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백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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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포의 극, 참학의 절, 마도 백백교의 죄상'''[1]

독수에 참살된 교도

판명자만 백오십팔명

추정피살자 남녀 사백여명

범죄 사상 공전[2]

의 참기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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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백교 사건을 보도한 1937년 4월 13일자 조선일보. 사진 중앙의 인물은 사실 교주 전용해가 아닌 살인을 주모한 백백교의 총 참모격인 이경득(李敬得)의 사진이다.

1. 개요
2. 전말
2.1. 탄생
2.2. 범죄
2.3. 최후
2.4. 전용해의 수급 보관 관련 이슈
2.5. 잔당
3. 기타
3.1. 대중매체에서
4. 둘러보기


1. 개요


1920 ~ 30년대 일제강점기가평에서 창립된 사이비 종교 집단이다. 이 사이비 종교의 교주의 지시에 따라 300여 건이 넘는 살인사건이 자행된 것으로 유명하다.

2. 전말



2.1. 탄생


그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동학에서 파생된 종교이며, 전신은 백도교이다. 정확히 말하면 백도교의 교주인 전정운[4]이 죽고 나서 교주 자리를 놓고 세 아들 간의 다툼이 일어났다. 그리고 세 아들은 각각 인천교, 백백교, 도화교를 만들어 독립한다. 그러다가 1930년, 죽은 전정운이 자신의 첩 4명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것을 비롯해 여러 범죄행각이 드러나면서, 이들 사이비 종교들은 한 차례 철저하게 박살난다.
그러던 것을 무사히 도망쳤던 차남 전용해(1895년생으로 추정)가 돌아와 비밀리에 백백교를 재건한다.
입교식은 돈 1원을 내고 행하는데, 먼저 마음속으로 기도를 한 후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세 번 손을 들었다 놓은 후

'''제제자 제제자 천혼도우 제여자 제여자 지후도우도 신인천주 임조화상고령천영주전장생노도학삼층삼계사신고우 삼층삼계현신도우(諸弟子 諸弟子 天混禱于 諸女子諸女子 地后禱又禱 新人天主 荏造化尙告靈天靈主前長生勞禱學三層三階司神告于 三層三階玄神禱于)'''

라는 이상한 주문을 7번씩 세 차례 외우는 것이었다. 입교 후에도 백백교에서는 성별에 따라 외우는 주문이 달랐는데, 성인 남자가 외우는 주문은 아래와 같았다.

'''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白白白衣衣衣赤赤赤感應感感應하시옵崇誠)'''

위의 해괴한 주문만 외우면 무병장수한다고 한다.[5] 성인 여자가 외우는 아래의 주문은 그래도 위 주문보단 나은 것이라 세간에는 덜 알려졌다.

'''백의부인선선감감응(白衣婦人善善感感應)'''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용으로는 '동자주문', '선녀주문'이라고 해서 각각 '백응선(白應善)', '백선응(白善應)'이라는 3글자짜리 주문을 따로 외워야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팔도(八道)주문, 몇백 번을 외운다면 신을 볼 수 있게 된다는 통신(通神)주문, 옥황상제 다음 가는 능력을 부여해준다는 비장의 주문 등등도 있었다. 옛날 뉴스 아카이브를 잘 찾아보면 나오는데 어감들이 하나같이 이상하다.
종말의 날에 서양은 불, 동양은 물의 심판을 받아 인류가 멸망한다는 종말론을 내세웠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백백교가 마련한 본소에서 생활하다가 물의 심판 날에 금강산의 피수궁(避水宮)[6]으로 옮겨가면, 대원님(백백교 교주)이 불로장생하고자 하는 자는 동해 천리 밖의 신대륙 영주로 보내주고, 부귀영화를 원하는 자는 계룡산으로 인도한다는 말 같지도 않은 교리를 설파했다. 그러나 시대가 혼란한 탓인지 그 교세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백백교는 홍보를 위해 폐광이 된 금광에 금을 숨긴 다음에 전용해의 힘으로 금광이 다시 터졌다는 식으로 사람을 모았다. 금광 드립은 홍경래의 난 당시에도 나왔던 고전적 수법. 이는 조선시대 후기 각종 예언서들이 횡행할 때 유행한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7]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백백교의 중심 교리는 '한 사람(교주)의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 하자(一之白將欲白之於 天下地).'는 것으로, 이는 유불선 3교가 모두 성쇠를 거듭하며 3천년을 흐르는 동안 그 본질이 쇠퇴하고 거죽만 남았고, 이제 '백백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나설 때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가까운 장래에 조선이 독립하여 백백교가 통치하리라는 주장까지 했다.

