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루카 잠브로타

 

'''잔루카 잠브로타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2006'''

''' 이탈리아의 축구감독 '''
''' 이름 '''
'''잔루카 참브로타[1]''' '''UOMRI'''
'''Gianluca Zambrotta UOMRI[2]'''
''' 출생 '''
1977년 2월 19일 (47세) /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코모
''' 국적 '''
이탈리아
''' 신체 '''
181cm | 체중 76kg
''' 직업 '''
축구선수 (수비수[3] / 은퇴)
축구감독
''' 주발 '''
'''양발'''
''' 소속 '''
''' 선수 '''
칼초 코모 (1994~1997)
FC 바리 (1997~1999)
'''유벤투스 FC (1999~2006)'''
FC 바르셀로나 (2006~2008)
AC 밀란 (2008~2012)
FC 치아소 (2013~2014)
''' 감독 '''
FC 치아스 (2013 / 수석코치)
FC 치아소 (2014~2015)
델리 다이너모스 (2016~2017)
장쑤 쑤닝 (2017 / 수석코치)
''' 국가대표 '''
98경기 2골 (이탈리아 / 1999~2010)
1. 개요
2. 클럽 경력
2.1. 초창기
2.5. 은퇴
4. 플레이 스타일
5. 기록
5.1. 출전 기록
5.2. 대회 기록
5.3. 개인 수상
5.4. 수훈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좌우 풀백, 메짤라, 윙어 등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올라운더로 유명하다.

2. 클럽 경력



2.1. 초창기


칼초 코모 유스 출신으로 세리에 B 소속이던 코모에서 우측 미드필더로 데뷔전을 치루었다. 이후 팀이 강등되고 주전선수들이 팔리자 주전으로 출장하여 47경기 6골을 넣는 활약을 보이며 당시 세리에 A 소속이던 바리의 주목을 받고 이적하게 된다. 바리에서는 주로 레프트윙으로 출전하여 인테르를 격파하는 골을 넣는 등 주목을 끌다 디노 조프 당시 이탈리아 감독의 차출로 노르웨이와의 친선전에서 데뷔전을 가진다. 1999년 당시 바리에서 50년만에 배출한 국가대표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2.2. 유벤투스 FC 시절


[image]
결국 1999-00 시즌 겨울 이적시장에서 당시 유벤투스 감독이던 카를로 안첼로티의 눈에 띄어 1,500만 유로라는 거액의 이적료로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이적 후 2시즌 동안 주전으로 활약하지만 스쿠데토는 각각 SS 라치오, AS 로마의 차지가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부상을 입고 재활 기간동안 AC 키에보베로나에서 새로 영입한 마우로 카모라네시가 맹활약을 펼치며 잠브로타의 공백을 충실히 메웠다.
좌측 파벨 네드베드, 우측 마우로 카모라네시의 백업으로만 잠브로타를 활용하기 아까웠던 당시 유벤투스 감독 마르첼로 리피는 잔루카 페소토의 부상 및 노쇠화로 공백이 생긴 왼쪽 수비수로 잠브로타를 기용하는 모험을 시도하여 놀라울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잠브로타는 비안코네리는 물론 아주리 군단에서도 파올로 말디니의 국가대표팀 은퇴 이후 부동의 왼쪽 수비수로 자리잡게 되고 호베르투 카를루스와 유럽리그 최고의 왼쪽 수비수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된다.[4]
파비오 카펠로 부임 후 조나단 제비나의 부상과 릴리앙 튀랑의 센터백 고집[5], 조르조 키엘리니라는 좌측 풀백 대체자 등장으로 잠브로타는 또 다시 오른쪽 수비수로 포지션 전향을 시도하였고 이번에도 멋지게 성공하였다. 미드필더 경험을 바탕으로 풀백과 윙백 역할 모두 잘 소화했고, 팀의 사정에 따라 좌측과 우측을 가리지 않고 기용되었다.
2005-06 시즌, 2010년까지 재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칼치오폴리가 터진 뒤 잠브로타 본인은 팀에 대한 충성심으로 유벤투스 잔류를 원했지만 유벤투스의 재정 상태가 최악이었기 때문에 그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잠브로타는 유벤투스가 세리에 A로 복귀했음에도 자신을 불러주지 않아 매우 서운해 했다는 일화가 있다. 레알 마드리드, AC 밀란, 첼시 등의 이적 제의를 받았지만 1,400만 유로의 이적료로 튀랑과 함께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였다.

