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하라 리노/AKB48 활동
1. 개요
일본의 여성 방송인. 前 AKB48 5기생이자 HKT48의 극장 지배인이다. =LOVE의 프로듀서 이다. 약칭은 ''''삿시''''.
총선거에서 1위 3연패 포함 총 4번의 1위를 차지한 총선거의 여왕이기도 하다. 이는 역대 48그룹 통틀어 최다 1위 기록이며, 1위 연패 또한 역대 멤버 중 유일하다. 그 외에도 총선거 역대 최고 득표 수 기록까지 가지고 있는 등 총선거에서 가질 수 있는 기록은 모두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48그룹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최고 인기 멤버 중 하나.
2. 캐치 프레이즈
어느덧 사시코 주제에가 습관이 되어버렸다. 삿시라고 하는 사시하라 리노입니다.
1대
기세만큼은 있는 여자. 당신의 마음에 사시하라 퀄리티 각성! 오이타현 출신 사시하라 리노입니다.
2대
저의 마음은 백색? 흑색? 저의 마음은 백색에 가까운 회색. 사시하라 리노입니다.
3대
당신의 하트를 가리키겠어. 삿시라고 하는 사시하라 리노입니다.
4대
'''오이타현 출신 삿시라고 하는 사시하라 리노입니다.'''
5대, 최종
3. 활동 및 총선거
3.1. AKB48에 들어오기 전
초등학교 2학년 때, 집에 컴퓨터가 오면서 삿시의 오타쿠 인생이 시작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은 팬 사이트를 확인하는 것.'''
당시에는 자신이 귀엽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우타방'[2] 에서 모닝구무스메가 까이는 것을 보고, '아이돌은 캐릭터도 소중한 거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아이돌 오타쿠에서 직접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그러나 삿시가 살았던 오이타 현은 지방이었고, 아이돌이 되기에는 힘든 장소였다.
AKB48 오디션은 1차 서류 심사는 붙었지만, 2차 오디션 장소는 도쿄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절대 반대하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2차 오디션은 안 본다는 약속을 하고 도쿄로 관광을 간다는 구실로 도쿄로 향한다. 삿시 본인도 2차 오디션에 크게 붙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는데 극장에 가서 공연을 본 후 마음이 완전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 2차 오디션에 응모해서 합격하게 된다. 뒤에 오이타로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평생의 부탁'으로 최종 심사를 받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하게 된다. 다시 도쿄로 가서 최종 오디션을 보게 된다. BINGO!를 노래했지만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가 모두 뒤집혔고 춤도 망쳐버렸다. 하지만 왠지 기적적으로 합격했다. 이유는 단지 삿시가 아이돌 오타쿠기 때문에 다른 오타쿠의 심리를 잘 안다는 것. 후에 아버지도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을 조건으로 AKB의 가입과 도쿄로의 상경을 허락했다.
3.2. 2007~2008년
2007년 AKB 제5기 연구생 오디션에서 합격.
2008년 8월 2일 팀B로 정식 승격한다.[3]
그 후 사시하라 리노는 AKB48 10th Single 大声ダイヤモンド, 11th Single 10年桜, 12th Single 涙サプライズ!까지는 선발에 들었으나, 이후로는 선발에 계속 탈락. 17th Single ヘビーローテーション에 선발 복귀하였다. 그 뒤로는 가위바위보 싱글을 제외한 전 선발에 들고 있다.
2008년 12월 3일 AKB의 라디오 프로그램 '전력으로 듣지 않으면 안 되잖아'에 같은 동기인 미야자키 미호, 키타하라 리에, 니토 모에노와 함께 레귤러로 발탁되었다.
3.3. 2009년
2009년 2월 8일부터 시작된 팀B의 4th공연 '아이돌의 새벽'에서 카타야마 하루카, 타나베 미쿠와 함께 '팀 사냥꾼'을 결성해 유닛곡 '愛しきナターシャ'의 센터를 담당하였다. 이때의 컨셉은 '''도리안 사시하라.'''