2.2. 범죄


교주 전용해는 학식이 없는 무지한 인간이었지만,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마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자칭하며, 말 그대로 혹세무민했다. 불로장생과 부귀영화를 미끼로 신도들에게 과도한 헌금을 요구하는 등 사기행각을 벌였다. 또한 총참모격인 이경득과 문봉조 등 간부들을 각지로 보내 예쁜 딸을 가진 부모들을 골라서 백백교에 입교시킨 뒤 그 딸을 전용해의 시녀로 바치게 하여 성폭행했다. 전용해는 이렇게 끌어들인 젊은 여성들을 항상 첩으로 거느리다가 싫증나면 살해하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이외에도 배교자, 교단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도 함께 살해했다. 나중에는 이것이 더 심해져서 신자가 너무 많이 몰려서 먹여 살리기 힘들다고 죽이기도 하였고, 경찰에게 들킬까봐 죽이기도 했다. 또한 내부 다툼으로 부교주를 살해하고 매장까지 했다.[8]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백백교 내부에는 이른바 '부엉이 부대[9]'라고 불리는 첩보원들이 있어 신도들의 행동을 비밀리에 감시했으며, 신도들의 이상행동을 포착하면 그 즉시 간부들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그리고 '부엉이 부대'의 보고를 받은 간부들은 행동대원들을 시켜 신도들을 살해했다.
당시 체포된 24명의 간부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곤 학교의 문턱을 밟아본 적도 없었다.[10] 그래서 그런지 모두들 교주인 전용해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를 '신의 아들'로 믿고 그의 말에 철저하게 복종했다.[11]
그리고 그의 말에 따라 살인을 저질렀다. 또한 가족 신도들을 지역별 지부에 흩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도망치면 다른 가족들이 죽임을 당할까봐 복종하는 경우도 있었다.[12]

2.3. 최후


조부와 부친이 백백교에 빠져 여동생을 교주에게 첩으로 바치고 전재산을 빼앗긴 유곤룡이란 청년이 교주 면담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흑막이 폭로되었다. 이에 대해 자세히 적힌 신동아 기사
1937년 일본제국 경찰은 8개월에 걸쳐 전용해의 아지트와 전국 각처의 백백교 비밀장소에서 '''시체 346구'''를 발굴했다. 전용해는 몇 달 후 솔밭에서 동쪽을 향해 누운 채 칼로 목을 찌른 사체로 발견되었으나, 얼굴을 산짐승이 먹어치운 탓에 신원 확인이 어려워서 세간에는 신출귀몰한 전용해가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사람을 잡아다가 자기의 옷을 입히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하고 도망쳤을 것이란 추측이 나돌았다. 하지만 전용해의 자식이 직접 보고 아버지라고 울부짖었다는 기록이 있어 자살한 것으로 판정.
이 일은 당시 영어권 기사로도 보도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당시 잡힌 사람만 해도 100여 명이 넘고 확인된 살인만 해도 300여 건이 넘는지라, 수사와 예심을 준비하는 데만 3년이 걸려 1940년에 첫 공판이 열렸다.[13]
재개된 공판에는 무수히 많은 방청객들이 몰려들었고, 연일 언론에서 백백교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당시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살인 행각보다는 교주 전용해의 무수히 많았던 첩들과 음란한 행위와 관련된 가십기사가 대부분이었다. 하긴 첩이 60여 명이었으니... 1941년 1월에 마무리된 백백교 사건의 선고 공판 결과 혼자서 '''170명'''을 죽인 김서진, '''167명'''을 죽인 이경득, '''127명'''을 죽인 문봉조 등 간부급 살인마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나머지 십수 명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되면서 희대의 살인마 사교 사건은 막을 내렸다. 다만, 위의 간부급 살인마들에게 진짜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곧 훨씬 이 벌어졌기 때문에 이런 놈들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기 때문이다.[14] 징역형을 받은 다른 간부들은 8.15 해방과 함께 1945년 모두 출옥하여 아래에 언급된 잔존세력을 만들거나 다른 사이비 종교에 관여한 듯하다.
그 이후 한국 사이비 종교사에서 가장 손꼽히는 사건이 되었다. 사이비 종교 관련 사건이 나올 때마다 상당히 자주 언급되며 다시 조명받곤 한다.

