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급 전함
1. 제원
2. 개요
크릭스마리네의 전함 '''비스마르크급 전함(Die Schlachtschiffe der Bismarck-Klasse)'''.
제2차 세계대전때 등장한 나치 독일 국방군 해군(크릭스마리네)의 고속전함으로 중후한 디자인과 함께 특히 1번함 비스마르크의 활약과 최후가 매우 드라마틱하고 장렬했기에 군사무기 매니아 사이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등장 시점에 영국 해군의 자존심이라 불리던 순양전함 후드의 배수량을 뛰어넘어 미합중국 해군의 아이오와급 전함과 일본군 해군의 야마토급 전함의 등장 이전까지 세계 최대의 전함이라는 타이틀을 보유했으며 건조되었던 2척 모두 영국 해군의 신경을 많이 긁었던 전함이다.
1번함인 비스마르크의 어원은 철혈재상으로도 유명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서 따왔으며 2번함인 티르피츠의 어원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 해군 원수인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의 이름에서 따왔다. 두 함선 모두 기원이 된 인물들의 이름에서 성만 따왔다.
3. 계획 비화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재무장이 시작되기 직전인 1933년, 독일 국가해군의 처지는 '''매우 참담했다.'''
한때, 영국 해군과 해군 군비경쟁을 하며 더 나아가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겠다는 독일 제국 해군은 전쟁에 패배한 후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으로 인해 쓸만한 함선 대부분이 고철이 되었으며, 그나마 남은 함선도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승전국에게 배상함으로 빼앗기는 바람에 허용된 전력이라곤 구식 전드레드노트급 전함과 약간의 보조함 전력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냉정하게 현실을 말하자면 자국 해역의 제해권도 보장못할 3류 해군의 처지였다.
하지만 이렇게 독일 해군의 발목을 잡아끌던 베르사유 조약은 점점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당시 베르사유 체제의 실질적인 주도국은 1차 대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프랑스였지만 이에 협조하는 당사국중 하나인 영국이 손을 떼어버릴 경우 프랑스로서도 딱히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전한 각 국가들은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고 인구 자체가 부족했던 프랑스의 경우 그 타격이 심각하여 1 ~ 1.5세대 남성 인구가 상당히 줄어든 상태였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20년이 경과한 시점에서도 그 후유증이 차마 회복이 되지 못한 상태였기에, 인구부족으로 인해 최소 30년간은 유럽에서 산업, 군사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기 힘들다는 갑갑한 미래가 있었다.
그러던 와중 1927년, 베르사유 조약 감시단이 독일을 떠나자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군비증강을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했다.[2] 비록 독일의 통제권 밖인 라인란트 지방에서 군수품을 생산하고 유령회사를 만들어 잠수함 기술 등을 연구했지만 프랑스와 영국은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예로 1936년의 라인란트 지방을 주민투표로 점거하고 군대를 주둔시켰음에도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이 자신의 앞마당에 걸어 들어간 것이라고 자위하며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불안감에 프랑스는 마지노선을 보수하고 영국은 독일을 공습할 계획을 승인했으나 네빌 체임벌린이 수상이 되면서 전부 무산되었다. 체임벌린은 폴란드전 발발 직전까지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런 절호의 호기를 맞아 나치 독일 해군은 야심찬 건함계획을 세웠고 그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비스마르크급 전함이다.
4. 건조계획
비스마르크급에 대해 논하기 전에, 비스마르크급을 만들고 운용한 독일 해군의 의중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 해군은 전함을 가질 수도 없었고 기술 연구를 위한 목업도 없이 그저 설계도를 구상하는 정도에 그첬다. 이후 영독 해군조약으로 독일의 오랜 꿈인 전함보유가 인정되면서 라이히스마리네는 북해와 폴란드 해군, 프랑스 해군을 상대하는데 적합한 35,000t급 조약형 전함 설계안을 내놓았다. 이 설계안은 해역 폭이 좁고 해안포가 많은 북해 특성상 최대한 신뢰성과 방호력에 집중한 형태였고, 13인치 연장포탑 4기와 14인치 측면장갑, 30kn의 고속성이 주된 특징이었다. 특이하게도 이 설계안은 중량 증가를 우려하여 프랑스 해군과 같이 4연장 포탑을 채택하는 방안 또한 고려되었다.
그러나 1935년부터 독일 해군의 사령관은 에리히 레더 제독으로 바뀌었는데, 레더 역시 당시에 흔하디 흔했던 거함거포주의 신봉자였고 당시로는 독일 해군 내에서는 해상전의 최고 권위자였으나, 전임자들과는 달리 레더 제독은 ''''영국 해군은 식민지 유지를 위해 3대양에 순양함들을 한가득 배치해놓은 상태고 홈플릿에는 속력이 느린 전함들 뿐이니 우리 독일 해군은 중순양함과 순양전함, 고속전함으로 이루어진 고속타격대를 편성해 선발대의 영국 해군 주력함을 한 두 척 잡고 주력대를 고속으로 따돌린 뒤 통상파괴전을 실시해야 한다'''' 라는 의중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레더의 의견을 들어본 아돌프 히틀러는 이 견해를 적극 채용하여 폴란드 해군과 프랑스 해군 뿐만 아니라 영국 해군에도 대응할 수 있는 수상함대 건설을 지시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 결정된 초창기 비스마르크급의 ROC(운용요구조건)는 프랑스 해군의 리슐리외급 전함이 등장하는 한편, 가상적군을 영국 해군까지 포함시키면서 ROC를 대폭 수정했다. 리슐리외급의 31kn에 맞춰 동등 혹은 이상의 속력이 필요했고,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을 상대할 수 있는 15인치급 포를 탑재하는 등 요구능력과 제약사항이 한층 더 늘어났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 후, 독일 해군은 이 모든 것을 조속한 시일 내에 3만 5천톤급 선체로 건조할 기술력은 없었다. 결국은 배수량을 대폭 늘린다는 무식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을 채택했고세계에는 3만5천톤이라고 발표했으나 실제로는 4만톤급의 거함을 만들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비스마르크급은 아이오와급 전함과 야마토급 전함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세계 최대의 전함이라는 비공식 타이틀을 얻었다. 비슷한 시간, 당시 영국과 미국은 조약 내에서 최대한의 성능을 뽑아내기 위해 골머리를 싸맨 것과 대조적이다. 한편 일본군 해군은 신형 전함을 건조할 수 없는 관계로[3] 기존에 보유한 전함들을[4] 개장하고 있었고 결국 조약을 탈퇴해서 만든게 야마토급 전함.
당시 각 열강의 해군은 과도한 건함경쟁을 억제하기 위해 군함의 배수량과 무장에 제한을 두기 위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체결했고 이 조약 내에서 최대한의 성능을 뽑아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서술했듯이 독일은 영국과 미국처럼 이 조약 내에서 성능을 뽑아낼 정도의 기술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고 제한된 시간 내에 보수적인 설계로 원하는 성능을 뽑아내기 위해 배수량을 잡아늘려버렸다. 사실 크기가 커지면 요구되는 예산이 엄청나지는데, 총통의 입장에서는 태클걸 '''의회'''도 없었기에 예산문제는 미/영에 비해 상당히 해결하기 쉬웠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법적으로나마 넉넉한 배수량을 보유할 수 있게 되자 검증된 구식기술로도 성능향상을 달성할 수준의 용적이 주어졌고 독일 기술진은 터틀백 형식의 선체방어구조와 구형 전함 바이에른급 전함의 3 샤프트식 설계를, 공격력 향상을 위해 비교적 경량의 고속탄을 선택했다. 알고보면 결국 2차대전형 전함이 아닌 1차대전형 전함인 것이다.[5]
기본적인 배의 디자인은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을 답습하고 있으나 배수량과 용적, 덩치가 커지고 11인치 3연장 함포 대신 빠른 장전속도와 포구초속을 가진 14.96인치 2연장 함포를 탑재했다. 또한 5.9인치부포 및 4.1인치 대공포의 숫자도 증가되어 제1차 세계대전후 20년만에 만들어진 독일 해군 전함치고는 그럭저럭 쓸만한 전함이 나왔다.