2009년 제1회 총선거에서는 27위를 차지하고 언더걸스에 진입한다. 1회 총선거기 때문에 선발로 진입하지 못하면 평생 선발로 못들어갈 것 같아서 삿시는 정말로 불안했다고 했으며, 결국 선발 진입에 실패.
소감으로는 너무 분하지만 1표라도 넣어준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싶다, 오타게 더욱 노력하겠다고 하면서 회장을 웃기면서 나갔지만, 무대 뒤에서 쓰러져서 이벤트장에서 사람이 모두 빠져서 삿시밖에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울었다고 한다. 예상은 적중해서 1회 총선거 뒤로 선발에서 계속 탈락했다.
이때의 실패는 삿시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분기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번지 점프 실패, 오오타 프로덕션 이적, 블로그 개설 전부 이 언더걸스 시절에 이루어진 것들이며, 이 당시에 불렀던 RIVER의 커플링 곡인 '君のことが好きだから'[4] 의 PV는 삿시의 팬들에게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결국 이때 언더걸스 시절이 없었더라면 푸쉬도 없었을 뿐더러 인기도 늘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3.4. 2010년
2010년 제2회 총선거에서는 19위를 차지해서 선발 복귀. 그런데 문제는 총선거 다음 싱글인 ヘビーローテーション의 PV에서 발생했는데, 5작품만에 겨우 선발에 복귀했건만 PV에서는 단 '''2.5초'''밖에 나오지 않았다. 당시 삿시는 블로그에 '보려는 마음이 있다면 알아볼 수 있어요(울음)'이라는 글을 올렸다.
2010년 아시아 송 페스티벌의 AKB48 참가 기사[5] 가 떴을 때, 오오타 아이카와 함께 가장 먼저 선발로 확정된 멤버였다. 그래서 당시 일본 연예 갤러리 내에서 설마 사시하라 리노가 국내에 '일본의 윤아'로 소개되는 게 아닌가 하는 장난섞인 우려에서 '일본의 윤아'라는 별명이 탄생하게 됐다. 공연 당시 선보였던 '''대~한민국''' 등의 개드립이 상당히 흥했다.
2010년 10월 9일 '메챠이케'에 AKB48 대표로 단독출연. 처음으로 지상파 골든타임 프로그램에 솔로로 출연했다.
2010년 10월 14일부터 '아리요시 AKB 공화국'에서 '사시하라 PRIDE'라는 프로로 고정 출연했다. 컨셉은 코지마 하루나에게 어떠한 일로 도전을 하고 져서 완전히 깨지는 컨셉이다.
2010년 11월 3일자 AKBINGO!에서는 '무챠부리 돗치볼'의 '게테모노 요리' 코너에서 산낙지를 먹기도 했다. 한국 음식점의 한국 요리사가 그 자리에서 직접 조리를 했는데, 먹다가 빨판에 입술이 들러붙어 아프다고 소리질렀다.
3.5. 2011년
2011년 1월 11일부터 TBS 테레비의 지상파 칸무리[6] 레귤러 방송 '사시코노 쿠세니[7] '가 스타트. 프로그램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일단 모토는 사시코를 제대로 된 아이돌로 육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라고는 하는데…… 방송에서 하는 건 토크력, 리액션, 애드립 능력 등 아이돌가수가 아니라 예능인 육성. 어쨌든 이리저리 굴려지는(?) 사시코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청률도 잘나왔고 방송이 재미있었을 뿐더러 방송 스폰서도 CYBIRD라는 AKB48과 관련없는 외부 스폰서가 붙었기 때문에 지상파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3쿨까지 방영하는 기적을 이뤄냈다. 참고로 일본 지상파에 개인 칸무리 방송을 갖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사시하라가 비록 심야지만 개인 칸무리 방송을 할 수 있었던 것도 CYBIRD라는 외부 스폰서의 힘이 컸다. 문제는 외부 스폰서 기업을 구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 프로그램이 종영한 이유도 TBS 테레비에서 Not yet멤버들이 출연하는 '욘파라'라는 방송이 새로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간 활발한 활동이 결실을 맺는 것인지, 2011년 3회 총선거의 잠정 발표에서 7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벌써 작년의 총 득표수를 넘어선 굉장한 수치. DTD가 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도 있었지만 그래도 순위를 사수, 제3회 총선거에서는 9위로 엄청난 성적을 기록 하였다.