2.4. 전용해의 수급 보관 관련 이슈


백백교 사건이 일단락된 후, 일제는 범죄형 두상에 대한 연구 목적으로[15] 교주인 전용해의 머리를 잘라내서 포르말린에 절여 범죄형 두상 표본으로 만들었다. 전용해의 머리는 해방 이후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관되었다. 1992년작인 영화 《백백교》의 끝부분에서도 전용해의 머리가 보관되고 있다고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잘 알려진 사실이기는 했으나 흐르는 세월 속에 전용해 수급 표본의 존재는 점차 잊혀져 도시전설 비슷한 형태로 세간을 떠돌았다.
그로부터 세월이 제법 흐른 2004년, SBS TV 프로그램인 백만불 미스터리의 42회 '국과수 X파일-일제시대 사이비 종교 백백교의 비밀'을 통하여 그 존재가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최초로 전용해의 수급으로 만든 액침표본의 모습이 전파를 타고 공개되기까지 하였다.[16]
그러다가 2010년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인 혜문스님이 인체표본 보관 중지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한 차례 이슈가 되었다.[17]
이와 관련해서 국과수에서는 이 머리가 전용해의 것이 맞는지, 왜 이 머리가 보관되고 있는지 자세한 이유를 모르며 단지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조만간 적법한 절차를 거쳐 처리하겠다고 공언하였다. 2011년 10월, 폐기 예정임을 발표.# 2011년 10월 25일, 수급 표본은 화장되었고, 이틀 후 봉선사에서 위령제도 지내줌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전용해가 희대의 용안이었다는 것도 유명한 소문이다. 당시 사람들에 의하면 그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신용이 생기고 '이 사람을 따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할 정도였다고.[18] 다만 일부의 증언에 따르면, 전용해는 자신의 얼굴을 아무나 보면 그 기운을 감당치 못해 죽게 된다면서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고도 한다. 심지어 함께 잠자리까지 같이 한 여자들도 전용해의 얼굴을 함부로 보지 못하게 해서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가까운 측근이나 가족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오히려 전용해가 신도들과 추종자들을 그렇게 휘어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능력이 천부적이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9]

2.5. 잔당


백백교 관련해서 당시 처형되지 않은 간부가 일제가 패망하고 6.25 전쟁을 거치면서 유야무야 물러나게 되고, 백백교를 재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당시에도 사람들에게 살인종교로 몰려 별다른 성장을 하지 못했고 이 자가 1978년에 죽으면서 흐지부지되었지만, 잔존세력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백만불 미스터리에서 백백교 관련 내용을 방송한 후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시신을 돌려달라는 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워낙에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사건이었고, 교주가 죽은 데다가 관련 간부들 대부분이 사형당한 터라, 재건되었을리 만무하다. 설사 재건되었더라도 동일한 이름을 내세울리 없다. 애당초 무슨 사이비 종교 관련 사건만 터지면 무조건 '백백교'가 언급되는 판국이니...
한편 2010년의 전용해 두개골 보관 중지를 요구하는 소송과 관련하여 '백백교의 신도들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교주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사실 무근이다.
하지만 백백교가 망한 뒤에도 백백교 같은 짓거리를 하는 사이비 종교는 성행했다. 6.25 전쟁 이후 혼란한 상황에서 이런 사이비 종교들은 불길처럼 번져나갔고, 여러 사회문제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1962년의 용화교[20][21]와 1974년 동방교[22] 등... 지금도 이런 종교가 존재한다. 사이비 종교의 관련 항목 참고.


