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통일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 대한민국 헌법 4조
[clearfix]
1. 개요
북진통일은 대한민국이 무력에 의해 북진하여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고 통일을 달성하는 것을 말한다. 적화통일과 반대되는 방식의 통일이라 할 수 있다.
드물게는 멸공통일(滅共統一), 승공통일(勝共統一), 백화통일, 청화통일, 녹화통일 등으로 일컫는다. 이 방식은 반국가단체 북한을 제거하고 온전한 대한민국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헌법 제3조 영토 조항과 합치하지만, 대한민국 헌법 제4조 평화통일 지향 조항과는 다소 배치되는 문제가 있다.
2. 역사
한때 한반도에서도 특히 이승만 정권 때에 한국전쟁 이전부터 북진통일이라는 슬로건을 열심히 내걸었다. 특히 한국전쟁 중에도 휴전을 반대하는 목소리로 북진통일 궐기 캠페인을 끈질기게 벌였다.
이승만 시절의 북진통일론은 월남한 사람들의 통일 열망에 부응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남북의 국력도 그런거니와, 미군이 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는 상황이었고 1953년에 체결된 한미방위조약에서 무력을 통한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금하고 있기에 북진통일은 현실적으로도 명백히 불가능했다. 하지만 북진통일론은 평화통일론 등 다른 통일 운동 논리를 억누르는 효과가 있었고, 분단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이 점에서 북진통일 운동은 통일을 막기 위한 반통일운동이었다. 또한 대중을 동원한 각종 궐기대회나 시위는 영도자 중심의 비상 결속 체제를 유도하고 이승만 정권의 권력을 강화하고 극우 반공 체제를 공고히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북진통일 운동은 이승만 정권 붕괴 시까지 계속되었지만,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와 그 이후에는 정치적 효력이 약해졌다.
1950년대에는 분단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통일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 그러나 이승만의 살벌한 북진통일론에 압살되어 어떠한 다른 통일론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이 정권은 위에서 말한 대로 휴전이 임박한 1953년 3월 말부터 대중 동원을 통해 북진통일론을 외치는 궐기대회와 시위를 벌이는 한편 1954년에는 뉴델리 밀회 조작사건이 불거졌고, 1955년 8월부터 연말까지 적성국/중립국 감시 위원단 축출 운동이 크게 전개되었다. 이에 죽산 조봉암이 북진통일의 허구성을 폭로하며 '공약 10장'을 펴서 극좌/극우세력을 억제한 진보세력 주도 하에 유엔 보장에 따른 평화통일을 이루는 '평화통일론'을 들고 일어났으나, 1958년 1월 터진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된 조봉암이 이듬해 사형을 당함으로써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 1960년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되고 제2공화국이 들어서자 북진통일의 개념은 약화되고 다시 평화적 통일이 대두되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가자 판문점''이라는 슬로건으로 통일 운동이 일어난 셈. 그렇지만 5.16 군사정변 이후부터 반공주의가 강화됨에 따라 승공통일(勝共統一)이라는 구호로 북진통일 이념을 벤치마킹하였다. 특히 1.21 사태나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 북한의 연이은 도발로 반공운동이 절정에 이르렀고 멸공통일 이념은 더욱더 강화되었다. 그렇지만 이는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자 전환점을 맞는다. 남북간의 상호접촉이 일어나고 화해무드로 변화하면서 민족적 통일의식이 올라갔고 남북한 모두 공식적으로 전쟁무력의사를 표방하지 않음에 따라 멸공통일 또한 지양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유신 헌법에도 조국의 평화적 통일 항목이 추가되자 정부 또한 북진통일 이념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1990년 독일통일과 예멘 통일[1] 도 평화적인 통일을 이룸에 따라 통일의 무력수단 방안은 더 약화되게 된다.
북괴군 수뇌부가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남한을 선제 공격하지 않는 이상, 한국군이 직접 북진하는 시나리오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전에 비해서는 입지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3. 군사력의 동원
문서가 길어져서 하위 문서로 분리했다.
4. 평화통일과의 차이
우선 가장 큰 이점은 김씨 왕조와 엘리트 계층을 몰아냄으로서 한국전쟁을 일으킨 전쟁범죄와 핵 개발 등 세계 평화를 위협한 데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평화적으로 통일할 경우 북한의 김씨 왕조 및 엘리트 계층들은 통일 직전에 망명을 가는 선택지를 택할 게 뻔하므로 처단이 곤란해진다. 전쟁이라는 위험한 일을 겪고 승리한 만큼 남한 정부와 국민은 막대한 정통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며 김씨 일당의 처벌에 자비를 베풀지는 않을 것이다.