당시 3회 총선의 최대이슈가 유키링의 3위와 삿시의 9위였다 속보대로 카미7에 드는 건 실패했지만 염원의 첫 미디어 선발 달성. 사시하라의 파란은 카시와기 유키의 대약진과 더불어 3회 총선거의 가장 큰 이슈였다.
이후에는 적당히 헤타레 기믹을 밀고 예전보다 앞에 나서서 활발한 예능 활동을 한다. 그 후 이른바 '사시코 열풍'이 더 거세진다.
2011년 10월 5일부터 후지TV의 '와랏테 이이토모'의 레귤러로 출연하게 된다. 이게 엄청난 일인 게 '와랏테 이이토모'는 시청률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일종의 '상징적인 예능'이기 때문이다. MC인 타모리는 일본 BIG 3로 뽑히는 MC 중 한명. 게스트진은 SMAP, 폭소문제, 사마즈, 쇼후쿠테이 츠루베 등 말그대로 연예계 초호화 게스트들. 여기에 사시하라 리노는 최연소 레귤러 게스트가 된다. 삿시는 꿈이 '와랏테 이이토모'에 나오는 것이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꿈을 달성한 사시코.
총선거 이후에는 아키P의 광푸시를 받고 있어서 12년 총선거에서 카미 7을 개발살 낼 것이 거의 확실시 되어지고 있다.
삿시의 엄청난 열풍은 2012년 발매한 사진집 판매량에서도 확인되었는데 무려 첫 주에 5.7만 부가 팔리면서 AKB 역대 1위 기록을 세워버렸다. 2위 기록이 마유유의 4.5만 부인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수치.
3.6. 2012년: 이적 전
2012년 1월 14일 니혼TV의 드라마 '뮤즈의 거울'에 첫 주연으로 출연했다. 후에 이 드라마는 영화화되어 삿시가 주연을 맡았다. 2012년 9월 29일 개봉.
2012년 2월 22일 패션 브랜드 '사만사 타바사'의 모델로 기용된다. 같은 모델로 활동한 인사가 AKB 내에서 '''패션센스 탑급인''' 그 이타노 토모미에 '''모델'''인 에비하라 유리, 미치바타 제시카, '''미란다 커'''그리고 Jeans 쪽의 경우 소녀시대인 걸 감안하더라도 삿시의 패션센스를 생각하면 이 상황에 웃음만 나올뿐. 패션모델까지 하게된 사시코.
2012년 4월 18일 오이타 현 관광대사 제 1호에 임명된다.
어린이 경찰 6화에서 특별출연했었다. 역할은 유명 아이돌 가수. 한국 더빙판에서는 김영은이 맡았다.
2012년 5월 2일에 솔로로 데뷔하면서 진행되는 이벤트가 5월 2일부터 8일까지의 데일리 판매량으로 같은 날에 나오는 노기자카46의 두 번째 싱글을 이기느냐 마느냐 대결이 진행되었다.
상황은 첫 날 판매고가 더블로 차이나면서 노기자카가 5만 장 정도 우세.
결국 삿시가 꺼낸 비장의 카드는…….
……어라?'''"이기면 오오시마 유코가 수영복으로 극장 공연을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진행되는 기획으로 6월 25일에 삿시의 프로듀싱으로 무도관'에서 이동복도주행대7, 모모이로클로버, 도쿄죠시류, 사립에비스중학, 아이돌링, SUPER☆GiRLS, Buono!, PASSPO☆를 섭외해서 유비 마츠리가 열렸다. 참고로 입장료가 '''345(사시코)엔'''이었다. 무도관 대관료도 안 나왔을 것이다.
결국 노기자카46과의 판매량 대결은 삿시의 패배. 첫 날 판매고가 더블 스코어로 차이난 걸 마지막까지 뒤집지 못했다.
판매량은 초동 '''12.4만'''매.
