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트 슈나이더
1. 소개
독일의 前 국가대표 축구선수. 현재는 축구 에이전트로 일하고 있다.
미하엘 발락과 함께 2000년대 초반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중흥기와, 암흑기의 독일 축구를 지탱했던 선수로 주 포지션은 오른쪽 측면 미드필더지만 중앙 미드필더로도 활약해 좋은 기량을 보여주었다.
다만 슈나이더가 맹활약하던 시기가 워낙 독일 축구의 암흑기인지라... 상대적으로 국내에서의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워낙 헤딩머신과 짐승 그리고 기럭지 주장, 이 3인방의 포스가 워낙 절대적이여서....[1]
2. 플레이 스타일
레버쿠젠 시절 4-1-4-1에서의 메짤라 포지션과 2006 독일 월드컵에서 독일의 4-4-2와 4-3-1-2의 박스 투 박스 포지션도 소화 가능한 선수. 정확한 패싱 능력과 드리블 능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특히 순간적인 가속으로 상대 선수를 제끼는 드리블 능력이 매우 일품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결승에서 미하엘 발락의 결장으로 팀의 무게가 줄어들었음에도 발락의 자리에 배치된 슈나이더는 뛰어난 중원 조율로 전력상 브라질에 밀렸음에도 상당히 대등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질베르투와 클레베르손을 상대로 보여준 순간 드리블로 두 명을 제치는 모습은 압권. 또한 수비시 대인 방어 능력도 좋았다. 플레이메이커와 박스 투 박스 등 미드필더의 여러 역할을 소화가 가능할 정도로 풍부한 활동량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무서운 점은 정확한 킥 능력이다. 2001-02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루시우의 동점골을 어시스트 할 때 슈나이더가 보여준 날카로운 크로스가 일품이였다. 미하엘 발락, 토어스텐 프링스. 팀 보로프스키 와 함께 2000년대 독일축구 내에서 다재다능함을 갖춘 만능형 미드필더이다.
물론 단점도 존재한다. 일단 피지컬이 그리 강하지 않고 킥력이 정확하지만 대표팀에서 전담 키커가 아니였다.[2] 사실 슈나이더는 킥력보단 빠른 주력으로 상대를 제끼는 드리블 능력이 더 좋은 선수로 경기 조율보단 순간 침투로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더 능숙한 선수다. 일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게 슈나이더를 가리켜 독일 대표팀의 키맨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2002년 한일 월드컵 결승에서 플레이메이커로 나선 적이 있지만 이는 후방에 옌스 예레미스가 수비형 미드필더로 저지선을 형성하고, 예레미스와 같이선 디트마어 하만의 완급조절과 마르코 보데, 토어스텐 프링스의 좌우 윙백의 활동량으로 당시 슈나이더는 프리롤을 맏아 브라질 수비수를 휘저으면서 위협했다. 이 후 레버쿠젠에서는 경기 조율 중심의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부여받았으나 대표팀에선 정반대로 전통적인 윙어를 맏았다. 간혹 독일 대표팀이 다이아몬드 4-4-2를 사용할 때도 토어스텐 프링스의 원볼란치에 미하엘 발락을 플레이메이커로 두고 슈나이더는 슈바인슈타이거 혹은 파비안 에른스트나 팀 보로프스키와 함께 좌우 윙어를 담당했다.
3. 커리어
3.1. 클럽 커리어
분데스리가 2부리그인 카를 차이스 예나에서 장기간 활약을 하다. 95 시즌부터 두각을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98시즌 1부리그인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한다. 프랑크푸르트에서도 거의 전 경기에 출장할 정도로 팀 내에서의 절대적인 비중을 자랑했으나 당시 프랑크푸르트는 15위를 할 정도로 팀 전력이 약한 상태였고, 바로 1년 만에 레버쿠젠으로 이적한다.
1999년 바이어 04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슈나이더는 바로 주전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팀의 절대적인 비중을 자랑했다. 특히 제 호베르투 - 미하엘 발락 - 카르스텐 라멜로프 - 에메르송 - 베른트 슈나이더의 미들진은 분데스리가 정상급 전력을 보였다. 1년 후 에메르송이 AS로마로 떠나지만 이 후 루시우, 일디라이 바스튀르크, 한스 외르그 부트, 디미타르 베르바토프까지 가세하면서 레버쿠젠은 분데스리가, 포칼, 챔피언스 리그에서 선전했고 슈나이더 역시 최상급 경기력을 선보이면서 팀은 트리플크라운까지 바라볼 수 있었을 정도.. 하지만 시즌 후반 막바지 옌스 노보트니 등 주전 선수들의 줄부상 속에, 3개 대회를 치루는 강행군을 극복하지 못하고 분데스리가 준우승, DFB-포칼 컵 준우승 그리고 어렵게 올라온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레알 마드리드 CF에게 1-2로 패하면서 트리플 러너업을 달성하게 된다.
