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드 칸국

 



'''대몽골국'''
'''Олноо өргөгдсөн Монгол улс'''
'''Государство Монголия'''
'''大蒙古國'''
[image]
국기
1911 ~ 1919
1921 ~ 1924
위치
외몽골 지역
수도
니슬렐 후레
(현 울란바토르)
정치체제
전제군주제사회주의 입헌군주제
지도자
복드 칸(젭춘담바 후툭투 8세)
언어
몽골어
종교
티베트 불교
성립 이전
청나라 치하 몽골
1차 멸망 이후
중화민국

2차 성립 이전
중화민국
2차 멸망 이후
몽골 인민 공화국
1. 개요
2. 역사
2.2. 청나라의 붕괴와 독립운동
2.3. 복드 칸의 즉위와 복드 칸국 성립
2.4. 중화민국재점령, 잃어버린 독립
2.5.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등장과 몰락, 그리고 적군 세력의 점령
3. 참고 문헌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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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1년 12월 19일 러시아 제국의 지원 아래 몽골의 왕공들(Jasag, 외몽골의 지도자들)이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세운 칸국이다. 정식 명칭은 '''대몽골국'''이다.

2. 역사



2.1. 청나라 치하


내몽골후금 건국 당시부터 혼인동맹으로 일체화되어 있었으며 17세기부터 청나라는 외몽골 지역을 침략했고 18세기에는 준가르를 멸망시키고 서몽골까지 거의 몽골 전 지역을 정복한다. 그리고 분할통치를 펼쳐 몽골인들을 청나라에 동화시키려고 하였다. 물론 내몽골의 차하르 부족은 이미 만주인과 일체화되어 있었으며 할하 족과 오이라트 잔당을 대상으로 동화정책을 폈으나 실상 외몽골은 반 독립지대였다.

2.2. 청나라의 붕괴와 독립운동


20세기에 들어 청나라가 붕괴될 조짐을 보이자 외몽골의 할하 족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1911년 7월 몽골의 왕공들은 왕공회의를 개최,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결정한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으로 대표단을 파견하여 외몽골의 독립 지원을 요청한다. 이 대표단 파견된 사람 중 한명이 몽골 불교의 수장인 젭춘담바 후툭투(Jebtsundamba Khutuktu) 8세 악왕롭상초이지냠단잔왕축(Agvaanluvsanchoijinyamdanzanvanchüg, 1870-1924)이다. 그는 훗날 복드 칸국의 군주 복드 칸으로 추대된다.
대표단은 1911년 7월 29일 후레를 떠나 동년 8월 1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였다. 이에 러시아 정부에서는 8월 17일 특별회의를 개최하여 외몽골 문제에 관한 사항을 논의하였다. 여기서 러시아는 몽골의 완전 독립은 불허하는 대신, 청나라 내에서 자치를 유지하게끔 처리하는 방안을 채택하였다. 대표단은 동년 10월경부터 한 사람씩 비밀리에 귀국하였다.
하지만 1911년 10월 10일, 청나라에서 신해혁명이 발발하며 중국 내부의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11월 28일, 외몽골의 독립 주도 세력들은 할하 왕공 전체회의를 개최하고 현안을 논의하였다. 왕공들은 회의 결과를 몽골 불교 수장인 젭춘담바에게 보고하였고, 젭춘담바는 룬덴(Lüden, 불교 수장의 가르침) 형식으로 이에 화답하였다. 이 룬덴을 통해 왕공들은 공통적으로 통일된 내외몽골의 민족적, 영토적으로 통합된 전 몽골의 독립을 주장하며 몽골의 민중에게 젭춘담바를 중심으로 한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되었다.