5. 장점
비스마르크의 속력은 동시대의 전함중 가장 뛰어난 수준이었다. 당시 비스마르크급을 추격할 수 있는 전함은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됭케르크급 전함, 리슐리외급 전함 정도인데 됭케르크급은 화력도 떨어지는데다가 방어력이 상당히 부실한 편이고 샤른호르스트급은 같은 국가의 함선이니[6] 논외로 한다면 리슐리외급 정도이다. 미국의 표준형 전함들은 21노트 전후의 느린 속력이었고 영국 또한 리벤지급 전함이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같은 구식전함이나 넬슨급 전함같이 공방능력은 우수하지만 속력은 느린 전함만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나마 빠른편인 일본의 나가토급 전함도 다른 전함에 비해서 빠를뿐 비스마르크의 속력에는 한참 못 미쳤다. 물론 영국이 보유한 순양전함들은 추격이 가능하지만 장갑이 얇아 전면에서 포화를 주고 받기는 여러모로 무리이고 비스마르크의 공방에 문제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전함은 전함인 만큼 상당히 위협적일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이건 비스마르크급까지 갈 필요도 없이 샤른호르스트급만 되도 충분한 수준이지만.[7]
그리고 관련 링크에 있는 글 작성자의 주장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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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기에 독일이 비스마르크급 2번함 티르피츠로 포격 훈련을 한 기록을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는데, 독일의 포격 훈련 실험 데이터가 포함된 독일의 전시 GKdos-100 파일에서 나온 정보에 따르면, 티르피츠의 포탄 분산도는 21km에서 112m의 분포를 보였다고 한다. 저 기록대로라면 티르피츠는 2차대전의 전함 중 가장 좁은 포탄 분산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1940년대 동안 일본, 영국 또는 미국 전함이 21km에서 112m의 분산도를 보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본, 영국 또는 미국의 전시 포격 훈련 기록이 없다고 한다. 여기에는 아이오와급 전함도 포함되어있다고 한다.
티르피츠는 함생동안 여러 번 실사격 훈련을 했는데, 예를 들어 1941년 8월에는 기동하는 140m 길이의 전노급 전함 "HESSEN"을 표적으로 하여 발사했다.[8] 흥미롭게도, 테스트 도중 25km (27,340야드)의 거리에서 티르피츠의 38cm 포탄은 HESSEN에 9발의 명중탄을 낸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25km 내에 있는 목표물에 9발 명중은, 1940년대 어떤 전함에서도 기록된 적이 없고, 자신이 아는 바로는 이 성능은 타국 전함들이 동일하거나 능가한 적이 없었다고 글 작성자가 주장했으며, 이 실험이 1941년 8월에 티르피츠의 기록이었기에, 후에 추가적인 업그레이드를 받은 티르피츠의 실 포격 명중률은 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6. 문제점
하지만 비스마르크급은 결론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형 설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제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내놓기에 만족스러운 전함은 아니었다.
그나마 당시 동원할 수 있던 나치 독일 해군이 동원한 기술력과 자원들이 모여 만들어진 총아였으나, 사상이나 개념적으로 1년 늦게 건조된 미국과 영국 해군의 신형 전함들과 비교를 할 경우 '''"결론은 옛날 잔재"''' 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9][10]
6.1. 화력
비스마르크에 탑재된 380mm 52구경장 SK C/34 함포는 경량 고속탄이란 개념하에 크루프 사에서 개발했으며 보고서에 따르면 전함용 거포중에서는 가장 빠른 속사능력을 가진 주포라고 평가받았다. 크루프 사의 공식문서에서는 탄체와 장약을 장입하고 4도 고각까지 주포를 고정하는데 26초가 걸렸으며 숙련병들이 다룰 경우 분당 3발을 사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동시기 타국 16인치 전함들이 분당 2발 수준이란 걸 감안하면 빠른 장전속도를 가졌다. 그러나 호이스트 설계의 문제와 독일 수병의 훈련도 때문에 실제로는 분당 2.3발의 사격속도를 발휘했다.[11]
전함 주포의 파괴력은 운동 에너지에 크게 의존하며, 주포의 파괴력은 포탄 중량과 초구탄속을 늘리면 된다. 그런데 비스마르크 주포탄의 무게는 800kg으로 885kg인 이탈리아 해군의 15인치 포탄이나 884kg의 프랑스의 15인치 포탄은 물론이고 영국 15인치의 879kg에 비해 가볍다. 포구 초속은 초속 820m이므로 영국 15인치 42구경장 Mark 1 함포의 초속 804m(수퍼차지)와 비교하면 빠르다. 그러나 이탈리아 15인치 함포는 초속 850m에 달하며 프랑스의 15인치도 830m/s라는걸 감안하면 타국 15인치보다 명확히 빠르다고 볼 수 없다. 게다가 포탄의 중량까지 가벼워서 장점이 없다.[12]
가장 큰 문제로 비스마르크의 주포는 낙각이 크지 않은 저각 함포였기 때문에 갑판에 착탄시켜 적을 격파하기 어려웠다. 2만m 구역에서의 낙각은 16.4~23.8도 사이로 영국의 22.2도~29.9도와 비교할 시 2만m 이상의 구역에서는 측면을 타격할 확률이 영국 함포보다 높았다.
포신의 내구력도 문제가 되었다. 크루프 사에선 이탈리아 15인치 주포처럼 성능을 얻고 130발을 자랑하는 것은 지양했고, 결국 포신수명을 210발 내외로 설계하였다. 이 수명은 영국 해군 15인치 포의 330발보다 짧지만[13] 독일 해군이 요구를 충족시켰다.
전략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1. 레더 제독은 영국 주력대의 집결 전에 기동력을 살려 통상파괴전을 실시할 것을 상정했다. 그런데 독일 해군은 대서양으로 나가기 위해 발트해와 북해를 거칠 것이므로 영국 해군이 경로를 예측하기 쉬웠다. 도버 해협은 홈플릿이 막을 것이고, 독일 해군이 대서양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북해 루트 밖에 없다. 이렇게 지형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니 나가기 힘든만큼 '''무조건''' 밥값은 하고 와야 남는 장사라는건 당연하다. 따라서 작전 수행시 수리 및 보수를 장기간 받지 못할 것을 상정하여 위력보다 신뢰성을 우선시했다.
2. 독일 해군의 홈그라운드인 북해는 항해하기 매우 가혹했으며, 근접 조우전이 다발하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장전 속도를 빠르게 하는게 유리했다.
3. 독일 해군은 포탑을 3연장화 하면서 포탑의 수를 3기로 줄이는 것보다 연장포탑 4기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포탑의 수가 많으면 포격을 통한 측정과 오차수정의 기회가 많아지므로 협차제원을 더 빠르게 낼 수 있고 그러면 유효타를 내는 것이 더 빨라지므로 그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연장포탑 4기의 경우 밸런스 문제 때문에 포기하였다. 속도를 포기하든가 항속거리를 포기하든가 방어력을 포기하든가 어느 한 부분을 포기해야 하는데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비스마르크급 전함은 당시 세계 최대급 전함에 걸맞지 않은 약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6.2. 방어력
한때 말이 굉장히 많았던 요소이다.