이 후 미하엘 발락, 제 호베르투, 루시우,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등 톱 클래스 선수들이 줄줄이 팀을 떠난 상황에서도 꿋꿋이 레버쿠젠을 지켰다. 특히 2003-04 시즌 슈나이더의 크로스와 베르바토프의 마무리 콤비는 분데스리가 최고의 콤비네이션이였고, 이 시기 득점력도 뛰어나서 리그에서만 10골을 넣게 된다. 이러한 활약속에 레버쿠젠은 다시 UEFA 챔피언스리그로 복귀하게 되고 조별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2위로 밀어내고 조 1위로 16강까지 진출한다.
2006년 이 시기 슈나이더는 상당한 경기력을 보여주는데 2006-07 시즌 키커지 평점 1점만점을 받은 경기가 무려 5경기나 된다. 그 스텟 커리어 하이를 찍은 2003-04 시즌조차 평점 1점을 받은 경기가 한 경기도 없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시즌 슈나이더 역사상 최고의 포스를 보여준 시즌. 이 당시 FC 바르셀로나의 스카우트 타겟이 되기도 했다.
이후 베르바토프가 2006 월드컵 직후 토트넘으로 떠나지만, 1.FC 뉘른베르크에서 영입한 신예 슈테판 키슬링과의 환상적인 호흡을 선보인다. FC 샬케 04와의 6라운드 경기에서 곤살로 카스트로와 평점 1점을 받는 만점 활약을 펼쳤고, 알레마니아 아헨과의 18라운드 경기에선 0-2로 뒤진 상황에서 2골을 떠트리는 맹활약으로 보로닌의 1골까지 더해져 3-2 역전승을 이루어냈다. 활약의 백미는 VfB 슈투트가르트와의 24라운드 경기. 특히 세르다르 타스치, 마리오 고메즈, 사미 케디라등 신예들로 무장한 VfB 슈투트가르트를 상대로 플레이메이커로써의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며, 보로닌과 주안의 골을 어시스트했고 3-1로 승리를 거두며 이 경기 최우수 선수로까지 선정이 된다.
하지만 2008년에 당한 허리 부상으로 인해 2008-09 시즌을 거의 통으로 날리게 되었고, 시즌 종료 후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3.2. 국가대표 커리어
'''미하엘 발락, 올리버 칸, 미로슬라프 클로제, 옌스 노보트니와 더불에 독일 축구의 암흑기에 나타난 난세의 영웅'''
프랑크푸르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슈나이더는 당시 '악동' 이라 불린 마리오 바슬러를 대신해 1999년 국가대표에 선발된다. 1999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 뉴질랜드 전을 통해 국가대표에 데뷔했지만, 이 시기부터 독일 축구는 쇠락의 길을 걸었고 본인도 별다른 활약을 못보여주었다. 결국 유로 2000에서 당시 독일 축구의 희망이라 불린 세바스티안 다이슬러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엔트리에 제외되었으나, 다이슬러가 부상으로 한일 월드컵 직전 엔트리에서 탈락하면서 레버쿠젠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다시 국대에 승선했다.
최고의 전성기를 보인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었는데, 킥 능력과 드리블 능력 모두 엄청난 모습을 보이면서, 다이슬러의 공백을 지워버릴 정도의 포스를 보여주었다. 당시 난세의 영웅인 미하엘 발락과, 당시 초신성인 미로슬라프 클로제, 그리고 올리버 칸이라는 괴물 골키퍼의 포스에 밀려서 그렇지 슈나이더가 보여준 팀의 공헌도는 앞의 3인방 못지 않았다.
2002년 월드컵 이후, 독일 대표팀 역시 당시 축구 트랜드를 따라기기 위해, 4-2-3-1과 4-4-2 포지션을 정착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다. 슈나이더 역시 이러한 암흑기의 독일 축구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는데 분데스리가에서는 미하엘 발락, 주앙 미쿠와 함께 끝판왕 미드필더로 포스를 보인 것과 다르게 국대에서는 클럽에서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질 못했다. 당시, 슈나이더의 포지션은 오른쪽 윙어였는데, 이 때 플레이메이커를 기대했던 메멧 숄과 세바스티안 다이슬러는 인저리 프론으로 전력에 도움이 거의 되지도 않았고, 브레멘의 중흥기를 이끈 파비안 에른스트를 기용했으나 루마니아전에서 1-5 대패로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슈나이더 역시 플레이메이커 자리에 기용된 적이 있으나 2002년 한일 월드컵때의 모습만큼 보여주질 못하면서 결국 모든 팀의 코어를 미하엘 발락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사태가 발생한다. 비록 발락에 비해 중원 조율 능력이 떨어져도 태크닉 면에서 뛰어났던 슈나이더는 대표팀에선 전혀 빛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당시 독일 대표팀은 발락 중심의 팀으로 실제 발락 없이 경기를 치룬 루마니아전과 헝가리전을 시원하게 말아먹으면서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와는 반대로 레버쿠젠에서의 슈나이더는 그야말로 엄청난 포스를 보였는데, 사실 이 시기 분데스리가는 지금의 세리에 A보다도 평가가 훨씬 낮은 암흑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2003-04 시즌 클럽 커리어 하이를 찍었음에도 국대에서는 클럽에서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질 못했으며, 훗 날 필립 람,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등 영건들이 성장하기 전까진 오직 발락의 원맨팀이였다.