3. 기타


2006년에 출간된 전봉관 교수의 『경성기담』 중 '살인마교 백백교 사건' 파트를 보면 당시 살인용의자의 재판내용 등이 나와 있다.
경기도 가평군 북면의 석룡산 부근에 백백교터가 있다. 전용해가 이곳에서 처음 백백교를 세웠으며, 접근하기도 어려운 곳이라 지금은 딱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다. 백백교 잔당이 머문 奧地 겨울의 끝자락도 좋은 산[23]
한편 백백교 사건은 사실 일제의 소행이다부터 일제가 방조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블로거 등이 있는데, 백백교는 명백한 살인 사이비종교이고 그 증거들이 너무나 명백한데다, 민족이나 문화를 가리지 않고 혹세무민 살인종교를 용인하는 통치세력은 없다.[24] 한편 백백교 간부들이 지역 일본제국 경찰에게 뇌물을 먹였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미 백백교는 한 차례 전례가 있었기에 소멸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고, 이 때문에 한 지역에 신도가 늘어나자 경찰에게 안 들키려고 늘어난 신도를 살해한 전례도 있어서 그렇게 신빙성이 높은 설은 아니다. 무엇보다 전용해는 신도들 앞에서 언젠가 자신이 신통력으로 일제를 몰아낸다고 호언장담했기 때문에,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 후 일제 입장에서는 도리어 뿌리 뽑아야 할 반사회단체로 더욱 철처히 수사했다. 즉 일제보다 더한 초악질이었다
2014년 사이비 교주 유병언의 시신이 발견된 후, 백백교 교주 전용해가 잠깐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시신 발견 경위의 유사성 때문에 닮은 꼴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3.1. 대중매체에서


당시에는 물론이고, 오늘날 기준에도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기에 영화와 소설화되기도 했다.
이 사건을 처음으로 다룬 작품은 구보 박태원의 장편소설 『금은탑』이다. 1938~39년 조선일보에 『우맹』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으며, 단행본은 1949년,『금은탑』으로 출간되었다.[25] 백백교의 재산갈취, 여신도 농락, 살인 행각과 한 청년에 의해서 무너지는 과정을 세세히 그렸다.
1980년대말 소설 『백백교』라는 소설이 출간되었으나 극단적인 19금 묘사로 서사성이 부족하다.
2014년 도진기의 추리소설 『유다의 별』도 백백교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은 교주 전용해의 죽음에 대한 의혹과 관련하여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고있다.
백백교 사건의 영화화는 두 차례 이루어졌다. 1960년작은 그냥 계몽성 극화 수준이고 허준호의 아버지 허장강이 전용해로 나온다. 1992년 작은 이대근 주연[26]이고 나름 제대로 보여준다. 단 어른의 사정으로 일부 내용이 검열삭제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신흥종교문제 연구소장이었던 탁명환의 자료 제공 및 자문을 통해 만들어졌다. 특히 주색잡기에 몰두하는 불한당 전용해와 얼굴을 가리고 눈빛과 목소리만으로도 광기넘치는 사이비 교주를 동시에 보여준 이대근의 연기가 일품이다. 그러나 사실과 다른 내용도 많고, 그 당시 영화수준답게 영화의 초점이 전용해와 그 일당들의 엽색행각(...) 위주로 흘러가는게 아쉽다. 영화는 전용해가 자살을 빙자해 사실은 아직도 살아있지 않았을까 라는 찜찜한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다만 영화적 허용으로 고증에 안맞는 장면도 많다. 영화는 유곤룡이라는 청년이 백백교에 입교를 빙자한 실체를 밝히고 누이동생을 구하기 위해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환심을 사는 내용이며 동시에 전용해의 사이비 행각, 그 부하들의 각종 일탈, 범죄행위 등이 교차된다. 하지만 유곤룡이 백백교의 실체를 밝힌 것은 맞지만 영화 상 감금당한 누이 유정전은 이미 전용해의 애첩으로 백백교에 크게 심취한 인물이었다. 또한 유곤룡과 유정전의 아버지도 초반에 살해당하지만 실제로는 젊은 시절부터 재산과 딸을 열심히 바쳐 뒷방 늙은이나마 멀쩡히 살아 있었고, 훗날 법정에서 백백교의 역사를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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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한혜연의 미스터리 오컬트 만화 『애총』 속 배경 도시인 Y시가 백백교 사건이 벌어졌던 곳으로 설정되어 있다. 또한 프롤로그에서도 백백교 사건이 나온다.

