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탕무

 


영어: sugar beet
독일어: Zuckerrübe
네덜란드어: suikerbiet
중국어, 일본어: 甜菜(첨채, Tiáncài, てん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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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명 ''Beta vulgaris'' var. ''altissima''
근대아종으로, 학명은 ''Beta vulgaris'' ssp. ''vulgaris'' convar. ''vulgaris'' var. ''altissima''이다.[1] 야생의 조상으로 세 가지 아종(subspecies)가 존재하며, Beta vulgaris ssp. vulgaris, Beta vulgaris ssp. maritima, Beta vulgaris ssp. adenensis의 아종들 중에서 vulgaris 아종이 뿌리채소 내지는 잎채소로 수천년간 품종 개량된 결과 오늘날에 이르렀다.[2] 언뜻 당근같이도 생겼다.
사탕수수와 더불어 중요한 설탕 생산원이다. 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사탕수수에 비해서 동유럽이나 미국 북부 같은 냉대, 온대 기후에서도 기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많이 길러졌다. 특히 뿌리에 당분이 많은 품종을 널리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사탕무로 별도 품종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3]. 사탕무 설탕은 사탕수수 설탕에 비해 상당히 부드러운 맛이 난다고 한다. 맛 측면에서는 사람에 따라 취향을 크게 타지만, 일반적으로는 사탕무 설탕이 사탕수수 설탕보다 한 단계 낮은 취급을 받고 있다. 사탕수수 설탕은 자당, 사탕무 설탕은 첨채당/감자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탕수수에 비해 재배된 역사는 훨씬 짧다. 일단 길러보니 냉대기후온대기후 지방에서도 쑥쑥 잘 자라서 초기 용도는 그냥 가축사료나 보르시 먹을 때 넣는 정도[4]. 그러던 1747년 어느날, 독일의 화학자 마르그라프(Andreas Sigismund Marggraf)가 현미경으로 사탕무 조각을 보던 중, 당 성분이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이걸로 설탕을 만들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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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라프의 제자이자 프로센의 과학자였던 프란츠 아카드(Franz Karl Achard)는 스승의 주장을 이어받아 직접 여러가지 사탕무 종자들을 키워보며 이 이론을 현실화 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운이 없었는지, 농장이 불타는등 악재가 겹쳐서 연구의 진척이 없었다. 그러던 중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후원을 받아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겼고 1801년, 마침내 설탕을 뽑아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사탕무 공장은 나폴레옹 전쟁에 휩쓸려 또 한번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이 시기 사탕무를 이용한 제당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그 유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그 동안 프랑스의 설탕 공급원이던 생도맹그(지금의 아이티)가 떨어져 나간데다 대륙봉쇄령으로 사탕수수 수입이 막히자, 그간 설탕을 만들 수 있다는 연구결과는 나왔지만 듣보잡이었던 사탕무 재배로 눈을 돌리게 된 것.[5] 나폴레옹은 아카드에게 과학자들을 보내어 제조법을 알아오게 했는데, 아카드는 이들에게 제조법을 알려주는 대가로 어떤 보상도 받지 않았다. 사실 그가 알거지가 되어가며 제당법을 개발했던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설탕의 달콤함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는 순수한 열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심지어 영국 설탕 농장주들이 찾아와서 엄청난 돈을 주며 사탕무 제조법을 파기해달라고 부탁까지 했으나 거절했다. 다만 그 열정과는 다르게 결국 그는 파산하여 빈곤속에서 늙어 죽었다. 인류가 설탕을 마음껏 먹을수 있게 된 해피엔딩 스토리의 뒷배경에는 씁쓸한 뒷이야기를 남긴 셈이다.
지금은 세계의 냉온대 지방에서 많이 재배하여, 전 세계 설탕 수요의 20% 이상을 충당하고 있다. 국가별로 보면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사탕무 생산국이며, 미국에서는 아이다호 주 등 북서부 내륙지방, 중국에서는 헤이룽장 성둥베이 지방이 주된 사탕무 재배지이다.[6] 일본에서는 홋카이도가 주 생산지이다.[7] 터키의 경우 자국산 설탕 100%를 사탕무에서 뽑아낸 설탕으로 충당하고 있으며 대부분 중부지방의 고원지대 콘야, 시와스 등지에서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다. 또한 자국산업 보호를 이유로 설탕 수입을 금지하고 있어서 터키의 유명한 전통 디저트들에는 모두 사탕무 설탕만을 쓰고있다.
한국에서도 재배는 가능하나, 경제성과 이윤이 없기 때문에 별로 재배를 하지 않고 있다. 이 작물 자체가 재배하는데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드는 데다가, 설탕을 경제성 있게 생산하려면 어느 정도 많은 양을 한꺼번에 대량으로 재배해야 하므로 사탕무만 생산하는 전용 토지도 확보되어야 한다. 게다가 지중해 원산의 작물답게 건조한 여름 날씨를 요구하는지라 지나치게 여름이 습한 한국의 기후 조건과는 맞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초반인 1920년경부터 조선총독부와 일본 제당자본들이 달려들어 식민지 조선에 독점 제당회사를 세우고 한반도 중북부 지방에 사탕무 플랜테이션 농업을 시도했다가 대차게 말아먹은 전력이 있으며, 1923년이 되자 황해도의 사탕무 농업은 거의 전멸하였다.
현재는 큰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아주 가끔씩 볼 수 있다. 설탕 제조용보다는 그냥 비트나 무처럼 채소 개념으로 판매하는 듯. 거의 대부분 제주도산인데 사탕무를 심어놓아도 겨울을 날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하기 때문에 월동작물로 재배를 시도하고 있다. 사실 한반도에도 북한 지역에 사탕무를 대량으로 재배하기에 최적인 곳이 있긴 하지만 통일 이후에나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트렉터 등으로 수확한 사탕무의 뿌리 부분만을 작게 잘라 삶고 필터로 거른 것을 여러 번 졸인 후 원심분리해 설탕 결정을 얻어내는데 부산물들은 애완동물의 사료나 비료로 사용하며 바이오연료로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이걸로 굴러가는 자동차도 있다.
한때 순무와 더불어 전쟁터에 을 온전히 운반하는 수단으로 제안된 적이 있다. 사탕무 조각을 술에 재운다는 것. 치킨무와 비슷하다. 술 맛이 제대로 안 난다 하여 기각되었지만...참고로 사탕무 조각 대신 젤리에 술을 흡수시켜서 운반하는 방법은 실제로 사용되었다. 물론 포장기술이 발달한 현대는 이런거 다 필요없고 간단하게 비닐팩이나 종이팩을 쓴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성 '베토벤'의 뜻은 '사탕무(Beet) 밭(hoven)'이다. 다만 이 Beet는 당시 비트종에서 사탕 빼먹는 것이 개발되기 전이기 때문에, 사탕무가 아니라 수프에 넣어먹던 채소 비트일 가능성이 높고, 주로 잎을 먹는 서양 근대일 수도 있다.