장갑재의 수준은 당대 세계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하지만 상부의 급작스런 요구성능 변경과 촉박한 시간 때문에 비스마르크를 포함한 독일 전함은 방어 효율성이 매우 낮았다.
비스마르크의 방어구조는 1차대전때의 터틀백 + 다층 방어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 방어구조는 10도 내외의 낙각을 가지는 즉, 저각으로 날아오는 포탄을 막아내는 데에는 상당히 유리한 구조지만, 15도 이상까지 올라가는 낙각을 가지는 포탄을 방어하기에는 무리가 많은 구조이다. 영국 해군의 15인치포가 2만m에서 22.2도 이상의 낙각을 가지고 있으며 미 해군의 16인치 초중량탄은 같은 거리에서 25도를 자랑한다.
측면장갑은 320mm로 되려 350mm급인 샤른호스트급 전함보다 약하며, 하부 주장갑은 320mm, 상부 주장갑은 145mm 장갑이다.[14] 더군다나 320mm 측면장갑의 절반은 물 속에 잠겨 있는 구조이다. 적의 주포탄을 막기 위해 설치한 장갑이 무용지물이 된 셈이다.[15][16]
따라서 145mm 장갑 부위에 착탄시엔 '''30mm 내부장갑과 2단식 장갑, 220mm 포탑 바벳장갑만이 남게 된다.'''[17] 기준배수량 45,000t급 전함이 이런 부실한 방어력을 발휘한다면 당연히 문제가 된다. 또한 구형 터틀백 구조를 채택하였으므로 방어효율도 나쁘다.
표로 비교해보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 명확히 드러나는데, 뱅가드급 전함은 비스마르크보다 장갑을 덜 둘렀음에도 실제 방어력은 훨씬 높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바벳 앞부분에도 측면장갑을 할당시키는 등 과방어로 인해 중량과 용적 낭비도 심한편이었다. 반면 신형 전함의 방어구조는 '''중요한 부분에만 장갑을 올인한다'''는 집중방어이론를 한층 더 개선하여 실제 방어력을 증가시키고 중량과 용적 낭비를 억제했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점이 미흡한 전함이었다.
갑판장갑 또한 방어력이 약했다. 갑판장갑은 50mm+80mm(총합 130mm)의 다층방식인데 이는 미국의 표준전함들과 동등 이하이며 신형 전함의 152mm+급보다 명백히 약하다. 킹 조지 5세급 전함은 갑판장갑이 6인치였고, 사우스다코타급과 아이오와급의 경우 6인치급 갑판장갑과 추가적인 피해감소를 위한 스플린터 덱이 있었다. 일본의 경우 나가토급은 건조 시기의 한계로 인해 다층방식이긴 하나 70mm+127mm로 총합이 197mm에 달하였고[18] 야마토급의 갑판장갑은 200-226mm[19] 였다. 터틀백 구조를 채용한 프랑스 해군의 리슐리외급은 집중방어 이론에 맞추어 최적화를 실시, 실제 갑판 방어력은 주장갑150mm+스플린터 덱 40mm로 터틀백 구조 답지 않게 우수한 성능을 자랑했다. 즉, 비스마르크급은 타국보다 갑판 방어력이 매우 떨어졌다.
이뿐만 아니라 다층방어 시스템의 특성상, 포탄을 내부에서 막아내는 체계이기 때문에 함선에 상당한 무리를 줄 수 있었다.
주포탑의 장갑도 좋다고 볼 수 없었다. 근접 저각 포격전을 상정하고 만든 전함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포탑 바벳장갑의 두께는 220mm다. 물론 주장갑 위로 솟아오른 2,3번 바벳의 특정부위는 340mm이나.. 약간 뒤늦은 시기에 등장한 노스캐롤라이나조차도 최소 292mm, 주장갑 밖으로 튀어나온 장갑은 374mm이다. 더군다나 노스캐롤라이나급은 측면장갑만 15도의 경사를 가지는 12.75인치 경사장갑인지라 측면장갑+바벳까지 다 합쳐도 넘사벽이다.[20]
덤으로 주포탑에 경사장갑을 잘못 적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타국 전함은 측면장갑과 상면장갑이 약 90도로 연결되므로 측면 착탄시엔 측면장갑으로, 수직 착탄시엔 천장장갑으로 막지만, 독일은 측면장갑 위에 45도 각도의 경사장갑이 있고, 이 장갑 다음에 상면장갑이 있는 구조다. 따라서 '''측면 착탄시 50%가 상부 경사장갑에 명중한다.''' 문제는 아무리 경사장갑이라도 일부 측면은 150mm였으므로 경사장갑을 사용해도 전함의 주포탄을 방호할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전면장갑 상부의 상부 경사장갑은 180mm라서 조금만 낙각이 올라가면 방호를 보장할 수 없다. 결국 주포탑 설계가 미흡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문제는 실전 당시 1,2번 주포탑인 안톤, 브루노가 영국의 넬슨급 전함2번함 로드니가 쏜 16인치 주포 일제사격 1번에 침묵해버리는 문제를 터뜨리고 말았다. 전함의 일제사격이 말과는 달리 실제로는 목표에 1-2발 맞으면 다행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비스마르크급의 주포가 2연장 주포탑 4기로 총 8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포탄 1-2발에 화력이 절반으로 떨어진 셈이다.''' 덕분에 적의 일제사격을 맞기 전에 애써서 적들의 전함을 먼저 협차했는데도 불구하고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결국 영국 함대가 비스마르크의 주포가 침묵하자 초근접거리로 접근, 포탄과 어뢰까지 발사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비스마르크 추격전 당시 비스마르크가 킹 조지 5세와 로드니의 집중포격을 받고도 침몰하지 않고 버틴 것은, 근거리에서 포격을 당했기에 원거리 포격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거리 포격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된 근접전 특화 구조가 설계자가 의도한대로 작동한 것이다. 만약 샤른호르스트가 격침될 당시의 상황처럼, 중거리 이상에서 대낙각탄을 맞았다면 큰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6.3. 단점에 대해 고려할 점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변명을 해볼 수 있다.
1. 독일이 금속이나 기계에 관련한 기술은 최고수준이었기에 비스마르크의 장갑판은 니켈 크롬 몰리브덴 강판이라는 당시에선 손에 꼽히는 최첨단 철판으로 만들어졌다. 다만 이 판을 적용하고 설계를 하는 과정에서 1932년 기준 최신식 정보가 없던 독일 해군은 당시 건조중인 프랑스의 전함이 15인치 미만의 주포를 올릴 것으로 판단했었다. 따라서 15인치 대응방어를 갖춘 전함에 그 이상을 바라기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라인연습작전당시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후드와의 교전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2. 1935년 독일 재무장 선언 당시에도 16인치까지 주포 제한이 풀렸으나 톤수 제한은 그대로 35,000톤이었기 때문에 독일의 뒤쳐진 건함 기술로는 조약 안쪽에서 꾸역꾸역 전함을 만드는 것에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조약을 맞춰가며 공격과 방어의 밸런스가 맞는 배를 만드는 부분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같은 제약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전함의 특성이 달라질 수 밖에 없으며 이는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과 킹 조지 5세급 전함을 비교하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3. 독일 해군의 모토는 통상파괴작전이었다. 그 때문에 긴 항속거리와 30노트의 타국 고속전함들과 속력 만큼은 동급으로 만든것. 통상파괴작전은 적의 주력함과의 교전이 아니라 수송선단 등을 습격하는 작전이므로 전함끼리의 직접적인 함포전을 염두에 두고 만든 배들에 비해서 전함에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변명은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1. 비스마르크급의 문제는 장갑재의 재질이 아니라 덜떨어진 장갑 구조인데 여기에 장갑재의 재질이 좋다고 하는 것은 문제점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 주장일 뿐이다. 라인 연습 작전의 경우 15인치 대응방어를 갖춘 전함이 14인치포를 장착한 전함한테 큰 피해를 입으면 그거야말로 망신거리인 것이고 막아낸 것은 당연한 것이다. 15인치 주포를 장착한 후드는 프린츠 오이겐을 먼저 공격하다가 비스마르크는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하고 격침되었으니 비스마르크의 방어력을 논하기는 부적절하다. 그리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쏜 포탄이 비스마르크의 연료탱크를 파손시켰기 때문에 이는 방어력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사실이다.