2.3. FC 바르셀로나 시절


칼치오폴리 사건으로 유벤투스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잠브로타의 다음 행선지는 당시 프랑크 레이카르트 감독의 지휘 아래 드림팀 2기를 구축하여 유럽정상을 제패한 바르셀로나였다. 기존 주전 라이트백이었던 줄리아노 벨레티[6] 와 힘겨운 주전경쟁을 벌일것으로 예상됐지만, 다행히 이적 첫시즌인 2006-07시즌이 시작하자마자 벨레티가 부상으로 골골대는 바람에 가볍게 주전자리를 꿰찰수 있었고, 첫 시즌을 무난하게 보낸 뒤 팀에 적응해가는 듯 했으나..
안타깝게도 당시 세계최고의 풀백이라 불린 잠브로타도 아내의 향수병 문제는 이길 수 없었다. 클래스도 여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기량이 시원찮은 모습을 보였다.
[image]
박지성 vs 잠브로타'''
특히 07-08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전에서 박지성에게 고전했다. 더군다나 당시 2차전에 그의 걷어내기 실수로 폴 스콜스에게 허용한 중거리 슛팅이 결승골이 되어버리면서 국내 해축팬들에게 안좋은 쪽으로 이미지가 박히게 된다. 그렇게 스페인 무대에서는 정점을 찍지못하고 2008-09시즌 여름 이적시장에서 AC 밀란이 2년만에 9m의 이적료로 영입하게 된다.

2.4. AC 밀란


[image]
드디어 그를 원하던 밀란으로 왔지만 풀백으로써는 많은 나이인 31세인점과 당시 레오나르두가 밀어주려던 이냐치오 아바테등의 존재로 양쪽풀백의 로테이션을 오가며 쏠쏠히 활약 후 11-12시즌 종료후 스위스의 키아소로 이적하였다.

2.5. 은퇴


치아소에서는 10경기 출장에 그쳤으나 조감독을 겸직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고, 감독 사임 후 뒤를 이어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2014/15 시즌 리그 8위로 한 시즌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3. 국가대표


[image]
잠브로타는 유로 2000을 통해 첫 국제 대회에 출전했고, 이탈리아의 주전 선수로 뛰면서 준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네덜란드와의 준결승전에서 경고 누적으로 퇴장을 당해 결승전에 출전하지 못했고, 벤치에서 패배를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그 해 젠나로 가투소, 안드레아 피를로 등과 함께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해 8강 진출을 이끌었다.
다음 2002년 한일 월드컵, 유로 2004에서도 이탈리아 대표로 출전했지만 예상보다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 다만 유로 2004에서는 조별리그 탈락을 했음에도 베스트팀에 선정되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단 1실점만을 기록하며[7] 결승에 올랐고, 프랑스승부차기로 꺾고 네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잠브로타는 이탈리아의 주전 라이트백으로 뛰면서 측면을 장악했는데,[8] 우크라이나와의 8강전에서는 중거리슛으로 결승골을 뽑는 등 1골 1어시로 맹활약하였다. 이 활약으로 잠브로타는 월드컵 올스타팀에 선정된다. 하지만 유로 2008에서 8강 탈락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뒀고 이후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4. 플레이 스타일


[youtube]
잠브로타는 공수 모두 수평적인 안정성을 갖춘 풀백이며, 양쪽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다. 또한 수준급 킥력과 돌파력을 갖추고 있어서 최전성기에는 위협적인 크로스와 강력한 중거리슛, 그리고 측면 돌파로 양쪽 측면을 지배하였다. 예를 들어 2006년 독일 월드컵 8강전에서 오버래핑 이후 중거리슛으로 선제골을 뽑은 장면과 우크라이나의 우측면을 공략하여 루카 토니의 골을 어시스트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또한 우측 미드필더로 데뷔했음에도 좌측 미드필더, 라이트백, 레프트백 등 팀의 사정에 따라 포지션 변경을 여러 차례 시도하였고, 매번 성공을 거두었다.
가장 성공적인 시절은 레프트백 시절이었으며, 호베르투 카를루스, 애슐리 콜 등과 비교되었다. 좌측 측면 파트너였던 파벨 네드베드까지 감안하면 당시 유벤투스의 좌측 라인은 당대 최강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

