙대의 2차대회 탈락을 막지 못했다.[2] 당시에는 1시즌 정규리그 경기 수가 45경기였다.[3] 그러나 여기에는 이견이 있는데, 전임 감독이 쌓은 자원을 바탕으로 성적을 냈지만 뒤를 이을 선수 스카우트에 소극적이어서 중앙대 농구부의 침체를 만들었다. 덧붙여 최전성기를 만든 2000년대 후반 ~ 2010년대 초반 멤버 중 임동섭, 정성수, 최현민을 뺀 나머지 선수들은 2015년 토토 사건에 연루되었다.[4] LG 감독으로 말하자면 박종천과 거의 비견된다.[5] 한국농구에 있어서 대학의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는 마치 농구계의 한일전 관계다. 농구대잔치와 프로농구에서도 전자 계열과 연고지로 인해 또 한번의 한일전 관계가 있다. 현대와 삼성이 이런데 현대가 해체된 이후 KCC가 라이벌 구도를 하지만 조금 약해진 측면도 없지는 않다. 이렇게 되면서 현대가 전자였는지 LG와 전자 라이벌 구도에 수원시를 떠나 서울로 입성한 뒤 SK와 서울 라이벌 구도로 바뀌고 말았다.[6] 다만 2013-14 시즌, 김동욱이 극도로 부진하며 이 선택이 신의 한 수라고 평가되기도 했으나, 오히려 15-16 시즌부터 부활하면서 핵심 전력으로 활약하며 우승을 차지하면서 전혀 의미없는 얘기가 되었다.[7] 이 과정에서 2011년 홈경기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8] 그나마 박병우는 삼성과 향후 동부에 있을 때 나름 밥값은 했으나, 이동하는 시즌 직전에 농구를 그만두고 만다.[9] 하지만 김상준 전 감독과 이상민 감독 사이에는 정말 큰 차이가 존재한다. 이상민 감독은 명가를 딱 1년만에 부숴버린 김상준 전 감독과 어긋나 있는 팀으로 리빌딩 대신 최대한 짜내서 성과를 보는 쪽을 선택한 김동광 전 감독을 거친 후 강해지지 못해 상민이형 받아!차재영의 자유투 에어볼이 '''주전급에서''' 나오는 무지막지한 팀으로 꼴찌를 했다. 두 번째 꼴찌 또한 김상준 이후 투자 의지를 거의 상실해버린 팀이 기둥 라틀리프가 나가고 김준일이 군입대한 뒤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 명장이라 할 수 없는 이상민의 팀빌딩만 갖곤 무리였던 쪽에 가깝다. 물론 두 번의 역대 최악급 시즌은 이상민 감독에게 큰 책임이 따르는 일이겠지만, 애초에 망가진 땅에서 바로 좋은 작물이 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반면 김상준 전 감독? 전임 감독 안준호의 결별 이유가 무려 PO 탈락이었던 강팀을 오롯이 자기 힘으로 망쳤다. 핵심 전력 강혁과 김동욱을 트레이드해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선수로 바꾼 것도, 빠른 농구를 한다면서 신장 223cm의 피터 존 라모스와 그때부터 이미 고령이던 아이라 클라크를 외국인선수로 놓고 농구를 쉬었던 김승현을 주전으로 쓴 것도 누굴 탓할 여지가 없는 김상준 감독의 선택이다. 이 썬더스 역사상 최악의 선택 이후 명가에 강팀이었던 삼성은 KBO한화 이글스롯데 자이언츠K리그대대강광 내지는 V-리그의정부 KB손해보험 스타즈에 비견할 만한 최약체가 됐고, 없는 전력에 최선을 다해 6강을 보낸 김동광 전 감독과 시즌 삭제급의 리빌딩으로 4강 및 챔피언 결정전에 나갔던 이상민 감독도 현재까지 이 약체팀 타이틀을 도통 벗겨내지 못하고 있다. 전자 라이벌인 LG 또한 현주엽으로 처참하게 몰락한 뒤 조성원의 시련사로 이어지는 걸 보면 감독 선임이 그만큼 중요하다.[10] 여기서도 이상민은 원래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예전 자신의 삼성 감독 후임이었던 안준호를 코치로 두듯이 자신이 양보를 하면서 코치로 선임을 했다. 김동광 감독의 진정한 참모는 이민형김상식이다.[11] 성균관대는 축구부 감독 선임 과정에서도 2급 지도자 자격증만 있는 설기현을 감독으로 선임하는 등, 야구부와 배구부 빼고 다른 스포츠부는 다 그저 그런 개막장 행보를 보여주'''었'''으나, 다행히 설기현 감독이 2016년 이후 불필요한 훈련을 폐지하는 등을 통해 성과를 거두고 있는 중. 그러나 정기전도 없다 보니 대다수 학생들은 대학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상황.[12] 후임이었던 김동광 감독조차도 이 양반이 질러놓은 것들을 수습만 하다가 자진 사퇴했다. 괜히 삼성팬들이 울화가 터지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13] 낙생고등학교 3을 앞세운 박성근 감독 시대에 우승을 한 번 하기는 했지만(2001년 MBC배), 연이은 스카웃 실패와 박성근 특유(?)의 폭력은 팀을 나락으로 몰아넣었고(오죽하면 천대현, 박대남 등이 휴학 후 타 대학으로 편입했을 정도) 이후 과감히 단행한 스카웃 역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 박성근의 뒤를 이은 조성태 감독은 사람만 좋은 무능한 지도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결국에는 팀이 해체 위기에 몰렸다가 간신히 살아났다.[14] 2015년 대학농구리그에서는 16전 전패. 그런데 이 시기는 그럴만했던게, 부임 당시에 팀의 훈련 프로그램도 제대로 잡혀있지 않았던 등 말 그대로 팀 상태가 개판 오분전이였다고 한다. 선수들의 체력 문제도 심각했을 정도로 부임 당시에는 김상준 본인이 경악을 했을 수준이었다고.[15] 더불어 처음으로 5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16] 2018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이윤수가 불의의 부상을 입어 결장한 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중앙대에게 패배.[17]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김상준이 부임하기 전 성대 농구부는 해체 직전에 몰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