2. 배수량의 제한으로 전함의 특성이 달라질 수 밖에 없는것은 사실이고 킹 조지 5세급 전함과 노스캐롤라이나급의 예시는 이에 부합하는 사례가 맞다. 그러나 이것도 조약에 맞춰서 35,000톤의 전함을 만들었을때나 할 수 있는 변명이지 조약을 무시하고 42,000톤급 전함을 찍어내고도 성능이 저 모양인 것에 대한 변명은 못된다.(그러나 그 당시 누가 42,000톤급을 운용한 국가가 없었기에 이는 시작부터 35,000 톤급 함선과 비교해야하지, 42,000 톤급과 비교해선 안 된다. 함선과는 비교할 이유가 못되어 다시 고려해봐야 하기도 하다. 다시말해, 35,000톤급의 함선을 크게 한거지 42,000 톤급을 생각하고 만든게 아니란 소리다)[21] 시기상 차이가 있지만 미국은 조약 배수량 내에서 16인치 주포를 장비하며 일반적인 16인치 포탄[22] 에 대한 대응방어를 달성하고도 27노트로 움직일 수 있는 사우스다코타급 전함을 건조해냈다. 노스캐롤라이나급과 킹 조지 5세급의 사례는 14인치급으로 설계되던 전함들이 일본이 조약에서 탈퇴하면서 갑자기 16인치로 업건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공수 밸런스를 찾지 못한 것으로 이해해야지, 그 국가들이 밸런스를 맞출 능력이 없었다고 이해하면 안된다. 처음부터 16인치 주포를 장비할 것을 염두에 둔 채로 설계에 들어갔다면 충분히 밸런스를 찾았을 가능성이 높은 전함들이다. 영국은 검증이 안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미국은 사우스다코타급에서 그 밸런스를 맞추어냈다.
3. 통상파괴전이라도 적 전함과의 교전을 상정해야 한다. 영국은 수송선 호위에 적극적으로 전함을 투입하였으므로[23] 전함과의 교전 또한 상정해야 했다. 그러나 배수량은 7,000톤이 더 높음에도 성능에서 비슷하거나 특별히 나을게 없다는 사실은 비스마르크급의 성능 문제에 대한 충분한 변호가 되지 못한다.( 역시 앞서 말했지만 이는 아직 아무 국가도 42.000톤급 전함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35,000 톤급 전함을 상대로 싸우겠다고 만든 함선이다) 전함이 없는 수송 선단만 골라서 털겠다면 샤른호르스트급만으로도 임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6.4. 기타
대공과 대보조함용 보조포에 있어서도 비스마르크는 불리했다.
당장 당면한 적인 영국 해군이 5.25인치 대공/대수상 양용포를 도입했고, 이 대포는 상당한 고위력을 자랑하는 양용포였으나, 고각에 문제가 있었고 장전속도도 느렸으며[24] 터렛의 무게가 상당히 무거웠다. 하지만 미국에게서 받은 VT신관을 적용하고 '''RP'''시스템을 이용하여 레이더와의 연동을 꾀했으며 뱅가드에 이르러서는 '''CRBF'''(단거리 무시야 사격)능력을 보유하여 262형 레이더의 통제 하에 모든 대공포문이 '''자동으로 조준'''되는 선진적인 시스템을 도입했다.
미 해군의 경우는 5인치 38구경장 양용포가 있다. 이 대포는 VT신관을 적용하여 강력한 화력과 뛰어난 대공 명중률, 분당 26발의 빠른 연사속도와 빠른 회전속도를 보유했으며 '''현재까지도 5인치 함포가 명맥을 유지하게 만든 원인이 된 명품 양용포다.''' 거기다 MK37 대공지휘/조준레이더와 각종 조준레이더의 지휘 하에 무시무시한 예측사격능력까지 보유했다. 당장 필리핀 해 해전에서 보듯이 VT신관과 이 대공지휘 시스템의 연동으로 미 해군은 공포적인 대공능력을 발휘했다.[25]
하지만 비스마르크급은 '''수상용 부포와 대공포를 따로 장비'''했다. [26] 레이더는 일본과 소련을 빼면 독,미,영 3국 모두 비슷한 기술 수준이지만 전간기 동안 군에 손을 놓은 대가는 매우 컸다. 이 문제 때문에 공간은 물론 중량에서도 동시기 미국/영국 해군 전함과 비교해 많은 점이 불리했다. 당장 터렛 무게만으로 미국 전함과 비슷한 대공화력을 뿜어내기 위해 400톤~500톤을 더 소모해야 했고 그에 필요한 탄약고도 따로 장비해야 했기 때문에 용적/무게 분배 효율이 나쁜편이다. 또한 위에서 설명한 문제 외에도 사용하는 포탄들의 종류가 여러가지이기 때문에 보급 면에서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27] 다만 당시 독일은 비스마르크가 단독으로 항해하며 구축함 같은 함정과 맞서야 할 상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수상함용 150mm 부포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주력 대공포인 105mm 대공포의 경우 포와 탄도 자체는 딱히 나무랄데 없는 대공포였으나 날이 갈수록 빨라지는 항공기에 대응하기에는 한참 모자라는 포탑 회전속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미 해군 5인치 양용포처럼 전기 모터 구동식이 아닌 유압 구동식이기 때문에 피탄을 당할경우 화재가 발생할 확률도 높았다. 심지어 '''사람의 힘만으로 움직인다는''' 일본군 해군보다도 성능이 떨어진다. 일본의 주력 대공포인 89식 대공포는 상하각이 초당 16도, 좌우로는 초당 16도를 움직이는 반면에 비스마르크의 대공포는 상하각이 초당 10~12도 좌우로는 초당 8~10도로 일본 해군보다 못한 수준이다. 물론 분당 발사속도는 15발로 14발인 일본 해군보다 1발 앞서기는 하지만 일본의 주력 대공포는 127mm이기 때문에 속사능력에서 더 뛰어나다고 보기도 어렵다.[사실]
심지어 소구경 대공포로서 장비한 SK C/30 37mm 2연장 대공포는 '''탄창식이다.''' 운용인원만 쳐도 일본제 25mm 3연장 대공포보다 많은데다가 '''분당 30발'''이라는 처참한 발사속도를 지녀서 소드피시 같은 허접한 뇌격기조차도 격추시키기 힘들었는데다, 이게 여기저기 고슴도치처럼 많이 박혀있던 것도 아니고 '''고작 16문만 장비되었다.''' 조약형 전함인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에도 건조 당시 1.1인치 기관포[28] 가 16문만 있었다. (여기서 알아둬야 할게, 독일은 88mm 대공포와 20mm대공포를 주력으로 사용하지, 105mm 대공포는 잘 쓰지 않았기에 적게 배치했다.). 이후 티르피츠는 개장을 거치며 2cm C/30기관포를 58문씩 도배를 했지만 C/30의 성능은 96식 25mm 고각기총 수준인데다가[29] 정작 SK C/30 37mm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그보다 대구경의 대공무장은 일체 증설되지 않았다(위에서 보았다싶이 20,37,88mm대공포를 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와중에 일부 순양함이나 구축함에는 4cm Flak 28, 즉 독일제 보포스 40mm 포를 달곤 했다.[30][31] 만약에 비스마르크가 이후까지 살아남아 개장을 거칠 기회가 있었더라면 적어도 티르피츠 수준으로 대공 무장이 증설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43년~44년 시점에서 티르피츠의 대공능력은 여전히 좋다고 말해주긴 애매한 만큼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못했을 것이다.[32]