2.3. 복드 칸의 즉위와 복드 칸국 성립


1911년 11월 30일에는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상황이 악화되자 임시정부의 구성을 선언하며 몽골에 주둔중인 청군을 추방하고, 청 제국의 몽골 통치의 중심지인 이흐 후레를 니스렐 후레(Niislel Khuree)라고 이름을 바꾸고 수도로 삼았다. 12월 1일 할하 왕공들은 몽골이 청으로부터 독립하였음을 공포하며 청 제국으로부터의 이탈을 선언하면서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또한 내몽골과 외몽골의 유력 부족장들과 왕공들에게 몽골의 독립에 동참하여 원나라가 망하며 사실상 공중분해 되었던 모든 몽골족의 통합된 독립을 이루자고 선언하였다.
1911년 12월 29일에는 젭춘담바를 신생 독립 몽골의 칸으로 추대하면서 마침내 복드 칸국이 건국되었다. 젭춘담바의 즉위식 이후 5부 내각의 발표와 함께 독립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논공행상이 이루어졌는데, 신생 몽골은 종교 수장이 나라의 수장을 겸하는 신정 국가의 정치체제를 취함에 따라 성직자인 라마승들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체제를 채택한 이유는 몽골인들이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기 보다는, 몽골인들의 주류 종교인 불교를 중심으로 내외몽골과 그 부족들을 하나로 묶으려는 정치적 계산의 산물이었다.
외몽골(할하)이 준가르 멸망 후 청나라로부터 지배를 받기 시작한 이래 약 200년 만의 독립이었다. 외몽골이 독립하자 독립선언에 자극받은 내몽골에서도 도처에서 독립 투쟁이 일어났다. 내몽골의 49개 호쇼(부족 단위) 중에서 35개 호쇼가 외몽골에 귀속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징기스칸 이래 600년 만에 다시 모든 몽골족을 아우르는 거대한 나라가 탄생할 것처럼 보였다. 더불어 이러한 움직임에 호응한 신생 몽골의 독립 군대는 내몽골까지 통합시킬 목적으로 군대를 남하시키며, 1만 명의 군대로 하여금 차하르 성까지도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외부의 요인이 이러한 움직임을 막게 된다.
통일된 몽골의 독립의 공인을 위해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 수도인 니스렐 후레에서 러시아 제국의 대표단과 신생 몽골의 대표단이 만났으나, 러시아는 독립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며 자치국 정도에 그칠 것을 요구하였다. 그 이유는 몽골이 독립한다면 그 주변에 있는 러시아 제국의 영내에 있는 몽골족들의 봉기가 일어나는 것을 러시아 제국이 우려하였고, 또한 1912년 4월 25일에 일본과 맺은 세력 분할의 조약에 따라 몽골 지역에 대해 외몽골은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내몽골은 일본의 영향권으로 보장함에 따라 더 이상 몽골의 독립을 무리하게 진행하지 않고도 러시아 제국이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몽골 정부는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 구미 열강 9개 국가에 승인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일본은 러시아와의 밀약으로 인해 묵살하고 나머지 국가들은 러시아에 이득이 가는 몽골의 독립이 자국에는 이득이 별로 되지 않는다는 판단하에 모조리 묵살당했다. 결국 이러한 요건 속에 중국이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결집하며 몽골을 다시 재합병시키려하며 그로 인해 독립마저도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몽골 정부는 수도에 있는 러시아 대표단과의 협상을 통해 외몽골만의 독립이라도 확정받기 위해 300만 루블의 원조와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내몽골에 주둔한 모든 몽골군을 외몽골로 철수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신생 중국은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몽골의 독립은 결코 승인할 수 없다는 주장을 고수하면서 외몽골의 군대가 철수한 내몽골 지역을 러허성과 차하르성, 쑤이위안성 등으로 분리시키며 중국군을 주둔시키게 된다. 그런데 러시아의 입장이 다시금 돌변하여 신 중국의 안정적인 정권이 몽골을 통치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 위안스카이 정부와 비밀리에 교섭하여 외몽골의 독립을 취소하고 자치국으로 격하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외몽골과의 협약을 위반한 것이었다. 항상 러시아의 목적은 몽골의 완전한 독립이라는 것보다는 어디까지나 외몽골에서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5년 5월 25일 러시아와 외몽골의 국경 마을인 캬흐타에서 체결된 러시아-중국-몽골 삼국이 맺은 캬흐타 협정에서 자치국으로의 격하가 담긴 조약을 몽골은 러시아가 몽골의 자치 형태마저 불허하고 완전히 중국의 영토로 공인하겠다는 협박에 못 이겨 받아들여야 했다. 대신 몽골은 최소한의 이득은 건져 실질적인 중국의 내정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것, 자체 정부와 군대를 보유할 권리등을 보장받았다.