그리고 2012년 제4회 총선거에서 9위에서 4위로 대약진. 오리멘들을 전부 뛰어넘고 대폭 상승한 순위로 마감. 헤타레 졸업을 소감으로 발표해 엄청난 충격을 오타들에게 전해주었다. 삿시는 삿시타들에게 평생을 조아리고 살아도 부족해졌다. 다만 총선 뒤 삿시가 홍보대사를 맡고있던 오이타 시에서 총선 투표에 개입해 꽤 다수의 표를 투표했다는 이야기가 터져서 말이 많기도 했다. 어쨌든 놀라운 총선거 성적. 와랏테 이이토모 레귤러에 예능에서도 잘나가니 앞으로 더 승승장구 할 것이라고 모든 팬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4. 스캔들 및 HKT48 이적
스캔들에 관해 자세한 정리글
승승장구를 달리던 사시하라에 2012년 6월 14일, 주간지 발행사인 주간문춘은 사시하라 리노가 팬에게 보낸 가슴사진을 입수한 후,
게 2012년 제4회 총선거에서 4위로 진입하는 기염을 토한지 단 '''일주일'''만인, 6월 21일 호에 사진을 실어 공개하였다.[8]
이 팬이 주간지에 보내 공개 된 사진 및 내용은 내용은 오타 간의 검열삭제가 포함 된 스캔들이었고, 이미 그 팬과 사시하라 리노가 섹스 관계까지 갔음을 시사하는 사진 이었다. 당시 주간지는 "더 강한 사진도 있지만 (너무 자극적인 사진이라) 공개할 수가 없다." 라고 할 정도 였다.
"나는 한 번도 남자를 사귀어본 적이 없다, 잘생긴 남자가 무섭다, 남자가 절대 자신을 좋아해줄리가 없다." 라는 발언을 한 후 터진 스캔들이였고, 특히 2012년 제4회 총선거 4위 진입 단 일주일 후에 스캔들이 발표되었기 때문에 더욱 파장이 컸다. 사진을 주간 문춘로 보낸 이 팬은 자신이 사시하라와 교제를 하던 사이라고 주장했으며, AKB48 팬이 되면서 사이가 발전했다고 밝혔다.
사건 추정 시기를 보자면 여태 삿시 측에서 언급하던 AKB 연구생 시절이 아니라 키쿠치 아야카가 남친과의 프리쿠라로 인해 퇴출 당하고 난 뒤 그 빈 자리를 삿시가 승격돼 메꾸고 난 뒤의 일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9]
스캔들 발표 직후, 사시하라 리노는 2012년 6월 15일 '''AKB48의 올나잇니폰(ANN)'''에 출연 하였고, 그냥 인정 해 버렸다.
이에 ANN에 같이 출연한 아키모토 야스시는 이렇게 얘기 했었다. (위의 유튜브 링크의 영상 중 5:50) [10]
당시 사시하라를 HKT48으로 보내버린건 사시하라 리노를 사실상 '''좌천'''이라는 처벌을 받게한 것이다.[11]'''사시하라는 가능한 한 빨리, 내일부터 사시하라 리노는 HKT48로 이적합니다.''' - 아키모토 야스시
당시 삿시는 ''''자신의 아이돌 생명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아키모토 프로듀서에게 AKB를 그만두겠다고 말했었다. 운영측은 '나가는 건 좋지만, AKB에 보답을 하나 하고 가라'고 했고 그 보답이 당시 데뷔도 하지 않은 신인 아이돌 그룹인 HKT48로 이적하여 그 그룹을 키워놓는 것.[12] 이 결정은 후술 하겠지만, 결국 사시하라와 HKT48 둘 모두에게 엄청난 상승 효과를 낳게 되었다.