거기다 대공/대수상용 포들을 따로따로 장비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부포의 개수는 늘어났고 부포 탄약의 유폭에 따른 데미지 컨트롤 능력에도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자칫 잘못하면 중앙부 갑판에 화재가 번지고 유폭을 일으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사격통제능력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해군은 우수한 광학측거의로 높은 포격정밀도를 자랑했지만 종전으로인해 사격방위반 등의 사격 시스템 개선은 상대국 영국에 뒤쳐져 있었다. 영국의 경우 1차 세계대전부터 독일보다 뒤쳐진 광학측거의 기술을 따라잡기보다는 사격방위반의 개발로 선회하였고 타이거급 순양전함에 탑재된 사격방위반 시스템은 기존의 인력계산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자동으로 사격제원이 송출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따라서 영국 해군은 독일 해군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사격제원을 송출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통합된 사격제원을 각 함포의 관제장교에게 넘겨 목표로 설정한 타겟에 대해 함이 보유한 전체 화력을 통합적으로, 신속하게 운용할 수 있었다. 이런 균일한 트리거 타이밍으로 인해 영국 전함의 전체 포문은 발포간격이 동일함은 물론 동일 사격제원이기 때문에 탄착확인이 훨씬 간단했다. 이러한 이유로 탄착수정이 훨씬 정확했고 개별 전함의 화력은 더욱 효과적으로 발휘되기 쉬웠다.
물론 독일 해군 역시 사격방위반 개발을 시도했지만 '''실전배치 전에 종전이 되어버렸고''' 전간기에 부활한 독일 해군은 여전히 이 사격방위반을 개발하지 못해 화력통제 시스템에서 적국인 영국에게 뒤쳐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으며 결국 비스마르크급에까지 와서도 이 문제는 끝끝내 해결되지 못했다.[33] 결국 '''사격제원 계산에 실패해서 짝포가 나거나 일부 포문은 아예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 있는등 많은 문제를 도출했다.''' 설상가상으로 충격에도 약해서 비스마르크의 레이더와 사격통제장치는 자신의 주포가 처음으로 포격을 시작했을 때 고장이 나버렸고 침몰 직전때까지 제대로 수리되지 못했다.
물론 후드를 일격에 잡았다. 그 이유는 후드 자체가 워낙 강력한 함선이라 일선에서 빼내어 현대화 개장작업에 착수하지 못했던 점도 있었으며 후드는 비스마르크가 최신예 전함답게 대응방어가 된 고속전함인 것으로 착각하고 근접격투를 노리고 급속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스마르크가 포탄을 명중시키기 편했다.
이외에도 비스마르크는 14.96인치 2연장 함포를 선수, 선미에 각각 포탑 2기씩 총 8문을 운용하는 설계였는데 이미 타국에서는 16인치 이상의 함포를 3연장화해 3연장 3기씩 총 9문의 함포를 운용할 수 있었다. 당시 독일 해군은 14인치급 이상의 포탑을 3연장화하지 못했을 때 타국의 신형전함들은 3연장 함포를 이용해 비스마르크급에 비해 화력은 강화가 되어 주포탑 하나를 없애서 주포탑에 할당되는 용적 및 무게를 절약할 수 있었고 부가적으로 위험한 피격구획인 주포탑 1기를 줄인 덕에 상대적으로도 피격에 안전했다. 그리고 주포탑을 줄이지 않는 선택을 한다면 3연장 주포탑을 4기 탑재해서 주포를 12문 탑재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2연장 주포탑 4기를 탑재한 전함보다 총합화력이 50% 늘어난다. 따라서 이 분야에서도 비스마르크는 문제점을 도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구형 설계가 발목을 잡는전함이었다.'''
7. 총평
이런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은 것이 뒤바뀐 상황에서 배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방어구조는 1차세계대전 수준에 정체되어 있었고 사격통제능력, 대공능력에 대해서도 정체되어 있거나 심각한 문제점을 도출해냈다.
독일 해군의 낮은 승조원 훈련도도 문제가 되었는데 당장 적국인 영국 해군은 비록 돈에 쪼들려도 매년마다 실탄 포격훈련을 철저히 하고 있었는데 독일 해군은 뭐 해보기도 전에 전쟁을 맞아버렸다. 이 훈련 부족문제는 페어리 소드피시 뇌격기의 공격이나 티르피츠 격침작전의 몇 가지 예에서 보듯 효율적인 대공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문제를 만들어냈고 '''데미지 컨트롤에 대해서는 아예 이것이 어떻다 라고 추정할만한 근거조차 만들어 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이 시도할 함대 결전을 회피하고 통상파괴전 및 통상파괴 전력 구축을 위해 마구마구 달려들 영국 해군 순양함 세력을 견제할 전력을 구축하나 노르웨이에서의 치명적인 해군 전력 손실로 인해 한때 상시운용전력이 구축함 3~4척에 순양함 2~3척까지 줄어든 전력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영국 전함 및 주력 함대와의 조우를 극도로 회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원래부터 해군강국이거나 나름대로 컨셉을 잡고 지속적인 발전과 여러가지 시도를 계속했던 당대 3대 해군국인 영국, 미국, 일본의 신전함들과의 비교는 말할 것도 없고, 1차대전 당시에만 해도 독일보다 해군력으로서는 뒤떨어졌던 이탈리아의 리토리오급 전함, 프랑스의 리슐리외급 전함과 비교해도 비스마르크는 야마토 등장 이전에는 최대급이었다는 배수량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다. 근접전에 특화된 화력은 16인치에 근접하는 현측타격 화력을 지닌(대신 희생한 것도 많았다) 비토리오 베네토보다 못하고, 공-방-주의 균형성은 리슐리외급 전함을 따라잡지 못한다.
그나마 자매함 티르피츠가 썩어도 준치라고 연합군에게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지속적인 압박을 주었고 그렇게 하여 북해에 해군전력 일부가 묶일 수 밖에 없었다. 항공모함이 해전의 주축이 되었던 2차대전에서 전함을 잘 이용한 사례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좋은 성능을 가졌지만 지휘부의 한심한 운용 덕분에 아무것도 못했던 야마토와는 달리 비스마르크는 적과 전투를 벌여서 싸웠고 자매함 2척을 전부 포함해도 아무런 전적도 쌓지 못한 야마토급 자매들과는 달리 비스마르크는 어쨌든 적함 하나를 격침시키고 한척을 중파시키는 전과[34] 를 보유했고, 티르피츠는 항구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영국 해군의 신경을 마구 긁었을 정도였으니[35] 설계가 신식이지 못하지만 좋은 활용이 받쳐준다면 활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는 했다.