그래도, 클럽에서의 꾸준함으로 슈나이더는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도 당당히 엔트리에 들면서 아르네 프리드리히와 함께 독일의 오른쪽을 지탱한다. 그리고 개막전, 부상으로 결장한 발락 대신 주장 완장을 차고 출전했는데 기본적인 클래스는 여전했으나 전에 비해 서른줄이 넘긴 나이 때문인지, 체력적인 부분에서 상당히 부담을 느끼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그래도 미하엘 발락 - 토어스텐 프링스 -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와 함께, 독일의 중원을 든든히 지키며 조별리그를 3전 전승으로 돌파하고 당시 준수한 전력을 보유한 스웨덴과, 극강의 경기력을 보여준 강력한 우승후보 아르헨티나를 격파하고 4강에 진출하지만, 4강에서 결국 이탈리아에 연장 접전 끝에 패하면서, 자국에서의 우승컵을 들어올리는데 실패했다.
특히 클럽에서 플레이메이커로써의 완벽한 모습과는 달리 국가대표에서는 클럽에서만큼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한 점이 매우 아쉽다. 헌데, 일부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2006 독일 월드컵에서의 키맨을 슈나이더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한마디로 하이라이트만 보고 대충 눈요기로 판단하는 눈팅에 불과하다. 당시 클린스만이 대표팀 감독이였지만 전술적 부분은 여전히 뢰브가 담당했는데, 플랜A로는 전통적인 4-4-2 포메이션과 플랜B로는 토어스텐 프링스의 원 볼란치에 좌우에 베른트 슈나이더 그리고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나 혹은 팀 보로프스키를 배치, 그리고 미하엘 발락을 플레이메이커로 두는 다이아몬드 형태의 포지션을 취했다. 그런데 4강전 이탈리아전에서 프링스가 징계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자, 뢰브는 '''팀 보로프스키 - 미하엘 발락 - 제바스티안 켈 - 베른트 슈나이더의 일자형태의 전통적인 4-4-2 포메이션'''으로 이탈리아전에 임했다. 만약에 슈나이더가 키맨이라면 다이아몬드 형태에 슈나이더를 플레이메이커로 두고, 좌우로 팀 보로프스키와 미하엘 발락을 배치한 다음, 원 볼란치로 제바스티안 켈을 배치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탈리아전에서 슈나이더는 경기 전체를 조율한 것이 아니라 순간 침투로 이탈리아의 후방을 깨는 역할을 하였다. 물론 4-4-2의 사이드 미드필더들도 키맨으로 활약할 수 있지만, 슈나이더와 맞붙는 위치인 시모네 페로타는 이경기에서 평점 8점을 파비오 그로소는 평점을 9점이다.[3] 특히 그로소는 결승골 뿐만 아니라, 공수 전체에서 페로타와 함께 수비에서의 단단한 모습과 공격에서의 위협적인 모습을 둘 다 보여주었다. 단순 골을 넣었다고 평점 9점을 받은게 절대 아니다.
물론 슈나이더가 전반 막판, 좋은 찬스를 보여주었지만 그게 다였다. 게다가 그 찬스는 미하엘 발락이 안드레아 피를로의 볼을 가로챈 뒤 바로 미로슬라프 클로제에게 연결시켜서, 클로제의 패스타이밍에 슈나이더가 침투하면서 만들어낸 장면이다. 일부 사람들이 하이라이트만 봤기 때문에 슈나이더의 활약이 대단한 건줄 알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이후 슈나이더는 파비오 그로소에게 철저히 봉쇄당하면서 다비드 오돈코어와 교체된다.
여튼 2006 독일 월드컵 이후 슈나이더도 30대 중반이 되기도 했고 요아힘 뢰브 감독 체제 하에 자신의 자리에 클레멘스 프리츠와 다비드 오돈코어가 중용되기 시작했고, 2008년 허리 부상으로 유로 2008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국가대표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4. 은퇴후
은퇴후 SMG라는 회사에서 축구 에이전트를 맡고있다.
니코 기셀만, 마르코 하르트만 등이 속해있다.
[1] 비단 슈나이더 뿐만 아니라, 토어스텐 프링스, 올리버 뇌빌 등 슈나이더처럼 충분한 활약을 펼친 선수들도, 이 3인방의 네임드에 밀려서 인지도가 낮은 케이스...[2]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의 전담 키커는 주로 크리스티안 지게와 디트마어 하만이 담당하였고,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전담 키커는 주로 미하엘 발락, 루카스 포돌스키,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주를 이루었다.[3] 페로타와 그로소 이외의 키모라네시와, 잔루카 잠브로타의 평점도 매우 높다. 이는 즉 이탈리아의 측면이 독일 측면을 완전 썰어버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