2012년 6월 26일, TBS 테레비에서 생방송 돗키리(몰래카메라)를 내보냈다. 대기실에서 나카이 마사히로와 스캔들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30분 정도 방송되었는데, 팬들은 어떨지 몰라도 방송국 쪽에서는 이례적으로 아이돌의 스캔들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보려는 의도가 강한 듯한 방송이었다. 사시하라는 생방송인 것을 모르는 상태로 나카이와의 대담이 설치된 몰래카메라를 통해 방송되는 형식이었는데, 화술로는 일본제일을 다투는 데다 대 선배인 나카이를 상대로 스캔들에 대해서 아무 말이나 막 할 리는 없기 때문에, 당연히 최종적으로는 이미지를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사시하라는 애초에 오타쿠를 대상으로 한 유사 연애를 가지고 승부하던 멤버는 아니었다.[13] 오히려 결과론적으로는 예능에서 써먹을 개그 소재가 늘어났으니 좋은 면도 없지는 않았고 실제로 라이트팬들이 늘어나는 효과를 보았다. 그래도 저 사태 이후 방송에 나와서 밝히는 이상형이 입이 무거운 남자. 2012년 8월에 와서는 아예 사시하라가 나오는 예능 방송에서 주간문춘을 사시하라 놀릴 때 쓰는 개그 소재로 삼고 있다. 주간 문춘 지못미…….[14]
이 스캔들에서 자주 간과되는 점은, 사시하라는 엄연한 성범죄 피해자라는 점이다. 아이돌이 연애를 하는 것이 팬들에게 비판을 받는 행위일 수는 있지만 불법이거나 계약 위반 행위인 것은 아니며, 하물며 주간지에 개인적인 사진이 유포되어 인격을 모독당해야 할 정도의 중죄인 것도 아니다. 팬들의 실망과는 별개로 우선 성범죄 피해자로서의 지원을 받았어야 맞는 일이다.
반면, 사진을 유출시킨 남자는 민감한 사진을 유출하는 성범죄를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그걸 잡지사에 팔아서 금전적 이득까지 얻었으니 윤리적으로도 구제의 가치가 없다. 당연히 가장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남자쪽과 그걸 곧이 곧대로 잡지에 게재한 황색언론인데 일본에서 해당 남자와 언론사는 비판을 전혀 받지 않고 사시하라만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일본 여성 아이돌계의 고질적 문제에 더해, 일본 사회의 낮은 인권 의식을 엿볼 수 있다.
4.1. 비판과 반론
사실 사시하라의 스캔들이 터지기 전 AKB48에서 스캔들을 일으킨 멤버들은 거의 대부분 사퇴 혹은 사실상 강제적 졸업 등의 형식으로 불명예스럽게 그룹을 떠나야 했다. 인기가 별로 없는 멤버에 대해서 그동안 운영은 가차없이 사퇴시키는 등의 행보를 보여왔기 때문에 "연애 등 스캔들을 일으키다 걸리면 사퇴한다"는 공식을 팬들도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2012년 히라지마 나츠미는 스캔들로 불명예 사퇴를 했다.
그런데 연애스캔들을 일으킨 사시하라에 대해서 사퇴가 아니라 신생 자매 그룹으로 이적시킨다는 발표가 나오자, 기존에 스캔들 문제로 사퇴당한 멤버들의 팬이었던 오타들의 반발이 극심하게 일어났다. 쉽게 말해, 인기 있는 멤버는 사퇴 안시키고, 인기 없는 멤버는 사퇴시킨다는 이중적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연애금지 룰"에 대한 팬들의 신뢰가 깨진 것. 게다가 특정 멤버가 트위터 등으로 문제발언을 했다는 이유[15] 만으로 8기생 10명이 연대책임 형식으로 셀렉션 탈락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적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퇴가 아니라, 신생자매그룹 이적이라는 어중간한 처벌이 내려진 것. 당연히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후 일어난 미네기시 스캔들에서 미네기시 미나미가 개인적 돌출행동으로 삭발하고 사과영상을 공개적으로 넷상에 올리고 연구생으로 강등되는 처분을 받은 이후, 연애금지조례는 폐지되고 자기책임제가 되어버렸고, 아예 처벌 자체가 없는 형태로 바뀌었다. 운영에서 그냥 무시하는 형태로 간 것. 본인은 의도한 게 아니었겠지만, 스캔들로 인한 마지막 처벌을 받은 것은 미네기시 미나미가 되었다.