8. 여담
비스마르크의 침몰에 대해 영국 측은 '격침'을 주장한 반면 독일 측은 '자침'을 주장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비스마르크의 비밀'이라는 다큐멘터리[36] 에서도 생존한 승조원들의 증언을 통해 은근슬쩍 자폭설을 내비치고 있다. 실제로 비스마르크의 잔해를 조사한 결과 수문이 열려있는 것이 확인되기는 했고, 승조원들의 증언을 참고할 때 지침 시도가 실제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자폭설을 따르더라도 방어구조가 '최대한 격침당하지 않기' 컨셉이라 격침을 안당했을뿐 최후의 전투에서 영국의 전함 '킹 조지 5세'와 '로드니'에게 얻어맞고 44분의 교전만에 앞서 언급한 얇은 장갑을 가진 주포탑과 바벳이 박살나면서 모든 포탑이 파괴되었으므로 사실상 전투불능이었다. 이후로는 그냥 두들겨맞았는데 후드때와 마찬가지로 비스마르크를 너무 과대평가한 영국전함 두 척이 근접거리로 너무 접근한 탓에 현측만 죽어라 두들겨댄게 큰 이유였다. 2만m 이상의 거리에서 갑판을 두들겼으면 비스마르크가 저렇게 전설로 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상황에서 영국 해군이 비스마르크를 내버려뒀다고 하더라도 비스마르크가 자력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격침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므로 설사 자침시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격침이라고 봐야 한다.[37]
격침기록은 후드 하나뿐이지만 그 하나가 탑 오브 탑이다 보니 그 때문에 이름값만큼은 엄청나게 높다. 배치시점에서 세계최대의 거함이라는 그 상징성에다 첫 출격에서 영국의 후드[38] 를 격침시켰고 비스마르크를 잡기위해 영국 해군이 투입한 전력도 엄청나다. 롬멜처럼 영국이 일부러 띄웠던 사정도 있다고... 첫전투에서 영국 해군 최대의 거함인 후드가 별다른 타격도 주지못하고 격침당하고 신예전함이었던 프린스 오브 웨일즈 역시 두드려 맞고 도주해야 했으니... 게다가 2차 대전중 전함 간의 고전적 포격전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대서양에는 사실상 이 전투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샤른호르스트 추격전 당시 샤른호르스트와 듀크 오브 요크는 아무래도 체급이 다르다. 샤른호르스트는 어뢰로 마무리당했고, 비스마르크도 넬슨급 전함 로드니에게 포격전으로 치명상을 입고 어뢰로 마무리당했다. 그리고 후소급 전함 후소와 야마시로도 레이테 만 해전에서 포격전으로 격침되었다. 공교롭게도 3척 모두 정규전함에게 격침당했다.(샤른호르스트급을 순양전함으로 분류했던건 영국이다. 독일애선 전함으로 분류되고 있었으며, 독일은 순양전함 건조계획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39]
2차 세계대전 직전의 상황에서는 기관공학의 발전으로 두터운 장갑을 두른 정규전함이 순양전함에 버금가는 속도를 낼 수 있었으므로, 순양전함의 쇠퇴는 예견되어있었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전투가 기리시마와 워싱턴의 포격전이었다. 워싱턴의 경우 단 7분간의 일제포격으로 16인치 주포탄을 최소 9발을 명중시켜 기리시마를 완전히 뭉게버렸다. 야간에 대략 8,400~12,560 야드에서 레이더 조준 일제사격 8회 75발을 사격하여 기록한 것으로, 명중률은 12%다. 1930년대에 미국의 전함 사격훈련에서의 성적이 '''일본군의 3분의 1 정도인 10%대'''였다는 점에서 레이더가 미국 전함들의 주포 명중률을 매우 개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0] 한편 워싱턴이 기리시마를 향해서 발사한 5인치 부포탄은 107발이고 그 중 40발이 명중하였다.[41]
여담으로 샤른호르스트는 나중에 킹 조지 5세급인 듀크 오브 요크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으므로 앙갚음은 한 셈이다. 덧붙여 기리시마는 미군 전함 워싱턴에 의해 격침되었다.
개전 당시 영국 해군 최대급의 함선이며, 나름 불침함으로 이름 날리던 순양전함 후드가 럭키샷[42] 에 당한게 꽤나 뼈아팠던 모양인지 영국이 무척 띄워주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당시 영국 수상인 처칠이 비스마르크급 전함에 노이로제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 그래서 2번함 티르피츠를 초중량 항공폭격으로 항구에서 앉은채로 뒤집어버리는데 성공했다.
사실 야마토급 전함이 나오기 전까지는 최대급의 전함이었고 독일의 전함건조능력을 너무나 과대평가한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사실여부는 불명이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비스마르크가 미국 동부 해안까지 와서 포격을 퍼부을까 두려워했다는 얘기도 있다.[43]
9. 대중매체
- 디스커버리 채널의 세계 톱10 군함편에서 7위를 차지하였다. 위협성과 화력에선 높게 평가를 받았으나 방어력, 혁신성, 운용기간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다.
-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도 방영이 되었다.
- Naval Front-Line의 나치 독일 트리의 레벨50급 전함이다.
- 네이비필드2의 독일 전함 트리의 9티어와 10티어 함선으로 등장한다. 왜 둘로 나뉘는가 하면 하나는 1941년 개장형이라는 이름을 달았기 때문이다.
- 월드 오브 워쉽에서는 독일 전함 8티어로 비스마르크가 등장했고, 8티어 프리미엄 함선으로 티르피츠가 등장한다. 이 게임에서는 전투거리가 현실보다 짧다보니 미국의 고낙각이 미국 최악이 단점이 되어버린데다가[44] , 오히려 전투거리가 짧은 전투에서 성능을 발휘하는 터틀백식 장갑 덕분에 집중 방호 구획이 잘 관통 당하지 않기 때문에 상당히 좋은 취급을 받는다. 거기다 어차피 어뢰 유폭 확률과 탄약고 유폭 확률은 거기서 거기기 때문에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방뢰와 선회가 그리 좋지 않아서 어뢰에 약하다.[45]
- 월드 오브 워플레인에서 야마토급 전함과 더불어 추축국 진영의 대형 중장갑 타겟으로 등장한다. 파괴 시 전술점수 32점을 획득하며, 상대방은 제공권의 최대 32%를 잃는다.
- 함대 컬렉션에 모에화되어 등장한다. 비스마르크(함대 컬렉션) 참고
- 워쉽배틀:2차세계대전에서 등장한다. 역시나 고증오류를 일으켜 함선 설명에 방어력이 강한 함선이라는 문장이 있다.
- 1941에서는 2스테이지 보스로 등장하는데 크게 어렵지는 않다.
- 벽람항로에서는 초반 튜토리얼에 등장한다. 해당 튜토리얼이 비스마르크 추격전을 모티브로 한지라 후드를 수만대의 대미지로 날려버리는 위엄을 과시한다. 단, 2년 가까이 소식이 없어서 대신 2번함인 티르피츠가 이벤트 보상함으로 먼저 나왔지만, 2019년 5월 23일 결국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나왔다.
- Naval Creed:Warships에서 비스마르크는 4티어 2차 전함으로 등장하며, 티르피츠는 프리미엄 4티어 2차 전함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팔레트 스왑(?)버전으로 우주 비스마르크라는 함선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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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쉽 플릿 커맨드에서 비스마르크가 5성급 함선으로 등장한다. 유명세에 걸맞는 능력치를 보유했지만 동급의 전함에 비해 화력과 방어력이 약하다. 다만 속도는 빨라 빠르게 교차하는 전략을 사용할 때 유용하다.