2.4. 중화민국재점령, 잃어버린 독립


하지만 1917년에 복드 칸국의 최대 후원자인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11월 혁명으로 붕괴하자 중국은 캬흐타 협정을 파기하고 복드 칸국의 자치마저도 불허하며 몽골을 다시 재합병시키려 한다.
당시 중국은 위안스카이 사후 정부의 실세가 된 안휘군벌의 수장인 국무총리 돤치루이가 장악한 상태였는데 돤치루이는 장훈복벽 이후 국회와 약법 복구를 거부하면서 독재정치를 하였고 이 때문에 호법전쟁이 일어났다. 돤치루이는 무력으로 중국을 재통일하려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차오쿤, 우페이푸가 이끄는 직예군벌과의 마찰이 심각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돤치루이의 심복인 쉬수정은 안휘군벌의 세력을 확대할 겸 안휘군벌 정권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외몽골 출병을 단행하게 되었다. 1919년, 외몽골 출병을 단행한 북양정부는 600명 규모 정도로 구성된 쉬수정의 변방군을 파병, 복드 칸국은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책략가에다 야심이 넘치던 쉬수정은 몽골을 그의 영지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몽골 정부에 대해 자치권을 포기하고 투항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복드 황제와 각료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베이징으로 압송하겠다고 협박하였다. 또한 중국군을 동원하여 복드 칸의 사원을 포위하고 당장이라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쉬수정의 군대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그렇다고 러시아의 도움 없이 중국과 전면 전쟁을 할 수는 없었고, 중국군의 무장에 비해 빈약한 몽골의 군대는 저항할 여력이 없었고, 복드 칸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약 2천여 명 정도였던 외몽골의 군대는 무장해제된 채 해산당했다. 1919년 11월 17일에 공식 항복했고, 22일 복드 칸국은 공식적으로 해산되어 중국에 다시 복속되었다. 쉬수정은 거창한 해산식을 거행했다. 몽골 관료들의 관인은 모조리 회수당했고 복드 칸은 오십노구를 이끌고 당시 중화민국 대총통 쉬스창의 사진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몽골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굴욕이었지만 덕분에 쉬수정은 중국인들로부터 "서북왕"이라는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쉬수정의 지배는 오래가지 않았다.
중앙의 지배권을 두고 1920년 7월 북양군벌 간의 전쟁인 안직전쟁이 발발하면서 서북지역에 주둔하던 중국군이 대거 철수했고 몽골에도 소수의 부대만이 잔류하게 되었다. 안직전쟁의 결과로 직예군벌에게 밀린 안휘군벌이 몰락하자, 환계에 속했던 쉬수정 역시 서북군을 상실하고 외국 공사관에서 숨어지내다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안직전쟁 이후에는 몽골에 대한 중국 중앙정부의 관심 또한 멀어지자 중국의 정치적 상황을 지켜보면서 몽골 독립파들은 다시 봉기할 준비를 하였다.