천일야사의 어사 박문수 코너에서도 백백교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이는 '''새하늘교'''라는 사이비 종교가 등장한다. 기도할 때 괴상한 주문을 외우는 점, 순결한 처녀를 교주를 위한 제물로 바친다(=살해한다)는 점 또한 백백교와 같다.[27] 다만 이름인 새하늘교 자체는 신천지(新天地)의 직역으로 보인다.[28]
슈퍼스트링에서도 대놓고 모티브인 종교 집단으로 등장한다. 문서 참조.
차트를 달리는 남자 사이비 종교편에서 3위에 달하는 기염을 토했다. 참고로 2위는 옴진리교, 1위는 인민사원.
MOTHER 2의 사이비 종교인 블루블루교의 모티프로 추정된다.
컬트영화 차우에서 잠깐 언급된다. 장항선이 맡은 베테랑 엽사 천일만이 산장에서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일제시대 사이비 종교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가 신도를 2천명이나 죽였다. 이후 경찰에 쫓기며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결국 이 산돼지가 사는 산자락 어딘가에서 자살을 했는데, 나중에 찾았을 때는 시체의 머리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몸뚱아리는 산돼지에게 죄다 뜯어먹힌 것.
군산에 있는 자영업 방탈출 모던타임즈에 백백교라는 이름으로 된 테마가 있다. 해당 방탈출 카페가 근현대사를 메인 테마로 다루고 있는 만큼 본문의 백백교에 대한 내용을 토대로 다룬 테마라 볼 수 있다. 약간의 그로테스크 요소가 있으니 체험 시 주의가 필요하다.