- Sabaton이 한국 시각으로 2019년 4월 23일에 공개한 노래, 'Bismarck'의 주역으로 비스마르크가 등장한다. 워게이밍 소속 월드오브워쉽 제작/운영진이 지원한 덕에 높은 영상미, 페어리 소드피시, 모함인 HMS 아크 로열, HMS 프린스 오브 웨일즈, HMS 킹 조지 5세, 어뢰를 날려대는 카운티급의 하위인 런던급 중순양함 HMS 도셋셔 포지션을 맡은 함[46][47] 과 함께 등장하나, 노래 소재가 비스마르크 추격전인 만큼 가라앉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 스타워즈의 독립 행성계 연합에서 건조한 서브쥬게이터급 중순양함 1번함 멀레벌런스도 비스마르크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 대체역사소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작중 최고의 수혜 함선으로 등장한다. 역사가 바뀌어 민주주의 국가로서 영국, 폴란드 등과 함께하는 연합군이 된 독일 라이히스마리네의 주력함으로 영국 로열 네이비와 연합해 프랑스 해군과의 영국 해협 전투에서 됭케르크와 리슐리외를 격침시키고, 작중 최후반부 일본 제국과의 함대 결전에서는 1번함 비스마르크가 일본 제국 전함 나가토와 무츠와 난타전을 벌여 결국 승리하지만 끝내 격침된다. 2번함 티르피츠는 전쟁 끝까지 살아남는데 성공한다.
10. 관련항목
[1] 헤르만 괴링의 어거지로 인해 해군 항공대를 보유하지 못하여 공군에서 항공기와 조종사, 정비 인력 일체가 파견되어 운용되었다.[2] 히틀러 집권 이전에도 베르사유 조약 이상의 군사증강은 있었으나, 히틀러 집권 후에 그 기세는 더욱 빨라졌다.[3] 해군 조약 하에서 새로운 전함을 건조할 수 없었으나 일본이 무츠를 살리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영국, 미국, 일본간의 조율이 이루어져서 일본은 무츠를 살렸고 영국과 미국은 16인치 주포를 장착한 전함 2척을 추가로 건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영국은 넬슨급 전함 2척을 새로 건조하였고 미국은 콜로라도급 2척을 추가로 건조할 수 있었다.[4] 공고급 순양전함, 후소급 전함, 이세급 전함, 나가토급 전함.[5] 비스마르크가 상대한 HMS 후드 역시 장갑만 강화된 1차대전형 순양전함이다. 전간기에는 전쟁혐오와 군축 분위기가 강해서, 엄청난 국력이 필요한 신형 전함 개발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국 해군도 후드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하필 대공황의 여파로 돈이 없어서 개량시기를 놓쳤다.[6] 게다가 이쪽도 주포가 11인치라는 빈약한 주포라 비스마르크에게 화력은 밀린다. 다만 방어력의 경우 측면 장갑만큼은 떡장이다. 효율이 좋지 않은 방어구조는 비스마르크도 똑같으니 논외.[7] 그런데 샤른호르스트급들은 영국의 순양전함인 HMS 리나운에 두들겨 맞고 그나이제나우의 주포가 고장나면서 쫓겨난 적이 있긴 하다.[8] HESSEN은 무선으로 조종되는 표적 함선으로써, 장갑이 좋아 표적 연습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개조된 전함이다. HESSEN은 최대 21노트로 움직일 수 있었고, 포격 훈련 당시에는 사격 난이도를 더 어렵게 하기 위해 선회기동도 하고 있었다고 한다. HESSEN은 무선으로 속도를 바꾸고, 선회하고, 적극적으로 연막을 작동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9] 의외지만 오히려 바이에른급의 후계함급인 L 20 α급 전함의 경우 비스마르크급보다 기초가 탄탄한 설계를 보여준다.[10] 물론 1차대전 시절에 비해 개선된 점도 있다. 속도는 명확히 빨라졌고 포곽식 부포 대신 부포탑을 도입했다. 그럼에도 문제점이 너무 많았다.[11] 물론 전간기 기준으로 2차대전기간까지 가면 교범상 30초가 기준인 16인치 포탄장전을 '''14초대'''에 끊는 '''노스캐롤라이나급전함 2번함 워싱턴'''이 있다. 병사들에 숙련도가 어마어마했고 훈련이 지옥이였으며 장전수를 갈아냈다고.....[12] 다만 여기서 감안해야 할 점이 있다. 이탈리아의 경우 지중해, 프랑스의 경우 영불해협, 크게 봐도 베트남같은 일부 식민지가 아니면 작전범위가 극단적으로 짧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프랑스 두 국가 모두 일본, 미국, 영국에 비해 매우 높은 포구속도를 가진데 비해 포신의 수명이 매우 짧다는 단점이 있는데, 이를 본국의 보급으로 때운 것이다.[13] 영국 해군의 16인치 포와 야마토의 18.1인치 포의 수명은 250발 정도이니 이들보다다는 수명이 조금 짧고 200발의 수명을 가진 프랑스 해군의 15인치보다는 수명이 약간 길다. 자국의 함포와 비교하자면, 헬골란트급, 카이저급, 쾨니히급에 쓰인 12인치 포의 수명은 200발로 비스마르크급의 주포보다 약간 수명이 짧고 바이에른급 전함의 15인치와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의 11인치의 수명은 300발이어서 수명이 더 길다.[14] 참고로 미국의 디모인급 중순양함의 측면장갑이 152mm다.[15] 수중탄을 대비한 것일 수도 있으나, 그런 이유라면 아래로 갈수록 두께가 서서히 얇아지도록 만들면 방어력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배수량 절감이 가능했을 것이다.[16] 의외지만 이 구조 덕분에 어뢰방어에 대비한 구조가 부실했음에도 어뢰공격을 버틸수 있었다고 한다.[17] 비슷한 방어구조를 가진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실제로 발생했다. 샤른호르스트가 듀크 오브 요크에게 피격당했을 당시, 포탄이 상부측면장갑과 2층 갑판장갑을 뚫고 보일러실을 타격했는데, 이는 샤른호르스트가 도망치지 못하고 침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18] 1차대전 때 설계된 탓에 비스마르크처럼 터틀백 + 다층 방어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애초에 구시대에 설계되어 구식 방어구조를 갖춘 것이며, 일본은 갑판 방어력에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갑판 장갑을 강화했다.(저 두께도 70+75mm에서 강화된 것) 훗날 야마토급 전함 설계시에는 신식 방어구조를 완벽히 구현했다[19] 7.87-8.9인치[20]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노스캐롤라이나급은 14인치 대응방어를 상정한 방어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14인치 대응방어를 상정한 전함보다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방어력이 더 약하다는 것이다.[21] 비슷한 크기의 전함과 비교하자면, 이탈리아의 리토리오급은 적어도 화력은 15인치급치고는 매우 우수했고(그 화력을 얻은 대신 치명적 단점이 생겼지만) 방어력도 매우 준수했다. 그러면서도 비스마르크처럼 속도도 충분히 빨랐다.[22] 자국의 초중량탄에 대한 대응방어는 달성에 실패했다.[23] R급같은 구식전함을 물론이고 신형 전함인 킹 조지 5세급도 아낌없이 투입했다.[24] 사실 이 문제 때문에 말이 양용포지, 사실상의 대수상용 부포나 다름없었다.[25] 물론 이건 1944년의 이야기이고 VT신관의 도입도 43년의 이야기이므로 공정한 비교는 아니기는 하지만 5인치 양용포 자체는 1934년부터 운용하기 시작한 물건이므로 포 자체는 비교해볼 가치가 있다.