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춘
[clearfix]
1. 개요
한국의 코미디언. 1세대 코미디 트로이카(서영춘, 구봉서, 배삼룡) 중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전설적인 코미디언이다. 다만, 이들 중에서 가장 늦게 데뷔하고 가장 단명했다. 이주일을 시작으로 전성시대를 맞이한 1980년대 코미디계에서 다른 2명과 다르게 원로 코미디언으로 활약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2. 활동 내역
원래는 극장가 화공 출신으로, 어느날 무대에 출연할 예정이었던 배우 한 명이 사정으로 불참하면서 악극단 단장의 제의를 받고 대타로 출연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발군의 연기 실력을 보여주었다. 이를 계기로 악극단의 정식 배우로 발탁되어 1950년대 악극 활동을 통해서 세간에 알려졌다.
1961년 MBC의 개국과 더불어 방송가에 입문하였다. 웃으면 복이와요 등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고, 이를 계기로 1960년대에 스타덤에 오르며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 구봉서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다. 1960년대를 시작으로 197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던 그의 극장식 패키지쇼. 이른바 서영춘쇼 또한 큰 히트를 치게 된다. 당시 '''살살이'''라는 별명으로 유명세를 탔다.
1970년대 중반 TBC로 자리를 옮기며 '''고전 유모어극장''' 등을 통해서 70년대 중후반 부터, 80년대 초반 이주일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코미디계 부동의 1인자 자리를 유지하였다. 1960, 70년대 구봉서, 배삼룡 등과 코미디 트로이카로서 인기를 나눠 가졌다고는 하나, 당시를 아는 사람들에게 그들 중 누가 1인자였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영춘을 첫 손가락으로 꼽을 것이 분명하다. 여담으로, 이주일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도 바로 서영춘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방송국 대기실에 들어온 이주일을 본 서영춘은 속으로 '저 놈 방송에 나오면 무조건 뜬다!'라고 예상했는데, 약간의 곡절을 겪은 후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다만 전성기 시절에 관한 부분은 더욱이 자세히 봐야 하는 게 그가 구봉서, 배삼룡보다 데뷔 시기나 주목받은 시기가 확실히 눈에 띄게 늦은 편이다. TV 방송 이전 악극단, 영화 시절 그리고 웃으면 복이와요 초창기 시절만 보더라도 메인은 서영춘이 아닌 구봉서, 배삼룡이었다. 실제로 웃으면 복이와요 초기 오프닝을 보면 배삼룡, 구봉서의 이름이 맨 처음에 등장하고 이 두 명을 중심으로 오프닝이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969년 당시 웃으면 복이와요 오프닝 링크
사실상 말이 트로이카지 선배였던 구봉서, 배삼룡의 인기가 조금 식어갈 시기에 서영춘이 원톱급으로 발돋움한 시기가 맞물렸으며 사실상 당시를 보면 완전한 트로이카 체제보다는 구봉서, 배삼룡 - 서영춘으로 이어진 세대교체로 봐도 좋을 정도였다.[3] 즉, 시대적으로 약간의 개인차가 있었을 뿐 누구 한 명이 어느 특정 시대에 완전히 압도했던 상황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고 이들이 엎치락 뒤치락 하던 시기가 한동안 지속되던 때에 다들 알다시피 어느 얼굴천재가 홀연히 나타나 연예계를 뒤엎어 버렸으니....
서영춘은 특히 무대 위 애드립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희극인이었다. 변화무쌍한 얼굴 표정과 판타스틱한 특유의 슬랩스틱 코미디로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TV가 대중화되면서 실질적으로 1세대가 된 당시 악극단 출신 코미디언들 대부분이 그랬듯, 연기 패턴은 왜정 시대부터 내려온 악극, 만담에서 출발한 것이 많고 내용도 일본 것을 그대로 번안한 것이 상당수 있었다. 예를 들어, 서영춘이 지상파에서 선보였던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깡 무두셀라 구름이 허리케인에 담벼락 담벼락에 서생원 서생원에 고양이 고양이엔 바둑이 바둑이는 돌돌이" 어쩌고 하는 긴 이름 가진 아이 이야기도 일본 설화에 바탕을 둔 것이다.
사실 한국의 문화 예술에서 당시에 이미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의 그림자가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여전히 짙던 시절이었고,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았고 저작권 의식이 희박했기에 부산이나 경남 일부 지역 사람들을 빼면 볼 수 없던 일본 TV프로그램의 포맷이나 내용을 방송국들이 많이 베끼던 시절이었다. 당시 일본 방송의 성적인 수위까지는 따라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2000년대 이전의 프로그램을 보면 묘하게 일본색이 난다는것을 알 수 있는게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세운 극장에서 공연을 하던 배우들이 TV시대가 되면서 TV에 등장한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영춘을 비롯한 당시 코미디언들이 독창성 면에서 부족한 개그를 하였더라도 폄하할 수만은 없다. 일단 악극도 연주와 노래 개그가 들어가는 뮤지컬 비슷한 형식이지만 분명히 순발력과 암기력이 필요한 연극이었기 때문에 연기력은 필수였고, 노래와 춤도 대충 해서는 안 되었던 분야였다.