인구상으로 많은 변화를 겪을 것이다. 일단 조선인민군은 궤멸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남은 잔당들을 처리하는 것은 규모적인 면에서 평화통일에 비해 수월할 수 있다. 다만 이미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죽기살기로 저항할 것이기에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북한 인구를 남한이 부양해야 될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에서는, 전쟁으로 북한 인민들이 어쨌든 줄어들었기 때문에 부담이 줄어들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죽는 인구의 대다수는 군인들은 젊은 남성층이 될 것이기에 성비 불균형 문제와 고령화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다.
그리고 패전 후 북한 인민들은 결국 패전으로 죽거나 다친 북한군을 아들, 손자, 형, 오빠, 남동생 등으로 둔 이들일 것이기에[2] , 남한으로서는 통일 이후에도 전후 복구 및 국가 재건, 통일 정책 추진에 있어 남은 북한 인민들에 의해 유형 무형의 저항을 겪을 것이다. 주적 북한군이 불쌍하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라, 전쟁 이후 민심 확보 및 국익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단 얘기.
또한 전쟁은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희생이 필요하다. 전쟁이 나기 전이라면 민주적 절차에 따라 여러 의견을 수렴하고 논의할 수 있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그럴 수 없다. 전쟁 전에 반대를 했든 안 했든, 일단 터지면 이기는 게 최우선이 되기 때문에 일개 개인으로서는 무조건 끌려나가 싸워야 하고 국가나 상급자가 죽으라고 명령하면 죽어야 한다. 21세기를 넘어 한국군이 북한군을 짓밟을 정도의 전력을 확보했다고 해도 한국 역시 많은 희생자가 생길 것은 당연하다. 전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전쟁 범죄들은 통일 후 남한 출신 사람들과 북한 출신 사람들 간의 관계에도 지장을 주는 것은 물론 제2차 한국 전쟁은 6.25에 이어 남북 간의 기나긴 쓰라린 동족상잔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2000만 명의 국민이 활동하는 수도권이 군사적으로 너무 전방에 있다는 것이 큰 문제다. 장사정포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늘상 하던 위협질이 현실화될 수도 있고, 다 같이 죽자고 핵미사일을 발사할지도 모를 일이다.
5. 실현 시나리오
한국은 공식적으로는 헌법상으로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을 포기하고 평화통일을 지향하고 있으나, 북한이 극단적인 실패 국가에 비정상 국가인 관계로 여전히 정부 차원에서도 염두되고 있는 시나리오다. 대한민국 국군에도 유사시에 북진을 위한 제7기동군단이 편제되어 있다.
북한의 선제공격시에도, 대한민국측의 피해가 있겠으나, 결국 기본적인 국력이 압도적인데다가 미군과 UN의 지원을 받을 대한민국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 결과적으로 북진통일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북한의 내전 발발 등 정권 붕괴의 경우 대한민국이 개입해야하는 상황이 된다면 이 경우에도 결과적으로는 북진통일에 가까운 상황이 될 것이다.
6. 결론
북진을 하지 않는 것은 북한이 너무 강하거나 남한이 너무 약해서가 아니라, 남한의 국력이 강대해졌기 때문에 '''정녕 승전한다고 해도 잃을 것도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북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어가면서까지 감수할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북진을 진지하게(대놓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물론 '북진으로써 얻을 수 있는 편익 >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대놓고 가시화된다해도 인명의 문제가 어떤 이익보다도 우선시되지는 않기 때문에, 남한의 경제가 전쟁이 나든 안나든 차이가 도토리 키재기 수준으로 예상될 정도로 붕괴하거나[3] , 북진을 주장하는 정권[4] 이 들어서지 않는 이상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7. 기타
정치적으로 우파, 성향으로는 애국주의, 국가주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이다. 그 외에도 군에서 피아식별띠의 문구로 사용한다.
기갑 갤러리와 군사 마이너 갤러리의 캐치프레이즈(...)며 북진콘까지 있다.'''북진 안 하냐?'''
대한민국 육군 제7기동군단은 아예 부대표어가 '북진선봉'이고 경례구호는 '북진'이다. 물론 대한민국 헌법 상 한국은 평화통일을 지향하기 때문에 선제공격을 할 수는 없지만 유사시에 오로지 공격만을 위해 편성된 부대이다.
[1] 최종적으로 평화합의통일을 선언했지만 남예멘 반란으로 북예멘이 무력 공격하면서 통일되었다.[2] 북한 여군이라면 딸, 손녀, 누나, 언니, 여동생 등[3] 이 경우에는 남한의 경제가 쇠퇴하여 '북진으로 얻을 수 있는 편익'이 상대적으로 커진다.[4] 이 경우에는 '북진으로 얻을 수 있는 편익'을 크게 평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