AKB의 팬들 중 스캔들을 공개적으로 개그의 소재로 차용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AKB48의 연애금지조례를 무시하고 반성하지 않는 태도"''' 라는 의견을 가진 팬이 엄청나게 많이 있다. "수많은 팬과 동료를 무시했다" 라는 주제를 가진 글을 '''사시하라 리노와의 악수회장에서 직접 읽고''' 스탭들에 의해 강제로 끌어내려지는 등 과격한 행동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16] 물론 사시하라 팬들과 안티들 모두 그녀의 스캔들이 정말로 있었던 사실이라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반론을 제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주간문춘이 내민 사실에 대해서 사시하라 자신이 "사소한 건 맞지 않지만, 그런 사실이 있었던 것은 맞다"고 인정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스캔들을 일으킨 행위 자체, 그리고 그 사실을 개그소재로 차용하는 등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극성팬을 제외하면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일부 삿시의 안티 중에는 "AKB를 대표하는 총선거의 1위가 저급한 농담으로 AKB48의 질을 떨어트려도 되는 것이냐", "삿시가 예능에서 저급한 개그를 하기에 사람들이 AKB를 받아들이는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라는 반응을 보이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각종 예능방송 등에 자주 출연하면서 삿시가 일반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AKB48 멤버였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특히 AKB의 공식 라이벌 기믹으로 데뷔한 노기자카46가 정말 라이벌급으로 뜨면서 청순하고 고급스런 아가씨 이미지를 굳혀감에 따라 상대적으로 AKB는 저급하다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어서 이 부분에 있어서 사시하라에 대한 비판이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삿시의 팬들은 이에 대해, 애초에 48그룹의 인기가 떨어지는 이유는 인기멤버들의 다수 졸업 이후 후발주자 즉 차세대라고 불리우는 멤버들이 아직까지 인기 멤버들과 비슷하거나 더 크게 발전하지 못한 것과 대중들이 48그룹 자체를 더 이상 '새롭다'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식상하게 받아들이는 점, 운영의 생각없는 자매그룹 확장 때문이지, 전부 다 삿시 때문이 아니라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케야키자카46, 노기자카46 같은 라이벌 그룹의 등장으로, 48그룹과 비교되면서 기존의 48그룹 팬덤 중 상당수가 46그룹으로 넘어가는 행동을 굳이 삿시 한 명에게만 뒤집어 씌우는 것은 잘못되었고 그러지 말아야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48그룹은 1명의 멤버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룹이 아니고, 또한 팬들이 직접 선발을 정한다는 총선거 싱글을 제외하면 운영은 단 한 번도 사시하라를 센터에 세운 적이 없는데, 이제와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운영의 선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팬들이 직접 투표해서 선발을 뽑자던 총선거 자체를 무시하자는 소리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런 총선거에서 사시하라에게 표를 던졌던 팬들을 그냥 무시하자는 소리다. 또한 이들의 말에 따르면, 애초에 현 48그룹은 이미 총인원 400명이 넘어가는 말도 안되는 멤버 수를 가지고 있는 그룹이므로, 이미 무슨 특정 이미지를 정해서 멤버들을 그 쪽 이미지로만 몰아 넣을 수 있는 그런 그룹이 아니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커졌고 너무 다양한 멤버들이 있다.오히려 이런 다양성을 살리는 게 낫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안티 측은 삿시가 예능방송에서 말하는 네타들 중 상당수가 수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네타라는 점을 지적한다. 