서영춘은 바보 연기에 특화된 배삼룡, 노래와 신체 조건을 이용한 개그가 장기였던 이기동, 미남 역을 자주 담당했고 선역과 정극 연기도 능했던 구봉서와 달리 강한 개성으로 어필하였다. 특히 얼굴 표정 연기에 능하였고 연기도 두루 잘 하는 편이었으며 영화에서도 활약했다. 예외로 미국 물(미군 8군 무대)을 먹은 곽규석이 미국식 스탠딩 개그와 성대모사, 남보원과 백남봉은 성대모사에 특화된 장기를 내세운 쪽이다.
슬랩스틱과 간신 수염 분장, 표정 연기를 장기로 해서 그렇지, 분장하지 않은 모습은 키도 큰 편에 얼굴이 희고 훤한 미남형이었다. 서영춘 사후 개그계의 미남 미녀로 꼽히던 아들 서동균과 딸 서현선을 보면 피는 못 속인다는 것을 알수 있다.
[image]
1960년대 극장쇼 무대에서 콤비로 활약했던 '''백금녀'''[4] 와 함께 한 음반. 서영춘이 홀쭉이, 백금녀가 뚱뚱이 기믹으로 활동했다. 이런 음반엔 주로 재미있는 가사의 노래가 들어갔는데, 노래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꽁트, 개그가 들어가 있기도 했다. 유튜브에 서영춘-백금녀 만담 녹음본이 있다.[5] 50년이 훨씬 지난 개그지만 현대의 개그와 비교해도 웃음의 수준이나 배우들의 연기력 수준이 상당히 높다. 서영춘의 대표작 "시골영감 서울 가는 기차..."노래가 이런 판에 들어간 종류.
하지만 사적으로 음주를 자주 하던 영향으로 간(肝) 건강이 나빠져 끝내 간암이 발병하면서 긴 시간 병고(病苦)를 치르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의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어느 날 단체로 문병 온 후배 코미디언 중 심형래[6] 의 낯빛이 유독 어둡길래 서영춘이 "형래야, 요새 어떻게 지내냐?" 라고 안부를 물었는데 심형래가 무심코 "네 선생님, 죽지 못해 삽니다"라고 대답하자 '''"너는 죽지 못해 사냐? 이놈아! 나는 살지 못해 죽게 생겼다!"'''라며 일갈했고, 이 한마디에 병실에 있던 후배들은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꺽꺽댔다고 한다... 게다가 서영춘이 세상을 떠난 후 영결식에서 후배 개그맨 엄용수가 "살살이 고 서영춘 선생님께서는 생전 국민들의 웃음과 즐거움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셨고, 대표적인 유행어로 '''요건 몰랐지 가갈갈갈, 붑빠라밥빠 붑빱빠,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컵)가 없으면 못마십니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이라는 내용의 고인 약력을 눈물을 삼키며 읽어 내려가는데, 정작 조문객들은 슬픈 분위기임에도 평소 서영춘의 우스꽝스러운 연기가 생각이 났는지 키득키득 거렸다고...
결국 앞서 말했듯 그는 간암을 이기지 못하고 1986년 11월 1일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당초부터 배우를 지망하지 않았던지라 무대 체질이 아니었고, 공연 전 긴장을 풀 생각으로 늘 소주 반 병 정도를 마신 후 무대에 올랐는데 그게 지나치게 심해져서 결국 중독 수준에 이르렀다고.
게다가 사적으로 구봉서와는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는데, 한때 주당으로 유명한 구봉서가 싫다는 서영춘을 억지로 술자리에 매번 데려갔다고 한다. 훗날 구봉서는 개신교에 귀의해 술을 끊었고, 뒤늦게서야 서영춘의 음주 습관을 말리려 했지만 너무 늦은 뒤였다. 이 때문에 구봉서는 이를 두고두고 애통해 하며 그때 서영춘을 술자리에 끌고갔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한번은 구봉서가 서영춘의 건강을 걱정하며 술을 끊으라고 충고하자, 서영춘은 '''"형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유!!"'''라며 대들었고, 구봉서는 그 말에 너무 미안해서 아무 말도 못한 채 뒤돌아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참고로 서영춘이 사망한 다음날(1986년 11월 2일)은 하필이면 구봉서의 환갑 날이었다. 구봉서는 이를 회고하는 언론 인터뷰에서 "자식들이 마련해준 환갑 잔치인데도 도무지 웃음이 나질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3. 사건사고
3.1. 무단횡단 보행자 사망 사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단횡단 중인 보행자를 치어 숨지게 한 흑역사가 있으며, 이 때문에 1살 많은 동료 코미디언인 송해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한다.