4. 둘러보기



[1] '흉포의 극'은 흉포함이 극에 달했다는 뜻이고, '참학의 절'은 '참학함의 절정'이란 뜻이다.[2] 전에 없던[3] 참혹한 기록[4] 녹두장군 전봉준의 친척이긴 하나 전봉준과는 달리 동학의 이름을 팔아 신도들을 수탈하고 혹세무민을 하다가 전봉준에게 쫓겨난 전력이 있다.[5] 이런 종류의 '주문 수행'은 동학 등 구한 말~일제시대의 신흥 종교들 사이에선 흔했다. 대개 무속이나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6] 이름부터가 '물(水)을 피하는(避) 궁전'이다.[7] 세상을 평화롭게 할 정도령, 진인(眞人)이 세속(조선왕조)의 압제를 피해 바다 멀리 어느 섬에 은거하며 힘을 키우다가, 때가 되면 뭍으로 돌아와 이상세계를 만든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바다섬(海島)의 진인(眞人)'이라 하였다.[8] 백백교 영화에서 배우 이춘식이 맡은 대법사가 이 인물. 이 사람은 극중에서 교주의 재물을 몰래 탐하고, 백백교의 교리도 이해 못해 신도에게 반박당하는가 하면 교주의 여자랑 놀아나는 등 말그대로 죽을 짓만 골라 하다가 끝내 살해당한다.[9] 주로 밤에 행동한다고 해서 붙은 명칭으로 대부분이 10대 소년소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10] 사실 이때는 문맹률이 70~80%대에 달했던 시절이고 그나마도 학비가 비쌌기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초졸 정도만 해도 잘 다닌 축에 속했다.[11] 훗날 조사받던 이경득과 문봉조 등이 진술한 바, 자신들도 이런 일에 회의감을 느껴 도망갈까 생각하면 그때마다 전용해가 다 꿰뚫어보고 있다, 허튼 짓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한다. 게다가 이경득은 전용해의 잔인함과 포악함을 알고 있어 울며 겨자먹기로 따랐다고. 나중에 전용해가 죽었다고 발표됐는데도 조사과정에서 늘 대원님 대원님하고 존칭을 붙였다고 한다.[12] 나중에 가면 살인을 즐기고 무덤덤해졌는지 문봉조는 자신의 형까지 죽였고, 사람을 죽인 후 그 시체를 자전거에 숨기고 백주대낮에 경성 한복판을 질주했다.[13] 이와 관련해서 일제가 의도적으로 수사를 중지하고 조금 잠잠해진 뒤인 1940년 말에 수사를 재개했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하지만 백백교 교리 중에 조선이 장래 독립해서 백백교의 통치를 받는다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에, 치안유지법이 적용된 사안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확실한 수사가 진행될 수 있었다(...).[14] 피해자 전원이 조선인이므로 이들을 죽이든 살리든 일본인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15] 골상학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유사과학이 되었다.[16] 구글링을 하면 해당 캡처본을 볼 수 있지만 혐짤이므로 심약자, 노약자, 임산부, 어린이는 검색을 자제하길 바란다. 실제로 보면 코 밑 부분의 살점은 남아있지 않은데, 이는 전용해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당시에 이미 산짐승에게 뜯어 먹히는 등 얼굴 부분이 훼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화질이 좋은 캡처본은 찾기 어렵다.[17] 일제 잔재 청산과 관련해서 벌인 소송으로, 교주 수급뿐만 아니라 기생 명월이 생식기 표본 등을 모두 폐기할 것을 주장했다. 연구용으로 보관되는 것도 아니기에 반문명적이고 반인륜적이라는 것. 이들은 결코 백백교 사건이 일제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언급하진 않았다.[18] 하지만 현존하는 사진은 없다. 워낙 철저하게 행동해서 자신의 사진 따윈 남기지도 않았고, 16개의 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의 시체도 얼굴이 심하게 훼손당해서...[19] 재판 당시에 전용해 측근의 증언에 따르면, 전용해는 부하들이 마음속으로 조금이라도 불만을 품으면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내 꾸짖었다고 한다. 그래서 백백교의 신도들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신통력이 있다고 믿으며 두려워했다. 추리력이나 타인의 심리를 파악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 직접 보지도 않은 것을 사실에 가깝게 짐작해내 주위의 놀라움을 사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전용해도 그런 유형의 인간이었던 듯하다.[20] 현 대한불교 용화종. 전술에는 용백교라고 적었는데, 이 용화교의 오기로 보인다. 교주인 서백일의 성범죄와 경제적 착취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고, 1966년 과거 신도였던 이에게 교주가 살해당하면서 교는 몰락하여 불교종파의 일부가 되었다.[21] 교주인 서백일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전적이 있었는데, 본인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 과거 백백교 간부였던 게 아닌가-라는 의혹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22] 기독교대한개혁장로회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던 이단. 유흥가에 청소년들을 보내 껌팔이를 시키는 등 착취로 물의를 일으켰다. 살인지령에 재산갈취 등... 60년대에도 문제가 되어서 수사를 받았지만 70년대에 와서 해결되었다.[23] 백백교의 지부는 비밀리에 만든 비밀지부인지라, 사람들이 잘 접근하기 힘든 곳에 있었다. 거기다가 대부분 현재 북한 지역이다. 또한 전용해의 집은 경성부 앵정정일정목 49(京城府 櫻井町一丁目/게이조후 사쿠라이쵸 잇쵸메 49), 현재 인현동1가 지역에 있긴 하지만, 그냥 주택가다. 전술처럼 교회같은 게 들어선 적은 없다.[24] 당시 일본은 국내에서조차 천율교 등 국수주의적 종교도 사이비라면 철저하게 단속했다.[25] 박태원은 이 시기 남한에 있었으며, 6.25전쟁 중 월북한다.[26] 잘 보면 김형자문회원, 김영인(심영 배우와 동명이인),이춘식(정도전의 노비 똘복 역), 조형기 등 은근히 중견 탤런트들도 많이 나온다.[27] 그리고 이 에피소드에서 박문수의 조수인 이기자가 제물로 바쳐지면서 목숨을 잃는다.[28] 교주의 이름인 희만 또한 신천지 교주인 만희의 이름을 뒤집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