5. 기록



5.1.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94/95
칼초 코모
세리에 B
1
0
0
0
-
-
1995/96
칼초 코모
이세리에 C1
14
2
1
0
-
-
1996/97
칼초 코모
세리에 C1
33
4
1
0
-
-
1997/98
FC 바리
세리에 A
27
2
2
2
-
-
1998/99
FC 바리
세리에 A
32
4
4
0
-
-
1999/00
유벤투스 FC
세리에 A
32
1
2
0
12
2
2000/01
유벤투스 FC
세리에 A
29
3
0
0
-
-
2001/02
유벤투스 FC
세리에 A
32
1
6
1
9
0
2002/03
유벤투스 FC
세리에 A
26
1
3
0
13
0
2003/04
유벤투스 FC
세리에 A
30
1
6
0
5
0
2004/05
유벤투스 FC
세리에 A
36
0
0
0
12
0
2005/06
유벤투스 FC
세리에 A
32
0
2
0
8
0
2006/07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29
3
5
0
6
0
2007/08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29
0
5
0
6
0
2008/09
AC 밀란
세리에 A
34
1
1
0
6
0
2009/10
AC 밀란
세리에 A
24
0
1
0
5
0
2010/11
AC 밀란
세리에 A
15
0
1
0
5
0
2011/12
AC 밀란
세리에 A
7
1
1
0
3
0
2013/14
FC 치아소
스위스 슈퍼 리그
3
0
1
0
-
-

5.2. 대회 기록



5.3. 개인 수상



5.4. 수훈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훈장 4등급: 2006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훈장 5등급: 2000
[1] /dʒanˈluːka dzamˈbrɔtta/. 이탈리아어에서 어두에 오는 z는 두 번째 음절이 유성 자음으로 시작할 때 /dz/로 발음된다. 그래서 실제 발음은 ‘잔루카 잠브로타’에 가깝다. 그러나 인명을 한글로 적을 땐 발음의 정확성보다 표기 대응의 통일성을 더 우선시하므로 ‘잔루카 참브로타’라고 표기해야 한다.[2] 2006년 FIFA 월드컵 수훈,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4등급 장교장 Ufficiale Ordine al Merito della Repubblica Italiana[3] 레프트 윙, 라이트 윙, 레프트백, 라이트백. 본래 윙어로 시작했으나 풀백으로 전환한 케이스이다. 양발잡이이며, 오른쪽이 주 포지션이지만 왼쪽 또한 오른쪽에 버금갈 정도로 잘뛰었다.[4] 말디니의 완전한 센터백 전향은 2006년이다. UEFA 유로 2000, 2002 한일 월드컵 때도 그의 포지션은 왼쪽 수비수였다. 그나마 센터백으로 뛰었던 것도 3백에서 뛰었던 경우였다. 16강 한국전에서는 주전 센터백 알레산드로 네스타파비오 칸나바로가 각각 부상과 퇴장을 이유로 못 나와서 어쩔 수 없이 4백의 센터백 자리에서 뛰었다. 이스탄불의 악몽(2005년)때도 말디니는 말네스카 라인의 왼쪽 수비수였다. 그 당시 말디니의 공격력은 전성기에 비해 떨어진 상태였으나, 수비력은 아직 최고 수준이었다.[5] 프랑스 월드컵에서의 맹활약 때문에 튀랑의 주 포지션이 라이트백으로 아는 사람이 상당히 많을 정도로 라이트백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이긴 했다. 그러나 튀랑의 주 포지션은 센터백이고 실제로 센터백으로서 활약도 매우 훌륭했다.[6] 브라질 출신 라이트백이자 바르셀로나 드림팀 2기의 일원으로, 활발한 측면 오버래핑과 활동력을 주무기로 삼는 전형적인 브라질리언 풀백이었다. 국내 인지도는 매우 낮지만 바르사의 2번의 라리가 제패에 기여하고, 2005-06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선 경기의 쐐기를 박는 결승골을 넣어 팀에게 빅 이어를 안겨주는 등, 나름 쏠쏠히 활약했던 선수.[7] 최종 7경기 2실점[8] 마르첼로 리피가 왼쪽에는 파비오 그로소를 신뢰했고 잠브로타가 이 전 시즌에 제비나를 대신해 라이트백으로도 많이 뛰었기에 잠브로타를 오른쪽으로 배치했다. 결과는 대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