지난 AKB48 역사를 놓고 볼 때, 스캔들을 일으킨 당사자가 이 정도 수위의 시모네타를 남발하는 경우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 지적은 위에서 언급된 "반성하지 않는 태도"와 연관되어, 비단 극성안티들만이 아니라, 일부 팬들 사이에서도 언급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스캔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자중하는 태도를 보이기를 요구하는 것은 비단 안티들 뿐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삿시의 팬들은, 삿시가 시모네타를 연발해서 얻는 이미지는 결국 삿시가 끌어안고 갈 책임이지, 그것을 그룹과 연관지어서 마치 그룹이미지가 삿시 한 명 때문에 나빠진다는 주장은 마뜩치 않다고 말한다. 애초에 48그룹은 멤버 한 명 한 명에 대한 팬덤이 강한 그룹이니, 삿시 한 명이 시모네타를 남발한다고 해서 그룹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주장이다. 당장 사시하라 이전에 절대적 센터와 그룹의 초에이스라 불리던 마에다 아츠코의 의욕없는 이미지나 오오시마 유코의 에로오야지 같은 캐릭이 그룹 이미지가 된 적이 없다. 방송에서의 모습과는 별개로 사시하라는 미성년자 AV 출연 반대 운동에 앞장서는 등 선은 확실히 지키는 성격이기도 하다. 그런데 안티들은 사시하라에게 이제와서 이미지를 그룹 이미지와 결부시키려고 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특히나 AKB는 그룹 전체를 지지하는 팬덤보다 개개인의 팬덤이 훨씬 강한 그룹이다. 이중적인 잣대로 멤버를 평가하려고 하지는 말자. 예를 들면 마츠무라 사유리는 불륜 사건을 일으키고 팬덤내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노기자카46는 약해지긴 커녕 더 결속력이 강해지고 국민적 아이돌 수준까지 올라갔다. 따라서 사시하라 그녀의 잘못은 어디까지나 그룹에 아직 연애금지조항이 있었을 때 스캔들을 일으켰다는 부분일 뿐이다. 그 이상을 덮어씌우는 것은 책임을 지지 말아야 할 것까지 멤버 개인한테 책임지게 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5. HKT48 이적 이후
6. 참여곡
6.1. 선발 참여곡
6.2. 참여곡
7. 역대 프로필 사진
[1] 주간문춘이 사건을 터뜨린 때가 2012년 6월 14일, 이적을 간게 2012년 6월 16일[2] 우리나라의 라디오 스타(황금어장)의 원조격 프로그램. 라스가 우타방을 벤치마킹했다. 기막힌 우연인지 우타방은 아키모토 야스시가 방송작가 시절 관여한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3] 키쿠치 아야카가 프리쿠라가 터져서 해고되었다. 그 빈 자리에 삿시가 들어왔다.[4] 언더걸스 최고의 명곡으로 뽑힌다. 타이틀곡인 RIVER보다 반응이 좋았고, 2010 리퀘스트아워에서는 RIVER를 제치고 2위를 기록하는 위엄을 보여줬다.[5] 이 때 기사에 이름이 '사스하라 리내'로 표기됐다.[6] 자신의 이름을 방송이름에 내걸고 하는 방송[7] 뜻은 '사시코 주제에!'[8] 순위 발표 당시 캐스터가 "불안해지는 건 왜일까요"라고 말하는데 그 예언이 적중해버렸다. 발표 영상 발표 후 소감 말하러 가는 부분에서 들린다.[9] 이때문에 키쿠치 아야카 포지션의 저주가 다시금 주목받았다. 키쿠치 아야카 참고.[10] 이 당시 했던 이 말은 당시 TV, 버라이어티에 자주 사용 됐었다.[11] 좌천이 아니라 기회를 제공 한거라 얘기 하는 팬들도 많으나, 당시 HKT48의 인지도부터 분위기까지 모든게 다 최악이었던걸 감안하면 좌천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12] HKT48의 외출! 2015년 8월 26일 방영분[13] 다만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사시하라가 가지고 있던 아이돌 팬 쪽 부분에서는 타격이 없다고 할수는 없다.[14] 거의 나오는 모든 방송에 계속 써먹히고 있는데, 13년 7월에는 춤추는 산마산장에 나와서 직접 주간문춘의 실명을 언급하며 감사하다는 말을 곁들였다...[15] 선배에 대한 뒷담화 등[16] 사실 이런 일은 꽤나 자주 있다. 스캔들을 일으킨 멤버에 대해서, 안티들이 악수회에 찾아와 온갖 욕설과 비난을 퍼붓는 일이 잦다. 다만 총감독 자리가 생기고 타카하시 미나미가 그 자리에 앉게 되면서, 무슨 이유에선지 이런 안티팬들이 오히려 타카하시 미나미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멤버들 스캔들 관리 안한다는 이유로 졸지에 타카하시 미나미는 악수회장에서 심한 욕설을 들어야 하는 일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