지금이야 법 개정으로 면허정지에 해당하지만, 서영춘은 당시만 해도(당시라고도 할 것 없이 현 개정은 2019년 6월 25일부터 적용된 개정안이다.) 음주운전 적발 기준에 들어가지 않는 혈줄알콜농도 0.04%(맥주 2잔)의 수치가 나왔고, 이로 인해 음주운전으로 인한 가중처벌이 아니라 사람을 치어 사망하게 한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 혐의로만 구속됐다. 또한 사건 시간 밤 11시대에 피해자가 무단횡단을 한 상황이었다고 하면 술을 마시지 않은 일반 운전자들도 어둠 속에서 무단횡단하여 갑자기 튀어나오는 보행자를 피하기는 어렵다.
또한 조형기처럼 만취 상태에서 뺑소니에 시체 유기까지 하는 파렴치한 행위를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서영춘 사건과 조형기 사건의 격차는 근 10년이 난다.
그의 음주운전은 당시 기준으로 음주운전 적발 기준에 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으로 음주운전이 성립되지 않은 것이라 음주운전 사실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뿐이지 사망 사건 자체가 묻힌 게 아니다. 더군다나 무단횡단 보행자에 대한 여론 자체가 현재는 운전자를 피해자로 보고 오히려 무단횡단으로 인해 운전자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현 법 집행에 대해 무단횡단에 대한 성토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일반적인 음주운전 사망 사고와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다만 당시 기사에는 피해자가 길을 건넜다고만 서술되어 있고, 무단횡단이라고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자의 무단횡단 진위 여부에 따라 이 사건에 대한 평가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4. 그 외
가족으로는 딸 서현선과 아들 서동균이 있고 둘 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코미디언, 연극배우의 길을 밟았다. 서현선은 1990년대 초반 KBS '한바탕 웃음으로'에서 레귤러로 이름을 알렸다. 현재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봉숭아 학당'에서 오서방(오재미)과 합을 맞추는 미녀 코미디언이 바로 그녀이다. 동료들이 서영춘의 성대모사를 시전하자 발끈하는 모습을 (물론 개그로) 보여주기도 했다. 서동균은 개그콘서트 초중반기 멤버로 참가하며 로보캅 연기로 인지도를 쌓았으나 이후 이정수처럼 연극 및 뮤지컬 배우로 전업하였다.
서영춘은 자녀들이 성인이 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요절했으므로 자녀들과 함께 무대에 서는 일은 없었다. 대신, 서영춘의 생전 공연 영상에 자녀들을 합성해서 만든 고려제약의 감기약 하벤플러스 광고에서 함께 브라운관을 타기는 했다.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던 시절 크고 작은 스캔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는 행사에 지각했다고 지명수배가 내려진 일도 있었다. 이 행사가 다른 행사도 아니고, 경찰의 날(1965년 10월) 행사의 사회자로 참석해야 했는데 그걸 지각한 것. 21세기 현대에도 이런 대형 행사에서 지각하면 방송인으로서 보통 문제가 아닌데 하물며 살벌한 독재 정권 시대에 이랬으니...... 겨우 서영춘이 행사장에 도착하자 당시 참석했던 종로경찰서 서장이 너무 열받은 나머지 행사가 끝난 직후 서영춘을 직접 불구속 입건 조치해버렸다. 죄목(?)은 사기 혐의.
5. 출연작
- 웃으면 복이와요
- 일요일 밤의 대행진
- 폭소대작전
- 좋았군좋았어
- 고전유모어극장
- 오부자
- 형님먼저 아우먼저
- 민며느리
- 밤하늘의 브루스
[1] 그중 2남은 개그맨 서동균 3녀는 개그우먼 서현선이다.[2] 무려 띠동갑으로, 1940년 생이라 한다. 출처[3] 정확히는 악극단 시절부터 70년대 초까진 구봉서, 배삼룡이 우위였고 70년대 중후반 경부터 서영춘의 우위라고 보는 것이 맞다. 다만 서영춘 역시 악극단 시절부터 최고의 톱스타였으며 구봉서, 배삼룡 역시 70년대 중후반에도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렇듯 전성기 시절 3명이 팽팽하게 인기를 가져갔으며 트로이카라는 말이 괜히 나온것이 아니다.[4] 악극단 출신의 코미디언. 드센 뚱녀 컨셉으로 1960-1970년대까지 큰 인기를 끌었고, 음반도 취입했다. 이국주와 흡사한 외모의 소유자였으며 노래도 매우 잘 해 지금의 이국주보다 훨씬 인기가 높았다. 1995년 작고. 아들인 '''강민'''도 1990년대 중반 어머니처럼 개그맨으로 활동했다.[5] 6분 16초부터 나오는 노래가 그 유명한 ''''사이다송''''이다. '''"인천 바다에 사이다 떴어도 고뿌 없으면 못 마십니다"''' 라는 구절이 이 곡에 등장한다. 전체적인 곡조가 오늘날의 랩과 매우 비슷하다.[6] 그런데 이 일화를 얘기하는 사람마다 그 당사자가 다르다. 이경규이기도 하고 최병서가 되기도 하고... 결국 그 당사자만 아는 일일 듯.