[26] 영국의 경우, 대공방어는 항공기의 영역이었던데다가, 개전 당시 주축군의 항공세력의 기동력과 화력을 과소평가하고, 식민지 영연방군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여 5.25인치 양용포를 장비하였다. 일본과 이탈리아는 활동 반경 내에서 항공기 지원을 받고, 자국의 구축함 세력이 미약한데다가, 그나마의 구축함의 메인 롤도 주력함의 호위가 아니어서(애초에 구축함의 제1순위 업무는 함대의 일꾼 노릇이다), 일본은 개함 전투력을 높이고, 이탈리아는 전함에 대수상용 대구경 부포를 장비한다. 독일도 다른 주축군과 같은 이유로 비스마르크급에 양용포를 채택하지 않았다.[27] 이 뒤에 미 해군은 부포체계를 통일했다고 서술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것은 오류다. 전쟁 전에 미해군과 영국 해군 역시 독일 해군과 비슷해서 다양한 부포와 대공포를 혼용했다. 예를 들어 미해군이 전투함의 함포를 20mm 오리콘, 40mm 보포스, 127mm 38구경장 양용포로 일원화하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 발발한 이후다. 태평양함대 전함군은 진주만과 본토에서 수리하면서 교체했고, 상대적으로 대공위협이 적은 대서양함대의 전함군은 거의 개선없이 종전을 맞기도 했다.[사실] 89식 대공포는 최우등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괜찮은 성능을 가진 대구경 대공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추축군 해군이 운용했던 대공포 중에서 이만한 물건이 없었다.[28] 참고로 이 기관포도 성능 면에서는 영 좋지 못했는데 작동불량이 잦았고 근접방어수단으로서는 그 크기와 무게 때문에 부적절했으며 그러면서도 기관총과 양용포 사이의 간극을 메꿔주기에는 위력과 사거리가 부족했다. 이 때문에 대부분 20mm 엘리콘 기관포와 40mm 보포스로 신속하게 대체되었다. 그나마 적어도 연사라도 (보포스 기관포 역시 단발이지만 탄띠 형식으로 되어 연사가 가능하다)되고, 아예 대공포로서 할 일을 못한 것은 아니다.[29] 탄창식 장전덕분에 카탈로그상 분당 250여발이 실전에서 120발 수준으로 떨어진 것도 똑같다. 그 외에도 일장일단이 있으나 전반적으로 도토리 키재기.[30] 사실 이것도 처음부터 단 것이 아니라 나중에 대공화력 부족 문제를 인식하고 증설한 것이다.[31] 그런데 사실 육상 대공포로는 3,7cm Flak 37 같이 좋은 발사속도(분당 150발)가 나오는 40mm급 대공기관포까 충분히 있었다. 왜 이런 좋은 대공포를 놔두고 쓰레기같은 SK C/30을 고집했는지는 의문.[32] 그나마 위안거리를 찾자면, 프랑스 해군의 리슐리외급 전함도 비스마르크급에 비해 나을 것이 없는 빈약한 대공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비스마르크급이 리슐리외급과 더불어 당대 전함 중 하위급의 대공무장을 갖추고 있었다.[33] 이 부분은 일본과 비교해도 뒤떨어지는데, 일본은 연합국 것보다는 계산속도가 떨어지고 자동화가 덜 되기는 했지만 정확도는 꽤 높은 사격방위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차라리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독일로써는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34] 순양전함 1척 격파. 전함 1척 중파, 2척 소파. 중순양과 구축함 각각 1척 소파시킨 전과를 보유했다라고 하지만 보통은 소파는 고려하지 않으니 실질적인 전과는 순양전함 1척 격침, 전함 1척 중파가 된다.[35] 이것 때문에 영국은 결국 지진폭탄을 동원해서 티르피츠를 격침시킨다.[36] 카메론 감독 작품답지 않게, 작중 독일 해군복 재현 수준이 개판이다.[37] 미드웨이 해전에서 중파되었으나 일본군이 뇌격으로 처리한 일본군 항공모함들도 미 해군이 격침시켰다고 하지 일본이 자침시켰다고 하지 않는다. 만약 비스마르크가 자침이면 일본 항공모함들도 자침이라고 주장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냥 정신승리일 뿐이다.[38] 비스마르크 건조전까지는 세계최대의 거함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39] 사실 샤른호르스트의 장갑은 방어구조가 막장일지언정 두께는 상당했던 비스마르크보다도 일부분에서는 더 두꺼웠다. 다만 화력이...[40] 얼핏 보면 차이가 없는데, 뭐가 개선이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보통 사격훈련은 '''목표에 명중하기 가장 이상적인 상황'''에서 한다. 일본에서 흔히 말하는 주간, 맑은 하늘에 잔잔한 바다 등의 조건을 갖춘 상태에서 하는 것이다. 당연히 실전보다 명중률이 높을 수밖에 없는데, 워싱턴의 실전 명중률은 오히려 그 당시보다 높다. 그리고, 시야 확보가 잘 안 되는 '''야간'''이다. 이를 고려하면 단순한 명중률 상승뿐만 아니라 주변 상황에 영향을 적게 받는 안정성도 확보했단 소리다.[41] 여기에 대해서 그 전 11,000야드 떨어진 경순양함을 상대로 16인치 42발을 쐈는데 전부 빗나갔고, 12%의 명중률은 8,400야드라는 초근접거리까지 다가간 덕이라고 봐야 하므로 결국 117발 중 9발이 명중한 셈이라는 헛소리가 있는데, 명중률은 '''단일 목표'''에 대한 명중률을 계산하므로 목표 자체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일고의 가치도 없다. 애초에 전함의 주포는 작고 빠른 경순양함 이하 함급에 대한 적절한 무기가 아니며, 이를 위해 부포가 따로 장비된다. 따라서 이런 것을 무시하고 명중률을 계산하면 이 세상에 명중률 높은 무기는 하나도 없는 셈이다.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키리시마를 향해 75발의 16인치 포탄을 발사해서 9발 명중이라 되어 있지만 침몰한 키리시마 선체의 조사 결과 16인치 포탄이 20발 정도 명중했다는 설이 있다. # [42] 탄약고 엘리베이터를 통한 유폭에 의한 피해로, 이 부분은 침몰 이전부터 문제시되어 있었다.[43]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걱정을 했다는 것 자체는 충분히 타당하다. 나치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대서양으로 보냈던 뉴멕시코급 전함과 항공모함 요크타운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전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서양함대에서 빼내 태평양으로 보냈기 때문에 대서양함대에는 레인저와 전함들은 비스마르크급과 정면승부가 안 되는 느려터지고 주포도 14인치밖에 안되고, 14인치 대응방어밖에 안되는 뉴욕급 전함 2척, 그리고 이들보다 더 낡은 드레드노트형 전함인 아칸소 정도가 남아 있었기 때문. 그나마 좀 더 나중에 신형 전함인 워싱턴이 배치되기는 한다.[44] 저각포일수록 탄착시각이 빠르고 맞추기가 쉽기 때문에 고각포는 그리 좋지 않다.[45] 하지만 비스마르크에는 소나가 있어서 어뢰를 피하기는 어렵지 않다.[46] 다만 어뢰발사관 위에 갑판이 하나 더 있는것으로 보아 도셋셔 본함은 아니고 같은 카운티급의 세 하위함급들중 또다른 하나인것 같다.[47] 도셋셔는 어뢰 발사관 바로 위쪽에 갑판이 없는 완전 개방형 터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