[1] 근대의 학명은 ''Beta vulgaris'' ssp. ''vulgaris'' convar. cicla. group ''Flavescens''. 영어에서 근대와 사탕무는 모두 beet(비트)라 부른지만 둘은 서로 차이가 있다. 영어로도 잎을 먹는 근대는 Chard라고 따로 부른다. 식물은 비록 종이 같다고 하더라도 품종 간의 차이는 꽤 클 수 있다.[2] 이는 배추가 속한 십자화과 식물도 마찬가지. 양배추와 그 형제들(케일, 브로콜리, 콜리플라워, 콜라비)을 보라. 모두 동일한 종의 다른 품종이다![3] 일반적으로 보르시에 넣는 비트도 사탕무라고 부르는 등 둘의 구별이 안되는 경향이 있다.[4] 이것도 지금은 가축사료로 쓰이는 품종과 덩이뿌리 먹는 품종을 분리해서 본다.[5] 이와 똑같은 입장을 가진 인물이 또 있었는데,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사탕무 말고도 감자에서도 감자당을 추출해 설탕을 생산했기 때문에 무역 차단 제재를 받아도 자국에서 설탕을 계속 소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44년이 되면 원료인 감자가 사람 먹기에도 부족해지고 연료인 가솔린도 전차에 쓰기에도 부족해져서 생산이 중단되었다.[6] 의외로 내몽골과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도 사탕무를 꽤 기르고 있다.[7] 미국, 중국, 일본은 지리적 특성상 사탕수수(최남단)와 사탕무(최북단) 생산이 모두 가능하다. 실제로 호쿠렌(홋카이도 농업협동조합의 경제사업부문)에서 사탕무 사업본부는 곡물, 농산물, 낙농축산 사업본부와 별도인 하나의 사업본부로 독립되어 있다. 또한 호쿠렌 외에 일본첨채제당이라는 회사에서 사탕무 설탕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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