2.5.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등장과 몰락, 그리고 적군 세력의 점령


1920년 10월 2일 백군의 지휘관중 하나인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Roman von Ungern-Sternberg) 남작이 이끄는 800여 명의 군대가 몽골 국경을 침입했다. 적백내전에서 패배한 채 패잔병들과 함께 몽골로 들어온 그는 몽골의 독립을 지원하겠다는 명목으로 몽골인들을 규합했다. 약 2천여명 이상으로 늘어난 그의 군대는 1921년 2월 4일 중국군을 니스렐 후레에서 쫓아내고 점령하였다. 하지만 그의 점령은 수도지역에 한해 있었다. 운게른은 복드를 다시 칸으로 추대하고 몽골 정부를 부활시켰다. 운게른이 니스렐 후레를 점령하는 동안, 외몽골은 크게 적백내전으로 쫓겨다니던 운게른 휘하의 백군들이 점령한 수도 근방지역, 나머지 지역을 아직 점령중인 북양정부 군벌,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몽골인들로 사분오열된 상황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 혼란 가운데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수립된 몽골 최초의 사관학교인 호지르볼란(Hkujirbulan) 군사학교 출신으로 훗날 몽골의 지도자가 되는 담딘 수흐바타르(D. Sukhbaatar)을 주축으로 하여 다시 몽골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그를 따르는 동지들과 몽골 인민혁명당(Mongolian People's Revolutionary Party)을 창설하고, 당의 군대인 인민의용군도 창군하기에 이른다.
수흐바타르는 그 당시 적백내전을 이기고 그해 9월 러시아 혁명 이후 수립된 신생국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접촉, 백군을 몰아내기 위한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소련은 운게른의 군대가 다시 러시아를 혼란에 빠뜨릴 것을 우려해 대대적인 지원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수흐바타르의 인민의용군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소련이 파병한 적군(Red army) 1600명을 포함하여 몽골을 되찾을 공격군을 구성하고 그 규모는 약 1만 명에 달했다. 또한 무장도 현대적으로 갖추어 대포 12문과 기관총 156정으로 무장하며 소련으로부터 약간의 장갑차와 항공기 또한 지원받았다. 인민의용군은 우선 1921년 3월 18일 새벽 캬흐타에 주둔하고 있던 2천여 명의 중국군을 기습하였다. 숫적으로는 월등히 우세했지만 사기도 낮은 오합지졸에 불과한 중국군은 변변히 싸우지도 않고 무기를 버린 채 도주했다. 이어서 인민의용군은 백군까지 몰아내기 위해 이르쿠츠크에서 니스렐 후레로 진격했다.
운게른의 부대는 불교도 기사단이라 불리며 약 4천여명에 대포 10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1921년 6월부터 7월 초까지 니스렐 후레 북쪽에서 벌어진 여러 번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7월 6일 니스렐 후레는 해방되었고 다시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 전투에서 패배한 운게른은 도망쳤지만 결국 포로가 되어 9월 15일 시베리아로 끌려가 군사재판을 받은 후 총살당했다.
​1921년 7월 9일 복드 칸은 다시 군주로 추대되어 사회주의 입헌군주제라는 독특한 형태로 몽골 인민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후에도 약 1년에 걸쳐 외몽골 여기저기에서 할거하고 있던 백군 잔당, 중국군 잔당들을 토벌하여 이들을 모두 소탕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력이 아닌 소련의 원조에 의존해야 했기에 상전이 중국에서 소련으로 바뀌었을 뿐이고, 외몽골은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한편 점차 심해지는 소련의 간섭으로 민족주의 계열의 혁명가들은 쫓겨나고 코민테른 출신의 친소파들이 주도권을 쥐면서 소련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심화되었다. 1924년 5월 20일 몽골의 정신적 지주였던 복드 칸이 승하하였다. 몽골 인민정부는 새로운 대칸을 세우는 대신 군주제를 폐지하고 완전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며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개칭한다.

3. 참고 문헌


  • 이평래, "1911년 몽골 독립과 민족 통합 운동의 초기 과정", 2008, vol., no.104, pp. 155-190 (36 pages)
  • 네이버 지식백과, "몽골의 역사"

4.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